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204)
204화 – 두 개의 시간선(1)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눈을 뗄 수가 없다.
나는 그저 망연한 얼굴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두 사람을 악몽의 세계에 가두다니, 도대체 릴리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단탈리안은 왜 파라켈수스의 명령을 듣고 있는 거지?
아니, 무엇보다 단탈리안의 저 말. 아르카나라는 이름은 분명..
“이제야 대화할 준비가 된 것 같군.”
그 순간 들려오는 것은 외신의 목소리였다.
우연이라기엔 절묘하기 그지없는 타이밍이다.
마치 내 마음속을 꿰뚫고 있기라도 한 것 같다.
“저들을 구하고 싶은 거냐? 그렇다면 이뤄주마.”
외신이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지금껏 숨기고 있었던 열망을 읽어낸 거겠지.
물론, 평소의 나였다면 저런 말 따위 받아들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다.
“그뿐만이 아니다. 니콜라스 쾰메른. 폴 뷔마. 노드릭 드라쿨리아. 이프리트. 라이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놈은 내 ‘진짜 염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달콤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내가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름을 속삭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악마와도 같은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너.”
“아니면 이건 어떤가.”
견디지 못하고 귀를 막아보려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놈의 목소리는 귀를 통해 들려오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개골 안쪽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놈의 목소리는 내 뇌 속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벨제고트를 돌려주마.”
놈의 목소리가 역린을 찔러 들고 있었다.
나로서는 차마 내뱉지조차 못한 그 이름을.
“프리드 아르나드를, 클라리스 아르나드를 되살려 주마. 네가 잃어버렸던 평화를, 네가 진정으로 이룩하고 싶었던 것들을 이루게 해 주마.”
그래, 확실히 외신이라는 놈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다.
설마 이 세계의 신들조차 감히 제안하지 못할 대가를 서슴없이 내밀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믿기 힘든가? 하지만 지금의 너라면 알 수 있을 테지. 내 힘을, 내 일부를 품고 있는 너라면.”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외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래, 외신의 말이 옳았다.
그가 나의 내면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외신처럼 그의 속내를 온전히 꿰뚫지는 못하더라도 이게 거짓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다는 거다.
“반대로 내 제안을 거절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이해하고 있겠지?”
삭막한 공기가 감돌며 눈앞의 풍경이 바뀐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용의 둥지였다.
모여든 용족들이 조르디네스를 둘러싸고 있었다. 흉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가 감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드래곤 로드.”
나는 한눈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조르디네스에게 쥐여준 쪽지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
바로 조금 전, 그것의 존재를 외신에게 간파당했기 때문이다.
외신이 나에게서 알아낸 진실을 아득한 시공 너머로 전한 것이다.
“당신의 시대는 저물었습니다.”
조르디네스를 마주하는 나가족의 수장은 붉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신룡의 눈이라고 하기엔 꺼림칙한 눈이다.
그 순간, 나가의 손 위에서 내가 전한 쪽지가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것은 만약의 경우 신룡의 배신을 증거하기 위한 쪽지였다.
설령 다른 용족들이 그녀를 배신하더라도, 드래곤들만큼은 그녀의 편이 되어주길 바라며 건넨 쪽지였다.
“..조르디네스.”
그러나 이 순간, 조르디네스의 몸을 억누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드래곤들이었다.
파우스트의 눈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운명을 바꾸지 못한 것이다.
이제 곧 나가족을 위시한 용족들은 신룡의 뜻을 받들어 인간들에게 전쟁을 선포할 테지.
“너.. 신룡과 무슨 관계인 거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아함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도대체 신룡은 무슨 생각으로 외신을 돕고 있는 거지?
“알고 싶은가?”
외신은 생각했던 것보다 순순히 내 질문에 답했다.
아마 알려주더라도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나를 이 세계로 부른 것이 그자다. 말하자면 그와는 동맹 관계인 셈이지.”
“..뭐라고?”
문제는 외신의 대답이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것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외신을 불러들인 게 신룡이라니?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의 흑막이 그였단 말인가?
“..너, 뭔가를 숨기고 있군.”
아니, 그럴 리 없다.
나는 직감적으로 외신이 모종의 진실을 숨기고 있음을 간파했다.
물론 단순히 감각만으로 확신을 내린 건 아니었다.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신룡이 나를 도와줄 이유가 없잖아.”
나는 구멍 안쪽에서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를 삼키려던 외신과 그런 외신으로부터 나를 지켜준 신룡.
“신룡이 미덥지 못한 건 사실이야. 아군이라는 확신도 없지. 하지만 그건 너에게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내가 거짓을 말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적어도 전부 말한 건 아니겠지.”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엔 충분하겠지?”
마기의 움직임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유황처럼 들끓어 오르는 마기가 내 안의 심장을 죄어든다.
“시답지 않은 대화는 이제 됐다. 왜 간단한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거지?”
그 순간, 나는 놈의 거대한 눈이 나를 바라보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시간 끌지 말고 대답해라. 나를 따를 건가?”
눈앞의 풍경이 다시 한번 바뀐다.
피에 젖은 데이브의 모습이 보인다.
이어지는 것은 그런 데이브를 지키려 나서는 칠검들의 모습이다.
무려 일곱에 달하는 그랜드 마스터의 협공이 이어지는 상황.
하지만 열세는 여전했다. 용사의 힘을 되찾은 단탈리안.. 아니, 단테의 에테르는 감히 전직 용사 따위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공을 넘어선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광경을 그저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잃을 텐가?”
지킬 것인가 잃을 것인가.
외신은 두 가지의 길을 제시하며 나의 턱밑에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나는 그런 외신을 향해 최후의 질문을 던졌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가? 질문은 여기까지라고 했을 텐데?”
당연하게도 외신은 달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는 묻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데.
“만약 내가 네 제안을 받아들이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조금 전에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 준다고 하지 않았나? 왜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는 거지?”
“아니, 아니겠지.”
누가 봐도 답은 정해져 있는 것만 같은 물음이 이어진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일견 다른 것처럼 두 가지의 선택지가 사실은 같은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딱히 신들이 무력해서 너 같은 제안을 하지 않는 건 아닐 거야. 원한다면 그들도 할 수 있겠지. 죽은 자를 살릴 수도, 과거를 바꿀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신들은 그러지 않았지.”
“그래, 아리벨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파라켈수스 하나를 막는 데에도 번거로운 과정을 거쳤지. 심지어 자기가 페널티를 짊어지기까지 했어. 이유는 하나였지.”
“…”
“왜곡점. 아리벨은 왜곡점이 세계를 멸망시킨다고 말했어. 그리고 내가 이 시간대에 오게 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지. 세계는 나를 위험이라고 판별했고, 나를 이곳으로 보낸 거야. 그런데 나를 왜곡점으로 만든 게 누구였지?”
“흐흐흐흐흐..”
놈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보이지 않는 적과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너는 내 소원을 들어주려는 게 아니야. 나를 파멸시키려는 거지. 아마 신룡에게도 같은 제안을 한 거겠지?”
“그래.. 확실히 신룡보다는 똑똑하구나.”
“신룡에게 뭘 들어주기로 한 거지? 무슨 짓을 했길래 신룡이 너의 말을 듣고 있는 거냐.”
“네가 알 것 없다. 너는 그냥..”
“그래, 내 알 바는 아니겠지.”
치밀어 오르는 공포를 애써 억누른다.
두려워할 시간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생각하는 것이 나았으니까.
생각하자. 혹시 내가 놓친 건 없나? 이 상황을 뒤집을 열쇠는?
“..그래.”
그 순간, 나는 죽음 속에 남겨진 데이브를 바라보았다.
“화염의 가호.”
본래라면 평범한 인간이 가질 수 없을 터인 가호가 머릿속을 스친다.
태양신의 영혼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생겨난 일종의 부작용.
그러나 그 과정과는 별개로 사실상 데이브의 몸은 그 어떤 존재들보다도 사제에 가까워져 있을 터다.
‘문제가 있다면 놈과 나의 사이에는 시공이라는 벽이 있다는 건데..’
가장 큰 문제는 데이브에게 손을 뻗을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의 나는 시공의 제약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상태였지만 그것이 신의 영역에 이르지는 못했다.
1초를 수억 분의 일로 쪼갠다거나 늘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시공을 거스르지는 못한다는 거다.
“..어?”
그런데 내 착각일까? 일순 데이브와 내 눈이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이런..”
그 순간 들려오는 것은 낭패한 듯한 외신의 목소리였다.
어딘지 모르게 다급한 목소리.
그와 동시에 눈앞의 풍경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환상을 지워버리려는 모양이다.
‘그렇게는 못 하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마기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곧장 외신의 방해가 들어왔지만 이번에는 내가 더 빨랐다.
“..설마 태양신 녀석.”
경악한 목소리를 뒤로한 채 앞으로 나아간다.
닫히는 세계와 가까스로 남긴 불꽃 하나.
“..잘되어야 할 텐데.”
최후의 희망이 시공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적막해진 가운데, 나는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
* * *
‘방금 본 게 뭐였지?’
데이브의 눈이 깜빡인다.
분명 무언가 검은 것을 본 것 같았는데.
설마 상처를 입은 나머지 환각을 본 것일까?
‘뭔가 불길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잠깐 마주한 것만으로도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무언가가 저곳에 있었다.
그런데 그 무언가에게서 익숙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설마.”
어렴풋한 확신과 함께 몸을 일으킨다.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상처가 눈에 띈다. 몸이 묘하게 가볍다.
그와 동시에 터무니없이 느리게 보이는 주위의 사물들까지도.
“..설마 너였던 거야?”
황망한 물음이 던져진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데이브는 침묵 속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아르카나 님?”
그런 데이브를 보며 이상한 표정을 짓는 단테.
그의 얼굴에 혼란이 서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데이브의 모습 위로 누군가의 얼굴을 겹쳐보고 있는 것 같았다.
“..데이브?”
아니, 가만 보면 단테만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칠검들 하나하나가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데이브의 걸음이 앞으로 나아간다.
형태가 없던 그의 검술에 처음으로 맥락이 잡히는 순간이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의 내면에서부터 솟구치고 있었다.
가히 악마와도 같은 재능이, 정체불명의 속삭임이 그의 검을 이끌고 있었다.
화륵!
이윽고 오러와 마기가 뒤섞인다.
그 검 끝에 서리는 것은 보랏빛의 검강이다.
“..좀 살벌한데?”
스스로가 펼친 기술에 완전히 질려버린 듯한 데이브의 얼굴.
그러나 그것도 잠시. 데이브는 이내 표정을 굳히며 검을 휘둘렀다.
“어스름.”
처음 휘둘러보는 궤적에서 묘하게 익숙한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몸속에 깃든 기억이 검술을 끌어내고 있었다.
검 끝을 타고 쏟아지는 그물이 눈앞의 것들을 난도질한다.
“기긱.. 긱..”
순식간에 무너지는 안드로이드의 대군.
빽빽하게 늘어서 있던 포위망에 구멍이 뚫리는 순간이다.
“..여긴.. 어디지..?”
그러나 가장 버거운 적은 아직 살아 있었다.
단탈리안의 눈동자가 데이브를 마주한다.
마음속에 깃든 혼란과는 별개로 여전히 흉흉한 살의가 느껴진다.
“..그래, 쉽게 끝날 리가 없지.”
가볍게 혀를 찬 데이브가 검을 들고 앞으로 나아간다.
묘하게 힘이 들어간 걸음이다.
잠잠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에는 일체의 미혹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솔직히 아직도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검을 들어 올리는 순간, 타오르는 것은 검은 태양이었다.
데이브의 눈은 어느새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쿵!
다음 순간, 두 개의 검이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