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21
121.
“네?”
먼저 배로 옮겨 놓으려 했는데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기에 이린은 우선 여인의 허리를 안아 들고 지붕 위로 뛰어 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 지붕 위에 올라앉은 여인이 놀라서 입만 뻥긋거렸다.
“어, 어떻게….”
“제가 가 볼 테니 일단 여기 있어요. 아기까지 있으니 옆에 있으면 방해만 될 거예요.”
“연 소저!”
다시 아래로 내려가려는 이린의 귀에 남궁청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사이 배가 가까워져 그 역시 이린과 마찬가지로 3층 지붕 위로 건너온 모양이었다.
이린은 마침 잘 됐다는 생각에 청휘를 불렀다.
“남궁 공자! 이분을 먼저 배로 데려가 주세요! 팔에 부상을 입었고 아기를 안고 있어요!”
“네? 연 소저는… 잠깐만요!”
청휘가 자신을 붙잡기 전에, 이린은 서둘러 다시 모습을 감췄다. 청휘는 당황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이린의 말대로 아기와 여인을 먼저 대피시켜야 했다.
다시 지붕 아래로 내려온 이린은 아까 여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달렸다. 배가 크다고는 하나 3층의 공간은 한정되어 있어 사실 방향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아래쪽에서는 싸우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린은 일행이 걱정되었지만 사람을 구하는 것이 먼저라 서둘러 움직였다. 하나뿐인 통로에 온통 시체가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여인이 말한 ‘주인’이 있는 곳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 듯했다.
‘쓰러져 있는 이들도 하나같이 실력이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다들 화려한 배를 보고 추측했듯 방금 전 그 여인이 말한 마님은 제법 신분이 높은 사람인 듯했다. 쓰러져 있는 이들은 어느 쪽이든 꽤나 단련된 몸을 가진 이들뿐이었다. 수적들도 단순한 어중이떠중이 도적패들 같지가 않았다.
챙- 챙-
곧 가까운 곳에서 대치하고 있는 듯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쓰러지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이린은 이 넓은 배 안에 남은 생존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소름 끼쳐 하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렸다.
* * *
“이런 짓을 저지를 정도로 무도한 이들은 아닐 거라 생각했건만 내 생각이 짧았구나.”
자신을 호위하던 이들 대부분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는 눈앞의 참담한 풍경에 여인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탄했다.
그런 여인의 반응에 사내는 히죽 웃었다.
“목숨이 촌각에 달했는데도 위세가 대단하시군. 덕분에 내 부하들이 이리 많이 죽었으니 어찌 보상할 셈인가?”
피를 흘리는 사내 몇몇이 아직까지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지만 머릿수의 차이를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인의 주변에는 이미 여인을 지키던 시녀와 무사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으나, 사내는 그들의 시체를 발로 걷어차며 여인을 향해 다가갔다.
호화로운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은 품에 강보로 보이는 것을 안고 있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임에도 겁에 질려 있기는커녕 담담하기만 한 얼굴은 어딘지 달관한 듯 보이기도 했다. 자신을 지키던 이들이 하나둘 쓰러지는 모습이 여인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다.
“내가 너희 같은 것들에게 목숨이라도 구걸하길 바라는 것이냐.”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말이지. 본인은 몰라도 아이는 살려 달라 빌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도 어미인데.”
“내가 죽으면 이 아이라고 무사할까. 죽이러 온 자가 말이 많구나.”
“귀하신 분이 무릎 꿇고 비는 모습 좀 볼 수 있나 했더니 안 되겠네.”
그리 말하며 사내는 히죽 웃었다. 평소 자신들을 버러지 보듯 하는 고고한 자들을 무참하게 짓밟을 수 있다는 사실은 사내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눈앞의 여인 역시 아직 오기를 부리고 있으나 품에 안고 있는 아기를 눈앞에서 빼앗기면 어떻게 될까. 고생이라곤 해 본 적 없을 저 우아한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져 제 앞에 무릎 꿇고 울부짖을 것을 생각하니 고양감에 심장이 뛰는 듯했다.
“그럼 그 아기부터 죽-”
파악-
여인을 죽이기 위해 칼을 높이 치켜들었던 사내는 자신의 머리로 날아드는 무언가를 느끼고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챙그랑-!
그의 칼이 부순 것은 기왓장이었다. 쪼개진 기왓장이 바닥에 떨어지며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아악!”
“헉!”
그리고 그와 동시에, 비명 소리가 잇달았다. 걸려 있던 등불은 이미 꺼진 상태였고 점점 짙어지는 연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남아 있던 제 부하들이 쓰러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사내가 주위를 경계했다.
“누구냐!”
하지만 대답 대신 들려오는 것은 굵은 비명 소리와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사내는 자신의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검을 피해 물러나야 했다.
“너는 누구냐.”
“글쎄요. 지나가던 관광객?”
“…왜 우릴 방해하지?”
“이렇게 눈에 띄게 일을 벌이면서 조용히 지나가길 바라다니 대단하네요.”
들려온 목소리는 뜻밖에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소녀의 것이었다. 게다가 그 목소리는 몹시 차분했다.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여인은 갑자기 나타난 이가 앞을 막아서자 조용히 강보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여인의 위치에서는 희미한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젊은 소협 한 명이 이 사태를 반전시킬 수 있으리라 희망을 걸기는 어려웠다. 여인은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소녀에게 아이를 맡겨 도망가라고 외쳐야 하나 갈등했다.
그리고 그사이 짙어진 연기로 인해 사내는 물론, 소녀의 모습 역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여인은 점점 짙어지는 연기와 열기로부터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이미 다리를 다쳐 움직일 수 없는 여인은 의자에서 일어나자마자 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여인은 입술을 깨물며 바닥을 기었다. 적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살아남아야 했다.
연기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있었다. 적어도 아래에는 아직, 자신을 도와줄 이가 남아 있었다.
“너, 너, 보통 계집이 아니구나.”
사내가 점점 짙어지는 연기에 소녀의 모습을 놓친 것은 정말 단 한 순간의 일이었다. 그 잠깐 사이 끔찍한 고통과 함께 자신의 한쪽 다리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자 사내는 비틀거리며 눈을 부릅떴다.
“생각보다 날렵하시네요.”
두 다리 다 부러트려 줄 생각이었는데.
이린의 작은 중얼거림은 주변의 소음에 묻혀 사내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사내의 실력은 분명 일개 수적의 것이 아니었다. 상당히 체계적으로 익힌 솜씨였다.
‘이런 자가 일개 수적이라면 대단한 일인데.’
정파의 제자들 중 죄를 지어 도적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도 있으니 수적들 중에 뜻밖의 고수가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들은 대화를 토대로 생각해 보면 단순한 수적질이라기보다는 암살(暗殺)에 가까워 보였다.
‘산 채로 붙잡아서 넘기는 게 나을까.’
배가 불타고 있으니 생포하려면 성가신 일이 될 듯해 이린은 잠시 손을 멈췄다. 그리고 그 순간, 배가 출렁거리며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순간 균형을 잃었다. 이린의 몸이 흔들리는 것을 본 사내는 휘청거리면서도 눈을 번뜩이며 몸을 움직였다.
“죽여 주…!!! 컥-!”
쿵!!
이린에게 달려들려던 사내의 옆으로 갑자기 누군가가 달려들었다. 이린을 신경 쓰느라 주변의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던 사내는 불시의 공격에 옆구리를 찔려 그대로 쓰러졌다.
사내가 다가올 것을 대비하던 이린 역시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크, 크으윽!!”
사내가 이린의 빈틈을 노렸듯, 상대 역시 배가 흔들리며 생긴 빈틈을 노린 셈이었다.
사내는 피를 흘리면서도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을 찌른 자를 향해 마지막까지 칼을 휘두르려 했으나 옆구리를 관통한 검 때문에 힘이 없어 허우적댈 뿐이었다.
생포를 포기한 이린은 빠르게 사내의 숨통을 끊었다.
“이봐요, 괜찮아요?”
“마님과, 아기…는….”
사내를 찌른 것은 여인의 시녀로 보이는 이들 중 하나였다. 시녀라지만 호위를 겸하고 있었는지 무예를 익힌 듯했다. 이미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기에 이린도 사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이, 원수의 모습이 보이자 마지막 집념으로 검을 내지른 모양이었다.
“아기와 부인이라면 무사해요.”
“제발…… 그분을….”
“안전한 곳으로 모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
이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시녀는 피투성이인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운 채 눈을 감았다.
불타는 저택과 매캐한 연기, 늘어져 있는 시체들.
이린은 문득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연 소저!!”
“-남궁 공자?”
잠시 상황도 잊고 넋을 놓은 듯 상념에 잠겨 있던 이린은 뜻밖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 남궁청휘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무사하십니까?”
“저는 괜찮아요!! 생존자가 더 있는지 살펴 주세요! 혹시 모르니 조심하시고요.”
이린의 말에 주위를 한번 둘러본 청휘는 움직이는 사람이라고는 이린 외엔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참혹한 현장에 잠시 숨을 삼켰다. 그리고 가까운 곳부터 쓰러져 있는 이들 중 생존자가 있는지를 살폈다.
이린은 시녀의 맥이 끊어져 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는 시녀의 귀에 있는 귀걸이를 한 짝 챙겼다. 아까부터 배가 휘청거리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청휘가 생존자를 확인하고 있었으므로 자신은 아까 본 여인이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여인은 여전히 아기를 안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 사람, 아까 다점에서 본 그 귀부인이구나.’
당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여인의 옷이나 주변에 쓰러져 있는 이들의 복장이 눈에 익었다. 아마 그때 시녀들이 안고 있는 것이 짐이 아니라 아기였던 모양이었다. 시체들을 보고 이미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까까지 살아 있던 이들이 이렇게 허망하게 목숨을 잃는 것을 본 기분은 좋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일어날 수 있… 다리를 다쳤군요.”
부인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본 이린은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지체 없이 부인을 안아 들었다. 다가온 청휘가 자신이 아기를 안겠다며 손을 뻗으며 말했다.
“아까 연 소저가 구해 낸 아기와 여인은 이미 다른 배로 피신했습니다.”
“아기가, 무사한가요? 다른 사람들은….”
“…….”
부인이 떨리는 눈으로 묻자 청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린에게 기댄 여인 역시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기를 꼭 끌어안았다.
“아래쪽은 불길이 더 커지고 있으니 지붕으로 올라가는 게 나을 듯합니다.”
청휘가 먼저 퇴로를 살피고, 이린이 부인을 모셨다.
청휘의 말대로 아래층 전체로 번진 불로 인해 누각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