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197
◈ 검뢰섬릉식 (5)
“우리 섬예, 오랜만이야. 난 다 보고 있긴 했는데…… 개파대전 때 멋있더라? 조금 반했지 뭐야.”
가볍고 작은 손길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단발을 목덜미까지 늘어뜨린 흑색 장포의 소녀, 악수림이었다.
정연신과 시선이 마주쳤다. 반로환동한 대선배의 눈동자가 까맣게 반짝였다.
“지켜보느라 눈 빠지는 줄 알았단다. 특히 검귀랑 있을 때. 안법이 내 특기도 아닌데 말이지. 하여간, 이건 묵과할 수가 없겠더라고. 너무 위험했어.”
말끝에 이르러서는 제갈가주를 돌아본다.
투명한 눈길이 맞닿았다.
악수림은 신검단주 밑으로 입황성 최강을 논했다.
제갈가주는 무림맹회를 계획하고 세가를 반석 위에 올렸다. 어느 쪽이 우위인가. 강호가 주목할 대치였다.
쿠웅!
그 사이에 전각을 일곱 채나 무너뜨리고 당도한 거한이 정연신의 좌측에 섰다. 엄청난 존재감이었다.
아무리 봐도 명족 같지 않은데, 귀가 웬만한 순혈 씨족 못지않게 뾰족하다.
머리칼을 완전히 뒤로 넘겨 넓은 이마를 드러낸 얼굴도 수려했다.
소년을 힐끗 내려다보는 눈이 짙은 호기심을 띠고 있다.
“네가 섬예로군. 이 몸은 입황하후가(入荒夏侯家)의 위진(威震)이다.”
체구만큼 두꺼운 목소리였다. 몸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리는 듯한데, 음성에 스며 있는 공력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한 마디가 나올 때마다 정연신의 머릿속을 울렸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명족이 진기 토납을 거르지 않은 결과일까.
천권용력신(千拳龍力臣) 하후위진(夏侯威震).
천림대(踐林隊)의 수장이자 입황성주의 심복으로 유명한 자였다. 마찬가지로 대주인 만큼 흑색 장포를 입었다.
정연신보다 머리가 세 개는 더 큰 신장 탓에 피풍의(披風衣:망토)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연신은 짧게 포권을 올렸다.
“하후 선배를 뵙습니다. 신야현의 정연신입니다.”
우선은 통성명으로 끝났다. 눈앞에 절세고수가 있는 까닭이었다.
악수림이 입술을 뗐다. 제갈가주를 삐딱하게 바라보면서.
“섬예를 스승으로 모시는 당가주도 올 거야. 모용이랑 제갈 정도만 확실히 꺾어놓으면 돼. 어려운 일은 아니지 싶어. 이 조잡한 맹회는 아직 미완성이니까.”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종달새처럼 명랑하게 지저귀는 듯한 느낌.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벼워지고 있었다.
악수림은 매끄러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보자보자…… 나, 당가주, 덩치, 섬예면 너처럼 희멀건 놈이랑 모용 멍청이 정도는 치고 빠질 수 있지 않을까? 네 불쌍한 수하들과는 칼질이랑 발놀림부터 다르니까. 보아하니 모용가 놈도 지금 다 알고서 칩거하고 있네? 기파 봐. 꿈쩍도 안 하잖아.”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 안에 보여선 안 될 게 있나 본데, 모용 놈은 너한테서 손 뗐나 봐. 우릴 느끼고는.”
제갈가주와 모용가주를 파격적으로 언급한다. 허나 과언도 아니다.
정연신은 무서운 속도로 접근해 오는 기파 둘을 감지하고 있었다. 깊디깊은 내공 기척이 익숙했다.
당가주와 천주진인. 이만한 난리를 벌였으니 이변을 눈치채고도 남았다. 당도한 그들이 누구 편을 들지도 뻔했다.
맹주는 중립이다.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만 봐도 알겠다.
검성 현소백은 민간에서 신선으로 불리는 절세고수였다. 낭인 출신임에도 번번이 초월적인 면모를 보여줬다고.
기감이 얼마나 드넓을지 짐작하기 힘들다. 마광익주가 소란을 일으킨 순간 청기린의 일도 눈치챘을 법했다.
정연신과 대면했을 때 백도의 정상화를 언급하며 고뇌를 드러낸 만큼, 지금 한중 땅에서 가장 강력한 고수는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무림맹주로서 입황성의 편을 들 수는 없으나 제갈가주의 손을 들어주지도 않을 터였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
악수림과 하후위진의 역할은 하나다. 섬예의 행사를 지키는 것. 전쟁도 불사하고 진입했으나 불필요한 교전은 피하는 게 맞다.
천하에서 가장 큰 적진의 한복판이다. 제갈가주가 그들을 뚫으려 하지 않는 한, 그들도 제갈가주에게 위해를 가할 필요는 없다.
영락을 지켜보는 걸로 족했다.
“근래의 입황성은 여유 전력이 없을 터인데…….”
제갈가주가 조용히 얘기했다. 무슨 마음이든 얼굴로 내색하지 않는다.
부채로 입술만 가린 모습이 여전히 여유로워 보였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안다. 그 태도는 허장성세였다.
악수림은 흑단처럼 흘러내린 귀밑 머리칼을 툭 뒤로 넘겼다.
이어 자신의 하얀 목덜미를 껄렁하게 주무르는데, 호기롭고 미려한 모습이 자유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우리 섬예는 누가 봐도 입황성의 미래잖니. 보배를 너희 쪽에 보냈는데 본성이 손 놓고 구경할 줄 알았어? 우리가 병신이니?”
막말로 빈정거리는데도 제갈가주는 마땅히 대답하지 않았다.
입황성의 흑색 최강자는 세가주와도 자웅을 겨룰 만하다.
입황신창이 악가창(岳家槍)을 또 다른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풍문은 허황된 소문이 아니라 했다.
한편, 천권용력신의 권법은 동산을 쪼갠다고 전해진다. 당가주와 검절도 익히 알려진 초고수였다.
더하여.
정연신이 일으킨 소란은 몹시 컸다.
제갈세가 영역의 담장을 부쉈다. 환강도 터뜨렸다.
무림맹회는 명백히 강호의 상층부로서 예민한 감각을 지닌 이들이 즐비했다.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몰려오고 있었다.
모든 게 제갈가주에게 악재다.
청기린의 시신이 있을 전각이 신경 쓰인다 해도, 입황신창과 천권용력신을 앞에 두고 한눈을 팔 수는 없다.
제갈가주는 고상한 자태로 지붕을 딛고 선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정연신은 몸가짐을 바로 했다. 오른쪽만 있는 소매를 가다듬고, 전신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입황성이란 울타리를 새삼 거대하게 느끼면서.
이제 고인을 만나러 가야 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을 떨던 제갈청아가 뒤따라붙는다.
결의 어린 표정. 끝내 제갈가주의 명망을 백도 정파에서 눌러 죽이겠다는 의도였다.
“마광익주.”
제갈가주가 담담한 목소리로 불렀다.
정연신은 돌아보지 않았다. 걸음도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이야기 속의 제갈무후에 빗대어질 만큼 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처럼 천지 분간하지 못하는 행실은 좋지 않다. 이르게 객사할 게다. 천고에 다시 없을 꽃도 피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법. 네 자질이 고금을 논한다 해도 뭇 강자들이 곱게 보지 않으리라.”
“너희 족속들은 생각을 반대로 하지 못하는군.”
정연신은 발을 떼면서 입만 열었다.
“맹회가 내게 잘못 보였다. 오늘을 기억하고, 이 년 뒤에 꺼내 보도록 해.”
침묵을 일으키는 말이었다. 무시무시한 경고이기도 했다.
천하에 다시 없을 속도로 질주하는 재능이 훗날을 기약한 것이다. 달인일수록 등골이 섬뜩해질 이야기였다.
백학선을 든 절대자의 말이 그친 순간.
으하하하하―!
“제법 오연하지 않은가!”
하후위진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불러온다. 호탕한 정도가 아니라 광풍 같은 울림.
정연신은 광륜기로 고막을 둘러칠 뻔했다가 애써 참으며 전각 안에 들어섰다.
가느다란 숨결을 몰아쉬고 있는 제갈청아와 함께였다.
뒤편으로는 무수히 많은 기척들이 솟아올랐다.
무슨 연유냐고 저들끼리 묻는 군웅, 한달음에 달려온 소검후를 비롯한 후기지수들, 그들보다 앞서 당도한 천주진인까지.
당가주의 기척에 매달린 헌원창의 기파도 느껴졌다.
큰 소란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어찌 이런 일이…….”
“마광익주가 개파대전을 제패했다 하나, 입황성이 이리 도리에 어긋나게 굴어도 되는 것인가?”
“입황신창?!”
“흑색 무복에 저 풍채, 명족…… 천권용력신이 여기에……?”
“마광익주! 어찌하여 이토록 참람한 일을 벌인 게요?”
청일문주의 혼란 섞인 목소리도 울렸다. 맹회 방문 초기에 제자들과 함께 정연신과 손속을 나눴다.
파백총람의 초반부를 장식한 인물이다. 호전적으로 방문해서는, 정연신에게 가르침을 받았노라 웃으며 헤어졌다.
맹회 내부에 마광익주에게 호감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는 걸 방증하는 사내였다.
뒤쪽으로 모여든 숫자가 기백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높은 담을 한달음에 뛰어오르고, 지붕을 타고, 전각의 난간에 발을 올리고 앉거나, 제갈가주의 맞은편 지붕 위에 우뚝 선 사람도 있었다.
“본래 저런 자였던 거요. 저 연배에 저만한 무위… 입황성주의 직전제자란 위치까지. 천하가 제 놀잇감으로 보이지 않겠소? 고고한 민생의 깃발을 뒤집어쓰고 무림을 제대로 보지 않는 게지.”
“오만이 과하여 맹회의 첨병에 검을 들이댄 건가. 안하무인도 정도껏이라야 할진대.”
“입황성은 정녕 백도와 사마외도를 동일시하는 것이외까! 이 삼락문(三樂門)은 개파 때부터 민의와 함께하였거늘! 모두가 황보세가 같지는 않단 말이오!”
적대감이 들불처럼 번졌다.
제갈세가는 무림맹회의 구심점이다.
타 방파의 무인이 맹회 본단에서 제갈의 영역을 범했으니, 정연신이 만들어낸 폐허를 보고 분개할 수밖에 없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급기야 날붙이가 뽑혀 나와 내공을 머금는 소리까지 울렸다.
스릉! 차차창!
악수림과 하후위진을 보고도 일전을 준비하는 이들이 많다.
뒤늦게 달려온 악예림도 그랬다.
길게 땋은 머리칼이 까맣게 흔들린다. 몸에서 일어난 기파가 백로의 날개 같은 옷자락을 휘날렸다.
양손으로는 창을 잡아들고 있었다.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고모 악수림을 눈에 담고도 잠시 흠칫했을 뿐이다.
마광익주가 패악질을 부린다는 소식을 듣고 왔는데, 상상 이상으로 초토화된 전각군이 그녀의 마음을 싸늘하게 식혔다.
‘생각과 다르다고, 내 편견이 과했다고, 부끄럽다고 생각했는데…….’
무림맹이 존재하는 한중에서 심무련 토벌을 맡은 건, 입황성의 마광익주였다. 적지에서 또 다른 적을 상대하는 일인데도 거절하지 않았다.
서봉로에서 심무련 무공 군세를 상대하기 전에는 속내도 들었다. 섬예는 호적수를 죽이고 제 자신을 억눌렀다.
그 마음이 선룡 제갈현의 조언에 풀어헤쳐졌을 때는, 제왕검형을 연상케 하는 쾌검식이 드러났다.
이후.
그녀는 개파대전의 일정을 앞당긴 맹회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봤다.
편협하고, 아집이 크고, 자신이 옳으니 무엇이든 허용된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행태.
제갈가주에게 받은 섬예무학 파훼법을 두고 읽을까 고민하던 언화련을 말리기도 했다.
역겨워서.
그런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어.’
아찔하게 인상을 쓴 악예림이 질끈 눈 감았다.
무엇이 옳고 어떤 게 그른가. 섬예는 정말로 어떤 사람일까. 멀리서 신음하는 현천대 무인들 중에는, 자신과 교분을 맺은 친우들도 있는데.
자그마한 전각으로 들어간 마광익주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어찌하여 이런 패악을 부렸는지 해명하라!”
“입황성이 본맹을 도모하고자 하는가?”
공기가 뜨거워졌다. 내가고수들이 밀집된 영역은 대개 열양지기로 채워지는 법이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그랬다.
내공을 일으킨 순간 기파가 마찰된다. 집단전에 있어서는, 공력이 강할수록 호신강기의 성취가 높아야 했다.
“십삼천부터 어찌해야 그대들의 명분이 서는 게 아닌가 말이다!”
“섬예는 나와서 직접 입을 열라! 어찌하여 제갈가의 처소에 숨어든단 말인가?”
분노가 열기를 낳고, 열양지기는 다시 노화를 북돋는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기파의 도가니탕이 점차로 팽창하고 있었다.
무림맹회였다. 병기를 패용했다면 그 자체로 이미 고수다.
허나 입황신창 악수림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듯했다.
“종알종알 시끄럽네. 제갈가주도 다칠까 봐 못 덤비는데, 무인이란 것들이 입만 살아서는.”
“백도 정파맹회에서 어찌 이리 무도한가!”
일부 무인들의 외침은 그녀가 입술을 떼는 순간 멎었다.
“흑색이 셋이나 모였는데.”
짝다리를 짚은 악수림이 가볍게 뒷짐을 진다.
피식 웃으며 대꾸했는데, 등 뒤로 대충 쥔 창에서 공력의 광채가 번뜩였다. 뒷골목의 왈패 같은 태도가 묘하게 어울렸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나 봐? 지금은 여기도 입황성이란다.”
지학을 갓 넘긴 듯한 소녀의 얼굴로 군웅들을 비웃는다. 선공을 취하지 않을 뿐, 숫제 기름을 붓고 있었다.
악수림이 타고난 성격이 그랬다. 절벽 끄트머리까지 몰려도 얄밉게 웃을 성품이다.
고절한 무공과 파격적으로 어우러진 성정이 입황신창이란 별호를 만들었다.
원성이 거세졌다. 자리답지 않은 야유까지 울렸다. 일부 맹회 고수들은 검격 경파를 완전히 벼려냈다.
일촉즉발. 전례 없는 규모의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하찮은 씨족이 끝 간 데 없이 떠들어대는군! 참으로 경멸스럽다! 벌레 같은 것들, 모조리 짓눌러 죽이고 싶구나!”
쾅! 쾅!
하후위진이 제 주먹을 맞부딪쳤다. 무색의 내공 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발경으로 말미암아 유형화된 진기다.
천권용력신의 무력을 방증하는 광경에 일부 군웅이 움찔할 때였다.
저벅.
그 막강한 경력의 파편들을 꽃잎마냥 가르는 옷자락이 있었다. 아주 새까맸다. 묵묵한 걸음 소리와 함께 움직였다.
바람과 함께.
어린 마광익주가 홀연히 나타났다.
“……!”
뭇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소년의 양팔이 출중한 용모의 청년을 받쳐 들고 있었다.
곤히 눈감은 남궁세진의 낯빛은 시신답지 않게 생기가 흘렀다. 모종의 술수를 가하지 않고는 있기 힘든 일이었다.
“아…….”
악예림이 제 손으로 입술을 막았다. 붉어진 눈시울로 신음을 참는다.
눈치가 비상한 몇몇은 빠르게 사정을 파악한 듯했다. 곳곳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청기린은 백도 강호의 유명인사였다.
얼굴을 아는 이들이 많다. 후기지수들부터 그랬다.
모용명준이 슬그머니 몸을 빼고 사라졌다. 공손민은 입을 크게 벌렸다. 소검후와 유현도 그러했다.
태염룡은 담장에 쪼그리고 앉아서 전각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옛 친우의 몰골을 보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도착한 선룡 제갈현의 얼굴은 숫제 혼돈으로 물들었다.
경악과 의문이 비대하게 일어났다. 군중들의 소란이 커졌다.
“청기린이 어찌 제갈세가의 전각에서?”
“진토에 묻혀야 할 시신이 왜 저리 온전한가……!”
제갈가주는 마땅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자신을 견제하는 입황성 초고수들의 눈길을 감내해야 했다.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맹주의 조력도, 재빠르게 상황을 눈치채고 내뺀 모용가주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
‘궁지에 몰렸군. 야인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그는 담담히 생각했다.
여기서 나온 청기린 남궁세진의 시신은, 그 자체로 너무도 명백한 증거였다. 제갈세가 구역의 방비는 철통같았다.
섬예가 일으킨 소란만 봐도 알 만했다. 청기린의 몸에 스민 모산파의 흔적도 마찬가지였다.
술법무공에 조금이라도 조예가 있는 명숙이라면 누구든 연원을 눈치챌 것이고, 남직례의 모산파와 남궁세가, 제갈세가의 관계까지 나아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터다.
그래서 미연에 차단하려 했다. 입황성의 초강수를 고려하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
거기에 제갈청아의 증언이 더해졌다. 종막의 절정이었다. 침을 살짝 삼키고 앞으로 나선 소녀가 일련의 사정을 공표했다.
“뭇 호걸들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정심안(靜深眼)이라 불리는 소졸로서, 제갈가의 눈입니다.”
영롱한 음성에 모든 정황이 담겼다. 담담한 말이 이어졌다.
남궁세가 직계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장로원주, 시간이 흘러 입황성 사절로서 맹회에 파견된 섬예 정연신, 어린 마광익주에게 체면을 내줄 수 없었던 부친의 결단, 제갈청아의 말을 듣고 기꺼이 나선 마광익주의 행보까지.
들을수록 경악이 거듭됐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이 무슨…….”
“천하가 맹회를 비웃을진대…….”
차마 백학선을 든 절대자를 노려보지 못한 사람들의 눈길이, 남궁세진의 시신에서 조금씩 올라갔다.
무수히 많은 망막에 마광익주의 얼굴이 어린다.
홀로 세가의 방진을 뚫었다. 적으로 만난 자의 시체를 수습하고자 질주했다.
맹회 한복판에서 세가와의 무력 충돌을 겁내지 않았다.
맹회 군웅의 얼굴들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분노와 결기로 물들어 있던 기색이 부끄러움을 찾는다.
백도 정파였다. 삼락문주의 말이 맞다. 모두가 썩은 강호는 아니었다.
그때 문득, 한쪽에서.
입황성 섬예의 곁을 가장 오래 지켜온 헌원창이 입을 열었다.
즉석에서 시구를 짜낸 듯, 장송곡 같은 가락이 짧게 흘러나온다. 낭랑하여 듣기 좋은 목소리로.
소년의 순간은 천금인데[少年一刻値千金]
적수는 그 검에 영원히 맺혔소[永結劍中好敵手]
“…….”
입황성과 남궁세가의 일을 모르는 자는 없다.
침묵이 해일처럼 번졌다. 수백의 군중들이 입을 다문다. 절경처럼 펼쳐지는 모습이었다.
제각기 어떤 감흥을 느끼고 있을까. 마음의 종류를 헤아리기 힘든 자리였다.
고수 아닌 자가 없는 장내가 구름처럼 일어난 기파에 휩싸인 가운데.
헌원창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이제 꺼지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