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303
◈ 연화나타(軟化哪吒) (2)
* * *
겨울 막바지의 바람은 건조했다.
사아아―
얼굴을 투명히 훑고 지나간다. 눈앞에 만전의 절세고수가 적으로서 웃고 있는 까닭일까.
낮게 깔린 흙먼지가 칼 뭉치마냥 서늘하게 발목을 스쳤다. 흑색 선배들과 제갈가주의 싸움이 일으킨 여파였다.
두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격의 위계로서 정연신의 선택을 받아들인 걸까.
그를 감싼 종극뢰의 꽃이 짙어질수록 후배가 염려스러운 듯 눈매를 굳히는 진명조와 손아귀를 몇 번 쥐었다 편 악수림이 한 걸음 뒤로 빠졌다.
주변을 훑는 기파가 차가운 게 호족들의 난입을 견제하는 모양새였다.
‘두 분이 개입하게 둬선 안 돼.’
아직 선배들에게 여력이 있을 테지만 절세고수와의 싸움에 통용될 정도는 아닐 것이다.
정연신이 밀리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 동귀어진을 불사하고 개입할 기세인데, 그때가 곧 두 사람이 목숨을 잃는 순간일 터였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절대로.’
정연신은 조급함과 불안감을 애써 가라앉혔다.
―오늘이다.
동시에 머리에서 상단전이 속삭이는 듯했다.
자신의 감각과 언화련, 법보와 제갈가주를 별자리처럼 이어 붙인 극상승의 무공 발상을 싸움에서 잡아채야 한다고.
일생에 드문 심득의 순간이란 느낌이 왔다. 직관적인 통찰이었다.
뇌리가 간질거렸다.
다른 무공을 창시했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머릿속에 새겨진 제갈현과 언화련의 시신 너머로 거대한 깨달음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당장은 형체를 파악하기 힘든 압도적인 영감이 느껴졌다.
‘분기점이다.’
장차 거대 방파의 수장들 및 절세고수들을 상대로 죄를 논하는 자가 될지, 혹은 태생적인 정기신의 불균형을 극복하지 못하고 잠깐 밝게 빛난 최연소 대주로 살다 갈지.
그간 겪었던 일들부터 어린 시절의 정가동공까지 환한 빛이 드리우고 있었다. 뇌리에 흐르는 기억의 광채였다.
이 순간 생사를 다투는 싸움에 임하면서 전에 없던 무공을 만들어야 한다. 초월적인 절세고수들에게도 살초로 다가갈 만한 신공을.
‘가능할까.’
그때.
스윽.
스무 걸음 멀리 떨어진 제갈가주의 손끝이 고아한 곡선을 그렸다.
선녀의 예장 같은 실타래들이 나풀거리며 놈의 주변을 둘러쌌다. 가닥가닥이 환강보다 강력한 자웅신편들.
[많은 걸 보여라. 이 자리의 강호 동도들이 네가 얼마나 고강했는지 기억하도록. 나는 너로 말미암아 월성(越城)의 기치를 세우리라. 입황성 또한 여느 문파와 같이 멸문할 수 있음을 천하에 알릴 것이다.]“시작하자.”
제갈가주는 말이 많다. 업보가 주둥이에서 흘러나오는 느낌이다.
정연신은 곧장 발을 뗐다. 몸에 두른 종극뢰의 거대한 연꽃을 짙게 만들면서다.
급속도로 증강된 힘이 몸속을 질주하며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일 보를 내딛는 순간 땅바닥이 터져 나갔다.
쾅!
흐린 빛무리가 발 뒤로 혜성처럼 이어졌다. 십리광요의 경공 여파다. 삽시간에 거리를 격한 정연신이 제갈가주의 면전에서 진각을 찍었다.
또 한 번 쿠웅! 하고 지반이 움푹 내려앉았다. 땅의 파편들이 흐리게 치솟았다.
‘심극기린.’
전신 발경으로부터 강풍이 일어났다.
높이 떠오른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는 가운데, 진각과 동시에 올려 친 북명검의 새하얀 궤적 끝에 제갈가주의 흑립이 휩쓸려 벗겨졌다.
빛살처럼 내려앉은 자웅신편 다섯 줄기에 부딪친 직후였다.
쩌저정―!
무지막지한 충격파가 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정연신은 신음을 삼켰다. 손아귀를 타고 들어온 반동이 엄청난 게 벼락이 팔뚝을 저미는 듯했다.
위아래로 좁아진 시야에서는 청기린의 시체를 욕보인 자의 얼굴이 비쳤다.
선룡 제갈현과 놀랍도록 닮았다. 가늘고도 뚜렷한 선을 그리는 이목구비가.
‘거슬려.’
저자는 부채를 휘둘러선 안 된다. 제갈현처럼 고아한 인물에게만 어울리는 무기다. 강호를 짧게 살아온 정연신에게는 그랬다.
아들을 죽인 자가 웃었다.
[입황성 멸문의 효시가 될 만하구나. 네놈은 자격이 있다.]목소리가 벌떼 소리처럼 웅웅거린다. 신령스러운 육합전성에 진언이 섞여 있었다.
자웅신편 열 줄기가 동시에 아래위로 겹쳐졌고, 개세적인 위력의 그물을 맞이한 대기가 흐리게 일그러졌다.
쩌저저저정!
북명검을 사방으로 튕기면서 빠져나왔다. 신법 풍신마저 동원해야 했다.
정연신은 주변의 바람을 몸에 휘감듯이 회전했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강기의 실타래들을 회피하는 와중에 날 선 삭풍이 살갗을 거칠게 훑어 올렸다.
갇혔다간 끝장이다.
저 자웅신편들은 극성에 닿은 술법 무공의 조화로 빚어졌다.
열 가닥에 깃든 공력과 변화가 모두 이기어검에 가까웠다. 신병이기를 스스로 만든 격이다.
[그 기예, 몸에 상당한 무리를 줄 테지. 얼마나 더 유지할 수 있겠나?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두르고서는.]제갈가주가 웃으며 재차 손을 저었다.
자웅신편들이 온갖 궤적을 그리며 뻗어 나왔다.
더 이상 출수에 꾀를 싣지 않는다. 종극뢰를 발동한 정연신이 검신에 법력을 온전히 집중시키지 못한 까닭이다.
북명검은 더 이상 푸른빛을 띠지 않았다.
멸마청강검이 지니는 상성의 우위를 스스로 봉쇄한 격인데, 제갈가주의 출수 속도에 대응하려면 종극뢰를 시전하고 있어야 했다.
반투명한 연꽃을 온몸으로 발하고 있기에 일대일 수 싸움이 그나마 가능했다.
전신에서 넘쳐흐르는 환강의 힘이 정기신 합일 상태가 자아내는 극한의 신속을 억지로 따라가 주고 있었다.
[네놈은 모른다. 입황성이 천하에 끼치는 해악을. 반드시 멸절당해야 할 성채가 버젓이 강호에서 질서를 흐트러뜨리고, 민초들을 위하는 양 행세하는 꼴이 얼마나 가관인가.]‘종극뢰는 곧 풀려. 이래선 안 돼. 죽을 거다.’
날숨과 들숨이 반복될수록 머리 한쪽이 암담함으로 물들었다. 무채색의 채찍 한 가닥이 그의 귓불을 베고 떨어지는 광경을 보면서다.
쾅― 하고 바닥이 폭발하는 와중에 귓전으로 화상 같은 통증이 끼쳤다. 죽을 뻔했다. 외줄 타기에 가까운 회피가 반복된다.
술법진에 갇힌 듯했다.
제갈가주의 초식 연계는 그랬다.
입술로 그림 같은 호선을 맺은 채, 금을 연주하듯 허공에 손가락을 튕기는 모습이 고아하다.
쩌저정! 콰아아앙―!
점차로 조여드는 자웅신편의 궤적들은 그렇지 않았다. 팔방에서 때리고, 치고, 찌른다.
검뢰섬릉식의 빛살 같은 궤적을 모조리 꿰뚫고 들어와서는 시화무극수의 왼손 움직임마저 완벽히 봉쇄했다.
그 사이에 터지는 충격파는 제갈가주의 길게 풀린 머리카락만 흩트려 놓을 뿐이었다.
청기린의 시신에서 섬예 무학의 파훼법을 도출한 장본인.
하수가 무공마저 통찰당한 상황이다. 합이 거듭될수록 상처가 늘었다. 외숙부에게 물려받은 장포가 점차로 가닥가닥 찢긴다.
군데군데 검게 짙어지는 부위는 출혈을 방증했다. 보신경의 격한 바람에 흩어진 핏물이 땅 밑에 점점이 새겨졌다.
몸을 둘러싼 연꽃이 옅어지고 있었다.
종극뢰의 효용이 다해 간다.
[굉뢰.]순간 시야 옆에서 흐린 빛줄기가 일었다. 보이는 광경이 먼저였고, 격통은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살이 움푹 깎이는 감각을 느낀 뒤에야 어깨를 관통당했다는 걸 실감했다.
‘봤는데……!’
푸확― 격렬한 통증과 함께 몸 곳곳에서 핏물이 터졌다. 술법 무공의 기둥이 내리꽂히는 와중에 자웅신편들마저 복부의 살점을 깊숙이 가른 것이다.
무인이 된 이래 이만큼 궁지에 몰리는 건 처음이다.
격통이 머리까지 치닫는 와중에도 분함을 느꼈다. 내공 수발력이 감각을 따라오지 않는다.
한 치씩만 더 빠르게 움직였어도 모두 회피할 수 있었을 텐데.
휘우우우웅―!
어느새 시야에 미치는 사방이 흐려졌다. 온통 자웅신편에 휩싸인 것이다.
제갈가주가 그리는 궤적은 정말로 술법진처럼 치밀한 투로로 조여들고 있었다.
이제 방어초에 가깝도록 내친 검이 맞닥뜨리는 충격파가 급격히 강해졌다. 고절함이 지나쳐 죽음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였다.
흑색 선배들이 한계에 이른 몸을 이끌고 언제 들어올지도 모른다.
정연신의 마음이 급해졌다. 과열된 혈류와 내공이 정수리 끝까지 질주했다.
타지에서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 서책과 무공 따위로 온기를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로 족했다.
우웅.
불현듯.
화악― 하고 뜨거운 느낌이 들더니, 상단전에서 꽃의 형상을 띤 감각이 피었다.
발밑에서는 물가에 꽃봉오리를 띄운 것마냥 흐릿한 동심원의 파동이 번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의념이 흘러넘쳤다.
‘왜 너희만 삼화취정의 연꽃을 피울 수 있지?’
하늘이 단명의 철퇴를 내리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건 너무하지 않나. 빌어먹을 하늘이 자신에게 준 건 어긋난 균형으로 인한 한계와 짧은 생애뿐이라는 건데.
혹시나, 정말로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평등해지겠다. 너희들의 연꽃을 딛고 올라서서라도.’
화아아악―!
물결처럼 번지던 무형의 파동이 전방으로 쏟아졌다. 자웅신편 열 줄기가 그를 향해 빛살처럼 짓쳐 드는 와중이었다.
뇌리에서 백열하기 시작한 상단전의 기운이 거세게 앞으로 몰아쳤다.
그것은 바다를 떠미는 광풍마냥 뻗어 나가 보이지 않는 물살을 제갈가주의 머리에 꽂아버렸다.
쩌엉!
정연신에게만 들린 소리였다.
언화련의 법보로부터 느낀 공조 현상을 재현했다. 상단전의 공능을 거대한 길로 빚어 제갈가주와 이어붙인 것이다.
정기신 합일이 자아내는 초상승의 느낌, 그 감각의 내밀한 골조를 그대로 끌어오는 통로였다.
제갈가주의 삼화취정 상태를 일시적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하늘이 정한 이치를 넘어서는 기예. 어째서일까. 명백히 상리에 어긋나는 일인데도 전신이 급속도로 가벼워졌다.
정가동공으로 닦인 몸과 신검처럼 날을 세운 감각이 공조 현상을 붙들기 시작했다. 온몸이 법보라도 된 것처럼.
그때였다.
전에 없던 무공을 순간적으로 정립하는 데 다소 긴 시간이 걸린 걸까.
눈앞이 빛줄기들로 가득 찼다. 자웅신편이었다. 더불어 짧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난입한 소녀의 뒷모습도 보였다.
“섬예야! 가!”
악수림이 제갈가주의 투로를 뚫고 들어왔다. 원래부터 내상이 심했던 탓에 입가로 죽은피를 흘리면서였다.
새까만 핏물을 머금어 검게 물든 입술을 달싹이는데, 정연신에게는 그 광경이 몹시 느릿하게 비쳤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잘 왔다, 입황신창.]불현듯 주변의 풍경이 선명해졌다. 자웅신편들이 제갈가주의 손아귀를 향해 통째로 빨려 들어간 까닭이다.
완전히 폐허가 된 공야세가의 장원, 사방으로 멀찍이 떨어진 채 그들을 응시하는 군중들,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진명조…….
그리고, 어느새 제갈가주의 손아귀에서 다시금 부채의 형상을 갖춘 백학선.
대적 불가의 일격을 뻗고자 힘을 모은 모양새였다. 입황신창이란 별호에는 그만한 무게가 존재했다.
홀연히 한걸음에 거리를 좁힌 제갈가주가 부챗살로 악수림의 목을 올려 친다. 기다란 궤적을 따라 대기가 흔들렸다. 허공에 지진이 일어난 듯했다.
그때.
쿠웅―!
가죽신 한 쌍이 백학선을 즈려밟았다.
[뭐?]위에서 떨어졌다. 별자리처럼 희미한 빛무리가 허공에서 흩어져 내린다. 경공의 여파였다.
십리광요로 내리꽂힌 정연신의 두 발이 허공에서 부채를 온전히 디딘 것이다.
이 순간 만천화우의 흡착력이 순환하는 태풍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섬예야…?”
마광익주 정연신은 제갈가주를 조용히 내려다봤다. 뒤편에 악수림을 둔 채였다.
부채를 밟고 선 양발이 천근추(千斤墜)의 수법을 자아내고 있었다.
백학선에서 재앙에 필적하는 경파가 몰아치고 있는데도 떨어지지 않고, 섬광처럼 흐르는 균형감으로 기이한 대치 상태를 만들었다.
파라락―
절세고수의 부채 위에서 길게 펄럭이는 흑색 장포가 신비로움의 극치를 띤다.
군데군데가 잘게 갈라진 탓에 선녀의 옷자락마냥 너울지는 모습도 그랬다.
“…….”
어느새 녹색 안광을 띤 제갈가주가 흔들림 없이 뻗고 있는 부채.
그 위에 양발을 앞뒤로 모은 채 고고하게 선 마광익주.
긴장감이 대기를 조였다. 출수 한 번에 서로의 생사가 결정될 듯했다. 멀리서 싸움터를 둘러싼 인파 속에서도 말 한마디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제갈가주는 눈동자만 올려 당대 마광익주를 노려봤다.
[…오래 살아선 안 될 놈이구나. 입황성으로 진군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겠어.]그는 팔대세가주로서 끔찍한 기질을 느꼈다. 패협 마연적이 다듬어진 신검으로 자랐다면 저럴까.
“진군이라고?”
정연신은 두 발에 힘을 실으며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았다.
이 순간 양손을 등 뒤로 모으는 몸짓조차 기수식의 일부로 화하는 와중에, 마광익주 섬예는 입술을 떼며 생각했다.
“허튼소리를 하는군.”
같은 조건이면.
“여기가 입황성이다.”
원숭이는 내 감각을 얼마나 따라올까.
[오만한 놈!]드물게 격노한 제갈가주가 이를 크게 드러낸다.
퀴유우웅―!
다시 한번 줄기줄기 갈라진 백학선의 깃살들이 색채 없는 강기(罡氣)를 둘러치며 무지막지한 기파를 일으킬 때.
‘상단전 공조… 삼화취정.’
부챗살 하나의 끄트머리를 밟은 정연신은 눈을 감았다. 찰나에 가까운 되새김이었다.
상대의 상단전 감각 중에서 낯익은 느낌을 그대로 가져와 몸에 완전히 동화시킨다.
언젠가 권무공 언화련에게서 느꼈던 정기신 합일의 감각, 부채를 쥔 신룡이 연꽃 너머로 끝없이 날아오르는 듯한 고양감.
신공비기(神功祕技).
선룡이화결(扇龍履花結).
우우우우우웅!
뒷짐을 진 정연신의 발끝에서부터다.
공력 파동이 번지는 속도가 자웅신편의 형상화를 순식간에 따라잡는다.
돌연히 백학선의 부챗살들 위로 거대한 무색의 연꽃이 벼락처럼 작렬하며 피어올랐다.
그것은 수백 줄기의 검격 경파에 가까웠다. 내공 운용이 신기에 이른 것이다.
[……!]제갈가주의 기다란 손가락이 강기 줄기들을 채 조율하기도 전.
정연신의 발바닥 용천혈에서 내뿜어진 발경력이 천둥 같은 굉음을 내더니, 삽시간에 불어나는 꽃잎의 형상으로 자웅신편 열 가닥을 모조리 불사르듯 집어삼켰다.
다시는 부채가 되지 못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