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59)
58마왕의 동요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집념.
지켜 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공포.
복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증오.
버텨 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정.
그 위에 이뤄진 존재가 마왕이라.
[…그날의 꿈을 꿨다.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오늘따라 그 꿈이 선명했던 것은 왜일까.
최근에서야 꼭 내가 옳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게 최선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최선이라 해서, 그게 옳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한들, 내 선택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부여한 운명이었으니까]
뚝.
…운명이라.
끼적거리던 팬을 멈춘 채, 나는 일기장을 보았다.
운명이라는 게 있음을 믿지 않았다.
설혹 있더라도 그 운명을 부수고 내 길을 개척하면 될 뿐이라고 믿었다.
그 생각이 바뀐 것은 언제부터일까.
왕국의 꿈이 무너진 그날?
아니면… 그 사내를 만나게 된 날?
생각해 보면, 그를 만난 것은 얼마 전.
고작해야 몇 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짧은 시간이, 지난 몇 년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것은 대체 어째서일까.
요리와 빨래를 배우고, 세레나를 만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도적들에게 납치됐다가 구해지고, 여관에서 일하기까지….
겨우 몇 개월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비록 처음의 목적이었던 사내의 비밀을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별 상관은 없다.
과거를 딛고 살아가는 방법을 이제는 알게 됐으니까.
그렇다고 그 비밀을 알아내는 걸 포기한 건 아니지만….
응?
시선을 느낀 나는 상념에서 벗어나 문가에 서 있는 금발의 여인을 보았다.
“…빨래, 끝났어?”
“아, 네.”
언제나처럼 같이 부드럽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세레나.
수수한 원피스를 입고 있음에도 깨끗한 피부와 조각처럼 반듯한 얼굴.
그리고 군살 하나 없는 유려한 몸매는, 그러한 수수함조차 매력의 하나로 만들어 버릴 만큼 아름다웠다.
…피부나 몸매는 둘째 치더라도, 뭘 먹으면 저렇게 가슴이 나오는지, 나중에 한번 물어봐야겠다.
딱히 누군가가 의식돼서는 아니다.
어차피 크면 나도 저렇게 될 테니까.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그가 저런 취향이라는 보장도 없으니….
아니, 어쨌든 그냥 궁금해서 그럴 뿐이다. 궁금해서!
“여관에 다녀올게요.”
“…알았어.”
내 시선이 그렇게 노골적이었나?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음에도 왠지 살짝 피하는 듯한 세레나의 모습에 이제 뚫어지게는 보지 말자고 반성하며, 나는 일기장을 덮는다.
왜 이런 걸 써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벤이 원래 어린 소녀는 일기를 쓰는 게 일반적이라고 하니까, 매일 쓰고 있을 뿐.
하지만 벤의 말대로라면, 그 사내는 왜 내 일기장을 안 보는 걸까.
소녀가 일기를 써서 숨겨 놓으면 몰래 찾아서 훔쳐보는 법이라고 해서 일부러 책상에 두고 나가기도 했는데 아예 내 방에 들르지도 않는다.
일기장을 숨겨 놓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직접 일기장을 가져다주길 바라는 걸까?
“갈 데가 있다.”
“……!”
한없이 무뚝뚝한 한 줄기 음성에 나는 반사적으로 일기장을 덮었다.
그리고 아무런 기척도 없이 뒤에서 나타난, 배려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는 사내를 돌아보았다.
이 사내는 언제부터 내 뒤에 있던 거지?
설마, 내 일기를 보고 있던 걸까?
“뭔가 하는 일이 있나?”
“…아니…요.”
“그럼 마을에 갈 준비를 해 둬라.”
그 차가운 시선이 식탁을 향하자, 나는 무심코 일기장을 등 뒤에 감췄다.
그리고 할 말만 하고 가 버린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일기장을 본 건 아니구나.
놀라서 두근거리던 마음이 가라앉자, 일기장을 정리하고 외출 준비를 마쳤다.
언뜻 보이기만 해도 이렇게 긴장되는데 다른 인간 소녀들은 일기장을 써서 그걸 남에게 보여 주며 사는 걸까?
인간 소녀의 심장은 철로 돼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깊이 넣어 둔 채, 나는 사내를 따라 마을로 향했다.
“잠시 기다리거라.”
“알았어…요.”
마을 중심의 광장에 나를 남겨 둔 채, 한편에 있는 방랑 상인에게 다가가 뭔가를 꺼내는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살짝 고개를 기웃거렸다.
뭔가 팔려고 하는 건가?
사내가 뭘 하려는 것인지 고민하길 잠시.
그렇게 상념에 잠겨 있던 도중, 나는 어느새 사내 앞에 한 인물이 나타나 있음을 깨달았다.
하늘색 머리와 깨끗한 백색 경장.
거기에 커다란 눈과 멍한 표정을 가진 요정처럼 순수해 보이는 여인의 모습에, 나는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저 암컷은?
물론 저 인간 암컷이 누군지는 나도 안다.
벤이 추가로 고용한 여급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즐겁게 손짓까지 해 가며 사내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왠지 불쾌감이 뭉클뭉클 샘솟는다.
…왠지, 마음에 안 들어.
사내와 친한 사이라고 과시하는 듯한 인간 암컷의 그 자연스러운 태도에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던 그 불쾌감은 암컷이 사내를 끌어안는 순간, 폭발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저, 저 천박한 암컷 같으니…!
연인이나 가족이라면 모르까.
낯선 남자를 아무 데서나 끌어안다니.
저 암컷은 부끄러움도 모르는 건가?
내 사나운 시선을 느낀 듯, 암컷은 사내를 끌어안은 채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내가 몸을 굳힌 순간, 인간 암컷은 어느새 내게 시선을 거두고 순수한 얼굴로 사내에게 떨어져 있었다.
사내에게 인사를 하고 골목길 사이로 사라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주먹을 편 나는, 찰나지간 내가 본 것을 되새겨 보았다.
허공을 보는 것처럼 공허한 눈빛과 아예 감정 자체가 없는 것처럼 무표정하던 얼굴.
…그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돌아가자.”
암컷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나는, 어느새 다가온 사내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아무것도 안 하고 돌아가겠다니.
그럼 대체 왜 마을에 온 거지?
“벌써…요?”
“일이 생겼다.”
무뚝뚝한 말과 함께, 사내는 대뜸 내 손을 잡았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랄 틈도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사내에게 이끌려, 외딴 골목으로 들어가며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왜지?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지?
평소와 똑같이 무뚝뚝한 태도였지만, 빠른 걸음과 갑작스러운 행동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묻어나는 것은 조급함.
무엇이 이 사내를 조급하게 하는 걸까.
혹시, 그 암컷과 나눈 얘기 때문일까?
사내를 따라가며 생각을 정리하던 도중.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나는 그 등에 살짝 부딪히고 말았다.
무심코 뒤에서 끌어안는 것처럼 된 탓에 반사적으로 후다닥 물러나려던 나는, 곧장 사내에게 양어깨를 붙잡힌 채, 그 차가운 눈을 코앞에서 마주해야 했다.
두근.
갑자기 다가온 얼굴에 심장이 요동친다.
분명, 놀라서 이러는 거다.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면 놀라잖아, 보통? 응? 그렇지?
뭔가 억지스럽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는 내게, 그는 나지막이 말해 온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기다리라고…요?”
“그래. 기다려라.”
나지막한, 그러나 더없이 또렷한 음성.
그 무뚝뚝함에 숨겨진 희미한 감정에, 나는 숨을 죽인다.
뭐지, 이 느낌은?
언젠가 느껴 본 적 있지만 다시는 겪기 싫은 꺼림칙한 느낌.
그 순간, 나의 눈앞에서 몸을 일으켜 등을 돌리는 사내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과거의 기억과 겹쳐졌다.
‘제가 그를 막아 보겠습니다.’
‘내가 나서야 해.’
‘당신께선 저희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부디 무사히 살아남아, 저희의 꿈을 이뤄 주십시오.’
“가지 마.”
그 옷자락을 붙잡는 것은 단지 본능.
이유 따위는 모른다.
다만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되어 가슴에 박힌 기억이 나를 움직일 뿐이다.
“같이… 있어 줘.”
유치하고 어리광이나 다름없는 행동.
그런데도 수치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당장 이 불안감을 떨쳐 내고 싶기에.
그런 나의 손을, 그는 조용히 잡아 주었다.
“반드시 돌아오겠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아….”
천천히 손을 떼어 내고 골목 저편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나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왕국이 무너지고 나의 꿈이 깨져 나가던 절망과 후회의 날처럼.
안 돼. 가면 안 돼.
그렇게 가지 마.
겨우 나 같은 것 때문에, 나를 지키기 위해 죽으러 가지 마.
…제발, 날 혼자 남겨 두지 마….
우르릉―!
천둥소리가 하늘을 울리는 가운데.
나는 골목 구석에 웅크려 앉은 채, 기다리며 기원했다.
그 무표정한 사내가 돌아와 내 손을 잡고 집으로 데려가 주기를.
다시 그 불만스럽지만 평화로운 나날로 되돌아갈 수 있기를.
하지만….
저벅.
그 기다림은 배신당한다.
저벅.
그 기원은 깨어져 나간다.
저벅.
저편에서 걸어 나온, 새하얀 인물에 의해.
“……!”
숨이 막혀 온다.
그 몸을 감싼 눈처럼 하얀 신관복과 후드 속에서 차갑게 빛나는 눈동자가 나의 심장을 옥죄여 온다.
“아리트리스 D. S. 악에서 태어난 마의 일족이여. 신의 뜻에 따라 이제 그대를 정화하겠소.”
그 한없이 냉혹하고 엄숙한 음성에, 터질 듯 조여들던 가슴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치솟아 오른다.
정화…하겠다고?
그날 못 마친 일을 마저 끝맺겠다고?
“빙설관 레닌―!!!”
꿈의 왕국을 무너트리고 왕국의 꿈을 깨부쉈던 원수의 모습에 일어나는 것은 격렬한 분노.
그 분노마저 넘어선 진득한 증오를 타고 농밀한 마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가운데, 순백의 인영이 나를 향해 미끄러져 온다.
주문을 외울 여유를 베는 쾌속한 선공.
하지만 네놈을 상대로, 주문을 외울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어!
우웅―!
가속화한 마력을 전신으로 방출하자, 마력이 공간이 일그러트려 벽을 이룬다.
마력장벽(魔力障壁).
오직 마술사만이 펼칠 수 있으며, 그 방어력은 성벽과 비견된다는 비술.
엄청난 마력을 소비하기에 마술사라 할지라도 장시간 유지할 수는 없지만, 유지되는 동안만큼은 절대에 가깝다는 방어술.
그 위로 하나의 주먹이 떨어져 내린다.
쿠웅―!
투석기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일격에 마력 장벽을 뒤흔드는 충격, 그러나 동요할 틈 따위는 없다.
흔들리는 마력을 다잡으며 일념을 모아 주문을 영창한다.
“세이너스여, 그대의 바람으로 나를 감싸 올리라.”
사방의 바람이 모여 내 몸을 허공으로 띄워 올린다.
약 20여 미터쯤 되는 높이에서 자연스럽게 멈춰 서서 마력을 조절한다.
마력 장벽과 부유 주문을 함께 유지한 상태로 시작되는 주문의 영창.
그때는 불가능했던 일이지만, 지금의 나는 그날과 다르다!
“강대한 폭염의 지배자 아크넬이여, 나 그대의 혼을 지닌 자, 그대의 힘을 원하는 자, 그대의 힘을 지배하는 자이니, 내가 원하는 것은 지옥 궁에 박힌 3번째 기둥. 용의 불꽃을 머금은 지옥의 옥좌. 악의 영광을 새겨 넣은 9개의 비석 중 하나이니, 나 그대의 봉인을 풀어 지상에 아르넬의 염주를 불러내리라!”
도도히 흘러나온 마력이 주문에 따라 ‘법’을 이루고.
현세의 법칙을 초월하는 ‘술’에 이르며.
놈을 중심으로 직경 10m에 달하는 화염의 마법진을 그려 낸다.
“겨울의 바람은 모든 악을 잠재울지니.”
화염의 진에 갇힌 상태로도 동요하지 않고 기도문을 암송하는 놈.
내 마법은 경계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 그 담담한 태도에 분노가 들끓지만, 결코 흥분하지는 않는다.
다만 분노조차 마력에 더해, 주문을 끝맺을 뿐!
“일어나라, 아르넬의 염주여!”
쿠과광―!
이글거리던 마법진에서 빛이 폭발하며 땅에서 치솟은 거대한 폭염의 기둥이 놈을 집어삼키고 하늘까지 치솟는다.
그것은 지옥의 밑바닥에 세워진 9개의 기둥 중 하나.
세상의 모든 업보와 죄악을 새겨 넣어 지옥 궁을 이루고 지옥을 지탱하는 뼈대이자, 99악마 중에서도 가장 강대한 힘을 지닌 아홉 대악마의 권위를 상징하는 옥좌.
비록 최소급 마술이라 할지라도, 그 옥좌에 앉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분노하는 화염의 지배자 아크넬뿐.
같은 악마라 할지라도 범접키 힘든 저 염주를 견뎌 낼 수 있는 것은 신화시대의 용이나 천상의 신뿐이다.
하지만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놈은 용도 신도 아니지만, 그 ‘힘’만큼은 가지고 있는 자니까.
퍼엉―!
화염의 기둥을 산산이 터트리며 그 속에서 튀어나온 하얀 인영을 향해, 나는 준비한 주문을 영창한다.
“강대한 폭염의 지배자 아크넬이여, 위대한 폭풍의 지배자 세이너스여, 그대들은 지옥의 권좌를 잃고 지상에 봉인된 죄인이니, 그 분노는 용의 비늘조차 녹이고 그 절망은 용의 날개조차 꺾어 내리라. 나 그대의 분노를 지닌 자, 그대의 절망을 이해하는 자, 그대들의 마음을 풀어내는 자로서 그 분노와 절망을 한데 모아 파멸로 빚어내리라!”
우우웅―!
왼손에 떠오르는 것은 붉은 화염.
오른손에 맺히는 것은 푸른 바람.
이것은 아크넬의 분노이고 세이너스의 절망.
악마의 감정을 힘으로 빚어내는, 마도 사상 유례가 없는 새로운 마법.
그리고 또 하나.
펼쳤던 양손을 가슴 앞에 맞대 두 마법을 모은다.
다른 마력으로 이뤄진 마법이 반발하며, 날뛰려는 것을 제어하며 하나로 합친다.
언젠가 그가 보여 주었던 그 도해.
비록 그것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일부만으로도 내가 얻은 것은 결코 적지 않다.
악마의 감정을 이용하는 기법.
마력을 융합하는 기술.
그리고 바로 이것.
“이룰 수 없는 분노. 이루지 못할 절망. 둘은 하나 되어 진정한 나락으로 거듭날지니, 이로써 신조차 끝을 모르고 악마조차 위치를 모르는 드라고이드의 계곡은 펼쳐지리라.”
허공을 찢어발기는 균열과 함께 나타난 ‘그것’은 신화 속에서조차 전설.
신과 악마의 십억 팔천만 군대를 삼키고, 신과 악마조차 접근치 못하게 했다는, 용이 잠든 계곡.
이미 주문으로 완성된 마법을 또 주문으로 가공헤 창세 이래 처음 나타난 절대적인 나락은, 허공을 찢어발기는 균열이 되어 놈의 육신을 집어삼켰다.
우우웅―!
성공이다.
놈을 집어삼키고 아무는 구멍을 보며, 나는 웃었다.
드라고이드의 계곡은 신화로 전해지는 신과 악마의 눈조차 닿지 않는 나락.
설령 신의 힘을 대행하는 신관 전사라도 한 번 그곳에 빠진 이상, 더 이상 신의 힘 따위는 사용할 수 없다.
신의 힘이 없는 놈은 단련된 인간일 뿐.
수명을 다해 육신이 먼지가 되더라도 드라고이드의 계곡을 나오지 못할 테고, 그 영혼조차 세상이 멸할 그날까지, 나락을 헤매며 고통받을 것이다.
…드디어, 끝났다.
로드 오브 킹덤의 복수를 마쳤다.
그런데도 나는, 왜 이렇게 허무한 걸까…?
파직.
허무감에 잠겨 있던 도중.
나는 이변을 감지했다.
마력을 거둬 이미 사라졌어야 할 균열.
그것이 아직 남은 채, 다시 벌어지는 모습이 나를 동요케 한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십억 팔천만 군대조차 삼켜 버린 나락.
신의 힘조차 닿지 않는 그 마역에서 인간이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더없이 이성적인 판단,
그러나 나의 본능은, 마력 장벽을 더 두껍게 하고 있었다.
파강―!
공간이 깨져지며 허공에 생겨난 틈.
그 속에서 솟아나듯이 튀어나온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인영의 모습이, 나를 굳어지게 한다.
막아야 한다.
공격해야 한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신의 힘조차 빌리지 않고.
오로지 순수한 육체의 힘만으로.
드라고이드의 계곡에서 기어 나온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 쏘아져 오는 것을, 나는 다만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신의 뜻은 삼라만상에 이르니, 천지 만물 중 닿지 않는 곳 없도다.”
짧은 기도문에 의해 뒤흔들리는 마력.
그렇게 약화된 마력의 성벽 위로, 한 치의 자비도 없는 주먹이 몰아닥친다.
“눈보라.”
쿠과과과광―!
대체 몇 번이나 격타당한 걸까.
연달아 터져 나온 폭음과 함께 마력 장벽이 유리처럼 깨져 나가며, 내 몸이 추락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
콰지직!
낡은 마구간의 지붕을 부수고 땅에 떨어진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왼팔과 옆구리에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
마력을 방출해 충격을 줄이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안 돼.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다.
복수조차 못 한 채 놈에게 죽는다면, 나를 위해 희생한 수하들을 무슨 낯으로 볼 수 있을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복수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격렬한 분노와 더불어 목을 조여 오는 목이 타는 갈증을 나는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순순히 받아들이며, 그 흐름에 몸을 맡긴다.
히히힝―!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듯.
날뛰기 시작한 말의 목을 틀어쥔다.
굳이 힘으로 잡아 둘 필요도 없다.
단지 내가 드러낸 순수한 갈증의 욕망만으로도, 말은 석상처럼 굳어 버린다.
그것이 천적을 앞에 둔 사냥감의 숙명.
그렇게 사로잡은 사냥감의 목에, 나는 포식자로서 이빨을 박아 넣는다.
꿀꺽. 꿀꺽.
달콤한 비린내를 타고 흘러든 생명이 목을 넘어가며 마력으로 뒤바뀐다.
갈증 대신 느껴지는 것은 나른한 쾌감.
다른 무엇도 필요치 않은 황홀한 감각이 마력을 따라 전신을 휩쓸며, 옆구리와 팔의 통증이 사라진다.
아아, 그렇다.
이거야말로 부정할 수 없는 나의 본성.
피로써 힘을 얻고, 만족을 느끼는 마성.
하지만 상관없다.
늑대가 토끼를 사냥하는 것이 죄인가?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악인가?
인간과 싸우는 것이 마인가?
그렇다면 나는 죄악을 이루겠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마가 될 것이다.
로드 오브 킹덤의 마지막 군주였던 72주문을 지배하는 마왕으로서!
피를 모두 빤 말의 목에서 입을 떼고 놈을 상대할 새로운 주문을 외우기 위해.
감았던 눈을 뜬다.
그리고 그 순간.
나의 심장은 얼어붙었다.
활짝 열린 마구간의 입구에서 더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그 사내의 눈동자를 마주 보며, 나는 한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절망과 후회라는 이름의 나락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