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being mistaken for a soccer genius RAW novel - Chapter (154)
파리 시내에 위치한 5성급 호텔의 고층 스위트 룸.
깔끔한 현대식 침구류와 프랑스 전통인지 뭔지 모를 난해한 인테리어가 퍽 잘 어우러지는 방에 앉아.
기껏 세심하게 구성한 인테리어가 무색하게, 불을 다 꺼놓은 채 창밖을 내려다본다.
“···”
경기 전엔 딱히 감흥이 없었건만, 이제야 시내 전경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온다.
뭐, 그래 봤자 늦은 밤이라.
띄엄띄엄 불이 밝혀져 있을 뿐 전체적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모습이라 크게 보이는 건 없다.
서울의 밤에 비하면, 파리라는 이름값이 아까울 만큼 시골에 가까운 풍경.
하지만 그래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내겐 화려한 도시보단 차분하고 조용한 도시가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호텔과 경기장만 오갔을 뿐인 나인지라, 지금 보는 이 풍경이 파리의 전부는 아닐 테고.
충분히 화려한 모습이 어딘가엔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내가 바라보는 것이 곧 전부가 아니던가. 그러니 내게 파리는 차분하고 적막한 도시인 것이다.
···음.
문득 오해와 편견이라는 건 그래서 생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같은 파리를 보더라도 앞면만 본 사람과 뒷면만 본 사람의 파리는 전혀 다른 도시일 테니.
···밤이 되어 혼자 어둠 속에 앉아 있으려니 감수성이 폭발하는 것일까.
별생각이 다 든다.
어쨌거나 결론은, 사람들로 가득하던 경기장에서 빠져나와 갖는 지금 이 혼자만의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바쁘고, 시간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도.
24시간이라는 하루의 시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 아닐까 싶다.
살면서 가장 바쁘다고 느끼는 지금 같은 와중에도 이렇게 충분히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나는 걸 보면 말이다.
결국은, 내 하기 나름이 아닐까.
딸깍-!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중. 들려오는 기계음에 일어나 테이블로 향한다.
커피포트에 물을 받아 끓여두고 있었는데,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물을 옆에 세팅해 두었던 잔에 따라 담는다.
그러자 진하면서도 구수한 향기가 올라온다.
그 잔을 들고 다시 침대맡에 앉아 향을 음미한다.
으음.
역시 좋은 호텔이라 그런지 인스턴트 커피긴 해도 냄새가 나쁘지 않은 것이, 꽤 고급 브랜드의 커피가 아닐까 싶다.
···사실 커피에 대해선 쥐뿔도 모르고 평소엔 입에도 안 댄다만.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잖아.
나도 이탈리아에서 삼 년 이상은 있었으니까, 나 정도면 냄새만으로도 좋은 커피인지 나쁜 커피인지 구분할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이건 좋은 커피가 분명하다.
후루룹, 후후 불어 조심스럽게 한 모금 적셔본다.
“······으엑.”
아으, 쓰다.
좋은 커피는 개뿔, 최악의 커피였네.
단맛이라곤 하나도 안 느껴지는 것이··· 거의 사약 맛에 가까운데, 이거.
괜히 잘 아는 척 구수하다고 하긴 했지만, 사실 씁쓸한 냄새가 나는 것부터 좀 불안하더라니.
왠지 모르게 방에서 어른 남자의 분위기가 풍기길래 한잔 해보려고 시도한 건데, 이 맛을 알기에 아직 멀었나 보다.
오만 상을 다 찌푸리며 기껏 탄 커피를 다시 테이블에 갖다 둔다.
···입 버렸네.
대체 어른들은 이 쓴 물이 뭐가 맛있다고 매일 그렇게 몇 잔씩을 마시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루카 코치님께서 그런 말을 하셨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수록 더 진한 커피를 찾게 되는 이유는, 살면서 맛본 인생의 쓴맛에 비하면 커피의 쓴맛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라고.
그쯤 되면 아무리 진한 에스프레소도 달게 느껴진다고 말이다.
대체 얼마나 쓴맛을 봐야 저게 달게 느껴질 수 있는 건진 모르겠다만.
어쨌든 난 아직 인생의 쓴맛을 보지 못했나 보다.
그럼 어른들은 훨씬 고생 고생을 하며 비로소 어른이 된 걸까.
앞으론 더 징징대면 안 되겠네.
특히 소주잔 만한 크기의 잔에 커피를 마시는 사람 앞에서는.
“쭙,”
쓴 기운을 없애기 위해 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 다시 침대에 앉는다.
역시 커피보단 사탕이 내게 맞는 것 같다.
그렇게 사탕을 쪽쪽 빨며, 커피만큼이나 시커먼 창밖을 다시금 바라보며 고요에 잠긴다.
그러고 있기를 몇 분여.
“···”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참을성이 없긴 없는 것 같은 게.
조용히 혼자 있는 이 시간이 소중하다고 한 게 방금 전이거늘.
조금 있다 보니 또 내심 심심해지기도 하고, 조금은 외로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경기장에 있을 때나 왁자지껄한 선배들과 함께 있을 땐 혼자 조용히 있고 싶었는데.
막상 혼자 조용히 있으니 좋은 건 잠시고 활기차고 떠들썩한 분위기가 그립다.
이래서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는 말이 있는 게 아닐까.
속기가 너무 쉬우니, 속지 말자는 말이 있는 거겠지.
뭐··· 원래 소중하다는 건 귀하다는 거고, 귀하다는 건 흔치 않다는 건데.
그게 내 손 안에 들어오면, 그게 아무리 흔치 않은 거라 해도 나에게만큼은 흔한 게 되어버리는 거니까.
그래서 속아버리는 게 아닐까 싶다.
나도 속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날 불러주고, 날 찾는다는 건 말도 안 되게 감사한 일인 게 분명한데.
감사한 줄도 모르고 힘들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까.
이제부터라도, 다시 깨어나자.
힘듦에도 종류가 있는데, 지금의 힘듦은 감사한 힘듦이다.
“쭙.”
어느새 입안을 달콤하게 해주던 사탕도 다 녹아 없어져 버리고.
다른 맛으로 하나 더 먹어볼까 하다가 이내 관둔다.
설탕 덩어리를 몸에 집어넣어 봐야 좋을 게 없다.
슬슬, 잠이나 자야지.
내일 또 비행기를 타야 하니까.
그대로 침대에 눕고 싶은 충동이 강렬하게 일어나지만, 아빠가 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양치를 한 뒤 침대에 눕는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잠을 청해보는데, 나는 다시금 쓰디쓴 커피를 원망하고 만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 탓이었다.
고작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효과가 이렇게도 좋단 말이야?
“···”
말똥말똥한 눈이 감길 생각을 하지 않아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려보지만, 지우도 일찍 잔다고 해서 딱히 할 것도 없고.
문득 외로움이 밀려와 다시 몸을 일으켜 옷을 챙겨 입는다.
이대론 도저히 잠이 안 올 것 같아 러닝이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마음 같아선 밤공기를 맞으면서 동네 한 바퀴 뛰고 싶지만, 호텔 밖으로 나가는 건 무단 외출이니까 헬스장 러닝머신으로 만족해야지.
그렇게 옷을 입고, 핸드폰과 룸 키를 챙겨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쾅쾅쾅-!
난데없이 들려온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흠칫 놀라고 만다.
이 시간에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혹시 방을 착각한 다른 방 손님일까.
괜히 하던 동작을 멈추고 숨을 죽인 채 인기척이 사라지길 기다리는데···
쾅쾅쾅-!
다시금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문 너머에서 들려온 건 익숙한 목소리들이었다.
“막내야. 안 자는 거 다 안다. 문 열어라.”
“형들 왔다. 방 좀 쓰자!”
“까까 사 왔으니까 문 좀 열어줘.”
···뭐야 이 사람들.
목소리나 말투만으로 동료들이란 걸 눈치채곤 문을 여니, 아뿔싸.
한두 명이 아니다.
“들어가자.”
“비켜, 비켜!”
“야, 불 좀 켜고 있지 이게 뭐야. 어둠의 자식이냐?”
문을 열자마자 막을 새도 없이 우르르 들어오는데, 나 참.
아니, 제멋대로 불 켜지 말고.
냉장고 열지 말고!
침대에 다이빙은 왜 하는데···
“막내야, 화장실 좀 쓸게. 아, 나온다.”
“···”
···다들 자기 방 놔두고 여기서 뭐 하는 건지.
어이가 없어서 할 말도 잊은 채 또라, 아니 선배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다들 낄낄대기 바쁘다.
“···괜찮으신 거예요?”
“응? 나? 괜찮아. 치료 잘 받았어.”
그 중엔 몇 시간 전 부상 때문에 실려 나갔던 테라차노도 있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더니 멀쩡하다는 듯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 처음 1군에 올라왔을 때만 해도 다들 그렇게 포스 넘칠 수가 없었는데.
다들 엄청 어른 같고, 위엄이 넘쳤었단 말이다.
근데 지금은 그냥··· 이게 동네 모자란 형들이지 뭐야.
옛날엔 무서워 보였던 저 팔의 문신들도, 이젠 자기들끼리 낄낄대며 한 낙서같이 보일 정도라니까.
“아니··· 그래서 다들 여기서 뭐 하세요?”
어쨌거나, 정신을 차리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리모컨을 손에 쥔 주장이 티비를 켜며 대답했다.
“조 추첨 다 같이 보러 왔지. 원래 조별예선 끝나면 바로 하거든.”
“막내야. 기도해라. 이왕 올라온 거 8강까지는 가야지.”
“채널 어디서 하는 거냐, 근데?”
···그거 보러 잠도 안 자고 쳐들어왔다는 건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테이블 근처에 앉았고, 여전히 냉장고를 뒤적거리고 있는 사포나라 선배에게 말했다.
“선배가 먹은 건 선배가 계산해야 돼요.”
“응? 치사해.”
치사하긴 뭐가 치사해.
아무튼, 때아니게 시끌벅적해진 탓에 정신이 없어 한숨이 나오면서도.
어느새 외로움은 저 멀리 달아난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좋은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축구선수가 되길 잘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아, 웃기지 마! 갈비뼈 아프다고!”
“···?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얼굴! 얼굴! 웃기게 생기지 말라고!”
“뒈질래?”
음.
좋은··· 친구들 맞겠지···?
*
2022/23시즌 챔피언스 리그 16강 조 추첨이 열리는 스위스 현지.
추첨을 위해 나선 양복 차림의 사내들이 각 포트 앞에 선 가운데.
챔피언스 리그 16강은 시드 팀, 즉 그룹 스테이지 1위 팀과 비 시드 팀, 그룹 스테이지 2위 팀들이 맞붙는 형태로 진행이 된다.
이번 시즌 각 그룹의 1위 팀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A조- SSC 나폴리
B조- FC 포르투
C조- FC 바이에른 뮌헨
D조- 토트넘 핫스퍼
E조- 첼시 FC
F조- 레알 마드리드 CF
G조- 맨체스터 시티 FC
H조- 파리 생제르망 FC
챔피언스 리그 규정상, 16강에선 같은 리그의 팀끼리, 같은 조에 속했던 팀끼리 만날 수 없다.
즉 피오렌티나로선 나폴리, 파리 생제르망을 제외한 나머지 팀들 중 한 팀과 만나게 될 거라는 이야기인데.
물론 1위로 올라온 팀들 전부 상대하기 싫은 팀이기는 하나, 그중에서도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팀들은 존재하기 마련.
분데스리가의 바이에른 뮌헨이나 라리가의 레알 마드리드, 그리고 프리미어 리그의 맨체스터 시티가 그러했다.
C조에 속했던 뮌헨은 바르셀로나, 인테르와 같은 조에 묶이며 꽤 만만치 않은 조에 속했다는 평을 받았으나.
그러한 평이 무색하게 6전 전승, 압도적인 파괴력을 보여주며 16강에 진출해 있는 상태였고.
디펜딩 챔피언이자, 어느덧 챔피언스 리그 하면 떠오르는 팀이 된 레알 마드리드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맨체스터 시티 역시 도저히 이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할 정도로 완성도 높은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피오렌티나는 물론, 다른 2위 진출 팀들 역시 저 셋만은 피해가길 바라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추첨이 시작되었다.
통 안에 든 공들 중 하나를 뽑아, 그 안에 적힌 팀의 이름이 대진표에 올라가는 전통적인 방식의 추첨.
그 공 돌리기가 시작되고, 가장 먼저 행운의 주인공이 된 팀은 프리메이라 리가의 벤피카였다.
– FC 바이에른 뮌헨 vs SL 벤피카
벤피카가 뮌헨이라는 폭탄을 끌어안으며 다른 팀들의 환호성을 이끌어낸 것.
이어선 곧바로 두 번째 폭탄의 주인공이 가려진다.
– 레알 마드리드 CF vs 리버풀 FC
그 주인공은 리버풀.
그러나 리버풀 역시 가장 만나기 싫은 비 시드 팀이었기에, 리버풀이 폭사하게 될지 아니면 폭탄 처리반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라.
결승급 대진이 16강에서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맨체스터 시티.”
시드 팀으로 맨체스터 시티가 호명되고, 그 옆자리의 주인공이자 마지막 행운의 주인공이 될 팀을 뽑는 지옥의 룰렛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이탈리아 세리에 A, 피오렌티나.”
안타깝게도 피오렌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