Healing village life with herbal elixir RAW novel - chapter 53
언젠가 영감님의 과거가 궁금했던 적이 있었거늘, 이렇게나마 확인을 할 수가 있었다.
나는 영감님의 과거를 본다는 생각으로 면밀히 관찰했다.
1943년은 일제강점기였으며, 당시 일본은 태평양전쟁에 많은 병력을 투입하기 위해 징병제를 실시했을 때였다.
소사나무가 기억하는 당시의 집이 풍비박산인 것을 봐선 내 짐작이 얼추 맞는 것 같았다.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는 영감님의 아버지가 소사나무를 통해서 보였기 때문이다.
‘영감님이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가 끌려가셨구나.’
홀로 남은 어머니와 유일한 자식 영감님만이 단 둘이서 집을 지켰다.
영감님은 혼자 있는 시간이 참 많은 것 같았다.
툇마루에 앉아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어린 영감님의 모습이 보였다.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며 홀로 외로움을 이겨내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청년이 되었을 때, 영감님의 어머님이 마당에서 쓰러졌다.
청년이 된 영감님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 부터는 집에 있지 않았다.
아마 이때부터 우리 아버지를 만나서 공부에 뜻을 두지 않았나 싶다.
때마침, 소사나무의 기억이 끝났다. 아니, 더 이상의 기억을 보는 건 무의미했다.
꽃이 피고, 지고, 눈이 오며 사계절이 반복되는 동안 빈집에는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텅 빈 집을 바라보는 소사나무의 심정이 느껴졌다.
그것은 아픔이며 실연이었다.
‘나무도 사람과 똑같다.’
만약 소사나무가 사람이었다면 어떠했을까. 가족을 잃는 아픔을 이겨낼 수가 있었을까.
나는 그 슬픔을 모른다.
다만 그 깊이는 다르겠지만 이혼으로 겪은 실연이면 조금이나마 비슷할까.
그리고 내 시선에는 이젠 사라져버린 옛 집터가 보였다.
소사나무가 오랜 시간 홀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단연코 옛 집 덕분이었다.
떠나간 영감님이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고 다짐하며 버텨낸 게 아닐까 싶었다.
“이런 기억을 품고 있었구나. 많이 힘들었겠다.”
소사나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비록 겉은 멀쩡하지만, 소사나무의 속은 썩어 들어가는 심정이었다.
***
다음날 아침.
나는 영감님이 임대 받아 살고 계시는 시골집으로 향했다.
몇 가지를 계획했다.
일단 영감님에게 소사나무의 특전의 힘이 깃든 찻잎을 달여 드렸다.
영감님은 영문도 모른 채 내가 달인 차를 한잔 마셨다.
“내 얼굴에 뭐 묻었나?”
“아, 아니요.”
소사나무의 기억을 통해서 영감님의 사연을 깊이 있게 알게 됐으니, 그 고난의 세월을 견딘 영감님이 새삼 대단하게 보였다.
“영감님.”
“응?”
“소사나무와 참 많은 기억이 있으셨네요.”
“소사나무랑?”
영감님은 내 말에 상당히 놀란 눈빛을 했다. 그리곤 말문을 열었다.
“그렇지. 내가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가 심었다고 하는 나무였으니까. 그래서 내겐 매우 각별했고 형제와도 같았지.”
영감님은 옛 기억이 잠긴 채 말씀하셨다.
“아버지 얼굴을 본적이 있으세요?”
“없어. 흔한 사진 한 장도 없어.”
“아…..”
“내가 어머니에게 듣기론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 징용을 당했다고 하더라고. 그 이후로 어떤 연락을 받지 못했어. 죽었다는 소문만 돌았지.”
영감님은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뵙질 못하고 살았다.
그래서 영감님에게 소사나무는 아버지의 온정이 담긴 유일한 것이었다.
나는 영감님의 과거를 알고 있으니 대화가 한결 수월했다.
영감님의 머릿속에 잠든 기억을 조금씩 꺼내어 보기로 했다.
“많이 힘들지 않으셨나요. 어머니도 몸이 편찮으셨고, 혼자서 집안을 이끄시느라.”
“다 그러고 살았는데 뭘”
영감님은 이내 옛 이야기를 해서 뭐하냐며 주제를 바꾸려 했다.
나는 다급히 말문을 열었다.
“영감님.”
“응?”
“마당에서 80년을 산 소사나무가 기억하는 건 뭘까요.”
“크흠.”
영감님께서 기억에 잠겼다. 그리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 단어를 내뱉었다.
“불행이었지.”
“……”
“생각해보니 불행 밖에 없었던 것 같아.”
“불행이요?”
“그럼. 그 집을 허물길 참 잘했지. 그 집에서 좋은 일이 하나도 없었거든. 그런데 나무는 꼭 살리고 싶어. 내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유일하게 남긴 유산이 소사나무잖아.”
영감님께서 씁쓸히 웃었다.
“나무를 살리려면 영감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내 도움이?”
“나무도 사람처럼 상처를 받아요.”
“뭐?”
“영감님이 가족을 잃은 상처가 깊듯이, 소사나무도 그랬을 거예요. 가족이 하나둘 씩 사라지는 걸 지켜본 이는 소사나무가 유일하니까요.”
“그래…자네 말이 맞다. 마지막 남은 가족인 내가 떠났으니 말이다.”
“……”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나?”
때마침, 소사나무의 차를 다 마셨다. 영감님의 몸에서 소사나무의 특전이 발휘되고 있을 때였다.
“소사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시죠.”
***
영감님과 함께 소사나무가 있는 폐가로 향했다.
새 집을 짓는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때마침, 우수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사를 진행하는 인부들이 비를 피해 저마다 흩어졌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소사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소사나무는 전부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영감님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천천히 소사나무 앞으로 향했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날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영감님은 허심탄회하게 과거의 기억을 모조리 꺼냈다.
홀로 남아 외로웠던 당시, 소사나무만이 유일한 친구였다.
그런데, 그 친구가 죽어가고 있었다.
영감님에게도 큰 슬픔이었다.
영감님이 소사나무를 어루만졌다.
영감님은 보질 못하겠지만, 소사나무에서 발현되는 초록색의 기운이 영감님을 휘감았다.
왜 이제야 나를 찾아왔느냐는 반가움과 설움이 처연하게 느껴졌다.
때마침 소사나무의 기운은 집터의 곳곳에 스며들었다.
그 순간 집터를 지키고 있던 수많은 꽃에서도 다색의 향연을 뽐내듯 눈부시게 수놓았다.
수풀 속에 숨어 있던 나비들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한 강아지가 주인을 알아보면 날뛰듯.
집터의 모든 식물이 소사나무와 함께 그 기분을 만끽했다.
마침내, 소사나무의 기운이 영감님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음에도 영감님은 소사나무에서 손을 떼지 않으셨다.
그리고 한참 동안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말문을 떼었다.
내 가슴을 에는 단어였다.
“아버지···어머니.”
아마, 영감님은 보았을 것이다.
소사나무를 심는 아버지의 모습과 단란했던 가족의 한 때를.
그것은 불행이 아니었다.
행복이었다.
나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영감님이 편안하게 소사나무와 기억을 공유하길 바랐다.
***
소사나무는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다.
뿌리의 형태로 파악함이 아니었다.
잎에서 새순이 돋는 것을 확인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편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F급이었던 소사나무가 A급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기적이 있을까.’
영감님은 소사나무 앞에서 지난 세월의 설움을 모두 쏟아냈다.
그 기간이 80년이었다.
80년간 꽁꽁 숨겨놓았던 아픔을 이제야 털어놓았다.
나는 그 감정이 궁금하여 영감님께 물었다.
“그 설움을 왜 혼자서만 간직하려 했나요. 죽기 전에라도 누군갈 붙잡고 설움을 털어내지 그러셨어요.”
영감님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씀하셨다.
“누구나 그러고들 살지 않나. 이렇게라도 풀었으니 내가 복이 많은 놈이야.”
영감님과 헤어진 후 나는 집으로 귀가했다. 소사나무가 다시 살았으니 앞으로 좋은 일만 바라보며 살길 기도했다.
“황궁아! 황복아! 소사나무를 살렸어!”
나무를 살리는 건 내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췌장암과 폐암, 치매를 이겨냈을 때의 기쁨과 버금가는 성취감이었다.
음메에! 월!월!
녀석들이 기분이 좋은 듯 내 주위를 돌았다. 황복이와 황궁이를 얼싸 안으며 기쁨을 만끽했다.
이번에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나무도 사람처럼 생각을 하고, 기억을 가지며, 경험을 공유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 집의 감나무가 매우 특별하게 보였다.
감나무는 나의 선조였으며 뿌리였다.
부모님의 품처럼 포근하다.
그러던 때였다.
감나무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감나무의 잎이 이리저리 거세게 휘날리는 게 아닌가.
“감나무가 왜 저러지?”
땡볕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휘몰아치듯 흔들리는 걸까.
그리고 때마침, 특전의 힘이 발휘되었다.
여태까지 보았던 특전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감나무에서 『보은의 인연』 특전이 발휘됩니다!]
감나무에서 매우 특별한 특전이 발휘되었다.
바로 『보은의 인연』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뭘까.
단어만 봐도 보통 인연은 아닌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해 봐도 곧 다가올 인연이 누구인지 짐작되질 않았다.
누군가 내게 은혜를 갚으러 온다는 뜻일 텐데, 회사 직원들일까?
아니면, 내가 판 약초로 병을 치료한 사람들?
그러던 때, 누군가 우리 집 문을 쿵쿵 두드렸다.
나는 놀란 마음에 소리를 쳤다.
“누구세요!”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를 통해서 보은의 인연이 의미하는 바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회사 생활을 할 때 필요한 것은 대인 관계와 영업이익, 포부와 자신감 등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대인 관계도 아니었고 포부와 자신감도 아니었다.
그런 건 이제 필요가 없어졌다.
‘세탁기와 에어컨.’
다른 건 몰라도 이 두 가지는 성능 좋은 모델로 필요하다.
특히 시골의 여름은 무덥다.
어르신들이야 가만히 있으면 시원하다며 손 부채질이나 선풍기로 버티겠지만, 에어컨 바람에 익숙한 내게는 필수적인 가전제품이다.
세탁기도 마찬가지.
그간 시골 생활에 익숙해져보겠노라고 샤워할 때 손빨래로 했건만, 실상 세탁기만한 것이 없다.
“이거 어디에 설치해 드리면 될 까요?”
“안방에 하나 설치해주시고요. 그리고 세탁기는 화장실이요.”
“네. 알겠습니다.”
“이거 두개 해서 얼마인가요?”
“저도 설치 기사라 정확한 건 모르는데, 최신형 모델이라 200만 원정도 하지 않을까요.”
“비싸네요.”
“좋으시겠어요. 이런 선물도 받으시고.”
“그러니까 말예요. 아빠가 혼자 시골 생활 한다고 딸이 보내줬네요.”
선물을 보낸 주인공은 나의 딸 연이였다.
돈이 어디서 났기에 이런 선물을 보냈을까 아빠 입장에선 의심해볼 만하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는 전처 희숙이가 딸 이름으로 보낸 것 같았다.
“자, 설치 끝났습니다. 에어컨 바람 잘 나오시죠?”
“오, 시원하네요.”
안방에 벽걸이 에어컨을 설치했더니 한 여름이 순식간에 겨울이 되었다.
“통돌이도 한 번 보시겠어요?”
“네.”
화장실에 설치된 통돌이 세탁기는 이불을 두 개나 넣어도 쉽게 세탁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용량이었다.
“잘 돌아가죠?”
“힘이 좋네요. 돌아가는 것도 시원하고.”
설치 기사님이 떠나자, 나는 하염없이 에어컨을 바라봤다.
정말 시원했다.
시골 생활을 아무리 오래해도 에어컨 바람은 항상 정겨울 것 같다.
“황복아! 황궁아! 들어와라!”
혼자서 이 기분을 느낄 수 없지.
나는 문을 열어 황복이와 황궁이를 안으로 들였다.
아이들이 신나서 날 뛰기 시작했다.
황복이와 황궁이의 발바닥에 묻은 흙먼지가 이리저리 나부꼈다.
그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방이 더러워지는 건 걱정되지 않는다.
어차피 방이 좁아서 청소하는 건 얼마 걸리지도 않으니까.
집이 넓지 않은 게 참으로 다행이다.
***
“연이야, 고맙다. 덕분에 아빠 여름나기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희숙이가 보낸 것을 알면서도 연이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연이는 전화를 받자마자 능글맞게 웃는다.
-아빠, 아빠 여름 잘나라고 이 멋진 딸이 선물한 거야.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마시라고.
“부담이라니. 전혀 그런 거 없어. 아빠 선물 받는 거 되게 좋아하거든.”
-하하하하. 아빠.
“응?”
-아빠랑 예전에 번지점프 할 때도 느꼈는데, 아빠 되게 솔직하고 재밌어진 것 같아.
“아빠 원래 재밌어. 네가 몰라서 그래.”
-그랬나?
“그럼. 너 꼬맹일 때 내가 얼마나 많이 놀아줬는데, 네가 기억 못해서 그렇지.”
-아무튼! 아빠 올 여름 잘 나시라고 딸이 큰 맘 먹고 샀으니까. 에어컨이나 세탁기 돌릴 때마다 딸 생각하셔!
“어이고, 아주 생색은 본인이 다 내셔.”
-응?
“이거 엄마가 해준 거잖아. 내가 다 알아. 네가 돈이 어디 있다고 이렇게 비싼 걸 해주냐.”
-…..?
연이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샀어. 아빠.
“뭐?”
-대형마트 가서 직접 고르고 주문하고 계약까지 다했어. 내 손으로 직접!
“….진짜?”
-아빠. 이제 나도 다 컸잖아? 기특하지?
“기특…..하네.”
-말투가 왜 그러실까.
연이가 샀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그럼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 하나.
“돈이 어디서 났어?”
-아빠 딸 이제 곧 있으면 성인이야. 알바해서 벌었지.
“알바를 했다고? 고3이?”
-어, 왜? 여름 방학에 다들 해. 고3이 공부만 하는 줄 알아.
“연이야. 다음부터는 이런 거 사지마. 아빠 괜찮으니까.”
-아까는 선물 받는 거 좋아한다면서요.
“그건 농담이고. 그러니까, 아무튼 하지마. 아빠가 이정도 돈 없어서 그간 에어컨하고 세탁기를 안 샀게냐? 시골의 삶에 한 번 젖어보고 싶었던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연이 너만 신경 써. 그 돈으로 맛있는 거 사먹고 교재도 좀 사고.”
-알았어…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만 해. 아빠가 다 해줄게.”
-됐네요. 갑자기 서운해질라 그러네.
“아니, 그게 아니고.”
-아무튼. 나는 아빠가 시골에서 편하게 살았으면 해서.
“그래..고맙다. 고마워. 아무튼 내가 우리 딸 자랑 온 동네에 할게. 아니다. 지금 내가 지역 방송국에 가서 자랑해야겠다. 우리 딸이 세탁기랑 에어컨 사줬다고. 전국에 자랑 좀 해달라고.”
-크크크크크.
“기분 좀 풀렸어?”
-어.
“아빠가 평생 잘 쓸게. 에어컨 킬 때마다 연이 생각하고, 세탁기 돌릴 때마다 연이 생각하고.”
-그럴 필요까지야…
“고마워. 딸. 아빠가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엄청 기뻐. 행복하고.”
-그럼 됐어.
“아빠도 잘할게.”
-응. 나도!
연이와 전화를 끊은 뒤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믿어지질 않았다.
에어컨과 세탁기를 사준 것보다는, 꼬맹이었던 아이가 벌써 성인이 되었다는 게 실감이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성인이라니···’
자식이 성장하는 것을 보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성인이 됐다는 건 정녕 내 손을 떠난다는 것과 같기에 왜인지 마음 한편이 씁쓸하기만 했다.
‘조금 더 옆에 있어줄 걸.’
아이가 사춘기 때는 바깥일을 하느라 보살피지 못했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남보다 더 못 본 사이가 되었다.
이혼 후에는 일주일에 한 번 볼까 말까한 사이였으니···
‘그래도 잘 자라주었네.’
너무 고맙다. 잘 자라준 것만으로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
“이야. 시원하네. 여기서 올 여름은 끝났네. 끝났어.”
“그치? 흐흐. 우리 딸이 선물해줬어.”
일단 누구에게 가장 먼저 자랑을 할까 하다가 철수를 불렀다.
철수를 부르면 언제나 행복이 배가 되는 법.
“이야. 이거 대기업 에어컨이잖아. 엄청 비쌀 텐데. 이젠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다.”
“네가 왜 죽어도 여한이 없어?”
“그러니까. 내 딸도 아닌데 괜히 내가 받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
“하여튼 참.”
“이참에 나도 짐을 꾸려서 이 집으로 와야겠어. 우리 집에 있는 거실 에어컨이 고장 났거든? 유일하게 하나 있는 벽걸이는 지훈이 공부방에 있는데, 와이프가 애 공부한다고 들어가질 못하게 해.”
“아이고 이걸 어쩌나.”
“내가 더워서 하루에 세 번을 찬물로 샤워를 해요. 그런데, 여기에 있으니까. 이틀에 한 번만 해도 될 것 같아.”
철수는 신이 났는지 연신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수박 줄까?”
“텃밭에 수박 난 거 나도 봤어. 그건 누구 코에 묻히려고 아껴두는 거야.”
“그러니까 물어 보잖아.”
“당연히 먹어야지. 이런 냉골에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뭔가 허전하잖아.”
“기다려봐. 가져올게.”
“천천히 가져와. 나는 우리 딸이 해준 에어컨 밑에서 좀 편히 쉬고 있을게.”
“왜 네 딸이야?”
“내 딸이고 싶어서 그런 거지. 우리 지훈이는 네 아들해라.”
“에휴. 기다려라.”
심어 놓은 수박이 며칠 만에 잘 익었다. 수박을 따다가 반으로 쩍 가른 뒤, 숟가락으로 속을 마구 파서 사이다를 듬뿍 부었다.
“자, 먹어봐. 맛있을 거야.”
우리는 땡볕이 지는 마당을 피해 에어컨이 빵빵한 방안에서 화채를 퍼 먹었다.
황궁이와 황복이에게는 그냥 수박을 줬다. 탄산은 아무래도 맞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수박화채를 해치운 뒤, 철수가 퍼질러지듯 누웠다.
심신이 노곤한 듯 자연히 눈이 감긴다.
“나 좀 잘 테니까. 삼십분 뒤에 깨워줘라. 에어컨 있는 방은 정말 오랜만이라 이해 좀 해줘.”
“휴…그래 알았다. 자라.”
철수를 부르길 잘한 건가.
왜인지 모르게 우리 집에서 살림을 차려버릴 것 같다.
철수는 금방 잠에 빠져 들었다.
나는 툇마루로 나가 잠시나마 햇볕을 쬐었다.
인연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보은의 인연처럼 은혜를 갚기 위함과 세상에서 만나선 안 되는 악연.
관계를 끊은 절연과 복수를 위한 원연의 관계도 있다.
감나무에서는 보은의 인연이 발휘되었고, 딸 연이가 내게 가전제품을 선물했다.
그리고 왜 보은의 인연이 떴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내가 헛살지는 않았구나.’
딸에게 선물 받음이 기뻐서가 아니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딸에게 인정을 받는 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그러던 때였다.
감나무에서 『인연』의 특전이 발휘되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녀석은, 다름 아닌 경훈이었다.
“이야! 여기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에어컨이 있다는 김도일 네 집이 아닌가?”
“읍내까지 소문났냐?”
“어디 한번 신선놀음 좀 해볼까! 에어컨 있는 방이 어디냐?”
하여튼. 친구들은 못 말린다.
***
시골에는 주말이 따로 없다.
밭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친구들과 함께 산수 마을 어르신들의 밭일을 도왔다.
주말이라 할 일도 없거니와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임에도 대가를 바라지 않은 순수함이 좋았다.
더위가 절정에 이르는 대서가 지났다.
이맘때쯤이면 수박과 참외를 수확하는 시기였으니, 우리가 향한 곳은 수박 농사가 한창인 이장님의 밭이었다.
“이장님! 아들 왔어요!”
“어! 왔냐!”
이장님의 아들인 경훈이의 어깨가 한껏 솟아올랐다.
“혼자오라니까 뭣 하러 친구들을 데려 왔는가.”
“아버지. 공짜 아닌데. 일당 줘야 돼요.”
“이장님 일당 바라고 온 거 아닙니다. 괜찮으니까 오늘 마음껏 부려주시죠.”
“도일아, 내가 널 보면 눈물이 다 난다. 눈물이. 어휴. 도일이 너는 일 하지 말고 차에 앉아서 좀 쉬어.”
나의 처세술에 철수도 합세했다.
“이장님, 제가 이장님 드리려고 좋은 약초 하나 가져왔는데, 맛 좀 보시죠?”
“뭔데?”
“저의 사랑과 영혼!”
“……”
이장님이 한숨을 푹 내쉬며 먼 산을 바라보셨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사랑과 영혼 받았으니께 얼른 밭일이나 하자고.”
“예!”
요즘 아무리 농가가 자동화됐다고 하더라도 수박을 수확하는 과정은 순전히 사람의 힘이 필요했다.
전지가위로 수박의 줄기를 자르고 일일이 카트에 담아다가 트럭까지 올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게 좀 무겁나.
나와 철수는 수박을 카트에 담고 트럭위로 올리는 작업을 했다.
한데, 철수 녀석이 힘을 못 쓴다.
“힘 좀 써!”
“네가 더 써라. 난 지금 체력이 좋거든?”
내가 트럭위에 올라갔고 철수가 밑에서 던져주기로 했는데, 끙끙 거리며 던지는 모습이 영 볼품없다.
“좀 세게 던져야 받지. 수박이 날아오다가 툭 떨어질 것 같아.”
“잘 받아 봐.”
그렇게 한 카트를 비우고 나면 뒤이어 경훈이가 카트에 수박을 가득 채우고 갖다 준다.
일을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트럭은 수박으로 가득차기 시작한다.
“이래 가지고 오늘 안에 끝낼 수가 있을까?”
이장님이 철수를 보며 말했다. 철수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장님, 저희가 오늘 이거 다 끝내면 일당 두 배로 주시죠?”
“두 배가 뭐냐. 세 배는 더 줄 수 있지.”
“정말이죠? 도일이 너 들었지?”
“똑똑히 들었다.”
“이장님 한 입으로 두 말하기 없기?”
“그럼. 이건 하루 만에 못 끝내. 양이 얼마나 많은데.”
“이게 끝이 아닌가요?”
“저기 뒤에 빈 트럭 보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