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291
◈ 연꽃 (10)
당대 마광익주는 우애를 겪어본 적이 없다.
형님 둘은 신야현의 아이들이 그를 괴롭히도록 부추겼다.
정가장의 체면을 떨어뜨리는 일이 마을에 널리 알려지지만 않는다면, 장주께서도 묵인하시리라고 설득한 것이다.
옳은 말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
정연신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또래들이 남몰래 시비를 걸어 오거나 따돌려댈 때마다 자리를 피했다.
삼류무가라 해도 무림 방파였다. 어설프게나마 들은 풍문이 많았는데, 강호의 대협은 무공으로 민초들을 괴롭히지 않는다 했다.
모친 또한 강호인이었으니 정가동공으로 마을 사람과 드잡이질할 수는 없었다. 사마외도로부터 지켜 주지는 못할망정.
형님들이 비웃었다. 나약한 놈이라 했다. 모친을 잡아먹고 나온 놈답지 않게 기백이 없다고.
지금은 먼 얘기였다. 동시에 지워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따돌림을 당해 함께 타 보지 못한 단오절 그네는 입황성의 흑색 위계에 오른 이후에도 마음에 남았다.
선룡 제갈현의 부채를 타며 새삼 깨달았다.
―돌 하나를 버리더라도 선수(先手)를 잡아야 한다는 이치인데, 이 선수라는 게 ‘중요한 의미’를 뜻하기도 합니다. 가치가 낮은 것과 높은 것을 분명히 구분하라는 가르침이지요. 청기린은 남궁 소가주란 허물을 버리고 무인 남궁세진을 취한 겁니다. 끝에 이르러 고매한 검객으로 갔군요.
그에게 바둑을 배워 검뢰섬릉식의 단초를 마련했다.
그의 학익선을 밟고 정가장 멸문의 흉수인 귀백신검의 뼈와 살을 갈랐다.
직계 혈육들에게도 받은 적 없는 은혜였다.
무림맹회의 대다수가 마광익주를 꺼려하는 가운데, 제갈현은 친우 청기린을 패사시킨 정연신에게 바둑과 삶의 이치를 알려줬다.
대협이었다. 남궁세진과 같았다.
입황성 바깥에서 교분을 맺은 호걸을 꼽자면, 제대로 된 형이 있다면 선룡 같으리라 여겼다.
마땅히 호감을 가졌다.
그래서 이 순간 상실을 느낀다.
정가장의 멸문 당시에 하인들의 시체를 보고 느낀 감정을 다시금 되새겼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리됐다.
정연신에게 선룡은 대가 없는 협의 표상이었다.
‘평안하길.’
마음에 매달려 있던 그네의 줄이 끊어졌다. 제갈현의 돌연사를 인식한 순간부터였다.
마광익주는 정해진 임무 경로를 이탈하기로 했다. 신검단 산하의 흑색으로서 지닌 재량으로.
“…월성문의 문도들이 나타나면 막아. 아무 때고 정체를 드러내도 좋다. 또 하나, 황보 망나니 외에는 언가제일권과 대적하지 마라.”
정연신이 허공으로 뻗은 손을 내리며 명령했다. 무미건조한 어조였다.
사아아―
능법광륜기의 경파로 하늘을 가득 채운 직후였다. 태염룡이 창안한 염강의 묘리를 이용했다.
흐릿한 광채의 파편들이 달빛 속에 파묻히듯 사라지고 있었다. 학의 깃털처럼 하얗고 푸르게 아롱지면서.
“잘만 쓰는구려. 조잡하다더니.”
양귀비쟁이가 놀리는 기색으로 분위기를 풀고자 했으나, 정연신은 웃지 않았다. 태염룡이 표정을 고치는 모습을 봤다.
망나니 같은 품행으로 몇 안 되게 사귄 친우를 잃은 놈이다. 대주가 수하에게 위로를 받아서도 안 된다.
“안가로 가라. 언가제일권과는 십 합 이상 손을 나누지 마. 제일권의 호신강기가 단단했다. 열양지기로 일점 타격을 노리되, 공세를 가하는 척 수세를 취하다가 도망가는 게 최선이야.”
“혹여 만난다 해도 도주가 가능하겠소?”
“내공이 더 깊어진 거 안다. 천주지문에서 그걸 다듬지 않았나?”
“짜릿한 눈썰미는 여전한데, 왜 대주의 눈이 뒤집어진 것마냥 싸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군.”
태염룡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 순간 그는 양귀비를 씹지 않았다.
태양신맥.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폭증하는 열양 공력에 대한 얘기였다.
황보 망나니 역시 태생적으로 정기신의 합일을 이루기 힘든 몸인데, 축기량만큼은 명족인 청명조차 넘어서서 마광익 제일이었다.
황보세가의 대공자로서 어느 쪽에 치우침 없는 무공 성향을 지녔다.
내공이 가장 중요한 공력 질주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으니, 내상을 감수한다면 초고수 앞에서도 경공 기동을 자랑할 만했다.
청명이 없을 때는 행동대장에 가까웠다.
“강호는 객사가 흔한 곳이오.”
“그래.”
정연신이 짧게 대답했다. 눈꺼풀을 살짝 내린 채였다.
“지인들의 죽음에 일희일비하지 마쇼. 당장 마광익이 어느 때라도 반절 이상 쓸려 나갈 수도 있소. 대주가 몸담은 강호는 대주가 고강해질수록 험난한 곳이 될 수밖에 없소.”
“이미 겪어 봤다. 사천에서.”
“그거야 아는데, 익숙해질 수가 없으니 하는 말이지. 웬만큼 성품이 뒤틀린 놈이 아니고서야 다 그렇소. 헌데 제갈 놈을 이렇게 보니, 나 죽고 난 뒤가 걱정이란 말이오. 재미있는 자질로 재미없게 살까 봐. 속도 은근히 물렁해 가지고.”
“닥치고 숨어. 신호하면 나와라.”
정연신은 천천히 발을 돌렸다. 몸에 맞춘 민무늬 장포의 끝단이 종아리를 살짝 쓸었다.
문지방 너머로 가까워져 오는 호족들의 기세가 삼엄했다.
광예결―염강을 강대한 침입자의 무력 시위로 받아들인 모양새였다. 당장이라도 검진 따위를 펼쳐 올 듯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벅.
제갈현의 시체와 흐느끼는 제갈청아를 뒤로하고 발을 디뎠다.
정연신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헌원창이 입을 연다. 큰일을 겪어 잠시간 죽상을 지운 기색이었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군. 대주가 어른이 되고 있구려. 저런 모습은 본 적이 없소.”
“나도 그래. 대주도, 이놈도.”
태염룡의 건조한 입김이 마광익주의 등에서 제갈현의 시신으로 흘렀다.
선룡이 쥔 부채는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 * *
예술적으로 화려한 장내였다.
은은한 묵향과 종이 내음이 좀처럼 흐려지지 않았다. 수십 명분의 연무장으로 써도 무방할 만큼 넓은 방인데도 그랬다.
현 줄기까지 광택이 흐르는 묵금과 대리석으로 조형된 바둑판, 빛깔 좋은 도료와 질 좋은 먹물로 수놓인 서화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격조를 느낄 만했다.
“제갈가주께서는 파문제자 같지 않구려.”
각진 얼굴을 지닌 중년인이 말했다. 고풍스러운 흑목 의자에 앉은 채 주변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그는 이내 앞으로 시선을 바로 했다.
맞은편에 동석한 인물이 있었다.
머리에 윤기를 띤 새까만 흑립을 썼는데, 둥글고 넓은 챙 아래로 반투명하게 흘러내린 면사가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주름 한 점 없이 올라간 턱선도 그러했다.
이처럼 고풍스러운 방의 상석에 걸맞았다. 장내의 화룡점정에 가까웠다.
“파문제자라.”
얼굴의 하관만 드러낸 사내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이 제갈 무맥의 종주가 하잘것없는 가솔들을 문하에서 쫓아낸 게다. 내가 곧 제갈세가이고, 내 손짓이 회풍무궁류(會風無窮流)의 새 지평을 여는데 어디에서 누구를 파문하는가. 무가치한 소리를 하려거든 돌아가라.”
“그럴 수는 없소. 본가는 언가권보(彦家拳寶)를 반드시 회수해야 하오.”
“또 같은 말을. 불가하다고 얘기하였다.”
“엄밀히 말해 그대가 허락하고 말고 할 사안이 아니오. 우리 가문의 문제외다. 언화련은 어디 있소?”
“내 반려의 일이자 장차 개파할 월성문의 일이다. 너희는 반드시 알아두어야 한다. 언가가 본문의 산하로 들어오지 않는 한 모든 제안은 무용하다. 언감생심 화련의 주해본을 바라지 마라.”
물 흐르듯 매끄러운 음성이었다.
우득.
언가의 중년인이 큼지막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등에서부터 팔뚝을 타고 올라간 근육의 윤곽 위로 거칠고 투명한 기파가 어른거린다.
붕산권열(崩山拳劣) 언태광(彦颱洸). 그는 팔대세가로 꼽히는 언가에서도 손꼽히는 권법가다.
절세고수를 대하는 자리의 사절로 나설 만한 고수였다.
“…우리는 충분히 양보했소. 하북의 광활한 토지도, 혜하상단(慧河商團)의 호위 수주도 말이오. 누차 전언을 보내지 않았소?”
“부족하다. 상승무공의 가치를 어찌 그따위 것으로 헤아릴까. 수백 년 면벽하던 소림의 명족 노승들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는 풍문을 들어 봤겠지. 난세가 다가오니 마광익주의 법력을 탐하는 게다.”
“본가를 후려치고자 수양 깊은 소림사의 승려들마저 깎아내리는구려……! 어불성설이외다!”
언성이 점차 올라간다. 이미 오랜 시간 은밀히 오가던 대화였다.
제갈가주의 웃음이 짙어졌다. 마치 분노를 유도하는 듯했다.
“소림에 빗대어지는 걸 영광으로 알아야지. 네놈들의 오성은 하나같이 미련하고 보잘것없지 않은가. 허울만 좋은 차기 가주의 위계와 가문의 부흥을 내 반려에게 떠맡길 때부터 알아봤다. 언가의 핏줄은 대개 성미가 급하고 제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지.”
“이자가 정녕!”
존귀한 팔가의 대호족, 언태광이 벌떡 일어섰다.
콰아아아악―!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에 있던 길고 두터운 탁자가 질주하는 지진마냥 갈려 나갔다.
황색 민소매의 옷자락이 격하게 펄럭거린다. 언태광의 몸에서 무채색의 경파와 호신강기가 동시에 일어났다.
장내에 폭풍이 들어온 듯 크게 뒤흔들렸다.
“당신은 제 손으로 아들을 죽인 후레자식이 아닌가! 무공과 존엄에 미쳐 혈육들마저 팔아먹은 작자야! 내 앞에서 가문을 운운하는 게 어처구니가….”
“너는 경청의 자세를 지니지 못했구나. 대의를 들을 자격이 없다.”
제갈가주가 중얼거렸다.
사락.
그의 양팔 소맷자락이 느릿하게 스쳤다. 새하얀 백학선을 쥔 채 팔짱을 낀 것이다. 무공의 기수식으로 보기 힘든 몸가짐이었다.
동시에.
우웅!
언태광의 전신에서 폭발적으로 뻗어 나오던 경파가 위쪽으로 흡입되어 끌려갔다.
천상의 옥황상제가 숨을 들이쉰 듯했다. 그야말로 찰나였다.
언태광의 두꺼운 눈썹이 경악으로 치켜올라간 순간, 흐릿하게 치솟아 오른 기운이 허공에서 구체의 형태로 뭉쳐지자마자 두꺼운 기둥으로 화하여 내리꽂혔다.
휘유우우웅!
그것은 천벌처럼 일직선으로 새겨졌다.
언태광의 정수리에서부터 사타구니 아래까지가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투툭, 하는 소음이 맥없이 울렸다.
머리와 몸통을 잃은 팔다리가 핏물조차 뿜지 못하고 널브러진 것이다. 절단면이 숫제 다른 공간에 접해 버린 모양새였다.
그리고, 뒤늦게.
거대한 원통형으로 투명해진 대기를 향해 장내의 공기가 빨려 들어갔다.
그 서슬에 사방을 장식하고 있던 금기서화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버렸다.
파라락―
제갈가주가 넓게 펼친 부채로 입을 가린다. 팔꿈치를 들어 올리는 몸짓마저 고아했다.
그의 몸을 두른 새하얀 장포의 빛깔이 잠시 동안 별스럽게 선명해졌다.
“저런 놈과 같은 공기를 마셨군. 불쾌하구려.”
말투가 바뀌었다.
저벅.
방 한쪽의 은밀한 문 틈새였다.
잿빛 민소매 무복을 걸친 근육질의 여인이 걸어 나온다.
권무공 언화련. 표정 없는 얼굴로 언태광의 사지를 힐끗하는 모습에서 중견 초고수의 풍모가 묻어나왔다.
“상공께서 기어코 일을 저지르셨군요. 제 오촌 당숙이셨는데.”
“그리 책하지 마시오.”
제갈가주가 웃었다.
“대의를 들어선 안 되는 자였소. 언가는 또 다른 놈을 보낼 수밖에 없을 거요. 심무련주에게 목이 꺾인 언가주를 대신할 이가 언 매뿐이었으니.”
“…….”
“무림맹이 염려된다면 기우라고 말해 주겠소. 패검종주가 검성을 홀로 감당했다는군. 구파는 애초에 발끝만 걸쳤고, 결맹을 표명했던 팔가의 다수가 빠졌으니… 지금의 무림맹회는 섬서 끝단의 군소 연맹체에 불과하오. 검성이 없다면 대방파라 하기 힘든, 근본 없는 잡것들.”
그의 기다란 검지가 부채의 측면을 쓸고 올라가는데, 손끝을 따라 금빛 글귀들이 은은한 빛을 발했다.
습관적으로 보이는 손놀림이 신묘한 술법 무공의 이치를 품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 내가 없으니.”
제갈가주가 부드럽게 뇌까렸다. 절대적인 기세를 사그라뜨리면서였다.
언화련은 한동안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술을 뗐다.
“제갈가의 추살대는 상공께서 절멸시켰으니, 의도한 대로 산서에 터가 마련됐군요.”
“이제 입황성이 남았소. 허나 놈들은 곳곳에서 깨진 중원이란 항아리를 막는 데 바쁜 형국이니, 고작해야 한 줌의 강자들이 월성문의 개파식을 축하하러 올 거요. 산서 비무대회로 말이오.”
“상공이 다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준비된 곳으로 와 주는 자들에게 어찌 패할까.”
그가 말했다.
* * *
따스해야 할 광륜기의 법력이 이전과 달라졌다.
불법(佛法)보다는 율법에 가까운 강대함으로 전신의 새까만 옷자락을 휘감고 있었다.
마땅한 호신강기를 짜낸 것도 아닌데 천상 신장의 철갑을 두른 듯했다.
기질이 그랬다. 실제로 철갑옷을 걸친 산서귀가주의 거대한 풍채와 묘한 대비를 이뤘다.
그 뒤편에 공야세가에 머물고 있던 온갖 호족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거대한 무리와 견주어도 무게감이 밀리지 않았다.
“흠.”
부리부리한 눈매를 지닌 중년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여러 차례 정연신과 부딪친 귀일태의 부친이다.
젊을 적에 북방 이민족들과 싸우던 대장군이었다더니, 몸가짐과 공력에서 거친 격조가 흐르는 듯했다.
어둑한 공기가 달빛과 어우러진 밤.
귀가주가 두꺼운 입술을 뗐다.
“현천문주 검운비라 했지. 놀라운 연배에, 그보다 더 경이로운 무위다. 내 제안을 하나….”
“먼지가 시야를 가리는군.”
마광익주가 허리춤의 검파에 한 손을 얹은 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