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being mistaken for a soccer genius RAW novel - Chapter (103)
103. 쉬운 건 없어요 -2
결국 딱 한 잔만 하겠다던 사포나라 선배의 다짐은 지켜지지 않았다.
당연히 예상한 결과라 놀라거나 실망하지는 않았다만, 감독님께도 이 비밀을 지켜야 할지에 대해선 생각이 점점 바뀌고 있다.
선배가 입을 열 때마다 풍기는 알싸한 냄새만으로도 머리가 어질어질한 기분이라··· 지우의 두 뺨이 조금 빨개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닐 수도 있을 거다.
“쉬운 게 없어··· 그래. 우리 막둥이 말대로 쉬운 게 없지···”
미개봉 상태였던 와인병도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예뻐서 건드리기도 무섭던 접시들이 설거지거리가 되는 동안.
선배는 내내 우리 팀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답답한 경기력으로 팀내 분위기가 최악이던 시절부터 시작해서.
선수들 때문에 욕을 먹는 감독님을 보면서 자기가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그런 상황에서도 출전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던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듣기만 해도 눈물이 찔끔 나오는 얘기를 늘어놓던 선배는, 나라는 구세주가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며 ‘일방적으로 주장’했다.
세상 물정 아무것도 모르게 생긴 이 꼬맹이가 충격의 데뷔전을 치르는 모습을 보면서, 한때 리그 최고의 유망주라 불렸던 자신의 옛 시절이 떠올랐다는 얘기부터 또 시작해서.
어마어마한 재능을 가졌음에도 누구보다 간절히 노력하는 내 모습에 큰 자극을 받았다는 둥.
막내가 제일 열심히니 선배들도 모범을 보이기 위해 피똥 싸는 노력을 했다는 둥.
블라호비치가 나가고 처음 선발 출전한 경기에서 나와의 호흡이 꽤 괜찮다는 걸 느꼈을 때, 자기도 아직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서 얼마나 울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너무 구구절절해서 과장 좀 하지 말라고 태클을 걸기도 어렵더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와인을 홀짝이고 한 잔씩 더 따르는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
“아무튼 말이야··· 너는 그것만 알아 둬. 너는 나한테 은인이야, 은인.”
“···취했어요.”
“짜샤. 이런 걸 취중진담이라고 하는 거야. 취중진담.”
“알겠으니까, 그만 따라요.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면 감독님께 이를 거예요.”
“에헤이, 거 참. 알았다. 우리 막내가 하는 말이라면 받들어 모셔야지. 충성!”
···어휴.
그 말을 끝으로 선배는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다더니 자취를 감추더라.
안드레아는 원래 저런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아무튼, 저 사람이 저렇게 고마워하니 나도 고마워요. 한 가족을 살린 거라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요.”
“···예.”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느껴진다만, 부담스럽게 왜들 이러시는지 모르겠다.
문득 반대편의 로메로가 떠올라 조금 미안해진다.
앞으로 사포나라 선배와 로메로에게 동시에 기회가 열렸을 때, 나도 모르게 사포나라 선배 쪽으로 패스가 향할 것 같은데.
으음.
그런 상황이 오면 차라리 나 혼자 해야 하나.
찝찝함을 남기지 않으려면 말이다.
“우웅···”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 거실에서 잠에 덜 깬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포나라 선배라기엔 너무 어린애 목소리라 고개를 돌렸더니, 안드레아와 똑같은 금발 머리의 꼬맹이가 눈을 비비고 있었다.
꼬맹이는 열심히 눈을 비비다가··· 날 보더니 잠이 확 달아난 듯 눈이 커졌다.
“lo zio (삼촌)!”
그러더니 내게 총총 달려와 품에 안기는 것이 아닌가.
조금 당황해 안드레아를 쳐다보니, 안드레아는 받아주라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팬이에요. 아빠보다 더 좋아해.”
그에 조심스럽게 어깨를 두드려주니, 사포나라 주니어는 별이 박힌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리고는 미취학 아동만이 할 수 있는 천진난만한, 그래서 당황스러운 말을 꺼내고야 만다.
“삼촌! 우리 아빠 골 넣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근데, 근데 우리 아빠는 왜 삼촌처럼 못해?”
“···응?”
“우리 아빠는 축구 못해!”
그 말에 안드레아는 빵 터져 버리고, 지우는 못 알아들은 건지 어색한 미소를 짓고, 나는 당황한 나머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하나 갈팡질팡했다.
“아빠는 열심히 안 해서 그래?”
그저 우물대고 있으니 재차 질문이 들어온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 고개를 숙여 사포나라 주니어와 눈높이를 맞춘 뒤 말했다.
“아니. 아빠는 열심히 하시지. 엄청 열심히.”
“그래? 근데 왜 삼촌처럼 못해?”
“아니야. 아빠가 삼촌보다 훨씬 잘해. 그러니까 아빠한테 공을 양보한 거지. 더 잘하는 사람이 골을 넣어야 하니까.”
나름 재치있게 설명했다 싶건만, 사포나라 주니어는 못 믿겠다는 듯 볼을 부풀릴 뿐이다.
마치 나도 축구 볼 줄 안다고 말하는 얼굴이라 자꾸 헛기침이 나오려 했다.
“근데 아빠는 열심히 안 해.”
“···왜 그렇게 생각해?”
“맨날 집에 일찍 와. 집에 와서 우리랑 놀아. 하나도 안 힘들어 보여. 연습 열심히 했으면 힘들어야지.”
···가끔 놀라는 거지만, 여기 애들은 말을 엄청 잘한다.
완벽한 논리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통에 언뜻 말문이 막히나, 나는 나름 공격수기에 돌파구를 찾는다.
“아니야. 안 힘든 척하는 거야.”
“왜?”
“힘들어 보이면 걱정할 거잖아. 아빠가 맨날 지쳐있으면 걱정 안 할 거야?”
“···할 거야.”
“그러니까 안 힘든 척하는 거지. 나는 같이 훈련하니까 알잖아. 아빠, 훈련장에선 엄청 열심히 훈련해. 왜 그렇게 열심히 훈련하는 줄 알아?”
“왜?”
“너한테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포나라 주니어의 양 어깨에 손을 얹고 말하자, 주니어는 그럼에도 의심을 감추지 못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내게 묻는다.
“그럼 삼촌은?”
“···나?”
“삼촌은 뭐 때문에 열심히 해? 아빠가 그랬어. 삼촌이 제일 열심히 한 대. 삼촌은 뭐 때문에 열심히 해?”
···음.
그 순수한 질문에 거짓말로 답할 수도 없고.
나는 지우의 이탈리아어 듣기 실력이 아직 원어민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길 바라며 대답했다.
“나도 똑같아. 누군가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게 누구야?”
“음···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
“고마워서 열심히 해?”
“응. 맞아.”
그렇게 말하며 웃었더니, 사포나라 주니어가 내 품에 와락 안기며 말한다.
“그럼 나 때문이네! 나 아빠보다 삼촌을 더 응원해!”
···음.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
“조심히 들어가. 내일 보자고.”
“네.”
“안녕히 계세요!”
“거, 와인 한잔 정도 한 거 가지고 감독님한테 말하면 안 된다.”
“···그건 생각 좀 해볼게요.”
뒤늦게 깨어 마중을 나온 선배와 안드레아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준다.
들어가라는 데도 한참이나 손을 흔들던 둘은, 제법 멀어졌을 때가 돼서야 서로 어깨동무를 하더니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 쪽쪽 소리가 들려온다.
참, 끝까지.
“두 분 되게 행복해 보이신다. 그치? 애기들도 진짜 예쁘고.”
그 모습을 보며 웃다가 묻는 지우의 물음에 입을 내밀곤 고개를 끄덕인다.
행복해도 너무 행복해 보였지.
그래도 미성년자 앞에선 좀 자제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무리 사랑 표현에 거리낌이 없는 나라라지만,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곤란했단 말이다.
가뜩이나 옆에 지우도 있어서 헛기침만 수차례를 했다.
···지우는 안 보는 척하면서 다 보더라.
“야. 너도 쓸 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잘 배워둬.”
“···뭘?”
“저 선배님이 와이프한테 어떻게 했는지 말야. 완전 스윗하잖아. 항상 사랑받는 느낌을 주니까 당연히 행복하시겠지.”
무척 뜬금없는 소리에 미간을 찡그리며 지우를 쳐다본다.
“뭘 저런 걸 배워.”
“야, 그래야 나중에 행복한 결혼 생활할 수 있는 거야. 사랑 표현은 자주, 확실하게. 오케이?”
···헛웃음이 나온다.
“네가 알면 뭘 안다고 아는 척이냐.”
“이거 우리 아빠가 해준 말인데? 지금 우리 아빠 비웃은 거임?”
“······그게 아니라. 널···”
“날 비웃은 거면 우리 아빠를 비웃은 거나 똑같은 건데?”
“···.”
···부모님 소환은 반칙이잖아.
치사한 공격에 말문이 막히자 지우가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키며 까르르 웃는다.
그러다가, 지우는 어깨가 귀에 닿을 것처럼 한껏 저녁 공기를 들이키더니 말했다.
“아아, 갑자기 엄마 아빠 보구 싶다. 이래서 언니들도 빨리 결혼하려고 하는 건가 봐.”
그리곤 이내 날 흘끔 보곤 묻는다.
“넌 빨리 안 하고 싶어?”
“뭘?”
“뭘 뭐야. 결혼 말이야.”
···뜬금없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대답한다.
“별로.”
“왜?”
“···나도 아빠 때문에.”
“······야, 야.”
회심의 일격에 지우의 표정이 요상해진다.
“부모님 소환은 반칙이잖아.”
“네가 먼저 했거든.”
“···미안.”
“됐어. 미안하긴 무슨.”
안절부절못하는 지우를 보며 피식 웃고 만다.
복수 성공이다.
아무튼, 예전에도 한 번 선배들과 얘기한 적 있는 것 같은데.
뭐 얼마 안 지나긴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 생각은 변함없다.
딱히 뭐······
“그래도, 저렇게 행복하게 살 수도 있는 거잖아.”
“아닐 수도 있지.”
“행복할 수도 있지!”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아닐 수도 있고.”
“치. 고집은. 너랑 결혼할 사람은 고생 좀 하겠다. 너한테 맞춰주느라.”
“그래서 말했잖아. 별로 생각 없다고.”
너무 틱틱 대면서 말했나.
내 말에 지우가 화가 난 듯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말이 안 통한다는 듯.
그에 나는 왠지 모르게 한마디를 덧붙인다.
“뭐··· 나중엔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
“아니. 바뀌지 마. 평생 혼자 살아.”
“···혼자는 아니고 아빠랑 살 건데.”
“그래, 그래. 아버··· 아저씨랑 같이 평생 행복하게 잘 살라구.”
···얜 왜 또 화가 난 거야.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 좋아 보였는데.
이래서 세상이 어렵다는 거다.
쉬운 게 없다.
쉬운 게.
뭐, 어쨌거나···
지우의 말대로 사포나라 선배는 정말 행복해 보이긴 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언젠간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들더라.
뭐, 세상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니까.
나만 해도 내가 지금 이렇게 될 줄 불과 몇 개월 전까진 몰랐었잖아.
그런 거지, 뭐···.
ㆍㆍㆍ
“정확히 22년 전이야. 22년 전이면 내가 총각일 때네. 그때가 좋았지. 그때가···”
형형색색의 과일을 종이봉투에 골라 담는 중, 오늘도 어김없이 과일 가게 아저씨는 출입구에 서서 밖을 바라보며 옛날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이미 4강 2차전 때의 내 플레이에 대한 호들갑을 늘어놓은 이후다.
“하여간, 시간이 이렇게 흘렀어. 대통령이 3번 바뀌는 동안 우승을 못 해봤다니. 7공주라 불리던 시절이 좋았는데 말야.”
옛날이야기 하기 좋아하는 거야 우리 아빠부터 시작해서 모든 아저씨들의 공통점이라지만.
이곳 피렌체의 아저씨들은 특히나 더 그런 것 같다.
아마도 한때, 그러니까 세리에가 세계 최고의 리그이던 시절.
그 세리에에서도 손꼽히는 강팀이던 시절이 피오렌티나에게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피오렌티나가 한창 잘 나갈 때, 그때 나도 참 잘 나갔었는데.”
그 시절이라는 게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이긴 하지만, 아저씨에게 하도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땐 나도 배불뚝이 아저씨가 아니었단다. 서른 살까지 80kg을 넘어본 적이 없었다고. 휘파람 한번 불면 지나가던 모든 여자들이 날 쳐다봤었지.”
뒷짐을 진 채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듯 얘기하는 아저씨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다만 어딘가, 행복한 느낌의 미소라기보단 슬픈 느낌이 드는 미소다.
저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아련하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네. 이 동네 과일 가게 주인장에게도 전성기라는 게 있었거든. 우리 팀도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 나도 머리숱이 빽빽했던 시절 말이야.”
추억을 더듬다 보니 그 시절로 돌아간 걸까, 한참이나 미소를 지으며 서 있던 아저씨는 잠시 후 돌아서더니 다시 과일 가게 아저씨로 돌아오셨다.
“아이쿠, 내 정신 좀 봐. 미안하다. 계산해줄게.”
한때 휘파람 한 번이면 모든 여자들이 쳐다봤다던 아저씨가 출렁출렁 뛰어와 종이봉투를 저울 위에 올려놓는다.
문득··· 경기장을 찾는 팬들 중 유독 아저씨와 비슷한 나이의 팬들이 많은 이유가 그런 이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젊은 시절.
그 시절 자신과 함께 전성기를 누렸던 피오렌티나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건 아닐까.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지만, 이 과일 가게 아저씨도 틈만 나면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자, 오늘도 열심히 하라구.”
“네.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울에 올릴 때보다 한층 더 무거워진 종이봉투를 건네받는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곤 가게를 나오다,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 한 번 더 인사했다.
“그때 들었던 우승컵, 다시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그러자 문 앞까지 마중을 나오던 아저씨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보는데, 문득 아저씨가 했던 이야기들이 마냥 허풍은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환한 미소에서 언뜻 아저씨의 젊은 시절이 보였고, 저런 미소라면 확실히 인기가 없진 않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시즌도 어느덧 다섯 경기밖에 남지 않았다.
리그 경기 4경기.
그리고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 한 경기.
앞으로 남은 경기들의 결과가 어떻든, 과일 가게 아저씨처럼 훗날 돌아봤을 때.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난 1년은 지금일 가능성이 무척 높을 거다.
그렇기에, 잘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왕이면··· 찬란하게 빛나는 기억만 남기고 싶은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