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74)
174화 – 해바라기(2)
망막이 불타는 것만 같은 찬란한 빛.
눈부신 섬광이 시야를 내찌른다.
콰아아앙!
물론 저 거대한 폭발에 비하면 빛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폭발로 인해 일어난 풍압만으로도 전신이 뭉개지는 것만 같은 압박감.
나는 라나와 엘리아를 등 뒤로한 채 날아드는 폭발을 견뎌냈다.
애초에 두 사람이 견딜 수 있을 만한 열기가 아니었다.
“이런 미친..”
다행히 빛은 곧 잦아들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보면 사막이 불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나마 아르카나를 하늘로 던진 것이 다행이었다.
폭발의 충격이 덜한 하부 쪽에 서 있어서 다행이지 자칫하다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다.
“..이제 도망칠 수는 있겠네.”
그러나 무사한 것은 지상 인근에 있는 것들 뿐이었다.
아르카나보다 위에 있었던 것들은 무엇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나는 마경을 둘러싸고 있던 폭풍이 잦아드는 것을 보았다.
아무래도 아르카나의 폭발에 정령이 말려든 것 같았다.
‘정령을 단숨에 역소환시키다니..’
솔직히 나로서는 기겁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나 먼 거리에서 일어난 폭발에 정령이 쓰러져 버리다니.
지금껏 내가 정령 하나를 쓰러트리기 위해 벌인 고생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나저나 이게 무슨 일이지?’
그러나 놀란 것과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분명 아르카나를 자극하고 있던 이브는 진작에 목숨을 잃어버린 거 아니었나?
그런데 왜 폭발이 일어난 거지? 설마 나 때문인가?
‘아니, 아니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들어보면, 하늘에는 거대한 태양이 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밝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빛의 정령이 탄생하며 생긴 부작용에 가까웠으니까.
애초에 지금은 기껏해야 새벽이 찾아왔을 시각이다.
태양이 떠 있을 만한 시간이 아니라는 거다.
“..설마.”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하나의 가설이 있었다.
만약 파라켈수스가 아르카나의 그릇을 찾아 헤맨 이유가 이것이었다면?
이브를 만들고도 부족해 수천 년간 실험을 거듭해 온 이유가 이것이었다면?
“내가 방아쇠를 당겨버렸다는 건가?”
파라켈수스는 이미 수천 년도 전에 아르카나를 담을 그릇을, 이브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파라켈수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무수한 인체실험을 감행해 왔다.
마법소녀 트윙클 다이아는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였다.
‘파라켈수스는 이브가 아르카나를 각성시킬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거야.’
나는 지금까지 그 이유가 이브의 몸이 아르카나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왔지만..
어쩌면 그냥 이브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인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아르카나의 각성은, 원래라면 이브가 이뤄내지 못할 기적이었다는 거다.
‘내가 개입하기 전에는 말이지.’
그런데 이런 걸 두고 운명의 장난이라 불러야 하는 것일까.
본래라면 결코 맞닿지 못했을 두 개의 퍼즐은 이 순간 하나의 조각이 되어 맞물리고 말았다.
내 안에 깃든 ‘태양의 가호’가 아르카나의 각성을 촉진시킨 것이다.
“거참 일이 더럽게 꼬였네.”
한편으로는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 이겼다고 생각했던 싸움이 이런 결말을 맞이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물론, 지금 생각해야 할 일은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겠냐는 점이겠지만.
“폭풍은 사라졌고, 장애물도 없어졌지만..”
이브의 눈이 나를 내려다보는 것이 보인다.
사실, 정말로 눈이 맞긴 한 건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지금 이브의 모습은 한때 내가 데이브의 몸에서 튕겨 나갔을 때의 모습을 닮아 있었으니까.
일렁이는 불꽃. 다만 붉지는 않고 보랏빛에 가깝다.
“아무래도 날 노리는 것 같은데.”
문제는 그런 이브의 시선이 유독 나에게만 달라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설마 태양의 가호에 이끌리고 있는 건가?
“라나, 지금 바로..”
“아뇨, 안 갈 거예요.”
고개를 돌려보면 라나가 아켈루스를 뽑아 드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심해의 진주를 이용해 이 열기 속에서 버티려는 것 같았다.
“어차피 지금의 제게는 아르카나가 없어요. 더 이상 도망칠 이유가 없다는 거죠.”
“..지금까지 안 도망쳤으면서?”
“..뭐든 간에요.”
라나의 검이 새파랗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옆에 서는 것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엘리아다.
아무래도 이 열기 속에서 숨을 쉬는 게 버거운 것 같다.
“..나도 도망칠 생각은 없어.”
“누가 뭐래?”
“괜한 헛소리 하지 말고 타개책을 내놓으라는 거야.”
나는 엘리아의 말에 말없이 벨을 내려보았다.
두 사람과는 달리 이 열기 속에서도 꽤 버티고 있는 모습.
빛의 정령과 호각의 권능을 보일 때부터 생각한 일이지만 확실히 제법 힘이 돌아온 기색이다.
그렇다면 여차할 때는 벨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거겠지.
“유인은 내가 한다. 너희는 기회를 엿봐서 알아서 끼어들어.”
“그게 전부야?”
“뭐야. 더 필요한 게 있어?”
“아니, 너답지 않게 완벽한 작전이다 싶어서.”
엘리아의 실없는 소리에 나는 잠시 웃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솔레이다.
“아무래도 또 싸워야 할 것 같다.”
“푸르릉.”
“그래, 고맙다.”
솔레이의 위에 올라타 이브를 바라본다.
이브는 아직 혼란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어쩌면 갑작스러운 변화에 이성이 휘발되어 버린 건지도 모를 일이지.
“…”
그러나 본능만이 남았어도 집착은 여전하다는 것일까.
이브가 가진 태양에의 갈망은 여전히 나를 향해 뻗어있는 것 같았다.
뭐든 간에 저걸 그냥 뒀다간 세상이 멸망해 버릴 거다.
당장만 해도 이 마경 전체가 불타 사라지고 있지 않던가.
“가자!”
나는 솔레이를 타고 내달렸다. 목적지는 저 하늘이었다.
* *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도적단의 단장 올가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그들의 앞을 막아서고 있던 폭풍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자들이 벌인 일일까요?”
“그럴 리가..애초에 폭풍이라는 게 뭔가를 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정체불명의 기계 군단이 사막 전역을 공격하고 있는 상황.
도적단은 혈겁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했다.
맞서 싸우기엔,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장장 수백만에 이르는 군단이 진격하고 있는 만큼, 도망칠 곳을 찾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가까스로 살아남은 몇몇은 울며 겨자 먹기로 마경에 돌아와야 했다.
“그나저나 렌..내 눈이 잘못된 건가? 왜 하늘이 저렇게나 밝은 거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하늘을 바라본다.
본래라면 이제 막 새벽에 접어들었을 무렵.
태양이 떠오르기는커녕 한창 어둠 속에 잠겨 있어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일까. 이 순간 하늘에는 태양이 떠 있었다.
아니, 심지어 그 태양이 누군가를 쫓아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설마 저거..그 남자인가?”
“..맞는 것 같군요.”
아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렌.
상상을 뛰어넘는 전투의 양상에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하다.
물론, 그건 올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겁이 많은 그녀가 아니던가.
“..아무래도 물러나야겠구나.”
“단장님?”
“우리가 저기에 가본들 뭘 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이미 많은 사람을 잃었다. 뻔히 죽을 걸 알면서도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물러나면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지금 저희에겐 물도 식량도 없습니다.”
“그건..”
무턱대고 도망치는 방법부터 떠올린 올가지만, 그녀라고 해서 그 이후의 대책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기야 이 드넓은 사막 모두에 놈들의 마수가 뻗어있는 상황이다.
“저, 저기요?”
“..토끼?”
그런데 그 순간 도적단을 향해 말을 걸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라나와 함께 도망친 줄로만 알았던 생원.
그가 마경 밖으로 나와 도적단에게 말을 걸어 온 것이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당연하게도 렌의 대답에는 날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지금은 회복되었다고는 해도 한때는 올가를 혼수상태에 빠트린 장본인이 아닌가.
렌으로서는 감정이 좋을 수가 없는 상대라는 거다.
“그건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뎁쇼..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그러나 생원 역시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가 마경에 있었던 그 잠깐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왜 살아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지?
“그러는 너는 왜 혼자 있는 거지? 분명 너는 저들과 함께 간 거 아니었나?”
“분명 그랬습죠. 하지만 보다시피 상황이 이렇지 않습니까. 솔직히 토인족인 제가 저기서 뭘 하겠습니까?”
“그래서 도망쳤다는 거냐?”
렌의 눈빛에 혐오감이 서린다.
물론 그 역시도 이성적으로는 생원의 행동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이 생원의 행동을 탓할 수 있을 만큼 떳떳하지 않다는 것 역시도 말이다.
그러나 렌이 생원에게 가진 악감정은 고작 이성 한 줌으로 어찌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그 순간, 생원의 귀가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가 일순 창백하게 보일 정도로 겁에 질린 그.
“다들 숨으십쇼! 뭔가가 옵니다요!”
“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
“다들 몸을 숨겨라!”
“다, 단장님?”
생원의 말이라면 우선 반발하고 나선 렌이었지만 올가의 명령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표정을 굳힌 채 생원을 노려보면서도 이내 순순히 몸을 숨기는 그.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몸이 지면에 잠겨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올가가 가지고 있는 권능이었다.
한때 그들 도적단이 마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주었던 힘.
“도대체 뭐가 온다는..”
“쉿.”
그렇게 몸을 숨기고도 불만을 늘어놓던 렌이었지만 재차 이어지는 올가의 명령에는 그 역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건 대체..!’
사실, 설득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얼마 안 가 렌 역시도 그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까.
쿠웅!
채 덮이지 않은 모래 틈새로 지상의 광경이 들어온다.
렌은 숨을 죽인 채 그 틈으로 눈을 내밀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웬 소년이었다.
사막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인간 소년.
‘아니, 인간이 맞긴 한 건가?’
렌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킨 채 그 소년의 행보를 살폈다.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하늘을 바라보는 소년.
자색의 태양을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서려 있었다.
“설마 각성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설마 그놈 덕인가?”
의미 모를 말을 읊조리는 소년.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걸 보고 있자면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공포가 마음을 좀먹는다.
렌은 자신도 모르게 올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라면 뭔가 아는 것이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다.
‘단장님의 눈이..’
아니나 다를까. 올가는 용족 특유의 눈을 번득이며 소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적대감과 투쟁심이 가득 물든 시선.
아니, 아니다. 저건 적대감이 아니라..
‘겁에 질렸어..?’
다년간의 경험 덕일까. 렌은 올가가 숨기고 있는 진심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는 것을.
도대체 그녀의 눈에는 무엇이 비치고 있는 걸까.
“휴. 그래도 무사히 끝났군요.”
그렇게 소년이 사라지고, 생원과 도적단은 다시금 사막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생원.
하지만 올가의 뺨에는 여전히 식은땀이 가득했다.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자에게로 가자.”
“단장님?”
“내 판단이 틀렸다. 그렇게 도망쳐서 될 일이 아니었어. 이대로 가면 모두가 죽을 거다.”
“대체 뭘 보신 겁니까?”
렌의 다급한 질문에 올가는 숨을 삼켰다.
마치 그 광경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롭다는 듯한 얼굴.
“그 꼬마는..영혼을 수확하고 있었다.”
올가의 대답에 사람들은 무심코 뒤돌아 사막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땅.
황량함만이 감도는 사막에는 무수한 죽음이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