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31
231.
주선하는 용봉지회가 열린 그 날 제갈세가에서 어떤 사내와 만났다.
시작은 단순했다.
[강함에는 성별도 가문도 무의미한 법인데, 어리석은 자들로 인해 곤욕을 겪으셨습니다.]대부분의 사내들이 시선을 피할 때 그자만이 두 사람에게 다가와 살갑게 인사와 위로를 건넸다. 자신 때문에 연화문까지 휘말릴 뻔했다는 자책감을 느끼고 있던 주선하는 그 부드러운 말에 쉬이 마음을 열었다.
이후로 그 사내와 몇 번이나 우연히 마주쳤고, 두 사람은 깊은 사이가 되었다.
처음에는 연화문 역시 그저 벗이 좋은 사내를 만났다 생각했다. 연이은 우연한 만남 역시 벗의 호감을 얻고 싶어 필사적인 모습으로 보였으므로 말을 삼갔다.
다만 언젠가부터 그자에게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을 뿐. 동시에, 벗 또한 어딘가 변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연화문은 그 사내가 어딘지 탐탁지 않았지만 주선하를 만류하지는 못했다. 말주변이 부족한 연화문에게 누군가의 단점을 들추어내는 것은 어렵기도 했거니와, 그럴 때마다 주선하가 말하는 ‘너는 사랑을 모른다’는 말에 반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처음 몇 번, 말을 꺼냈으나 여전히 ‘네가 사내에 대해 뭘 아느냐’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그때도 결국 마찬가지였다.
[좋은 사람이라니? 네가 뭘 안다고 그 사람을 평가해?! 연화문, 너같이 무심한 이가 무슨 기준으로 사람을 보겠어! 절망해 본 적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도 없는 네가, 어떻게 날 이해하겠어.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갈망하는지!] [주선하!] [세상에 고통받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알잖아! 많은 여인들이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고, 노예처럼 부려지고, 폭행당하고 죽는지도 알잖아! 그게 잘못되었다는 걸 너도 공감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너는 모르는 척할 수 있어?] [그 때문에 그 남자와 함께하겠다는 거야?] [그래! 그는 너와 달리 나를 이해해 줘!]이해한다는 게 대체 무엇일까.
연화문의 눈에 그 남자는 그저 말만 번지르르하게 웃으며 주선하의 장단을 맞춰 주고 무조건적인 찬사를 쏟아붓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너는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며 칭찬인지 의심스러운 말과 함께 자신들만이 특별하고 깨어 있는 사람이기에 결코 평범한 다른 이들과 함께할 수 없노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내는 정작 주선하가 보지 않는 곳에서는 다른 사람 같았다.
자주 마주친 것도 아니었으니 그 이상한 감각을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연화문은 어설프게 몇 번인가 주선하에게 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라 말했지만 사랑에 빠진 이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저 저에게 정인 생긴 것을 너무 부러워하지 말라는 말만이 돌아올 뿐.
정인에 대한 험담을 들으려 할 리 없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연화문은 다른 방법을 찾았다.
[연가장은! 너에게 연가장은 아무것도 아니야?!] [연가장? 연가장의 장주? 고작 그 작은 장원의 장주가 그렇게 중요해? 어째서 더 큰 것을 보지 않아?] [주선하!] [우둔하고 멍청한 인간! 어째서 나와 같은 것을 보았는데 너는 전혀 깨닫지 못하지? 너같이 강한 여인이 앞장서야 할 일이야! 그런데 어째서 너는 너와 네 장원 생각만 하지? 나에게도 너 같은 힘이 있었다면 그리하지 않았을 거야. 너 같은 여자들만 있기에 안 되는 거야! 바꿔야 해! 바꿀 수 있어! 내가 바꿀 거야! 이제 나 역시 무력하지 않으니 그 사람이 함께하며 나를 도울 거야! 그와 함께라면 분명히 할 수 있어!] [선하.] [내 이름 부르지 마. 이제 나는 네 수하가 아니야. 늘 너보다 한발 뒤처져서 보호받던 주선하가 아니라고!]악을 쓰며 끝없이 서로를 상처 입히던 대화, 그 끝에는 결국 검을 들고, 그대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씁쓸한 기억.
주선하가 연화문에게 검으로 이긴 적이 없듯이, 연화문 역시 주선하에게 말로 이긴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늘 그 대화는 머릿속에서 반복되고, 반복되고, 또 반복되며 연화문을 괴롭혔다.
주선하와 함께한 사내는 혈교의 교주였다.
그들 역시 남들과 다른 방법을 쓰기에 배척당할 뿐. 마교와 섞여 있어 오해받았을 뿐이라고, 성별에 관계없이 능력을 우선하는 곳이니 서로를 돕고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주선하는 믿었다.
그리고 주선하의 딸이라 주장하는 여인은, 기억 속의 그 사내와 조금 닮은 듯도 했다.
[어째서 제가 어머니의 딸이 아니라고 생각하시죠?] [그 답에는 나보다 더 잘 대답해 줄 사람이 있을 것 같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주선하를 죽이지 않았다는 걸, 누가 알려 주었지?] [그건….]주선하가 사망했을 당시 주세하는 어린아이였을 터.
몰래 빠져나와 어머니가 죽는 것을 직접 보았다면, 연화문을 이렇게 담담하게 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훨씬 나중에, 아이가 성장한 후. 주세하에게 이야기를 해 준 이가 있을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내가 구천현녀를 죽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되죠?] [그게 왜 문제가 되겠느냐. 네가 지금 혈교에서 이런 취급을 당하는 이유를 네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그럼 나도 한 가지 물어보마. 지금 혈교의 교주는 누구지?]너무나 당연한 질문에 굳어있던 세하는 애써 웃으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야, 전대 부교주였던 위지운 교주님이죠!]세하의 말에 담담하던 연화문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래, 그랬군.] [왜… 그런 걸 물으시죠?]연화문의 반응에 세하 역시 의아한 듯 얼굴을 구겼다. 방금 전까지 뜻 모를 흐릿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연화문의 눈에 오싹한 귀기가 흘렀다.
하지만 다시 주선하를 향한 그 눈에는 동정과 비통함이 가득했다.
[너는 모르고 있구나.] [무엇을요?] [주세하를 죽인 건, 위지운이었다는 걸.] [!!!]힘없이 늘어져 있던 주세하의 손이 연화문의 멱살을 잡았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다고요?!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사실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릴 하는 연화문의 얼굴은 그저 무덤덤해 보였건만, 그 옅은 갈색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그리고 너 역시 마찬가지로구나.] […….]세하가 황도를 오가며 신교의 새로운 거점으로 쓰던 근거지에 밀려든 정파의 갑작스러운 습격, 분명 경비를 서고 있어야 했건만 습격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어느새 사라진 혈교의 고수들.
오늘따라 평소와 다른 차를 내왔던 시비, 내공을 끌어올리자 갑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된 몸, 신녀만은 살아남아야 한다며 목숨을 걸고 자신을 탈출시켰던 측근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신을 습격해온 자들.
…기억났다. 차를 내왔던 시비. 그 아이의 부친은 혈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이곳이 갑자기 습격당하게 된 이유가 정말 그것이라면.
세하는 으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황실과 연을 맺고 난 이후부터 세하는 가능한 혈교를 멀리하려 했다.
혈교를 멀리해야 할 이유는 산더미같이 많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세하 자신이 아버지 앞에서는, 아버지에게는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혈교에 대고 있던 자금줄을 몰래 다른 곳으로 옮기고, 황실의 일에 집중한다는 이유로 교주와의 만남도 점차로 줄여 갔다.
교주도 그 사실을 느꼈으리라.
만약, 점점 말을 듣지 않고 방해만 되는 세하를 교주가 자신의 손을 쓰지 않고 제거하려 했다면.
주세하의 떨리는 눈동자를 본 연화문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너를 이렇게 만든 것은 정파의 고수들이 아닐 테지.] [!]애써 부정하고 있던 사실을 찔렀는지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핏발선 붉은 눈을 연화문은 씁쓸한 눈으로 응시했다. 이렇게 눈에 띄는 용모의 고수를 누군가 발견했다면 정파에서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부상을 입고 혼자 쓰러져 있다는 건, 가까운 이의 습격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돌연변이로 태어난 백발에 적안.
얼핏 보면 자신의 딸보다도, 이 아이가 더 자신과 닮아 보일 것도 같았다.
여기서 살아남은 이 아이를 만난 것도 어쩌면 하늘의 뜻인지도 몰랐다.
[주세하라 했지.] […….]그자에게 주선하는 무엇이었을까.
주선하에게 이 아이는 어떤 의미일까.
[만약 네가 혈교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도와주마.]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제안에 세하의 몸이 떨렸다.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세하는 힘겹게 손을 뻗었다.
[혈교에… 아직 남아 있는 신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들만 빼낼 수 있다면 그 후에는….]* * *
‘그렇게 선하의 뒤를 이은 아이는 구할 수 있었지만….’
주세하를 데리고 정파의 사람들과 함께할 수는 없기에 연화문은 다른 이들에게 별다른 언질을 남기지 않고 그대로 잠적해야 했다.
만약 자신이 혈교의 부교주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연가장에도 피해가 가므로 세상과 소식을 끊은 채 세하와 함께했다. 주세하는 신교가 뻗어 놓은 세력에 몰래 연락을 시도하려 했으나 번번이 이미 혈교에게 먹혔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절망했다.
물론 신교인들이 남아 있었으나 주선하가 부재한 사이 중요한 자리는 이미 혈교에게 빼앗기고 실권마저 잃어 대부분의 신교인들은 실상 거의 노비 같은 상태였다.
연화문의 비호 아래 완전히 몸을 회복한 세하는 할 수 없이 자신의 생존을 알려야 했다.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인 신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몸을 굽히고 혈교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물론 이미 빼앗긴 것들을 되찾기는 어려웠기에 세하의 실권은 약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황실의 일만은 멈출 수 없었다. 애초에 신교의 무인들이 적었던 것은 황태손의 즉위를 돕는 데에 힘을 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연화문은 세하가 황가에 연을 대고, 힘을 빌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감탄했다. 주세하가 말했던, 세상을 바꾸는 시도를 이 아이가 하고 있었다. 그것은 연화문에게는 부끄럽고도, 기쁜 일이었다. 혈교에 묶인 세하의 운신이 어려워진 동안, 연화문 역시 그 일을 돕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겨우 황위 다툼이 마무리되고 바깥일에 신경을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을 무렵, 이린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벗의 후인을 살리고 나오니 정작 내 피붙이는 실종이라니.’
대체 연화문이란 자가 살며 지킨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한없이 의미 없는 삶이었다.
연화문은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는 순진한 얼굴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검성의 무공이 뛰어난 것은 틀림없겠지만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
하지만 어린 여협은 연화문의 말을 바로 부정했다.
“으음. 무공이 뛰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사람인 거 맞지 않나요?”
“…그런가?”
뜻밖의 새로운 관점을 들은 연화문의 고개가 갸우뚱 옆으로 기울었다.
많은 이들이 연화문에게 많은 것을 바랐다.
연화문은 혈교의 교주와 혈교도들을 배출한 연가장의 장주로서의 책임을 져야 했다.
그에 대한 책임을 진 후에는 검성(劍聖)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강함과 위엄을 요구했다. 정작 연화문이 젊고 약하던 시절 강호에서 받아 본 적 없는 보호와 가르침마저도.
‘그저 나에게 소중한 걸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연화문이 지키고 싶었던 건 아주 작았다.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벗들이 있는 연가장.
무공을 익히는 건 좋아했지만 별다른 야망도 없었고 그저 충실하고 평화로운 하루가 만족스러웠던 시절.
“선배님께선 검성을 잘 아시나요? 혹시 어디 계신지도 아세요?”
“예전에 연이 있었을 뿐. 그런 자세한 일까지는 알지 못하네.”
“그런가요.”
아쉬워하는 모습에 눈을 가늘게 뜬 연화문이 검성에 대한 동경을 감추지 못하는 젊은 후배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검성은 왜 찾지?”
“으음. 그냥…요.”
그렇게 말하며 상대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동정호의 풍경을 바라보며 평온하게 대화하던 두 사람의 손은 어느새 자연스레 검파(劍把:검 손잡이)를 향해 있었다.
아까 산적과 싸울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두 사람은 참 호흡이 잘 맞았다.
스르릉― 챙!!
동시에 검을 뽑은 두 여인은 방금 전의 평화로운 대화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서로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역시!’’
수차례 초식이 오가고 적당한 거리로 떨어진 두 사람이 잠시 침묵했다.
“그 검술을 어디서 사사받은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
“어어… 그러니까, 어머니한테서요.”
왜 그렇게 자신 없는 목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후배의 대답에 연화문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모친께서 어느 문파의 출신이시지?”
“네? 아… 죄송하지만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어머니를… 뵌 지 너무 오래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