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78)
178화 – 하프 데몬(2)
두 사람과 헤어지고 난 후, 나는 무작정 북쪽을 향해 걸었다.
우선은 마왕령을 향해 갈 작정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하건 간에 일단은 벨제뷔트를 만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달리 솔레이를 타고 날아서 갈 수는 없었다. 그전에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어서다.
“..그나저나 뭔가가 좀 걸리는데.”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나는 불현듯 가슴이 술렁이는 듯한 기분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멈춰 선 걸음. 나는 까닭 모를 기시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단순한 착각이라면야 상관이 없겠지만..어쩐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푸르릉.”
문제는 솔레이 역시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솔레이가 갑작스레 걸음을 멈춘 채 나의 앞을 막아섰다.
나와 눈을 마주해 보이는 녀석.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하다.
아마도 예전 같았으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테지.
나는 솔레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누구인지도 잘 알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나는 솔레이의 갈기를 쓸어내리며 그 눈을 바라보았다.
내 심장이 솔레이와 공명하는 것이 느껴진다.
교차하는 마음과 기억.
이 순간, 나는 솔레이의 심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헤아리는 것조차 의미가 없을 정도로 아득한 기억이다.
수천..수만..아니, 어쩌면 그보다 이전일지 모르는 오랜 기억.
“도대체 나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푸릉.”
첫 만남에서 이 녀석이 보였던 까칠한 태도가 이해되는 순간이다.
아니, 그보다 더한 짓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나는 이 녀석을 용서할 수밖에 없을 테지.
내 지난 삼천 년의 삶조차 희미하게 만들 장구한 세월.
허나 그 기나긴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솔레이는 웃었다.
마치 별소리를 다 한다며 핀잔을 주는 것 같았다.
참 미련한 녀석이다. 나는 괜스레 가슴이 울컥이는 것을 느꼈다.
“푸르릉.”
그러나 솔레이는 이 장소를 잘 보라며 다시 한번 나를 채근할 뿐이었다.
나는 그런 솔레이의 모습에 새삼스레 주위의 모습을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차이점을 모르겠는 건 어째서일까.
나는 그렇게 한참을 살핀 후에야 이 장소가 어딘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긴.”
막상 정체를 알고 보니 왜 몰랐나 싶을 정도로 익숙한 형태가 엿보였다.
비록 세월에 닳아 풍화되어 버리긴 했지만 아직은 그 형태가 남아있는 이곳.
한때 호루스족들의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던, 태양신의 시신이 떨어진 장소.
“..그래서였구나.”
나는 그제야 왜 이곳이 마경이라 불리게 되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왜 유독 이 장소에서만 마수가 탄생하게 된 것인지 역시도.
“손휘. 그 남자는 다른 세계에서부터 마수들을 끌어모으고 있었지. 한때 호루스족이라 불렸던 이들은 마족으로 영락했고 어째선지 마수들을 탄생시키게 되었어. 아마 우연은 아닐 거야.”
“푸릉.”
“설마 태양신이 죽은 이유와 연관이 있는 건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나의 질문에 솔레이는 몇 가지의 심상을 띄워 내게 보여주었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는 생각들. 그러나 상황을 이해하기엔 더없이 충분하다.
“..그렇구나.”
아득히 먼 옛날, 신들은 그저 숭배받을 뿐 저마다의 종족들에게 큰 간섭을 해오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엘프와 세계수 정도만이 남다른 유대를 뽐낸 것이 전부였다.
신들은 그렇게 무책임한 군림을 거듭해 왔고, 그런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갔다.
파탄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한없이 윤택해져만 가고 있던 필멸자들의 삶.
그러던 중, 한 종족이 그만 세계의 섭리를 건드리고 말았다.
인간. 그 한없이 탐욕스럽고도 오만한 종족이 그 정체였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건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거대한 구멍.
그 안에서부터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정체 모를 힘은 단숨에 세계를 휩쓸어 가기 시작했다.
필멸자의 힘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을 수준의 재앙이었다.
세계의 멸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느 날 시작된 정체 모를 격류.
밀려오는 마수들의 대군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종족이 멸망에 이르렀다.
물론,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인 인간 역시도 그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신들은 낙관적이었다.
구멍 하나 정도쯤이야 그들의 힘을 사용하면 언제든지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아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참에 필멸자의 오만함을 일깨워 주겠노라 호언장담하던 신조차 있을 정도였다.
세계는 그렇게 회생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신들은 인간들이 언제나 답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거다.
“그 답이 정답은 아니었지만.”
인간들은 단순히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들이 낸 구멍이 문제를 일으켰다면, 그와 비슷한 구멍을 하나 더 뚫으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흔히 말하는 이이제이의 수법이었다. 그것이 이 세계에 두 무리의 침략자가 찾아온 이유이기도 했고.
“이래서 돌이킬 수 없게 된 거구나.”
이세계를 다스리는 기계신의 사도들과, 정체 모를 어둠을 섬기는 종들의 침략.
이른바 왜곡점이 탄생하게 된 최초의 사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신들은 그때가 되어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거야. 하지만 수습하기엔 이미 늦어버렸지. 그 결과 태양신이 희생하게 된 거고.”
아리엘과 신룡이 왜 그렇게 태양신을 그리워하는 건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태함과 오만함에 젖어있던 다른 신들과는 달리, 태양신은 여러모로 신답지 않았던 존재였다.
“인간들에게 제약이 생긴 건 그때부터였군.”
인간들에게서부터 용사 이외의 그랜드 마스터가 나오지 않게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신들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모든 사건의 시작을 끊었던 그들이 자칫 또 한 번 멸망을 초래하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비록, 지금 상황을 보면 결국 실패하고 만 것 같지만.
“..누군가 오는군.”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인기척 하나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기괴한 소음이 귀를 찌른다.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무거운 걸음 소리.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것은 강철의 삐걱임이다.
설마 안드로이드의 잔당인가?
그렇다면 문제가 크다.
고작 안드로이드 하나를 처리하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만약 내 위치가 파라켈수스에게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단탈리안?”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니. 어쩌면 불행하게도.
그곳에 있는 것은 안드로이드가 아니었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역시..당신..이군요..벨제..뷔트..님.”
붉은 안광이 나를 마주한다. 그 순간 가슴을 물들이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낯선 감정이었다.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형상. 과거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
이윽고 단탈리안이 나에게로 다가온다. 그리고 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런 꼴이 되고서도 여전히, 나에게 충성하겠다는 거냐?”
단탈리안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미어지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잘 돌아왔다. 잘 견뎠어.”
나는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다시 한번 결의를 다졌을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녀석들을 버릴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이런 모습이 되어서도, 나의 모습을 보고서도.
그럼에도 여전히 충성을 말하는 이 녀석들을 버릴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드디어 왔군.”
그렇게 얼마간을 서 있었을까.
드디어 기다리던 얼굴들이 나를 찾아 모습을 드러냈다.
대충 50여 명 정도인가? 못 본 사이에 숫자가 제법 줄어들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오냐.”
“네, 넵? 저, 저는 그냥 길 안내를..”
그런데 저 토인족은 왜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걸까.
막판에야 우리를 돕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를 한 번 배신했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닐 텐데.
“그래? 그럼 저리 가버려.”
“죄,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쇼!”
“어차피 네가 와서 될 일이 아니다. 나 역시도 너를 믿을 수 없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믿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런데 어째 놈답지 않게 진중한 반응이 이어진다.
나는 잠시 턱을 쓸며 놈의 모습을 살폈다.
그것이 정녕 진실인지 아닌지 감이 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너, 혹시 마왕령으로 가는 길도 알고 있냐?”
“..그, 생각해 보니 제가 두고 온 물건이..”
“…”
“..물론 알고 있습죠.”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이번에는 올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보아하니 그간 꽤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보아하니 도적단은 그만둬야겠던데?”
“..처음부터 우리는 도적단이 아니었다. 그저 우리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을 뿐이지.”
“그래? 그럼 이제부터 너희는 도적단이 아니라 용병단이다.”
“..갑자기 용병단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걱정 마라. 내가 너희 용병단의 이름도 정해놓았으니까.”
“..말해봐라.”
영 꺼림칙하다는 표정을 짓는 올가를 향해 나는 미소 지었다.
“데몬 하트.”
물론 올가의 표정은 썩어들어갔지만 말이다.
“이런 미친..우리를 미끼로 쓸 작정이냐?”
“싫다면 헤어져도 된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그 이름을 쓸지 말지는 너희의 선택이니까.”
“..젠장.”
올가의 눈빛에 고뇌가 어린다. 하기야 한순간의 선택으로 도적단의 태반을 잃어버린 그녀다.
그 와중에 다른 마을의 생존자들을 규합시킨 것 같긴 하지만 그래봤자 정예라고 보기엔 어렵다.
이대로 두었다간 전멸하는 건 시간문제일 테지.
그녀로선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다.
“..도대체 우리에게 뭘 원하는 거냐. 설마 미끼로 쓰고 버릴 작정은 아니겠지?”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래도 뭐, 이거 하나는 약속해 줄 수 있다. 비전투원들의 경우는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겠다. 물론, 진짜 안전하다는 건 아니지만.”
“..무슨 말인지는 나도 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 따위는 없다는 것도.”
올가는 내 말에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을 따르도록 하마.”
“잘 생각했다. 합류한 걸 환영하지.”
“그런데 안전한 곳이라니 어디로 가려는 거지?”
“조금 전에 말한 걸 못 들은 건가? 마왕령이다.
“..거기에 우리를 데려가겠다고?”
올가가 아연한 기색으로 내게 질문을 던진다.
아마도 마왕이 그들을 반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러나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내가 보면 괜한 걱정에 불과했다.
“아마 제법 마음에 들 거다. 뭐, 그놈으로선 황당한 일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마왕성을 향해 나아갔다.
* * *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걸까.
마왕, 벨제뷔트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선명한 얼굴이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아니, 어떻게 경비를 따돌린 거지? 침입자가 있다는 보고는 못 들었는데.”
“보안이 엉망이더군. 그나저나 나를 아나?”
벨제뷔트의 얼굴에 당혹이 스친다. 하기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다.
지금 벨제뷔트의 앞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클라리스 아르나드.
벨제뷔트의 미련이자 악몽이었으니까.
“하지만..너는 죽었잖아?”
“그랬지. 그런데 나에 대해 꽤 많은 걸 아나 보군. 아무래도 데이브 클락의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야.”
“..누구라고?”
“못 들었나? 데이브 클락..”
쾅!
클라리스가 막 벨제뷔트의 질문에 대답하려던 찰나, 큰 소리와 함께 대전의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황급히 달려들어 오는 것은 익숙한 얼굴이다.
“무슨 일이냐. 세이르.”
한때 팔레아스 령에서 사건을 일으켰던 하급 마족, 세이르의 재등장이었다.
“마, 마왕님! 지금 성밖에..!”
그 갑작스러운 등장에 미간을 모았던 벨제뷔트.
그러나 이어지는 세이르의 말에는 제아무리 그라 해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성 밖이라니? 설마 침입자인 거냐?”
“데, 데이브 클락. 그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벨제뷔트와 클라리스가 눈을 마주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