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104
◈ 섬예 일맥 (4)
“뭐라고 했지?”
태염룡이 물었다. 짙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정연신은 그의 얼굴만 봐도 말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듣지 못하여 되물은 게 아니다. 말을 바꿀 기회를 주겠다는 표정으로 보였다.
“지하 뇌옥에 오래 갇혀 있었거든. 듣는 귀가 어두워진 모양인데, 다시 한번 말해 줘라.”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역으로 위세를 부리는 모습이었다.
대명문가의 소가주였던 자다.
산동 제남의 토착 호족으로서 웬만한 왕가 못지않은 지위를 누렸을 테니, 능히 그럴 만했다.
정연신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마광익 편제에 속했다면 내 수하가 맞아.”
“지금 도발을 하는 건가?”
흐릿한 눈웃음을 그리던 태염룡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본래부터 눈그늘이 짙게 져 있었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관에 누울 듯한 모습이었다.
강렬한 기세와 별개로 폐인처럼 보였다.
화악!
타오르는 듯한 기파 속에서 입술을 비튼다. 나른한 웃음이다. 변함없이 기괴한 자였다.
“뭐야 뭐야?”
“못 보던 사람인데. 섬예 오라버니랑 싸우는 거야?”
“어른한테 알리자.”
“바보야. 다 임무 가고 없잖아. 정 형이 지금 여기서 제일 위란 말야.”
당초에 태염룡이 크게 소리친 바였다. 어느새 마광익 무명제자들이 구경을 나와 있었다.
개중 정연신보다 두어 살 많은 소년이 나서서 아이들을 물렸다.
“전각 뒤편으로 가자. 딱 봐도 고수잖아. 정 형한테 짐 될라.”
“저 아저씨는 색깔도 없는데?”
“일단 가.”
고마운 일이었다. 정식 무사로서 마광익 전각에 홀로 남은 신소빈의 역할을 저 소년이 대신한 것이다.
정연신은 마광결을 일으켜 투로를 셈했다.
아이들에게 여파가 미칠 동선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쉬웠다.
태염룡의 뒤쪽 방위가 훤히 뚫려 있는 까닭이었다.
그대로 입을 열었다.
“상명하복이다. 신검단 무력대는 모두 그래.”
정연신의 말에 태염룡이 피식 웃었다.
“애들이 귀엽군. 여하간, 내 연배가 이제 곧 이립(而立:서른 살)이다. 굳이 널 대장으로 불러 주랴?”
“선배로 족해.”
“이 몸은 황보가주에게 사사했지. 아비라 부르기도 싫을 만큼 괴팍한 노인네였지만, 팔가주 중에서도 손꼽히게 늙은 망령이었단 말이다. 강호의 배분을 봐도 역시 네 말은 괴이한…….”
그때였다. 멀찍이서 살금살금 다가오던 신소빈이 외쳤다.
“섬예 선배는 입황성주께 배웠는데?!”
“…….”
태염룡의 입이 다물어졌다. 강호의 배분이란 명족 앞에서 무의미해지기 마련이었다.
모든 말이 논파당했다. 태염룡은 궁색하게 입술을 뗐다.
“그래도 내 연배가…….”
“무명옷 제자가 청색무사한테?”
신소빈이 고양이 같은 눈으로 반문했다. 묘한 구도였다.
정연신과 태염룡이 마주 본 가운데, 한켠에서 양 허리춤에 손을 올린 그녀가 두 사람을 새까만 눈에 담았다.
태염룡이 하는 모든 말을 반박할 태세였다.
신소빈이 두 고수가 자리한 공간에서 버티기 위해 기파를 일으켰다.
백색 장포가 천상 소선녀의 옷자락마냥 부드럽게 하늘거린다.
타고난 담력일까. 그녀는 일말의 긴장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
“본가가 그래도 팔대세가의 일익이었다.”
태염룡이 정연신에게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대꾸는 신소빈에게서 나왔다.
“멸문했잖아?”
말이 짧다. 허나 태염룡은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이미 정가동공을 일으킨 정연신이 깊게 가라앉은 기도를 내비치고 있었다.
이제 상승 고수란 말을 들을 경지까지 왔다.
태염룡의 친우라 했던 청기린마저 격살한바, 대방파 최정예 고수라 할 만했다.
“거참.”
된통 피곤하게 되었다는 듯, 태염룡이 미간을 모았다.
“…본디 강호에서 쌓은 명망도 있다. 용봉지회 제패의 풍문을 익히 들었을 터.”
“똑같이 제패한 백기린이 섬예 선배에게 졌는데?”
“지위를 생각해라. 나는 일가의 소가주였다.”
“없어진 가문이 무슨 대수래? 그리고 말이야. 섬예 선배는 입황성주님의 직계, 나는 입황 신씨세가의 적녀. 섬예 선배는 청색무사, 나는 백색무사. 그리고 당신은…….”
신소빈이 입매를 살짝 올렸다. 당돌한 얼굴이었다.
“아까 스스로 말하던데. 잔챙이 무명제자라고.”
“…….”
“당신 제정신이야? 본성에 입문했으면 본성의 율법을 따라야지, 어딜 천지 분간 못 하고 까마득한 청색고수한테 대들어? 다시 뇌옥 구석에 박히고 싶나 봐? 우리 할아버님이 전대 원로원주셔. 내가 말만 하면 당신은 그저…….”
쏘아붙이는 말이 점차 강해졌다. 고양이의 날카로운 울음소리 같았다. 백묘란 별호가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
태염룡이 완전히 할 말을 잃은 모습으로 점차 기세를 갈무리하는 가운데, 정연신은 놈을 경계하다가 내심 아쉬워했다.
상대가 낮은 연배의 무명제자도 아닌바, 마광익 선배로서 원리원칙을 내세웠을 뿐이다.
그런데도 덤벼들 듯했던 태염룡의 태도가 못내 기껍던 참이었다.
‘전력으로 합을 나눌 수 있을까 했는데. 도발 따위를 하지 않고도.’
소년은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헌데.”
“무엇이 또.”
“나 역시 네 별호만 안다. 이름이 뭐지?”
고강한 고수가 강호를 활보하면 당연히 무명을 떨친다.
허나 대개는 별호가 퍼지는 게 전부였다. 무지막지하게 넓은 땅덩어리 탓이다.
정연신의 출신지인 하남 신야현은 더욱 그랬다. 웬만큼 커다란 소문이 아니면 닿지 않았다.
허나 입황성 무인이 태염룡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정상이 아니다.
팔가의 소가주란 지위는 강호에 뚜렷이 여덟뿐이기에.
‘임무 때도 용모파기와 별호만 받았어.’
이유가 있었다. 정연신의 청색 선배인 백미려조차 태염룡의 짧은 수명을 익히 알았다.
황보세가가 서출인 태염룡을 후계자로 세운 연유가 멸문과 함께 알려졌다.
요절할 목숨에 찬란한 재능이다. 본가의 명성을 드높인 뒤에 갈아치울 소모재로 여겼다고.
그래서 소가주의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 명성을 바라면서도 쉽게 지워질 존재를 원했다. 역설적인 일이었다.
정연신은 태염룡의 처지에서 자신을 보았다. 외가인 입황마가를 멀리하는 까닭 중 하나였다.
사박.
좋은 향기가 났다. 어느새 신소빈이 소년의 옆으로 다가왔다.
눈이 한 번 마주치자 생긋 웃는데, 한순간 백묘가 아니라 강아지 같았다.
정연신은 의아함을 삼켰다. 새삼 태도의 변화를 묻는 것도 번잡스러운 짓이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가 태염룡을 채근했다.
“선배가 묻잖아. 대답해.”
“알려드리기 싫은뎁쇼?”
태염룡이 대꾸했다. 권태가 짙게 어린 표정이 나이답지 않게 어울렸다.
용모가 워낙 출중하기 때문인 듯했다.
청기린과 백기린도 그렇고, 명문가 직계들의 외모는 모두 특출났다.
생각해 보면 신소빈과 마세인 또한 그러했다.
‘외양도 지위라 했지.’
이번 임무에서 동행한 입황신창 악수림의 말이었다.
정연신은 무심코 입황성주를 떠올렸다. 가지지 못한 것이 없다.
존귀한 지위와 개세적인 무공에, 한없는 수명까지도 그랬다. 결핍이란 게 존재하는 자일까.
동시에 신소빈의 눈매가 다시금 날을 세웠다.
“지금, 뭐라고? 싫은뎁쇼? 이 아저씨가 정신을 못 차리네?”
“버린 이름이라서 그렇슴다. 황보 씨에 부정 탈라.”
태염룡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시금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말투를 자유자재로 바꾸는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심기가 깊다.
거대한 명문가의 소가주로 버틸 만하다 싶었다.
“앞서 받은 전갈이 없어. 우선 총관부로 함께 가보자. 확인을 받아야겠어. 정말로 뇌옥에서 풀려나 마광익에 배속된 게 맞는지.”
정연신이 얘기했다. 총관부의 동행인 한 명 없이 태염룡 혼자 왔다.
도통 있기 힘든 일이다.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안내하던 이를 따돌린 게 분명했다.
그때 어깨 어림으로 신소빈의 숨결이 살짝 붙었다.
정연신보다 머리 반 정도가 작은데, 빤히 올려다보는 모습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선배, 저도 같이 가요?”
“아니. 아이들이 불안해할 거야. 진정시켜 줘.”
마광익 무명제자들 얘기였다. 정가장에서 받지 못한 온정을 나눠주는 이들이었다.
마광익 모두가 그랬다.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짜 민가의 애들도 아닌데.”
작은 입술을 비죽인 신소빈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물러섰다.
정연신은 그녀를 히죽거리며 바라보던 태염룡과 시선을 마주했다.
“지금 가지.”
사실 확인이 먼저였다. 정연신은 태염룡을 이끌고 총관부로 향했다.
피식 웃은 놈이 건들거리면서도 설렁설렁 따라와 주었다.
황혼을 맞으며 한동안 걸었다. 전각군을 몇 개고 지나쳤을 때였다.
“정 소협.”
대총관을 맞닥뜨렸다. 마침 총관부 전각으로 들어가던 길인 듯했다.
그는 여전히 커다란 풍채에 강건한 기운을 두르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노을의 아스라한 몸부림과 몹시 동떨어져 보였다.
정연신은 담담히 포권을 올렸다.
“대총관님. 마침 뵈러 가던 차였습니다.”
“아, 이유를 알 만합니다.”
대총관이 활짝 웃었다. 마치 아들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가 정연신의 등 뒤를 힐끗했다. 다리 한쪽을 약간 올리고 선 태염룡이 있었다.
“저 친구 때문인 듯한데, 맞습니까?”
“예.”
“정식 배속이 맞습니다. 태염룡은 마광익의 강력한 도검이 될 인물이지요. 제어가 윗사람의 몫이긴 하나, 소협과 마광익이라면 능히 잘 해내리라 생각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역시, 쉬이 납득할 만한 일은 아니지요. 허나 성주께서 몸소 살피셨습니다. 마음을 놓으셔도 될 겁니다. 명분이야 성주님의 명으로 족한 터이고.”
“아.”
정연신은 작은 탄성을 뱉었다.
입황성주가 태염룡을 응시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집무실을 가득 채운 나무 둥치에 비스듬히 기대어, 기파 한 점 내뿜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뚜렷하게 그려지는 상상이었다. ……심연을 담은 진녹색 눈동자에 비친 태염룡이 초라해 보였다.
명족 가운데 지고한 초월자의 눈이다. 본질을 꿰뚫는다고 했다.
의문이 사그라들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포권을 취한 정연신이 몸을 돌리려 했다. 대총관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급한 용무가 있는 게 아니라면, 잠시 총관부로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사천에 파견된 마광익 관련 파발이 막 도착한 걸로 압니다. 제 수하들이 살피고 있을 터인데.”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정연신이 곧장 되물었다. 대총관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어렸다.
“아무렴요. 성주께서 친히 직전제자로 들인 분이니, 성정에 의심할 여지가 없지요. 따라오십시오. 지금쯤이면 서찰의 암호문을 해독했을 겁니다.”
“기다려.”
정연신이 짧게 얘기했다. 대총관을 향한 말이 아니었다.
졸지에 개와 같은 취급을 당한 태염룡이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소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저벅.
정연신은 대총관을 따라 총관부로 들어섰다.
거대한 문지방에 발을 들이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귓전을 때리는 소리들이 있었다.
읊조리는 음성들이 차분한 한편으로 소란스러웠다. 급박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진법이구나.’
발달된 감각으로도 바깥에서 듣지 못했다. 정연신이 새삼 입황성의 광대함을 실감하던 때였다.
“……익 백색, 두 명 전사. 시신 수습 중. 여타 마광익주 등 스물셋, 모종의 무리와 교전 후 전원 행방불명.”
“광역 무공의 시전이 있었던 걸로 추정. 반경 팔 장(약 이십사 미터)에 암기 흔적. 모든 자국이 조밀함. 사천당문의 비전절기, 만천화우(滿天花雨)로 사료됨. 지원인지 적대인지 불분명.”
“패검종주 출현. 사천성 용안부. 패검종 장로가 동행.”
“사천 순경부에서 십삼천 후기지수 회합. 십전문(十全門), 순마련(純魔聯) 외 사마외도 무인 다수 참석. 호위무사들 가운데 눈에 띄는 고수들 일부 관측. 최하 청색급으로 사료됨.”
“점창파 소검후(小劍后), 아미파 금장신녀(金杖神女), 청성파 적운룡(赤雲龍) 출현. 구파 셋. 마찬가지로 사천 순경부.”
입황성 총관부다. 천하의 온갖 소식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무공을 익힌 문사들이 정광 어린 눈으로 곳곳에서 토의했다.
“지원대를 보내야 하지 않나?”
“불가. 본성의 방비 인원이 부족하다. 십칠대 중 열다섯이 파견 중이거늘.”
“사천성 주둔 신검단…… 마광익, 창천대, 순천익. 이 시간부로 마광익은 전력 외로 논한다.”
급박한 가운데.
쥐죽은 듯한 침묵이 번져나가는 자리가 있었다.
입구 쪽이다. 푸른 옷자락이 펄럭였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격랑처럼 움튼 기파가 천장을 향해 충천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뿜는 기세였다.
“전력 외라는 판단은.”
이제 변성기다. 목소리가 두꺼워지기 시작한 소년의 음성이 울렸다.
“유보해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