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69)
167마왕의 결전
화르르륵.
대지 위에 흐르는 불꽃의 강, 하늘을 뒤덮고 있는 화염의 구름, 세상을 녹여 버릴 듯 거대한 핏빛 태양까지. 모든 것이 화염으로만 가득한 그 세계에서도 가장 붉게 타오르는 것은 따로 있었다.
지하에서부터 천상까지를 꿰뚫는 듯한 거대한 화염의 기둥과 그 안을 깎아 내듯 만들어진 화염의 옥좌, 그곳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존재야말로 이 모든 불꽃의 주인이라는 것을 나는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존재는 나와 똑같은 외모를 하고 있었으니까.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머리카락과 핏방울을 담고 있는 듯한 선홍빛 눈동자, 작은 키에 어려 보이는 외모까지. 태양처럼 타오르는 금빛 머리카락을 제외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똑같아서, 거울을 보는 듯한 싶은 느낌을 주는 존재는 옥좌 위에서 나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나의 어린 여식아.”
“…내가 왜 당신의 딸이라는 거지, 아크넬?”
99악마의 정점에 위치한 9명의 대악마, 그중에서도 서열 3위를 차지하고 있는 분노와 폭염의 지배자는 내 싸늘한 말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올렸을 뿐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오싹한 소름과 함께 몸을 굳혔다. 어느새 내 앞에 나타난 아크넬의 모습이, 그리고 내 뺨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이 내게 전율을 느끼게 한다.
“나의 피가 흐르고, 나의 얼굴을 하는 네가 어찌 나의 딸임을 부정하느냐?”
아크넬의 말에 나는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그 말 그대로 마왕으로서의 힘은 물론, 지금 내가 가진 외모조차도 대부분은 아크넬에게 비롯된 것이었으니까.
강력한 마력을 지닌 아홉 대악마, 그중 둘의 봉인구를 이식받은 부작용으로 나는 10살 이후로 신체적 성장을 잃어버렸고, 외모 또한 과거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피를 타고 흐르는 강대한 마력이 나의 육신을 아크넬에 가깝게 바꿔 놓은 것이다. 물론 세이너스도 아홉 대악마 중 하나였지만, 아크넬의 마력을 넘어서지는 못했기에 이 은빛 머리카락만이 세이너스의 마력이 내 육신에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고, 대체 왜 나를 부른 거지?”
나는 차갑게 아크넬을 노려보았다.
본래 봉인구에 갇혀 있어야 할 아크넬이 이렇게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경계하게 하였지만, 아크넬은 오히려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반문을 건네 왔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나의 어린 여식아. 나를 찾아온 것은 바로 네가 아니더냐?”
“내가 찾아왔다고?”
나는 의심 어린 눈으로 아크넬을 보았지만, 그녀에게서 거짓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경계심을 버리지 않았다.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니라, 거짓과 기만 속에 악을 다스리는 악마, 그중에서도 정점인 아홉 대악마 중 하나였다.
거짓으로 신이라도 속일 수 있는 악마를 단지 느낌 하나로 믿을 정도로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봉인구에 틈을 만들어 낸 것은 가상한 인간들이지만, 이곳에 직접 찾아온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너 자신의 악이라고 해야겠구나.”
아크넬이 담담한 말과 함께 한 손을 펼친 순간, 사방에 가득 차 있던 불꽃이 일그러지며 희미한 영상을 비춰 내기 시작했다.
그 불꽃 너머로 비춰지는 것은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흔들의자에 앉아 벽난로를 보고 있는 그와 빨랫줄에 빨래를 널고 있는 세레나, 그리고 수프를 끓이고 있는 나 자신까지. 절대 몰라보려야 몰라볼 수 없는 영상을 확인한 나는 아크넬을 노려보았다.
“왜 내게 이런 걸 보여 주는 거지?”
“이것은 내가 보여 주는 게 아니다. 단지 네 마음속에 있는 것을 비춰 주고 있을 뿐이지.”
아크넬의 말은 사실이었다.
때로는 눈 덮인 숲에서 따스한 차를 마시고, 때로는 새롭게 단장한 여관에서 함께 일하고, 때로는 빈민가에서 약술사 노릇을 하는 모습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과거 우리의 모습이었으니까.
“저들 곁에 있을 때, 너는 일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다.”
“그래.”
나는 선선히 아크넬의 말을 긍정했다. 단지 과거의 영상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채워 오는 따스하고도 아늑한 느낌이, 그리고 영상 속에서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러므로 너는 생각했을 것이다. 단지 그들의 가족으로서 곁에 남을 수만 있어도 만족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지 않느냐?”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나에게 거짓말을 통하지 않는단다. 아이야.”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거짓에 능한 악마, 그중에서도 내 심장 속에 깃든 채 십수 년을 함께해 온 아크넬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향해, 아크넬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무리 사랑받고 행복하다고 해도 너는 마족이지. 그리고 실제 나이야 어찌 됐든 아직 어리게만 보이고, 앞으로도 절대 성장할 수 없는 자신이 그의 사랑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아크넬의 음성이 잠시 끊긴 순간, 불꽃 속에 비치던 영상이 뒤집히며 하나의 모습으로 통일되기 시작했다. 아크넬 못지않게 찬란한 금발과 호수와 같이 푸르고도 맑은 눈동자. 그리고 그 얼굴에 맺혀 있는 아름다운 미소와 누구나 시선을 향하게 되는 매혹적인 몸매까지.
이상적인 여인으로서의 미모와 영웅이자 검사로서의 고결함을 함께 품고 있는, 그리고 같은 가족으로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세레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그녀를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느냐?”
“…내 마음을 포기한 적은 없어.”
“하지만 그녀에게라면 양보해도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나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나에 비하면 너무나 아름답고도 고결한 세레나.
아무리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마왕으로서 세계를 혼란에 몰아넣고, 영원히 어린아이로 남을 수밖에 없는 내가 그녀를 이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 따위는 절대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세레나가 상대라면 아무리 가슴 아프더라도 그를 포기할 수도 있다고 나는 은연중에 생각해 왔다.
“설령 그들이 맺어진다고 해도, 같은 가족으로서 그들의 행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래, 그렇다.
설령 함께 맺어진다고 해도 그들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날 가족으로 여겨 줄 것이고, 그들과 함께 있는 한 나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 순간, 불꽃에 비치던 영상이 흔들렸다.
세이나르의 외딴집에서 셋이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여전히 함께 식사하고, 산책하고,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일을 하는, 그러한 일상 속에서 그와 세레나는 조금씩 가까워져 갔다.
그것은 그가 세레나의 요리를 칭찬하고, 그의 옷을 세레나가 직접 챙겨 주고, 세레나와 대화를 나눌 때만 유독 그의 음성이 따스해지는 그런 작은 차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작은 차이만으로도 둘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행복하게 느껴져 나는 마음이 욱신거리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세레나와 그가 가까워질수록 흐려지는 나의 영상이, 그리고 행복한 듯 웃고 있으면서도 어두워지는 나의 얼굴이 심장을 조여 왔다.
“지금은 ‘같은 가족’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겠지. 하지만 둘이 맺어지게 되면? 그래도 과연 너는 ‘똑같은’ 가족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아크넬의 속삭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영상 속에서 그와 세레나가 가까워질수록 내 얼굴이 어두워지는 일은 늘어만 갔다. 그리고 그 어둠의 끝은, 어느 깊은 밤중의 영상이었다.
끼이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둠을 틈타 조용히 방을 나선 그녀가 소리 내지 않고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세레나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 뒤를 쫓듯이 몰래 방을 나온 영상 속의 내가 그의 방을 향해 다가가는 모습을 본 나는, 심장이 터질 듯 옥죄여 드는 것을 느꼈다.
그만둬. 그러지 마.
폐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채 목구멍을 넘어서지 못하고 다시 삼켜졌다. 그것은 영상을 향해 그런 말을 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으리라는 이성적인 판단 때문이 아니었다.
그와 그녀가 뭘 하고 있는지를 보고 싶다는 그 음험하고도 어두운 욕망을 가진 것은 영상 속의 나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상 속의 내가 조심스럽게 그의 방문을 연 순간….
나는 얼어붙어 버렸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입술이 맞닿으며 따스하고도 뜨거운 숨결이 뒤섞여 드는 모습과 거친 상처와 흉터가 희고도 부드러운 살결과 뒤엉켜 들며 두 사람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그 추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은 내게 있어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얼어붙은 이유는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문틈으로 그것을 훔쳐보는 영상 속의 내 얼굴, 어두운 눈동자에 두 사람의 모습을 담은 채 절망감이, 질투심이, 후회가, 슬픔이, 좌절이, 증오가, 고통이 뒤얽혀 너무나도 불행한 표정을 하는 나의 모습이, 나의 심장을 후벼 파고 있었다.
“집어치워!”
화르륵!
비명과도 같은 고함에 타오르던 불꽃이 스러지며 그 안에 비치던 영상도 함께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영상이 사라진 뒤에야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떨리는 손을 꽈악 움켜쥐며 사납게 아크넬을 노려보았다.
“대체 뭐야? 나한테 이런 걸 보여 줘서 대체 뭘 하려는 거냐고!!”
내 처절한 외침에 아크넬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허공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나와 똑같은 얼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단지 네 마음을 비쳐 주고 있을 뿐이라고.”
“……!”
너무나 세게 움켜쥔 나머지, 손톱이 파고든 손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손을 풀지 않았다.
무엇이든 소리를 내지르고 싶은데도 어떠한 소리도 내지를 수 없다는 사실이, 날뛰는 심장을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이, 아크넬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하게 했다.
그것은 분명 내가 품고 있던 불안감이었다. 내가 지닌 미래에 대한 공포였고, 슬픔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나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미래를 어떻게 인정할 수 있을까.
마치 북풍한설에 알몸으로 내던져진 것처럼 피가 싸늘하게 식어 가는 감각 속에 스스로를 끌어안은 채 바들바들 떨던 나를 어느새 뒤에서 나타난 가느다란 두 개의 팔목은,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슬퍼하지 말거라, 나의 어린 여식아.”
목덜미를 지나 쇄골을 타고 내려오는 그 손길은 너무나 부드럽고도 따스하여 너무나 깊은 공포에 얼어붙어 있던 나는 그것을 떨쳐 내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 열기에 취해, 그녀의 팔에 몸을 맡겼다.
“너의 존재가 마라고 하여도 네가 슬퍼할 필요는 없다.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화르르륵.
그 너무나 뜨거운 열기 때문에 옷이 불타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쇄골을 타고 내려온 손이 가슴을 희롱하며 심장을 뜨겁게 달구는 것을, 다리 사이를 파고든 손이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단순한 포옹에서 애무로 뒤바뀌는 것을 그저 방관하고 있던 나의 귓가에, 그녀는 더없이 따스하게 속삭여 왔다.
“빼앗길 것 같다면, 빼앗을 상대를 없애 버리면 되지 않느냐?”
그 목소리는 더없이 사악하며, 음란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너무나 뜨거운 목소리를, 온기를 갈구하고 있던 나는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내가 그의 사랑을 얻을 수는 없어.”
그것은 부정 아닌 부정.
‘세레나를 죽일 수 없다’가 아니라 세레나의 죽음을 전제로 한 대답이었지만, 이미 아크넬이 불어넣은 뜨거운 열기에, 그리고 이제는 애무를 넘어 농락에 가깝게 허벅지 안쪽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 오는 손길에 머릿속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던 나는, 그 사실을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를 얻어 주마. 그가 영원토록 너만을 바라보게 하고, 너만을 사랑하게 하고, 너만을 느끼도록 해 주마.”
“그건….”
조용히, 목을 타고 안으로 넘어온 마른침은 그대로 목 안에서 증발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보다 깊어져만 가는 갈증 속에, 나는 바르르 몸을 떨었다.
‘로드 오브 킹덤’의 파멸마저 인정할 수 있었다. 마족의 죽음마저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하나의 고독과 슬픔이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게 했다.
“자아. 한마디만 하거라. ‘원한다’고, 그렇다면 내가 너의 소망을 이뤄 주마.”
그 속삭임을 통해, 그 숨결을 통해, 그 손길을 통해, 그 몸을 통해 전해져 오는 그 뜨거울 열기를,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깊고도 순수한 열망을 나는… 거부할 수 없었다.
“…나는, 그를….”
후회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단지 너무나도 순수한, 그렇기에 바로 악이 될 수밖에 없는 그 소망을 나는 그렇게 입에 담았다.
“원해.”
내 대답을 들은 아크넬은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 요염하고도 아름다운, 그렇기에 요사스럽고도 사악하기 그지없는 미소….
“너의 소망을 들어주마. 나의 어린 여식아.”
그 속삭임과 함께 내 가슴을 파고들어 온 새하얀 손이 나의 영혼을 움켜쥔 순간, 심장으로부터 폭발하듯 터져 나온 열기가 내 몸을 불사르며 세상의 모든 것을 화염으로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