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32
32.
“아니, 저기, 내가 먹을게.”
“어, 일어날 수 있겠어? 일으켜 줄까?”
“아니! 괜…찮아. 고마워.”
이린이 안아서 몸을 일으켜 주려 하자 깜짝 놀라 저지한 아이는 힘겹게 일어나 찻잔을 건네받고는 목을 축였다.
‘아직 좀 경계하고 있나 보네. 그나저나 참 예쁘게 생겼다.’
역시 눈을 뜨고 있으니 확실히 인상이 달랐다. 반듯하게 예쁜 얼굴에 속눈썹도 길고 차분한 게 어쩐지 어른스러워 보였다.
‘으음. 실은 내가 훨씬 어른이겠지만 나는 좀 이런 느낌이 아니려나?’
주변으로부터 충분히 어른스럽다는 평을 듣고 있는 이린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리광만 부리고 있는 것 같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가 차를 허겁지겁 마시는 것을 보며 찻물을 더 채워 준 이린이 살짝 등을 토닥였다.
“너무 갑자기 급하게 마시면 좋지 않아. 괜찮아?”
“후우우. 고마워.”
아직도 살짝 쉰 듯 지쳐 있었지만 아까보다는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인사한 아이는 살포시 웃으며 이린에게 찻잔을 돌려주었다.
“몸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 고마워. ……아니, 저기, 그게 아니라.”
스스럼없는 이린의 태도에 그만 똑같이 반말로 대답하던 아이는 순간 뭔가 깨달은 듯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은공께 인사가 늦었습니다. 구명지은(求命之恩)을 입었으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아, 괜찮으니까 무리하지 마.”
“그래. 무리하지 말고 좀 더 누워 있도록 해. 오늘 장사에 있는 연가상단으로 가야 하니까.”
어느새 이린의 뒤쪽으로 다가온 이현이 고개를 숙이는 아이를 다시 천천히 침대에 눕혔다.
“감사합니다…….”
“린아, 너도 어서 출발 준비해야지.”
“별로 할 거 없는데.”
툴툴거리면서도 이린은 청아를 붙들고 어제부로 이래저래 가벼워진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현은 그런 이린의 모습을 한번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의 안색을 살피고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은 많이 내렸구나. 말하는 건 이제 괜찮니? 몇 가지 물어봐도 괜찮을까?”
“아, 네.”
이현의 말에 아이는 살짝 긴장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일은 얼마나 기억하고 있지? 널 쫓던 자들이 누구인지, 몇 명이나 되는지 혹시 기억하니?”
“어제…….”
찬찬히 호흡을 고르는 아이를 보며 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이현은 자신들이 구한 아이가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린에게 깍듯하게 감사 인사를 하는 모습이나 쉽게 속내를 보이지 않는 면모를 보면 소박한 옷차림과는 달리 평범한 집안 자제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보다는 이린과 있을 때 본모습이 나타날 거라 생각했지만.’
뭔가 감추고 있다기보다는 아무래도 이현을 경계하느라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아이는 이린과 있을 때와는 달리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차분하게 어제 일을 털어놓았다.
“함께 마차를 타고 가던 이들이 갑자기 저를 덮쳐서 마차 안에서 소란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제 동행들이 저를 지켜 주었지만 마지막에는 저 혼자 남았고……. 이상하게 점점 몸에 힘이 빠져 움직이지 못하고 마차 혼자 달려갔기 때문에 저를 쫓던 이들이 누구인지, 몇 명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온몸이 굳어 버렸을 무렵, 저, 제 기억이 맞다면 은공께서 갑자기 나타나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정중하게 말하던 아이는 이린에 대해 말할 때 갑자기 목소리에 자신이 없어졌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마차가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는데 어린 소녀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구해 주었으니 자신의 기억을 의심할 만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저런 보기 드문 파란 눈을 착각했을 리가.
아까 잠에서 깼을 때 눈앞에 뱀이 있어 깜짝 놀란 덕분인지, 이린의 반짝이는 파란 눈에 동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아, 믿기 힘들겠지만 저 아이는 나이에 비해 경공이 뛰어나거든.”
“죽기 직전 마지막 꿈을 꿨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이었어요.”
어딘지 멍한 얼굴로 웃는 아이를 본 이현은 묘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장사에 가는 동안은 이린의 친구라고 해 둘 테니 너도 그렇게 알고 있으렴.”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는 군요.”
“네가 누구든 어린아이가 살해당하도록 못 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내 어린 동생을 위험한 일에 연루시킬 수도 없다.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두 분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 몸이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담담하게 웃는 얼굴을 보며 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린이 이 아이와 연루되면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몰랐다. 이현 혼자의 몸이라면 몰라도 이린까지 보호하기에는 아직 힘이 부족했다.
‘아직도 나는 많이 부족하구나.’
협객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적어도 어린 여동생 하나는 지킬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현은 한탄과 함께 청아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천진한 표정의 이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린을 보는 이현의 눈매가 너무 다정해서 아이 역시 저도 모르게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두 분은 친동기간이시지요? 동기간의 정이 참으로 두터워 보여 부럽습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다 보니 아무래도 귀여워서 응석을 받아 주게 되니 부끄러울 뿐이지.”
“아니요. 참으로 부럽습니다…….”
무거운 눈빛의 아이를 보며 이현은 말없이 어제 이린이 아이에게 입혀 준 외투를 건넸다.
어느새 청아의 밥을 다 먹였는지, 이린이 탈주하려는 청아의 머리를 강제로 밀어 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날은 평소보다 다소 이른 출발이었다.
“이 아이는 청아야.”
“비늘이 푸르스름해서인가요?”
“응. 뱀이라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청아의 비늘은 의외로 예쁘거든.”
“맞아요. 반짝반짝하는 게 정말 예뻐요.”
아무래도 첫인상이 안 좋았던지라 조금 꺼리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아이는 청아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드물게도 비늘이 예쁘다고 칭찬해 주자 이린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언니도 무공을 익혔지?”
이린도 아이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평범한 집안의 자제가 아니라는 것은 대충 눈치로 알 수 있었고, 어린아이라 해도 양가의 여식은 이름을 잘 밝히지 않는 법이었다. 이린도 민영을 잡으려 했던 이들에게 이름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다만 나이를 물어보니 이린보다 두 살 위인 10세라는 대답이 돌아와 그럼 언니라고 불러도 되겠느냐 물었다. 아이가 곤란한 얼굴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기에 이린이 부르는 호칭은 ‘언니’였다. 덕분에 어쩐지 분위기는 좀 더 편안해졌다.
“네. 가전(家傳)무공이지만요. 나름 성취가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제 은공을 만나고 제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으음. 내가 뛰어난 건 경공이니까.”
이미 검강까지 다룬 적이 있는 이린의 현재 무공 수준은 또래의 아이들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영약의 덕도 있겠지만 쓸데없이 눈에 띄고 싶지는 않아서 이린은 대외적으로 경공‘만’이 유독 특출 난 것으로 해 두고 있었다.
“은공의 오라버님도 굉장한 무위이시죠.”
아이는 두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지만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은공으로만 불렀다. 어차피 이 마차에 타고 있으면 자연히 알게 되는 일이라 이린은 별 거리낌 없이 웃으며 답했다.
“호남제일미소년이기도 하고.”
“아, 맞아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후후. 우리 오빠는 정말 보기 드물게 잘생긴 미소년이니까.”
자랑스럽게 어깨를 펴고 말하는 이린을 보며 귀엽다는 듯 아이가 웃었다.
“은공도 예쁜데요…?”
“에이, 구해 줬다고 아부하지 않아도 되거든?”
“아니요. 정말로요. 외모로 사람을 평하는 건 좋지 않지만 누구든 과연 호남제일미소년의 누이동생답다고 할걸요? 햇빛에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금실 같고, 푸른 눈은 신비롭고 아름다워요.”
오랜만에 들어 보는 순수한 칭찬에 이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린이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 않을 때에는 멀리서 바라보며 수군대는 사람만 많지, 이렇게 직설적인 칭찬을 하는 건 지금은 가족들과 서문민영 정도였다.
“언니는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이구나.”
“네??”
탁-!
“도착했구나.”
부끄러워하는 이린의 말에 아이가 놀라 허둥대는 사이 이현이 들고 있던 책을 소리 내어 내려놓으며 두 사람에게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먼저 나갈 테니 두 사람은 마차가 상단 안으로 들어간 후에 내가 부르면 내리도록 해.”
“네.”
“응.”
이현은 이린과 정체 모를 아이를 단둘이 놔두는 것이 못마땅한 듯 다시 한 번 두 사람을 쳐다보곤 마차를 빠져나갔다.
“오빠 오늘 왜 저럴까.”
“그야 소중한 여동생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상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걱정되시겠죠.”
“흐음.”
이린 자신의 현재 실력이 예전의 자신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눈앞에 있는 어린아이 하나 제압 못할 정도는 아닌데 역시 과보호가 아닐까.
“오빠란 그런 걸까.”
“글쎄요……?”
두 아이는 나란히 고개를 갸웃하며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