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425
◈ 무맥 (6)
* * *
훤칠한 두 사람이 먼 곳을 바라봤다.
호방한 인상에 높이 솟은 콧대. 굉장히 닮은 이목구비를 지닌 이들인데, 나란히 서 있다고 하기에는 입황성 청색 무복을 입은 청년의 자세가 비딱했다.
얽히기 싫은 것마냥 사선으로 한 걸음 물러선 모양새였다.
그보다 조금 더 연로해 보이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네 대주의 명령을 이리 어겨도 되는 게냐? 본성으로 귀환하라는 말을 전한 지가 언젠데, 이리 다시 나오고 말이다.”
“견문이 깊게 고인 우물과 같아서 모르시나 본데, 입황성 청색부터는 단독 임무가 가능합니다. 시국을 미리 헤아려 재량껏 움직인 뒤에 보고를 올리면, 징계를 내리든 상을 주든 윗선에서 알아서 하지요.”
“내 한때 산동 강호의 왕이었다. 입황성 아랫것들의 행동양식이야 별달리 알 바가 아니지. 여하간 세가와 달리 자유롭구나. 내가 황보 씨족을 이끌 적의 입황성은 군문과 같았다만…….”
“한 번 강호에 나서면 일상이 야전으로 바뀌더군요. 팔자 좋은 세가의 돼지들과는 달리 적이 많습디다. 당연히 재량도 클 수밖에요.”
언뜻 맥없어 보이는 청년의 말이 공손함과 비아냥을 제멋대로 오고 간다.
몹시 짙게 내려앉은 눈그늘에, 시뻘건 양귀비꽃을 질겅이는 모습이 그 언행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사내가 노인처럼 코웃음을 쳤다.
“말본새하고는.”
“조부님이야말로 여기서 뭐 하십니까? 모처럼 반로환동도 하셨는데, 저 같으면 가문과 절연한 손자 놈을 졸졸 따라다니느니 항주에서 주지육림이나 즐길 겁니다.”
“주지육림? 고기 말고 네놈을 나뭇가지에 매달고 싶은 심정이다.”
등봉현을 등진 조손이 먼 평야를 응시한다.
입황성 마광익의 태염룡.
전대 황보가주, 신수혜왕 황보곤.
그들의 시선이 뻗어 나가는 곳에 산동 제남이 있다.
옛 황보세가가 무소불위의 권세로 크게 번성했던 자리. 하지만 이 순간 두 사람을 향해 불어온 바람은 공허한 습기만 선사하고 흩어졌다.
“그래… 절연이라. 그래서 이름 넉 자를 버렸느냐. 입황성 아해들이 모르는 눈치던데.”
“뭐, 그렇지요.”
“어찌하여?”
“식솔이란 것들이 백성을 사사롭게 노역시키는데, 대공자 신분으로 거기에 대고 한마디도 못 했습죠. 협객 놀음보다는 죽을 날을 받아둔 제 목숨이 더 아까웠으니.”
“…….”
“황보란 성씨는 나름대로 유서가 깊지 않습니까? 죽은 식솔이나 저나, 선조들이 쌓은 이름을 물려받기엔 졸렬하고 비천합니다.”
“입황성의 무인 놀음은 잘하고 있구나.”
신수혜왕이 툭 던지듯 말했다. 하지만 태염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잎사귀 한 장을 베어 문 채 입꼬리만 올릴 뿐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름도 없이 사는 건 과하지 않으냐. 산동에서 제일가는 호족의 적장자가 말이다.”
“망한 씨족이 어떻게 산동제일호족입니까? 여하간 제 천명을 알기 전까진 태염룡입니다.”
“굳이 그리 죽을 거라면 자손이라도 남기고 가거라. 나는 재가할 마음이 없으니, 네 자식에게라도 이름을 붙여 줘야겠다.”
“턱도 없는 소리 마십쇼. 우리 대주의 각법이 날로 일취월장하는 걸 보면, 누구라도 자식을 아비 없이 자란 놈으로 만들기 힘들 겁니다.”
“무슨 말이냐?”
“이만 가 보겠다는 말씀입니다. 건승하십쇼.”
신수혜왕을 향해 건성으로 고개를 꾸벅인 태염룡이 돌아섰다.
이마에 영웅건을 쓴 청년과 흰 무복이 어울리는 소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스럽게 투레질하는 세 마리의 입황성 준마와 함께였다.
신수혜왕이 손자의 등에 대고 말했다.
“삼화취정도 이루지 못할 놈이 씨를 남기는 것보다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네 기(氣)가 쓸데없이 비대하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우리 대주는 정기신의 합일 전에도 초고수란 것들을 잘만 때려잡고 다녔습죠. 그까짓 둔화취정이 뭐 대수라고…….”
대충 대꾸한 태염룡이 말 위에 오르며 투덜거렸다.
“내공 화후가 얕은 것들이랑 다니려니 영 불편하군. 경공으로 하루종일 달리는 게 뭐 그리 힘들다고 역참까지 쓰는지.”
“입 좀 다물어 주세요. 양귀비 냄새가 독해요.”
백묘 신소빈의 머리칼이 좌우로 길게 흔들렸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앞으로 몬 까닭이었다.
곧이어 준마를 탄 세 사람이 황야를 가로지르기 시작했고, 헌원창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말발굽에서 일어난 흙먼지의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 * *
정연신은 원형의 나무 탁상 앞에 가만히 앉있다가 불현듯 의구심을 느꼈다. 소림승 중에는 명족이 많다고 들은 까닭이다.
소림 역시 입황성과 같이 목재를 지양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전각부터 탁상까지 나무가 아닌 게 드물었다. 마치 평범한 사찰처럼.
“부처는 윤회의 고리를 끊은 자일세. 그를 좇아 불가에 귀의했다면, 어떤 씨족이든 그 관습에서 벗어남이 마땅하지.”
양팔이 없는 외눈의 승려가 말했다.
신승 범허. 소림의 방장대사.
노승의 한쪽 눈에 정연신이 투명하게 담겨 있었다.
불가의 타심통(他心通)이라도 깨친 걸까. 마음을 꿰뚫어 보지 않고서는 던질 수 없는 얘기였다.
‘과연…….’
어릴 적에 들은 풍문 그대로다. 수행이 깊어 육신통(六神通)마저 얻은 소림의 고승. 정연신의 두 눈에 존경이 깃들었다.
소림 방장의 한쪽 눈이 구붓하게 휘어졌다.
“놀라지 말게. 다들 그리 묻곤 한다네.”
목소리가 굵직해서 농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정연신의 고개가 미세하게 옆으로 기울어질 때였다. 범허대사가 불쑥 물었다.
“올라올 때는 어떠했는가? 소림은 처음인 듯한데.”
“바깥에서 구경할 때는 고즈넉했는데, 들어오고 보니 산세가 험하더군요. 어릴 적에 올라왔으면 부친께 버려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내심 상당한 수준의 농을 꺼냈다고 생각했다.
그간 신검단주 용희명을 보고 풍류를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파의 고인들 중 누구도 웃지 않았다.
정연신은 문득 그들이 온갖 강호인의 신상에 통달할 수밖에 없는 절대자임을 깨달았다.
“말 몇 마디에 강호를 담는군.”
고검이 중얼거렸다.
곧이어 범허대사의 눈길이 주변을 느릿하게 훑었다. 무당, 화산, 청성, 아미의 절대자들이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넘겼다.
“입황성의 자색께서 입회하셨소. 이제 식순(式順)을 논해야 할 때인 듯싶구려.”
“오늘날 열리는 화산지약의 당초 목적을 상기해야 하오. 황보세가의 멸문과 같은 일로 강호에 피바람이 불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 이 비무회의 규칙이 생사결이라 하여 여러 강호인들의 죽음을 관망해선 아니 될 것이외다.”
범허대사의 말을 백약사태가 받았다.
아미파 뇌정관음은 입황성과 팽가 사이의 은원에 다른 피가 흐르는 것을 경계하는 듯했다.
사천 땅의 큰스님답다고 할 것이다. 정가의 군자는 내심 크게 감복했다.
“사태의 말씀이 옳습니다. 사사로이 날붙이를 들었다 해도 그들 역시 금수와 같은 생명을 지녔지요. 제가 벌인 일이니, 마땅히 그들을 긍휼히 여기겠습니다.”
정연신은 정가장 뒷산의 멧돼지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당연하게도 아미 장문인의 자애로운 시선이 그에게 돌아왔다. 본 적도 없는 조모의 칭찬을 받는 듯했다.
“저건 진심입니다. 핏줄을 넘어섰군요.”
내내 얼굴이 굳어있던 청성의 청수진인이 드물게 입을 살짝 벌린다. 감탄을 표함에 숨김이 없는 명족다웠다.
강호 절대자들의 회합은 그렇게 진행됐다.
“중재자가 필요하겠죠? 본파의 검절에게 살피라고 이를게요.”
“육왕(六王) 무맥이 녹옥검장을 찾아왔군. 이들의 비무는 우리 중 하나가 지켜봐야겠어. 쾌검이 몹시 빠르니…….”
“말씀하신 고검께서 그 일을 맡아주십시오. 본파의 청운적하검보다는 태극권이 더 부드럽게 받아넘길 수 있을 겁니다.”
나지막한 음성들이 오갔다.
뭇 대문파의 수좌들로서 화산지약 비무회의 규칙을 만들고, 그 대진을 정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범허대사의 품 앞에는 언제 띄웠는지 모를 서찰이 허공섭물로 펼쳐져 있었다.
숭산 아래의 녹옥검장에 묵고 있는 강호 무문들의 명단이라 했다. 무수히 많았다.
“대진은 이리 짜는 게 좋을 듯싶군.”
“조금 어색한데요? 구파와 입황성이 모두 흩어지잖아요.”
“피는 일찍 멎을수록 좋네.”
율하낭랑이 고검의 붓질을 지적했지만, 소년 도사의 모습을 취한 무당 신선의 얼굴에서는 완고함이 묻어날 뿐이었다.
이 순간 그들의 최우선 과제는 대문파간의 비무에 애꿎은 희생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엄밀히 말해, 그들은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 팽가의 수뇌를 징치하고자 연 비무대회의 곁가지였다. 사실이 그랬다.
풍문이 퍼지자 견식을 넓히고 이름을 알리고, 그로써 얻게 될 온갖 이권들을 취하고자 몰려온 자들. 구파와 입황성의 안중에 들어올 수 없는 이들이다.
정연신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별다른 악의를 품지 않은 구파 절대자들의 결단에 이리저리 파도처럼 움직이는 강호를, 앉은 자리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이 역시 자색의 강호였다.
‘너무 높아. 그리고…….’
위험하다.
자신이 오른 위치가 그렇고, 이만한 판을 자연스럽게 차릴 수 있는 강호 최상층부의 힘도 그랬다.
태모산성과 천극문 등의 십삼천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이제 자색의 무인이다. 강호를 두루 경계해야 마땅했다.
‘아.’
정연신은 불현듯 깨달았다. 무림에 두루 영향을 미치는 절대자가 아니라, 입황성 자색으로서 이 자리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화산지약을 계승한 당사자로서 남다른 태도를 지녀야 했다.
“정 시주.”
“예, 방장 스님.”
“청을 한 가지 받아주시오.”
범허대사가 말했다. 그는 의자의 팔걸이에 맥없이 널브러진 소맷자락을 드러내고도 고요한 무게감을 발하고 있었다.
정연신은 그의 외눈을 마주하는 데 상당한 기력을 들여야 했다.
“별다른 소란이 없는 한, 우리는 모두 자중해야 하오.”
한 줄기의 목소리에 실내를 흐릿하게 물들이던 먼지가 갈라지는 듯했다.
어떤 힘 대신 현기가 실린 음성. 정연신은 단번에 소림 방장의 의중을 헤아렸다.
말 그대로 무림 강호의 절대자들이다.
별것 아닌 행보에도 무수한 추측이 뒤따른다.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어떤 자와 교분을 맺어 함께 있는지. 그로써 온갖 문파와 상단의 움직임이 이어진다.
이 회합장에서 정해지는 모든 것들이 제 역할을 다하려면, 변수를 미연에 막는 게 첫 번째일 것이다.
정연신의 눈에 푸른빛이 스쳤다. 이해를 뜻하는 안광이었다.
“십오 년을 자중했습니다. 방장 스님께선 염려를 놓으셔도 됩니다.”
그는 담담히 확언했다.
* * *
녹옥검장.
장차 화산지회가 벌어질 장원이다. 팔방으로 여덟 개씩이나 되는 연무장을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란이 저물지 않았다. 광활한 강호 각지에서 몰려든 무림인들 탓이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흐린 만월까지 올라갈 기세였다.
“한 잔 더!”
“잠시 멈추게. 저자가 지금 소주천을 돌리는 듯한데…….”
“겁도 없이 그럴 리가.”
저마다 익힌 무공은 물론 어조마저 판이하게 다른 이들이 모였다.
논검이나 비무, 술자리 따위가 연일 벌어졌다. 개중에는 구름 속의 용처럼 추측만 무성하던 이들 역시 존재했다.
“저 여인이 장봉이라고……?”
“조용히하게. 주씨 황족일세. 황제가 친히 무당 장문인에게 입문을 청했다는…….”
높이 솟은 기와지붕.
그 끝자락에 앉아 한쪽 다리를 접은 여인이 아래를 힐끗한다. 술이 든 호리병을 쥔 채였다.
무당파 특유의 소나무가 수놓인 백색의 소맷자락이 마치 궁장처럼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반투명한 면사가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도 눈동자가 식별된다. 안광이 유난히 새까맣고 짙은 까닭이다.
수군거리던 무인들이 황급히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무당 장봉.
고검과 함께 화산지약 참가가 예정된 인물이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처마 아래의 연회장에서는 화산의 검절, 삼보검룡, 난검을 높이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섬서 무림인들 틈에 둘러싸인 세 사내는 매화 줄기처럼 꼿꼿이 세운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오연하다기보다는 고매한 모습이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황…? 입황성이다!”
“태염룡!”
입황성 일행이 녹옥검장에 들어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방파의 고수들은 서로를 경원시했다. 큰 행사를 앞두고 뒷말이 나오는 것을 저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기감만으로 인근의 공간을 장악하고, 장차 상대해야 할지도 모를 이들을 훑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태염룡의 입매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구파 신선들이 구름에서 내려왔군.”
“팽가는 어디에 있대요? 대주님은요? 기파가 느껴져요? 제가 할아버지한테 들은 말이 있는데…….”
신소빈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말고 문득 입을 다물었다.
서늘한 공기가 등을 두드리는 느낌. 보이지 않는 성벽이 주변을 둘러싼 듯했다. 습한 여름바람이 더이상 불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웬 사내의 그림자를 덮어썼다.
“입황성 원로원주의 손녀인가? 좋은 기감을 타고났구나. 하기야 핏줄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
두꺼운 목소리가 대기를 저민다.
순간 신소빈은 멀리서 신음처럼 쥐어짜인 외마디 말을 들었다.
대절패도. 언젠가 남궁가주와 쌍벽을 이뤘다는 팽가주의 별호였다. 어떤 강호인에게든 명부의 염라대왕으로 다가올 이름이기도 했다.
곧이어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짚었다.
분명히 빛살처럼 빠른 출수였는데도 굉장히 느릿하게 느껴졌다. 절대자의 시간은 그처럼 하수의 감각에 괴리를 일으켰다.
“네 조부가 무슨 이야기를 하더냐?”
신소빈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럴 새가 없었다는 말이 옳았다.
돌연 팽가주의 뒤에서 비롯된 듯한 그림자 하나가, 대절패도 팽가주의 인영을 집어삼킨 까닭이었다. 순간 주변으로 쏟아지던 월광이 은은한 자줏빛으로 변색됐다.
“…누구냐?”
팽가주가 물음을 건넸다.
“…….”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명백했다. 신소빈의 뒤를 점한 팽가주의 배후를, 또 누군가가 점한 것이다. 숨통을 막아버리는 듯한 적막이 주변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여기서.”
익숙한 목소리가 신소빈의 귓전을 때렸다. 그 음성은 여느 때와 달랐다.
엄청나게 맹렬한 패기가 번져 나왔다. 아스라한 달빛이 실린 밤공기가 물결처럼 출렁였다.
“화산지약의 개회를 알린다.”
“뭐라…?”
“팽가주는 도를 뽑아라. 입황성이 네 도전을 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