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33
33.
마차에서 내리라는 이현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생각보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우선 청아부터 못 나오게 단단히 단속하고 기다리고 있던 이린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마차에서 내렸다. 상단 안에 사람이 없으리란 법도 없었으니까.
“의외로 오래 걸렸네?”
“아무래도 마중을 나오시겠다는 거 같아.”
“?”
이현은 뭔가 골치 아픈 듯 살짝 이마를 감싸더니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린과 아이를 데리고 안쪽 전각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안녕하세요. 연이린이에요.”
이린은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장사 지부장 연사훈에게 면사를 걷으며 인사를 건넸다.
과연 객잔 점소이부터 시작해 지부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답게 이린의 용모에 움찔하는 기색도 없이 웃으며 안쪽으로 안내했다.
‘흐음. 약간 놀랐나?’
놀라는 기색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웃는 낯을 유지하고 있는 상인 정신에 이린은 내심 감탄했다.
“괴기기광(怪奇機狂) 님이 이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괴기기광?”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이지. 그리고 진명현이란 야장을 만난다고 했지?”
“네.”
괴이한 별호에 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과 달리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괴기기광이란 사람에 대해 아는 건가?’
상단의 안쪽에는 넓은 장원이 꾸려져 있었고 여러 개의 전각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일행은 그중에서도 유독 넓고 휑한 전각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다른 곳과는 달리 유독 황량했다.
“여긴, 나무가 없네요.”
“있으면 좋긴 한데, 또 성가신 게 잘 붙거든.”
이린의 의문에 낯선 목소리가 답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쾌활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여인은 바퀴가 달린, 처음 보는 가마를 타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말도 사람도 없이 스르륵 다가오고 있었다.
“어? 어떻게 움직이는 거예요?”
“기업 비밀이란다.”
하나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아이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며 다가온 여인은 이현과 이린 앞에 사뿐하게 내렸다.
‘무공을 익힌 사람이다.’
아버지 연적훈에 비할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무공을 익힌 사람의 몸놀림이 분명했다.
“나는 제갈윤위라고 한단다. 이름을 들으면 알겠지만 제갈세가 출신이고. 집구석이 썩 맘에 들지 않아서 호남으로 내려와 연가상단과 연을 맺어 주고 있단다. 자꾸 거창한 이름으로 부르려고 해서 이곳에서는 그냥 괴기기광이라는 이상한 별명으로 불리고 있지. 기왕이면 별명은 좀 짧으면 좋을 텐데. 이름이랑 똑같이 4글자라니 재미없어. 그렇지 않니?”
“네? 아, 네.”
“그래, 너희가 재밌는 거 가져왔다지? 얼마 전에 연 장주에게 서신을 받았단다. 평소에는 안부 연락도 잘 안 하면서 갑자기 서신을 보내기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했더니 아이들이 사고를 쳤다 그래서 깜짝 놀랐지 뭐니. 아들은 아직 어리다고 들었는 데다 딸에 대해선 많이 못 들어봤거든. 하지만 덕분에 모처럼 괜찮은 물건을 만들 수 있을 거 같아 기대하고 있단다. 게다가 덕분에 오랜만에 좋은 걸 볼 수 있게 됐지 뭐니. 호호, 세상은 정말 오래살고 볼 일이야.”
히죽히죽 웃으며 제 할 말만 와르르 쏟아 내고 있는 제갈윤위의 기세에 밀린 아이들은 뭐라 말을 열지 못하고 휩쓸리고 있었다.
‘어라. 제갈윤위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은데.’
희미한 기억을 더듬고 싶은데 뭔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여인 덕분에 이린은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어디, 우선 연가장주의 아이들부터 좀 봐 볼까나. 어머나~?”
거침없이 다가온 여인은 우선 눈높이가 비슷한 이현부터 붙들었다. 제갈윤위의 이름을 듣고 굳어 있던 이현은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연이현이라 합니다.”
“네가 연이현? 과연 호남제일미소년. 연 장주도 옛날엔 미소년이었는데 아들은 청출어람(靑出於藍)이구나! 하아, 눈이 맑아지는 것 같아.”
“부인…….”
감탄하며 요리저리 훑어보는 제갈윤위의 집요한 시선에 이현이 견디지 못하고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자 여인의 존재감에 밀려 보이지 않던 사내가 어지간히 하라며 말렸다.
“어머 어머, 삐지지 마. 난 당신 근육을 좋아하니까.”
“아니, 아이들 앞에서 그런 말씀은 조금…….”
“결혼한 지가 언젠데 저렇게 부끄러워한담. 아참, 소개하는 걸 잊었네. 이쪽은 내 남편인 진명현이라고 한단다. 나와 함께 일하고 있지.”
서슴없는 부부의 애정 표현에 내성이 없는 아이들은 멍하니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다 아직 가지 않고 있던 지부장의 떨떠름한 얼굴이 점점 구겨지고 있는 것을 보며 심심한 공감과 위로의 시선을 보냈다.
주변에서 괴로워하거나 말거나 제갈윤위는 이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밖에 나갈 때는 조심하렴. 도시의 여자아이들은 적극적이란다. 특히 날아드는 과일 조심하고.”
“하아……. 감사합니다.”
“그럼 네 동생은 어느 쪽?”
이현이 겨우 해방된 후 다음 차례는 이린이었다. 자신을 찾는 제갈윤위의 목소리에 이린이 앞으로 나섰다.
“아, 안녕하세요.”
“흐음. 그럼 네가 연이린이구나. 이제 8세라고? 호호, 귀여워라.”
살면서 처음 보는 듯한 적극적인 첫 만남에 이린이 면사를 걷으며 어색하게 인사하자 여인의 눈이 반짝였다. 어째서일까, 순간 당황이 스쳐 간 눈빛에 유독 즐거움이 담겨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파란 눈이 아주 예쁘구나.”
그렇게 말하며 윤위는 옆에 있는 이현과 이린을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머리카락 색은 금발이라, 중원에서는 보기 힘들지.”
“금발이요?”
“그래 새외(塞外)에 사는 색목인(色目人)들 중에 가끔 있거든 금발에 벽안(碧眼)을 가진 사람들이. 연가장 선조는 그쪽 출신이었다는 얘기가 있었으니까.”
제갈윤위의 말에 이린의 눈이 깜빡였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있을까? 이린에게 그런 것을 말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실은 알 사람은 다 아는 얘기였을까. 슬쩍 옆에 있는 이현을 보니 놀란 기색은 없었다.
‘왜 나한테만 말을 안 해 줘?? 아, 내가 말해 줄 틈을 안 줬나……’
자신이 예전에 가족들을 피해 다녔음을 떠올리며 이린은 금발이라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들어요.”
“어머 그래? 하긴 뭐, 그리 중요한 얘긴 아니지.”
어딘지 즐거워 보이던 제갈윤위는 다음으로 이현 뒤에 반쯤 가려져 있던 아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그럼 우리 현랑을 만나러 왔다는 꼬마 아가씨는 이쪽? 어머나…….”
아이에게 다가가 얼굴을 확인한 제갈윤위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세상에~ 예쁘기도 해라~ 누가 이렇게 예쁜 옷을 입혔어?”
“아, 옷이 더러워져서 제 옷을 좀 빌려줬는데…….”
이린의 말에 제갈윤위는 즐거운 듯 들뜬 목소리로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침에 이린이 본격적으로 자기 옷을 꺼내 꾸며 놓은 덕분에 지금 어느 귀족가 아가씨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고운 얼굴에 머릿결까지 좋아서 모처럼 쓸데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장신구들이 아이의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예쁜 옷 좀 입자. 응? 응? 현랑, 봐봐. 귀엽지! 예쁘지! 사랑스럽지!”
아이는 제갈윤위의 품에 갇혀 숨이 막힌지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갔다. 이를 애처롭게 쳐다보던 진명현이 제갈윤위의 품에서 아이를 빼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쯤하시지요, 부인.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인사는 이쯤하고 자세한 얘기는 후일 계속하지요.”
“어머 그랬지. 아쉬워라. 그럼 두 사람. 나중에 다시 보자꾸나.”
그렇게 인사를 남긴 채로 아이를 안은 두 사람은 이린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묘한 탈력감에 이린과 이현이 멍하니 있는 동안 내성이 있는 지부장이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놀라셨겠지만 원래 조금 성정이 거침없는 분이시라……. 악의가 있는 분은 아니니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연 장주님과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신 분이라고 알고 있고요.”
“네에…. 감사합니다,”
기왕이면 마음의 준비라도 좀 하게 만나기 전에 언질이라도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산속 장원에서 대체로 조용한 생활을 해 왔던 연씨 오누이는 익숙해질 수 있을지 약간 회의를 느끼며 시선을 교환했다.
“두 분의 숙소는 이쪽입니다.”
“지부장님이 직접 안내해 주실 것까진 없었는데요.”
“크흠. 장주님도 소장주님도 그리 자주 오시는 분들이 아니니 당연히 제가 직접 안내를 해야지요!”
그렇게 말하는 지부장의 시선은 이현과 이린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흐뭇해 보이는 지부장의 시선을 느끼며 이린은 이유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