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195
◈ 검뢰섬릉식 (3)
“이 사숙도 나이가 들었구나. 중요한 이야기를 잊었어.”
천주진인이 유현을 살짝 내려다보고 말했다. 입황성 사절들이 머물고 있는 운향원을 나선 뒤였다.
중추절의 가을을 머금은 황토에서 두 사람의 발소리가 담담하게 울리는 가운데, 사숙질은 조곤조곤 말을 나눴다.
“아…… 연신이한테 다른 용무가 있다고 하셨죠. 잊으셨다니, 없던 일 아닌가요?”
고개를 살짝 든 유현이 새까만 눈썹을 치켜올리며 묻는다.
검절 사숙은 본파에서도 엄중하기로 유명했다.
해야 할 일을 도통 잊는 법이 없고, 자신의 행실에 걸맞는 잣대를 화산파 제자들에게도 들이대는 편이었다.
문파 바깥의 무인들에게나 고매한 검객이다. 본파 내에서는 살아있는 염라였다.
‘돌아가면 폐관수련을 지시받을지도 몰라. 연신이랑 검까지 나누셨으니.’
유현의 입꼬리가 힘없이 내려갔다.
사숙은 정연신에게 유독 누그러진 모습을 보였는데, 그야말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검객으로서 검절의 호의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척박한 화산의 돌 봉우리에서 실제 매화를 찾는 것보다 어렵다 할 만큼.
배분 낮은 본산 제자들이 목도한다면 질시를 느낄지도 모른다.
유현 자신이 어린 나이에 장문제자가 되어 동년배에서 겉돌게 되었듯이.
‘입황성은 그런 거 없나? 나보다 더한 놈이면서 수하들이랑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그 수하란 인간들이 백기린에 태염룡인 것도 어처구니없지만.’
사질의 묘한 기색을 눈치챈 사숙이 유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는다.
“마광익주의 칼 다듬기가 놀랍지 않았더냐.”
천주진인은 섬예를 떠올렸다. 기이한 소년. 서안에서 마진의 보호하에 있던 백색무사가 아니었다.
지난 시간 어떤 수라장을 거쳤는지 짐작이 가지 않을 만큼 괄목상대했다.
불가사의한 자질이 그나마 입황성에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사마외도에서 태어났다면 천하의 근심거리가 되었을 터였다.
유현의 하얀 얼굴이 불퉁해졌다.
“저는 외날이 아니라 양날로 만들 줄 아는데. 매화검법 전반 십초는 이미 관통했단 말입니다.”
“마광익주의 검초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네가 그처럼 강력한 경파를 다루는 건 아주 지난한 일이다. 십 년은 일러.”
“연신이가 저보다 몇 곱절은 더 빠르게 살긴 하지요. 그래도 열 배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 모르렵니다. 정진에 방해돼요. 조바심만 생기고.”
“비교는 심마를 만든다. 묵묵히 적공을 쌓으면 언젠가 네 검에서 노을이 필지니, 아주 좋다. 네가 면벽수련의 오의를 깨쳤구나. 돌아가는 대로 몸속의 자소단 기운부터 갈무리하거라. 벽곡단을 준비하마.”
“사숙?”
오래된 사숙질 간이었다. 실없는 말을 몇 마디 더 주고받은 뒤에야 본론이 나왔다.
유현은 자신의 머리 위에 상투를 틀고 얹은 하얀색 관모를 매만졌다.
친우의 자질에 대한 열등감을 말로 풀어내다 보니 도사의 상징마저 흐트러진 까닭이었다.
“연신이한테 패검종주에 대해 말씀해 주시려 한 거죠?”
“그래.”
천주진인은 제 옆구리 어림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 모습을 그늘진 눈으로 바라본 유현이 입을 연다.
“그자가, 다시 종남을 치려고 할까요? 이제는 유아독존이 따로 없는데…….”
“청성 장문인께서 입적하셨다. 직접 겪어보니 섭리로 검법을 담금질했더구나. 본산 아래가 아니었더라면 매화검진이 아니라 내 심장이 베였을 터. 패검종주는 무엇이든 해볼 만한 절세검객이 되었으니, 본파도 마땅히 대비해야 할 게다. 패검종이 다시 일어날 것이고… 섬서에 칼바람이 불겠지.”
검절의 어조는 전에 없이 침중했다. 불현듯 유현이 힐끗 뒤돌아봤다.
“연신이의 원수인데,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나중에 알려주는 게 맞다. 일전을 앞둔 검객은 심신을 벼려야 해. 원수의 이야기가 도리어 검날을 무디게 만들까 저어되는구나.”
“아.”
유현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검성께서 내치는 일검은 산봉우리도 쪼갠다던데…… 뭐, 입황성 흑색 정도면 체면치레는 하겠죠. 맹주께서 살수를 펼치실 리도 없고.”
턱없이 낮은 내 무공이 문제지.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소년 도사가 문득 얼굴을 든다.
“그보다, 당문이 이제 왔다고 하던데요. 뭐 이렇게 늦게 당도한 걸까요? 개파대전이 끝나고서야…….”
“사천성도 어지럽다. 순마련의 주요 고수들이 섬예에게 격살당했고, 십전문주는 중태에 빠졌다 하더구나. 당문이 사천을 제패하자면 참룡맹회를 넘는 걸로 족할진대…… 근래에 맹회가 아니라 금시문(金翅門)이란 단일 문파로 통합되었다지. 저항이 만만치 않았을 거다. 오히려 이곳 한중까지 당가주가 몸소 행차한 까닭을 모르겠구나.”
그때였다.
이야기를 잇던 천주진인의 눈매가 가라앉았다.
“유현아.”
“예?”
“멀리서, 마광익주의 기파가 격랑처럼 퍼지는구나. 모종의 일이 벌어졌나 보다.”
* * *
정연신은 제갈청아와 함께 나아갔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세가주급 인사들이 출타하는 시간은 반 시진이 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제갈청아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맹회 본단 앞의 청학루 꼭대기일지도 모른다고만 추측했다.
언화련을 비롯한 고위 인사들이 극비리에 풍류를 즐기는 곳이라고.
입황성 대주는 세가주를 감당하지 못한다.
명약관화였다. 분명한 사실이다.
흑색의 영역 끝자락에 머물던 대주 세 명이 황보가주를 합공했다.
지금껏 무위의 차이가 크지 않은 적들을 단기 결전으로 격살했던 것처럼, 역으로 정연신이 그렇게 당할 수도 있었다.
자색 인근의 고수들은 천하 어디서든 절대적인 호족으로 행세한다 했다.
지위와 배분 탓에 개파대전을 관망하고 있던 제갈가주와 모용가주 등은 소년을 하수로 내려다봤다.
연배와 입지를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오기 전에 탈취해야 해.’
소년은 생각했다.
청기린의 시신을 제때 확보하지 못하면, 어쭙잖은 명분으로 제갈세가를 선제 타격한 셈이 된다.
분명히 궁지에 몰릴 것이다. 정연신은 지금 맹회에 지어진 세가의 심처를 범하고 있다.
제갈가주의 부채가 마광익주의 목을 잘라도 뭐라 할 이가 없다.
무림의 이치가 그랬다.
역적으로 지목되었던 일부 무림인들이 신출귀몰한 보신경으로 멸족을 피한 이후, 황실은 대외적으로 입황성과 선을 그었다.
황조의 존엄성 탓에 입황성의 적은 역적이 아니게 됐다.
결국 강호와 입황성 사이에 남은 건 힘의 차이뿐이었다. 그래서 무림맹이 결성됐다.
맹회가 구성된 지금.
팔가의 가주들이 한데 모이면 입황성을 논할 만했다.
명분과 무력을 갖춘 강호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보통 상황이 아니었다.
그 탓에 입황성 수뇌가 전례 없는 자질을 지닌 신임 마광익주를 출두시킨 것이다. 사전에 무림맹의 사기가 꺾이도록.
이제 종장이었다.
시간 싸움이다.
타악!
땅을 박찰 때마다 흙먼지가 일었다. 담장과 전각들이 쏜살처럼 스쳐 지나간다.
달리는 한편으로 뭇 사람들의 시선을 챙겨야 했다. 단발성 임무로 놓고 봐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성과 분노가 엉켰다. 진기 운용의 기저에 합리적인 생각을 깔다가도 문득문득 노화를 느꼈다.
날 선 단풍잎이 머리에 들어선 듯했다.
투명히 울리는 이명, 살기 묻은 몸짓, 경파에 실린 분노, 이성보다 차갑게 번뜩이는 상단전.
“정문이… 침입자로군……!”
“아가씨가 함께 계신다!”
“인질인가?”
“마광익주다! 극성으로 전개하라!”
경공 질주를 막아서는 놈들이 많았다. 전열만 일곱 명에 뒤로도 겹겹이 달려들고 있었다.
녹색 무복의 왼쪽 가슴에 백학을 새겼는데, 누구 하나 소년을 얕보는 기색이 없다.
제갈세가 현천대(賢天隊). 남녀가 고르게 섞인 무력대다. 저마다 비범한 안광을 번뜩였다.
진법무공을 장기로 삼는다 했다. 세가의 정예였다.
후우웅!
놈들의 몸에서 인위적인 바람이 일었다. 유형화된 기파였다. 구름처럼 뭉클거리며 살갗까지 와닿는다.
누가 봐도 고절한 진식이 발동됐다. 이름난 운백참절진(雲魄斬絶陣)일 것이다.
일반적인 진법이 아니라 했다.
기관진식과 주변 기물을 이용하지 않고, 각각 익힌 내공심법을 모종의 방위로 공명시켜 무력 상승과 상대의 둔화를 동시에 꾀한다고 들었다.
입황신창 악수림이 정연신의 출행에 앞서 주지시켜줬다.
―네 내공 기질을 알고도 요상한 검진을 쓰는 수가 있거든? 대뜸 들어가지 말고 기파부터 깎아버려. 내가 본가에서 깽판 치고 청색 달았을 때, 재수 없는 제갈 놈들한테 호기 부리다가 홀몸으로 삼도천 건널 뻔했단다. 너는 그러지 마. 걔네 겁나게 치사하더라. 합공 엿 같이 하더라구.
언행마저 반로환동한 선배가 귓전에 재잘거리는 듯했다.
세가의 얼굴과 같은 무력대라면 신검단 산하의 무력대와 격이 다르지 않다.
엄청난 전력이었다. 잠시나마 흑색고수의 발목을 잡아둔다 해도 누구나 수긍할 터였다.
그래선 안 된다.
‘빠르게.’
상대의 기파를 깎는다는 건 아주 모호한 개념이다. 수단이 흔치 않다. 허나 정연신에게는 마땅한 방도가 있었다.
화악!
흑색무복 바지 끝단에 새까만 질풍이 감겨든다. 다리 세맥까지 내달린 광륜기가 종아리 옆 중도혈(中都穴)에서 빛으로 산란됐다.
발 복숭아뼈 세 개의 혈도가 무형의 갑주를 두르기까지 한순간이었다.
발산 구결. 입황성주의 술잔에서 태어난 걸음걸이가 움텄다.
‘환익이보.’
쿵!
기세를 뚫고 간합을 창출하는 발걸음이다. 내디딘 발을 중심으로 기의 파동이 번졌다.
무색 물결이 대기를 밀어낸다. 찰나였다.
일곱 무인이 자욱하게 뿜어내던 기파까지 닿더니, 역으로 회전을 시킨 것마냥 사방으로 풀어 헤쳤다.
진법의 이치는 오묘하다. 각각의 축에서 합치된 공명이 공능을 자아내는 법이었다.
현천대 고수들의 운백참절진처럼 편의성이 큰 진식은 더했다. 한순간 힘이 흩어졌다.
그들의 머리 위를 부유하던 솔잎들이 솜털처럼 내려앉기 시작했다.
마광익주와 십 보 거리였다.
“……!”
제갈세가 현천대. 제각각 눈썹을 꿈틀거리거나 입을 살짝 벌리면서도 쇄도를 멈추지 않는다.
세가의 저력일까. 가솔로서 기백이 대단했다. 정갈하게 벼려진 삭풍처럼 질주해 왔다.
발길마다 일어나는 흙먼지가 투명하다. 정제된 보신경이었다.
기량도 그랬다. 진법의 축이 금방이라도 다시 맞춰질 듯했다. 그들 틈에서 다시금 일어나는 기파에 올올이 흩어져 오르는 솔잎들.
정연신과 부딪치기 직전에 복구되면 최상이고, 그렇지 않는다 해도 영역 사수에 힘쓰겠다는 결기였다.
뒤편에서 달려드는 동료들과 동선이 엉킬 수 있는 것이다.
괜찮아.
소년은 생각했다.
진정 무서운 건 돌아올 제갈가주다.
최연소 대주의 안위를 살피고자 입황성에서 극비리에 뒤따라 나온 소수 전력은, 정연신이 심무련 군세를 맞이할 때도 나서지 않았다.
허나 세가주급 앞에서는 다를 터였다.
자칫하면 본래의 의도를 불문하고 방파대전으로 비화되는 수가 있다. 사정이 어지러워지기 전에 끝내야 한다.
‘신법, 풍신.’
파악!
발가락 끝마디에서 종아리까지 이르는 장무지신근을 공력으로 격하게 조였다.
전신 미세 근육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 발밑에서 낙엽이 소용돌이친다.
강풍이 눈꺼풀을 쓰다듬고 간 순간, 돌연 현천대 무인들의 얼굴이 확 커졌다. 빠르게 접근한 것이다.
운백참절진이 채 복구되기 전이었다. 삽시간에 뒤로 처진 제갈청아의 기척이 구경꾼들과 함께 자리했다.
“출검(出劍)!”
선두에 선 현천대 고수가 기합처럼 외쳤다.
갸름한 얼굴에 깃든 경악을 채 갈무리하지 못했는데도, 그녀는 유려한 도약과 함께 검을 내뻗었다.
뒤로 편 다리가 칼과 일자를 그린다. 제 몸을 화살로 삼아 검격 경파를 한 줄기로 벼려냈다. 깊게 연마한 신검합일의 자세였다.
파파팍!
좌우로 펼쳐진 적들의 대열까지 봉황의 날갯짓마냥 조여들어 왔다.
진법 묘리가 없이도 비범한 간격으로 합공을 가해 온다. 저마다 뻗어낸 협봉검의 좁은 검극에서 솔잎과 단풍이 갈라졌다.
찌르기 경파들이 나뭇잎 부대끼는 소리를 낸다. 대기가 스산하게 울렸다.
방심이 없다. 필생의 일격이다.
빛살처럼 가속을 거듭하는 상단전의 기감 속에서.
소년은 새삼 자각했다.
이제 만방에 이름을 알렸다.
남직례 청야곡에서 별호를 떨친 후기지수도 아니고, 폐쇄적인 사천성에서만 왕으로 불리는 신진고수도 아니다.
한중 땅에서 본격적인 강호 무림의 영역에 들어섰다.
오늘날 천하가 주시하는 초고수다.
세상의 칼숲과 검산은 더 이상 소년을 소년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고수를 예우하는 만큼 하수들도 목숨을 건다.
흑색을 논할 만한 강자들은 시작부터 필살초를 준비할 터였다. 개파대전 제패를 기점으로 요행을 바랄 수 없게 됐다.
마광익주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도산검림에 전력으로 맞서지 않으면, 그간 정연신이 겪어 온 적수들처럼 죽는다.
눈앞에 들이닥친 현천대 고수의 일검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공기를 매섭게 가르는 질감이 살갗으로 느껴졌다.
‘시화무극수.’
소년은 오른쪽 날개뼈의 천종혈(天宗穴)에 광륜기를 심었다. 팔뚝 상완근을 수축시키면서다.
근육과 세맥의 미세한 움직임이 내공력의 힘을 증폭시킨 찰나였다. 공력 폭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등 뒤에서 능법광륜기가 벽력탄처럼 터졌다. 정연신의 오른손 주먹이 대기를 찢어발긴다.
귓가를 쓸어올리는 권법 경파와 함께 측면으로 짓쳐 들어갔다.
제이초, 진벽.
쩌어어엉―!
권격이 반탄력마저 집어삼키고 솟구쳤다. 산산조각 난 검의 파편들이 광풍 속으로 섞여든다.
철편에 사방팔방으로 반사된 햇볕이 현천대 고수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체공하고 있던 그녀가 나뭇잎처럼 비틀린 궤적으로 나동그라졌다.
발경력 직격타에 흉골이 뭉개진 듯 헛숨을 내뱉으면서다. 진벽의 여파를 버티지 못한 것이다.
소년은 새된 소리를 듣고도 쉬지 않았다. 한 호흡을 꿰뚫는 합공 검격들이 쇄도하고 있었다. 좌방 셋에 우방 셋이다.
무공수위가 높은 고수를 사냥하는 데 특화된 움직임이 맞다. 몸을 놀리기 늦었다.
놈들의 얼굴에 득의한 기색 따위는 없었다. 지척까지 다가와 검을 내치는 표정이 무심했다.
얼핏 봐도 검세의 틈이 생기지 않도록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소년은 권격으로 뻗어 올렸던 주먹을 풀었다. 다섯 손가락을 펴는 순간, 광채를 산란시키며 떨어지던 검의 파편들이 그 자리에서 멈춘다.
손바닥 소부혈, 노궁혈, 중자혈의 일직선 혈도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흡착과 발산 구결이 절묘한 균형을 이뤘다.
‘강호가 날 온전히 마광익주로 대한다면, 나 또한 마광익주로서 고절하게 행세하겠다.’
만천화우.
제갈세가와 마광익주가 물러섬 없이 부딪치는 자리였다. 섬예의 발걸음은 이름처럼 화려한 빛줄기와 함께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