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4)
13일류 검사의 여행(3)
카앙!
세상에 수많은 검술이 있다고 해도 그 요체는 대체로 비슷비슷하다.
어떤 검술도 결국 인간이 만든 것, 두 팔과 두 다리를 놀려 검을 효율적으로 휘두르는 방법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 쿠크리를 휘두르는 괴한을 상대하며 나는 그것이 편견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캉, 카가강!
바닥을 구르며 발목을 베어 오고, 공중제비를 넘어서 목을 노리고, 달팽이처럼 웅크리며 검을 피하고, 빙글빙글 회전하며 사방을 돌아다니는 등.
그 움직임은 기괴하면서도 기이.
형식이 정해진 검술이라기보다는 본능에 의지한 임기응변에 가까운, 단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엉망진창의 싸움법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나는 괴한에게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카아앙!
검으로 쿠크리를 튕겨 낸 순간, 휘둘러진 것은 매의 발톱처럼 웅크린 손가락.
정확히 눈을 노리는 그 공격을 피해 상체만을 뒤로 살짝 젖히자, 기다렸다는 괴한이 몸을 뒤집으며 목을 향해 날카로운 발차기를 날려 온다.
타앙!
끌어당긴 칼자루를 방패로 삼은 방어.
그리고 화살처럼 검을 뻗어 반격하자 발로 칼자루를 밀어 몸을 굴려 검을 피하며 발목을 잡으려 든다.
그대로 발을 굴러 손목을 짓밟으려 하자, 마치 사람의 모습을 한 벌레처럼 네발로 사사삭 발을 피해 거리를 벌린다.
결국, 공격의 기회를 놓친 나는 추격을 멈췄다.
그리고 한참 뒤로 물러나고도 일어나는 대신, 바닥에 웅크려 쿠크리를 빙글빙글 돌리는 괴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강하다, 이자.
처음 내 일격을 막아 냈을 때부터 보통 실력이 아님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시작된 괴한과의 싸움은, 예상한 것보다 몇 배는 더 까다로웠다.
예측을 불허하는 변칙적인 동작, 철저하게 급소만 노리는 흉성, 거기에 내 검속에 반응하는 동체 시력에, 맹수를 방불케 하는 감각과 신체 능력까지.
이것만으로도 괴한의 실력은 전율 자체, 충분히 일류 검사라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괴한을 상대하기 까다로운 이유는 그 실력보다는 마음가짐에 있었다.
“…당신, 죽고 싶은 겁니까?”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스스로 약간 다치는 걸 감수하더라도 상대에게 피해를 입히는 걸 중시하는, 누구도 함부로 쓰지 않는 최후의 전법.
그런데 이 괴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식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나와 같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아니, 내게 작은 상처 하나만 낼 수 있다면 팔다리가 잘리든 몸이 꿰뚫리든 좋다는 듯.
방어를 도외시하고 무분별하게 공격만 쏟아 내니, 나로서도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KAuna, odu Hauji Ruog.”
제국어를 모르는 것인지, 괴한은 알 수 없는 말을 토해 냈다.
하지만 한쪽으로 치켜 올라간 입꼬리와 그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만 봐도 그것이 무슨 말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좋습니다. 당신이 정 그렇게 죽고 죽이는 싸움을 원한다면….”
자신이 절대 질 리가 없다고 믿는 듯한 방약무인한 괴한의 태도는 납득할 수 있다.
저토록 검술에 뛰어난 이가 저런 전법까지 쓰니, 남부 밀림에서는 지금까지 적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알려 주고자 했다.
이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 휘두르는 진짜 필살의 검이란, 어떤 것인지를.
“원하는 대로, 죽여 드리지요.”
검을 옆으로 비스듬히 늘어트리고 방어는커녕 회피조차 도외시한 채 나는 괴한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내 무방비한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뜻밖이라는 듯 나를 바라보던 것도 잠시, 괴한은 결국 씨익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쿠크리를 움켜쥐고 내게 달려들었다.
타다다닷!
상체를 바싹 숙이고 두 발로 땅을 박차며, 채찍을 다루듯이 팔을 맹렬히 휘둘러서 사각에서 쿠크리로 심장을 찔러 드는 그 움직임은 그야말로 맹수 자체.
사냥감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폭발적인 야성에서 비롯된 치명적인 공격.
그러나 그런 괴한의 쿠크리를, 나는 굳이 막거나 피하지 않았다.
한 걸음을 내디디며.
팔을 움직였을 뿐.
푸욱!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쿠크리가 내게 닿기 전에 내가 괴한의 옆구리에 검을 박아 넣기에는.
그림자처럼 빠르고 은밀하게 스며든 칼날.
그 통증에 옆구리 근육이 반사적으로 수축되자 괴한의 쿠크리도 힘을 잃었다.
“Acz…?!”
괴한은 눈을 크게 떴다.
먼저 검을 휘두른 건 자신인데 왜 내 검이 먼저 닿은 건지 모르겠다는 듯이.
하지만 나는 그 의문을 풀어 주지 않았다.
괴한의 옆구리에서 검을 뽑아내고 대신 또 한 걸음을 내디디며, 손목을 흔들었다.
촤라라락!
손목의 교묘한 움직임을 따라 허공에 흩뿌려지는 것은 검의 잔영.
마치 칼날이 수십 개로 분화하듯 셀 수 없이 많은 검영이 시야를 뒤덮으며, 폭풍처럼 괴한을 향해 몰아쳐 간다.
“kAaaaa!”
칼날의 폭풍을 보고 당황한 듯.
주춤하며 뒤로 움직이기를 한 걸음.
무심코 물러난 스스로에게 분노한 것처럼 괴한은 이를 드러내며 사나운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역수로 쥔 쿠크리를 내리찍어, 시야를 뒤덮은 검영을 깨부수려고 했다.
하지만 쿠크리가 가른 것은 허공뿐.
타오르는 불꽃처럼 검영이 흩어졌을 때, 나의 검은 이미 괴한의 손목을 베고 있었다.
촤악!
얕지만 정확하게 동맥을 가른 검상.
그로 인해 손목에서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며 괴한은 멍하니 나를 보았다.
“Ya, Yahju?”
자신이 베인 것을 믿을 수 없는 것처럼.
혹은 이제야 겨우 위기감을 느낀 듯 딱딱하게 굳어 버린 괴한에게 나는 굳이 여유를 주지 않았다.
단지 다시금 한 걸음을 내디디면서, 머리 위까지 치켜든 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을 뿐.
생존 본능의 발현인지.
괴한은 쿠크리를 위로 들어 올려 머리로 떨어져 내리는 내 검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발버둥이었다.
콰아아앙!
구르는 바위처럼 무겁게 떨어진 검은 얄팍하던 쿠크리를 유리처럼 깨트리고, 쿠크리를 받치던 왼팔을 자르며, 어깨 밑으로 빠져나왔으니까.
그래도 괴한의 방어가 아주 소용없진 않았다.
쿠크리를 깨트리며 검이 느려지고.
틈을 타 괴한이 몸을 비틀지 못했다면.
바닥에 떨어진 것은 괴한의 왼팔이 아닌, 정수리부터 좌우로 갈라진 몸의 반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였다.
이미 검과 한쪽 팔을 잃은 이상, 괴한은 더 이상 내 적수가 아니었다.
남은 것은 마무리 일격을 날리는 것뿐.
“Ha….”
하지만 막상 결정타를 앞두고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한쪽 팔을 잃고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을 입고도, 쓰러지기는커녕 꼿꼿하게 서 있는 괴한.
“Hahaha…. Kahahahaha!!”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입을 찢어지도록 벌리고 환희하며 폭소하는 그 광기 어린 모습이 절로 내 미간을 찌푸려지게 했다.
죽음의 공포에 미친 이들쯤 지금까지 몇 명이나 보고 베어 왔다.
하지만 이 괴한은 달랐다.
분명 죽음의 위기를 앞두고 있건만.
두려움에 떨기는커녕, 오히려 기쁨으로 몸을 떨며 미치도록 즐겁다 못해 진짜 미쳐 버린 듯한 그 기괴한 웃음이 본능적인 꺼림칙함을 느끼게 했다.
타닷!
바로 그 직후였다.
괴한이 튕기듯이 뒤로 몸을 날린 것은.
“거기 서십…시오?”
반사적으로 괴한을 쫓으려던 나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멈출 수밖에 없었다.
괴한은 마을 밖으로 도망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달려간 방향은, 오히려 정반대 쪽. 마을 한복판에 쌓인 시체 더미였다.
…뭘 하려는 거지?
다른 무기라도 찾으려는 걸까?
아니면 뭔가 함정이라도 숨겨 둔 걸까?
나는 만약의 사태를 경계했다.
궁지에 몰린 악인이 어떤 짓을 벌일 수 있는지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거리를 두고 경계하는 사이, 괴한은 다짜고짜 시체 더미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아까 전까지 뜯어 먹던 장년인을 찾아내 활짝 열려 있던 가슴팍에 오른손을 쑤셔 넣었다.
그야말로 보기만 해도 끔찍한 만행.
하지만 이어진 광경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멈추십시오!”
무언가를 찾듯, 장년인의 가슴을 뒤적이다 붉은 덩어리를 우드득 뜯어내 입가로 가져가는 괴한을 보며 나는 반사적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괴한은 멈추지 않았다.
단지 씨익 웃으며, 아직도 핏기가 선명한 장년인의 심장을 물어뜯었을 뿐.
이 천인공노할 자가!
죽은 이를 모욕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도 끝까지 인육을 탐하는 요마와도 같은 행위에 분노하던 나는 뒤이어 벌어진 일을 보고 더욱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우득, 우드득!
뼈와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옆구리와 손목의 출혈이 뚝 멎으며, 갈라졌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 때.
어깨 밑에서 잘려 나갔던 왼팔의 절단면에서 울퉁불퉁한 살덩이가 풍선처럼 부풀어 살을 찢고.
치솟은 뼈를 중심으로 근육과 혈관과 신경이 뒤엉키며 매끈한 피부가 그 위를 뒤덮는다.
그 모든 변화가 끝났을 때.
더 이상 그곳에 한쪽 팔을 잃고, 빈사 상태로 죽어 가던 중상자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상처는커녕 흉터조차 하나 남지 않은 멀쩡한 모습의 식인귀 한 마리만이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을 뿐.
“무슨…?”
좀 전의 싸움이 환각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상처 하나 남지 않은 괴한의 모습을 보며, 나는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3년간 수행을 위해 대륙을 떠돌며 제법 많은 것을 보고 겪어 온 나로서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은 들어 본 적조차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성력인가? 아니면 마법?
물론 신을 모시는 신관들이라면 상처를 치료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성력에도 한계는 있는 법. 삼대 신관 중 가장 성력이 뛰어난 신관장의 치료도 저렇게 빠르지는 않았다.
하물며 잘린 팔을 다시 자라나게 하다니? 그건 이미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범주의 일이 아니었다.
가능한 것은, 신의 기적이나 악마의 장난뿐.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마법.
저 괴한이 사실 검사가 아닌 마법사였다면, 그래서 지금껏 환각으로 나를 속인 것이라면 상처하나 없이 말끔한 저 모습도,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마법은 아니다.
내가 괴한과 싸운 시간은 10분 이상.
그 점만 봐도 내가 마법에 홀렸을 리는 없다.
결국 이 괴한은 나와 사투를 벌이고 신이나 악마의 힘도 빌리지 않고도, 극심한 부상을 일순간에 치료한 것이다.
“…정체가 뭡니까, 당신은?”
그렇기에 나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인간이 있다는 것을 믿기 힘든 걸 넘어 과연 인간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기에.
“kkk.”
분명 제국어를 못 알아들었을 텐데도 내가 무엇을 물어봤는지 빤히 안다는 듯.
괴한이 비릿한 웃음과 함께 대답하려던 순간.
한 줄기 목소리가 우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저기, 아직 안 끝났어? 나도 슬슬 배고파서, 뭐라도 좀 먹고 싶은데….”
“……!”
“……?”
한순간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까무잡잡한 소년이 얼굴을 내밀고 나와 괴한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을 향하며, 괴한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 것은.
이런…!
그 모습을 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이어질 괴한의 행동을 직감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처하기에 소년은 괴한과 너무 가까웠고, 괴한의 움직임은 내 생각 이상으로 빨랐다.
타닷!
“엑? 우왓!”
“라쟈!”
짐승 같은 몸놀림으로 길잡이 소년을 잡아채고, 마을 밖으로 도망치는 괴한을 쫓아 나는 다급히 달려갔다.
하지만 내가 마을을 벗어났을 때.
괴한은 어느새 높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 버둥거리는 라쟈를 옆구리에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어리석은.
나는 스스로의 미숙함을 자책했다.
끝낼 수 있을 때 끝내야 했거늘.
뜻밖의 사태에 당황한 나머지, 손을 쓰는 게 늦어 라쟈를 인질로 잡히다니.
그야말로 통한의 실수였다.
“Ha DuiZa, reim.”
그런 나를 비웃듯이.
괴한은 씨익 웃으며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기억을 되짚는 듯한 표정을 짓다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마지악, 아을.”
겨우 기억하는 단어를 읊는 듯.
어색하고도 투박한 제국어.
하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 나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인질을 잡은 악당이 이럴 때 하는 말은, 어차피 정해져 있었으니까.
“마지막 마을, 말입니까?”
“Uajo, 마지막 마을.”
“…좋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마지막 마을로 가 드리겠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스스로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똑바로 괴한을 노려보았다.
“대신, 그 아이에게는 손대지 마십시오.”
라쟈를 길잡이로 데려온 게 나인 이상, 저 아이를 구할 책임은 내게 있었으니까.
“만약 제가 가기 전까지, 라쟈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나는 굳이 말을 잇지 않았다.
단지 검을 집어넣고, 살기를 일으켰을 뿐.
어차피 제국어를 못 알아듣는 괴한에게는, 이쪽이 훨씬 이해하기 쉬울 테니까.
예상대로 내 뜻을 이해한 듯, 괴한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덩굴을 잡고 훌쩍 몸을 날려 밀림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나는 괴한의 뒤를 쫓지 않았다.
쫓아가면 인질인 라쟈가 위험했던 데다 어차피 그가 어디로 갈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마지막 마을이라….”
남부 밀림의 가장 안쪽,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마지막 땅에 있다는 곳.
애초부터 이곳에 수행을 하러 왔을 때부터 그곳까지 들어가 볼 생각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길잡이를 해 주던 라쟈가 납치당하며 라쟈가 가지고 있던 짐과 식량까지 잃어버렸다.
길을 모르는 나로서는, 마지막 마을은커녕 일곱 번째 마을조차 찾아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갈 길이 멀군요.”
그러나 어차피 선택지 따위는 없었기에 나는 각오를 다지고 곧장 몸을 돌렸다.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마지막 마을을 향해서.
* * *
처음부터 각오했던 바와 같이 일곱 번째 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맨땅보다는 늪을 뛰어다녀야 할 때가 더 많았고.
쉴 곳을 찾지 못해 나뭇가지 위에서 잠들었으며.
그나마도 하룻밤에 두세 번씩은 독사나 맹수의 습격을 받아야 했다.
무엇보다 곤란한 것은 길이었다.
수백 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끝없는 숲과 늪이 뒤섞인 남부 밀림은 미궁 자체.
길잡이라도 까딱하면 길을 잃기 십상인 곳을 지도조차 없이 남쪽으로만 향했으니 보통이라면 영락없는 자살행위.
목적지에 도달하기는커녕, 늪에 빠지거나 맹수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맞이할 만행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고작 늪에 빠질 뻔한 위기를 수십 번 넘기고 맹수나 독사를 백여 마리 물리친 것만으로 다음 마을을 찾아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몰랐다.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피이잉!
“…저는 여러분의 적이 아닙니다.”
몇 날 며칠이나 밀림을 헤맨 끝에 가까스로 찾아낸 일곱 번째 마을.
그곳에 채 발을 들이기도 전에 다짜고짜 날아든 화살 세례를 검으로 튕겨 내며 나는 살기등등한 주민들을 설득하려 했다.
“Ivaka!”
“kimugtyo, Rasyank!!”
그러나 실로 유감스럽게도 주민들은 내 말을 듣지도 못했다. 핏발 선 눈으로 내게 달려들었을 뿐.
단순히 말이 안 통해서 벌어진 오해는 아니었다.
그렇게 달려드는 이들 중에는 적게나마 제국어를 구사하는 이들 또한 명백하게 있었으니까.
“밀림의 주인의 뜻대로! 제물, 바쳐라!”
“제물, 잡으면 주인께서 평생 사냥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제국어를 하는 이들일수록 광분해서 앞장서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나 오해가 아니며 명백하게 누군가가 의도한 결과라는 것을.
그리고 공포심에 물든 주민들의 얼굴만 봐도 이 일을 꾸민 게 누군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런 교활한 짓을.
쫓아오는 주민들을 두고 망설인 끝에 나는 결국 마을로부터 몸을 돌렸다.
싸우려면 얼마든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악한이 아닌 일반인들, 검으로 베어야 할 상대가 아니었다.
다행히 도망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부분 무력한 일반인이었던 데다가, 밀림 깊은 곳까지 쫓아오는 이들은 없었으니까.
“역시, 협박을 받은 모양이군요.”
배후는 십중팔구는 그 괴한일 터.
그런 미친 식인귀를 따르는 이들은 없겠지만 괴한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첫 번째 마을에서 만났던 하르바만 해도 샤하타라는 존재를 밀림보다 두려워했으니까.
만약 그것이 남부 밀림에서 보편적인 일이라면 일곱 번째 마을만 아닌, 다른 곳에서도 이 비슷한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은 적지 않았다.
“…정말, 갈 길이 멀군요.”
나는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길잡이와 짐까지 잃은 마당이다.
그런데 새로 길잡이를 구하기는커녕, 사람들까지 피해 다녀야 할 지경이 됐으니 갈수록 태산이었다.
그래도 나는 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마지막 마을을 찾아 남쪽으로 향했을 뿐.
아무리 힘들어도 멈추거나 주저하지 않고 느리더라도 꿋꿋하게 나아가면 아무리 불가능한 일이라도 언젠가 도달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그의 가르침이었으니까.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매일같이 숲과 늪을 헤매고 다니며 나는 어느새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사람들을 피하고, 짐승을 잡아 배를 채우며 다만 남쪽으로 나아가기만을 거듭했을 뿐.
아홉 번째 마을을 지나.
열 번째 마을을 속여.
열한 번째 마을에 숨어들며 밀림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밀림에서의 생활은 익숙해졌고, 은밀하게 마을과 주민들을 관찰하면서 적지 않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마지막 마을의 정확한 위치나 남부인들이 자주 쓰는 말의 의미.
그리고… 남부 밀림의 주민들의 어떻게 사는지를.
“…가혹하군요.”
얼핏 평화롭게 보였던 남부 밀림의 마을.
하지만 정작 그 실체는 끔찍했다.
마을마다 정해진 할당량이 있었으며 그 할당량을 못 채우면 끔찍한 형벌이 따른다.
정기적으로 주민들을 산 제물로 바쳐야 했고 허가받지 않으면 마을을 벗어날 수도 없다.
하고 싶은 일 대신, 명령받은 일만을 하며 혼약조차 정해진 이와 행해야만 하는 그것은 이미 사람의 삶이 아니었다.
길러지는 가축의 삶이었지.
즉, 남부 밀림의 열두 마을은 누군가에 의해 관리되는 목장이었던 것이다.
인간을 잡아먹는 식인귀들이 안정적으로 식량을 얻기 위해 몇 년에 걸쳐 만들어 낸, 인간 목장 말이다.
정말이지, 끔찍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마지막 마을로 향했다.
같은 인간을 잡아먹다 못해, 짐승처럼 사육하기까지 하는 끔찍한 괴물들을 응징하기 위해서.
하지만 정작 마지막 마을을 앞두고, 나는 섣불리 검을 뽑아 들 수 없었다.
이미 내가 올 것을 예상했기 때문인지.
마을의 경계가 워낙 삼엄해서, 도무지 몰래 들어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곤란한 일이었다.
만약 발각되면 주민들 모두와 싸워야 할 터.
아무리 나라도 그들을 상처 없이 제압하면서 괴한을 상대할 자신까지는 없었다.
인질까지 잡혀 있는 마당에는 더더욱 말이다.
“어떻게든 주의를 흐트러트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마지막 마을을 살폈다.
안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빈틈을, 혹은 그 빈틈을 만들 방법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내가 며칠에 걸쳐 밀림에 잠복한 채 마을을 지켜보던 도중이었다.
마지막 마을에서 이변이 벌어진 것은.
“Yatuka!”
“Raio, hela!”
…무슨 일이지?
창칼을 챙겨 들고 우르르 몰려나온 갑작스러운 주민들의 행동에 나는 긴장했다.
혹시 내가 매복하고 있던 게 들킨 거라면 무력 충돌을 피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건 내 기우였다.
주민들은 내가 매복하고 있는 곳 근처에도 오지 않고, 어떤 곳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갔으니까.
뜻밖의 사태에 의아해하기도 잠시.
주민들이 내지르는 소리를 엿들음으로써 나는 상황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쫓고 있다…?”
고작해야 단어 몇 개만 익숙해진 만큼, 정확한 상황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민들이 밀림의 주인의 명령에 따라 나 외의 누군가를 쫓아 나왔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대체 누구지?
남부 밀림은 식인귀들의 왕국.
이곳에서 그들은 절대자와 같았다.
그런데 밀림에서 가장 깊은 이 마지막 마을에서 그들에게 대항해서 쫓기는 이가 있다니,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밀림을 뒤지는 주민들과 흐트러진 마지막 마을의 모습은 내게 깨닫게 해 주었다.
저들은 분명 누군가를 쫓고 있으며 지금이 마을에 잠입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감사를 표해야겠군요.”
이 일을 벌인 게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들이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것을 볼 때, 십중팔구 밀림의 주인과 적대하는 의인일 터.
그 무모한 의기에 감탄하며 나는 마지막 마을에 숨어들었다.
누군지 모를 의인이 목숨 걸고 만들어 준 기회를 헛되이 놓칠 수는 없었으니까.
마지막 마을에 잠입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워낙 많은 이들이 갑자기 빠져나간 탓에 경계가 그만큼 흐트러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라쟈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으슥한 감옥부터, 낡은 움막이나 창고까지 가장 있을 법한 곳부터 뒤져 봤음에도 라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표적을 찾는 암살자의 심정으로 은밀하게 집을 하나씩 뒤져 갔을 뿐.
그 결과, 나는 마을 중심부에 있던 화려한 가옥에서 마침내 라쟈를 찾아낼 수 있었다.
“라쟈!”
두꺼운 가죽 위에 곤히 잠들어 있는 까무잡잡한 길잡이 소년을 발견한 순간 나는 곧장 창문을 넘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음을.
머리 위에서 은밀하게 떨어져 내린 쿠크리는, 내게 깨닫게 해 주었다.
카앙!
이런…!
내가 찾아오기만 기다렸다는 듯.
천장에서 숨죽이고 있다가 기습해 온 괴한의 쿠크리를 검으로 튕겨 내며 나는 반사적으로 반격을 가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던 상대는 괴한 혼자만이 아니었다.
파바바바밧!
목을 노리는 사슬낫을 피한 순간 허리를 양단할 듯 휘둘러져 온 도끼.
그 공격을 검으로 받아 내는 순간의 틈을 노려 미간으로 뻗어 온 창을 몸을 뒤집어 피하고, 정수리로 떨어지는 지팡이를 튕겨 내니 은밀하게 파고드는 뼈로 만든 암기.
그것은 죽음의 그물.
각자가 일류의 수준의 실력자들이 목숨을 도외시하고 단 한 명을 죽이기 위해 연수합격을 펼치는, 검자라도 베어 넘길 수 있는 무서운 맹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캉, 카강! 카가가가가강!
잘린 옷자락이 허공에 휘날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목을 간지럽힌다.
베인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땀과 뒤섞이며 칼날이 마주치며 튄 불꽃이 시야에서 명멸한다.
17초, 53식, 119격, 284합…!
… 안 돼, 못 버틴다.
고작 눈 몇 번 깜박일 동안.
수백 번의 공방을 주고받는 사이.
치솟는 것은 죽음이 은밀하게 등을 끌어안고, 목에 입을 맞추는 듯한 오싹한 감각.
그것을 느낀 순간, 나는 더 이상의 방어를 포기했다.
대신 이를 악물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쿠웅!
바닥이 산산이 깨져 나가고 그 충격으로 지면이 흔들리자 아슬아슬하게 뺨을 베고 지나가는 쿠크리.
그렇게 공격이 빗나간 틈을 타, 나는 빙글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바로, 뒤에 있던 벽을 향해서.
콰르르르릉!
“kAk?!”
“M, Muco AhsIu…!”
힘을 조절할 여유조차 없이 전력을 담아 휘두른 검이 벽을 깨부수고.
무너지는 벽과 지붕의 파편에 휩쓸린 탓에 습격자들이 당황하며 물러난 사이 나는 번개처럼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잠들어 있던 라쟈를 잡아채고, 지붕이 무너지며 생긴 구멍을 통해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걸로, 됐다. 어차피 내 목적은 인질을 구하는 것.
라쟈를 구해 낸 이상, 저들을 상대할 필요는 없다.
그렇기에 나는 곧바로 마을 밖으로 도망쳤다.
…아니, 도망치려고 했다.
촤악!
하나의 칼날이 내 목을 스쳐 지나가기 전까지는.
내가 그것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운에 가까웠다.
아니, 사실상 기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데스 쉐도우’에서, 그에게 살기를 감지하는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그래서 소름 끼치도록 은밀한 살기를 느끼고 즉시 들고 있던 것을 내던지지 못했다면.
그리고 높이 치솟았던 지붕의 잔해가 때마침 칼날에 부딪혀 튕겨 나가며 칼날의 진행을 늦춰 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목이 베어졌을 것이다.
타닷.
“우와, 이거까지 피할 줄은 몰랐는데. 검사님, 진짜 대단한 검사였구나.”
좀 전까지만 해도 죽은 듯 잠든 채 내 손에 짐짝처럼 들려서 덜렁거리던.
그러나 내가 인질을 구해 내 안심한 틈을 노려, 단숨에 내 목을 베어 내려고 했다가 내게 던져진 까무잡잡한 피부의 소년.
라쟈는 지붕 위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리고 뱀처럼 구불구불한 단검을 들어 그 칼끝에 묻은 내 피를 달빛에 비춰 보며, 생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왜 검사님이 하늘의 검이라고 불리는지, 납득이 갈 정도야.”
“…….”
나는 잠시 침묵했다.
왜 라쟈가 나를 기습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해했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연.”
진작 깨달아야 하는 사실이었다.
들른 마을마다 우리를 피하던 사람들.
길잡이를 앞세우고도 유독 험난했던 여정.
괴한을 상대할 때 절묘하게 나타난 타이밍.
거기에 방충제의 짙은 향에 가려진 피비린내까지.
그 모든 것이, 라쟈의 정체를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첫 번째였습니까.”
“맞아, 검사님.”
남부 밀림에 있는 열두 개의 마을.
그 마을을 각자 감시하고, 다스리며.
필요할 때마다 그 주민들을 잡아먹는.
인간을 초월한 힘을 지닌, 열두 명의 주인.
“내가 바로 첫 번째 밀림의 주인이야.”
12식인귀의 막내는, 그렇게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