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105
◈ 섬예 일맥 (5)
울컥한 마음에 내뱉은 말이었다. 문사들의 읊조림이 귀가 아니라 마음에 꽂혔다.
‘행방을 찾지 못했다고? 전원?’
소년은 처음으로 객기를 부렸다.
지금부터 마광익을 전력 외로 논한다? 전멸을 상정하지 않고서야 하기 힘든 말이다.
설령 모든 정황이 그리 얘기한다 해도, 정연신마저 그렇게 판단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정가장은 아무것도 아니다. 마광익이 그의 집이었다.
“섬예 소협.”
“이런…….”
“못 올 곳에 오셨습니다.”
일부 문사들이 자리에서 분분히 일어났다. 정연신을 좋게 봐 주는 이들이었다.
제각기 포권이나 묵례를 하는데, 올곧은 몸가짐에 비해 표정이 불편했다.
마광익 청색 중에서 유일한 가용 고수가 참모진의 판단을 들었다. 누구라도 곤혹스러울 만했다.
“지금 본대는, 저와 신소빈, 태염룡을 제외하면 스물다섯이 맞습니다.”
정연신은 애써 어조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앞서 금조문(金朝紋) 문사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백색 둘이 전사했다고. 혹, 마광익을 얘기하신 건지요?”
분명히 귓전에 다가온 소리가 있었다. 두 사람의 시체를 수습 중이라고 했다.
“…….”
“말씀해 주십시오.”
정연신은 먼발치에 있는 문사 한 명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옆에서 침중한 기색을 비치던 대총관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중년의 금 문사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결운검(潔雲劍) 유은은(劉誾銀), 산권(散拳) 도명(都鳴)의 시신을 발견했다 합니다. 본성 사천지부의 무명제자들이 추슬렀노라고 전해 왔습니다.”
소년은 침묵했다. 마광익 결운검과 산권이라면 익히 아는 이들이었다.
모를 수가 없다. 헌원창과 함께 몇 안 되는 마광익 백색무사.
정연신이 흰 무복을 입고 처음 들어왔을 때 유난히 신난 얼굴로 본성 곳곳을 안내해 줬다.
소년이 청색으로 승단한 뒤에는 장난스럽게 존대해 주던 이들이었다.
후욱!
기파가 작게 요동쳤다.
정가동공이 의지를 벗어난 게 아니라, 한번 일어난 기운이 흔들리는 마음에 제멋대로 이지러지는 것이었다.
정연신은 금강결의 구절을 되뇌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두어라. 멸마청강수를 창시할 때 처음 들은 말이다.
소림 소신승과 원종 선사의 설법이었다. 당시 유난히 귀에 꽂혔다.
하여 근래에 창안하고 있는 심법의 요결 중 하나로 삼았다.
소년은 요동치는 심장을 관조했다.
강호에 들어선 이래 처음 느끼는 내면의 격랑이었다. 슬픔과 분노가 급류처럼 거셌다.
안 된다. 복수하자면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심정을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바라봤다. 익숙한 일이었다.
그가 한정된 삶으로부터 두려움을 외면하는 방식이기도 했기에.
‘보복하면 돼. 이미 귀천해서 늦었다면, 적의 목을 날리는 게 우선이야.’
소년은 강호인으로서 생각했다. 사람 정연신을 철저히 뇌리에서 떨어뜨렸다.
동시에 전신으로 갈무리되는 기파를 느꼈다. 그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남은 스물셋. 행방불명이라 함은, 마광익주 등 본대 인원들로부터 전서구나 파발이 없었다는 겁니까? 칠주야 넘게 말입니다.”
“……그렇지요.”
대총관은 내심 경탄하면서 대답했다. 심법과 심공이 축기법으로 여겨지는 세상이었다.
글자처럼 마음 수행으로서 운기 토납을 수련하는 곳은 구파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절한 심법을 익힌 망나니가 강호에 얼마나 많던가.
‘연배에 비해 과하게 침착하다.’
섬예를 보며 생각했다. 심기가 깊은지는 모르겠으나, 검날처럼 서늘하게 벼린 기질은 느껴졌다.
저 칼이 소년의 무공 자질과 어우러져 어떤 힘을 뿜어낼까.
심상치 않은 소식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입황성 대총관으로서 흡족했다.
그때였다.
“대총관님.”
“말씀하시지요.”
대총관 임진명이 성주의 어린 직전제자에게 대답했다.
정연신은 곧장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마광익 정연신이 사천 출행을 청합니다.”
“그리 말씀하실 듯했습니다.”
대총관이 자신의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정연신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척후 임무를 내려 주십시오. 구파 셋에 십삼천 셋, 더하여 당문까지 세를 다투는 곳이지요. 주둔 중이라는 창천대와 순천익은 자리를 지키는 걸로도 벅차지 않습니까?”
“전력이 없습니다.”
대총관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본성에 있는 신검단 무력대가 둘뿐이지요. 빼낼 수 없는 이들입니다.”
“…….”
“그 외에는 각 대에 조금씩 남은 인원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합당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무인의 기량이란 담금질 이전에 쉼으로써도 절정에 이르는 법이지요. 대부분 달포 내에 임무를 마치고 온 이들입니다. 본 총관부조차 그들을 곧바로 차출할 권한은 없습니다. 율법이 그렇지요.”
칼같은 이야기였다. 말투와 의미가 모두 분명했다. 끝으로 대총관은 한숨과 함께 말을 맺었다.
“현재로서는 별도의 무력대를 구성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의 말이 맞다. 휴식기에 들어선 무인들의 시간은 율법의 보호를 받는다.
입황성의 특징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온 고수들이 비단 무공 수련에만 몰두하지는 않는다 했다.
강호인의 목숨이란 언제 사그라들지 모르는 것이니, 본성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고.
“…….”
정연신은 입을 다물었다.
섣불리 호기를 부릴 수 없는 사안이다.
백색은 물론 마광익주를 포함한 흑색과 청색 전력이 전원 사라졌다.
강호 독보를 논할 만큼 평이한 사건이 아니었다.
혼자 떠날 수도 없고, 총관부에서 그것을 허가해 주지도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텐가? 아니다.
“가용 전력이 구성된다면 임무 출행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정연신이 말했다. 눈을 치켜뜬 대총관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저희로서도 마땅히 강구해야 할 일이지요.”
“압니다.”
실은 입황성주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허나 감히 꺼낼 수 없는 이름이었다.
명족 신물인 천하목의 수호자인 바, 본성에서 가장 존귀한 그녀의 거취를 감히 논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입황성주는 결코 가벼이 움직이지 않았다.
혈염교 본단과 같이 명확하고 거대한 목표가 없다면 더욱 그러했다.
‘날 특별히 대해 주신다 하여 선을 넘을 수는 없어.’
소년은 생각했다. 애써 절대자에 기대고자 하는 마음을 접었다.
“인원을 꾸려 오겠습니다.”
정연신의 말을 익히 예상한 걸까. 대총관이 다시 한번 머리를 주억거렸다.
저벅.
그걸로 끝이었다. 정연신은 곧장 돌아섰다. 청색 장포의 밑단이 세차게 움직였다.
그 광경을 말없이 눈에 담은 총관부 문사들이 침묵으로 배웅했다.
* * *
마광익 전각으로 향하지 않았다. 발길을 정반대로 돌렸다. 바깥에서 불퉁하게 서 있던 태염룡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딜 가는 거지…… 요?”
“입황마가.”
짧게 대답했다.
본성에 복귀할 때 마연적이 당부한 바가 있다.
마가에 와서 주연정의 사죄를 들으라는 말이었다.
소년은 지푸라기라도 잡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제법 큰일 난 거 같은데. 표정이 심상치가 않아. 아, 이건 혼잣말.”
옆으로 따라붙은 태염룡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정연신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네 배속은 확인받았다. 전각으로 돌아가도 좋아.”
“아니 아니. 함께 가십시다. 무료한 건 딱 질색인데, 이쪽이 더 재미있을 듯해서.”
태염룡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연신에 대한 흥미가 가득해 보였다.
소년은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태염룡과 대거리 따위를 할 여유가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말없이, 그대로 곧장 걸어 입황마가의 정문에 도달했다.
정연신은 고풍스러운 현판을 올려다봤다. 마가별각(馬家別閣)이라 쓰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헌원창이 꾀를 내어 주연정을 곤경에 빠뜨렸을 때였다. 청명과 백미려가 함께했다.
익숙한 곳마다 마광익의 향취가 어려 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사천에 도달해 있었다.
소년은 수단을 가리지 않기로 했다.
“정 공자님.”
당혹감 어린 표정으로 자신들끼리 수군거리던 문지기들 중 한 명이었다.
정연신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뒤로 손짓했다. 몹시 공손한 품행이었다.
“언제든 곧장 안내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헌데 곁에 계신 분은……?”
“하인입니다.”
“아, 그렇군요. 마땅히 대동하셔도 좋습니다.”
문지기가 옅게나마 긴장감이 깃든 미소로 말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정연신이 발을 뗐다.
옆에서 기막히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태염룡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입황마가의 정경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주기적인 손질이 닿아있는 정원이 푸르렀고, 내원의 전각들은 정갈하게 늘어서 있었다.
정연신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외가의 어른들을 불러 달라고 익히 얘기한 참이었다.
“연신!”
기별이 빨랐다. 벌써부터 나온 소년이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영준한 얼굴. 입황마가의 후계자인 마세인이었다.
정연신을 보자마자 대명문가 특유의 엄중한 기질이 사라졌다. 환한 웃음이 제법 그림 같았다.
“돌아왔다는 말은 들었지! 네가 복귀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다들 그럴걸?”
크게 반겨 준다. 이제는 선명히 기억나지도 않는 성년식 때 정연신이 덕담을 해준 까닭일까.
방계 황족 주연정의 치맛바람과 별개로 마세인의 호감은 날이 갈수록 더해지는 듯했다.
얼핏 정연신을 향한 동경도 엿보였다.
“요즘 마광익 섬예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커졌는지 몰라. 본성의 화제라고. 며칠만 더 지나면 마광익 전각에 직접 찾아가는 놈들이 나올걸? 네게 무공 조언을 들으려고 말이야.”
싱긋 웃으면서 말한다. 정연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 띤 눈으로 그를 쓸어 보던 마세인이 태염룡을 흘깃했다.
그는 정연신의 등 뒤를 따르다 말고 마가의 전각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네 뒤에 계신 분은? 기도가 범상치 않은데.”
“하인.”
“음…… 그래. 우선 들어가면서 얘기하는 게 어때? 알다시피, 이곳 어른들은 의복 같은 채비를 갖추는 데 오랜 시간을 들이시지 않아서.”
“그래.”
정연신은 마세인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문득 그의 눈길이 방계 사촌의 손에 들린 옥돌을 향했다.
어린아이 주먹 크기인데, 묘한 기운을 지닌 청옥이었다. 바닷빛이 아름다웠다.
시선을 곧바로 눈치챈 마세인이 피식 웃었다.
“보령옥(寶靈玉)이라고 해. 얼마나 정순한 공력을 쌓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어. 본가의 무인들이 심공을 수련할 때 주로 사용하지. 내공 밀도를 확인하려고.”
“그런 기물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철족이 만든 겁니다요.”
태염룡이 불쑥 끼어들었다. 정연신을 비꼬는 얼굴로 하인처럼 말하는 모습이 썩 어울렸다.
“우리 주인어른이 모를 수밖에 없지요. 철족과 연이 없으면 구할 수가 없는데, 더하여 소모재랍디다.”
“소모재?”
“탁월한 견식이군요.”
마세인이 슬쩍 웃었다. 애초에 태염룡이 하인이란 말을 믿지 않은 듯했다.
“연신. 이건 이렇게 쓰는 거야.”
한순간이었다. 마세인의 손가락 사이에 끼인 보령옥에 금이 갔다.
옥돌 전체로 퍼진 실선들이 가뭄에 갈라진 땅덩어리 같았다.
“기파가 발생하지 않도록, 내공의 정량을 지켜서 한 줄기만 밀어 넣으면 돼. 기운이 순정할수록 많은 금이 가. 소모재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지.”
“그렇군.”
정연신이 대꾸했다. 평상시라면 호기심이 들 만한 물건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먼발치에서 걸어오고 있는 주연정과 입황마가의 여러 원로들, 그리고 외조부 마연적의 모습만 눈에 담았다.
“하나 줄게. 내부를 관조하면 제법 재미있을 거야.”
그 와중에 마세인이 정연신의 손에 또 다른 보령옥을 쥐여 주었다.
일찍이 후계자의 자리를 포기한 정연신에게 부채감을 느끼는 걸까.
뭐라도 베풀어 주고 싶은 듯했다.
그동안 정연신은 입황마가의 어른들과 마주했다. 마연적이 당장 안아줄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연신아. 이리 와 주어 참으로 고맙다. 그새 세인이가 보령옥을 선물한 모양이구나. 아주 보기 좋다.”
“외조부님.”
정연신이 격식을 갖추어 포권하자 입매 주름이 흘러내린다. 실망한 듯했다.
그때였다.
“섬예.”
칠흑 같은 궁장을 입은 여인이 입술을 뗐다. 몹시 곱게 나이 든 얼굴에 지고한 품격이 흘렀다.
황족 주연정. 마세인의 모친이다.
금선팔법(金仙八法)이라는 황가의 무공을 극성까지 익힌 무인이었다.
눈길부터 고고했다. 뒤편에 늘어선 입황마가 원로들의 기질 역시 그 못지않았다.
저마다 정연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압박감이 실로 대단했다. 의도하지 않고도 다가오는 기파의 물결이 해일 같았다.
“외가의 여러 어른을 뵙습니다.”
그들에게도 인사한 소년은 문득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대충 쥔 보령옥에 맺힌 월광이 영롱했다.
“방치된 혈족의 권리로 요구할 일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정연신은 담담하게 말했다. 동시에 그들의 존재감을 이겨내고자 진기 한 줄기를 일으켰다.
뭐라도 보여 주면 한결 나아질까 싶었다.
기파 한 점 없이, 보령옥을 향해 정가동공의 내력이 파고들었다.
구슬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세인이 보여줬던 광경처럼 금이 가지는 않았다.
다만 사라졌다.
사아아―
먼지처럼 흩어져 오른다.
정연신의 손 위로 수증기마냥 피어오른 분말에 은은한 달빛이 아롱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