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463
◈ 천하오검
* * *
정연신은 한 걸음 물러섰다. 서리처럼 창백한 살갗을 지닌 칠사도의 목덜미가 그만큼 멀어졌다.
육합전성을 널리 퍼뜨린다는 느낌으로 검가를 발동시킨 뒤였다.
“…….”
넓은 음영이 펼쳐진 공터는 어느 순간부터 적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항상 옆에서 입을 놀리던 소천무적도 침묵했다. 그녀는 뒷짐을 진 모습 그대로 점차 희미해졌다.
정연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사아아.
잔잔한 바람을 따라 물결치는 나무 그늘 위로 어디서 넘어왔는지 모를 단풍잎이 소복하게 쌓여 갔다.
그래서 태모산성과 천극문의 침묵은 불그스름했다.
입황성과 화산, 청성과 같은 쟁쟁한 대방파들 틈에서 아직까지도 항주를 지배하고 있는 사마외도 십삼천.
이 순간 공터를 포위하고 있는 그들은 정예고수였다. 성취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내공으로 상단전을 두드린 지 오래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검의 음률에 깃든 의념을 어렴풋하게라도 느끼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정연신은 그들에게 말을 건넨 것이 아니었다. 신검 여뢰의 울음은 완전히 다른 이들을 향해 공간을 내달렸으니까.
‘와라.’
곁에 떠 있던 여뢰를 마음으로 부른다.
우웅.
검가를 공격초로 쓰지 않은 덕인지, 검신에 어떠한 균열도 생기지 않은 우윳빛 신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되돌아왔다.
그리고 정연신의 허리띠에 매인 송문고검의 손잡이를 우연처럼 툭 치고는 검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허리춤에 두 자루의 검이 자리했다.
사박.
칠사도가 그를 향해 돌아선다. 투명한 가을바람을 새까맣게 스치는 머리칼. 그렇게 스스로 움직여 놓고도 오히려 그녀 자신이 흠칫 놀란 걸까.
얼굴을 사선으로 지나고 있는 흑색 안대가 움찔했고, 그 반대쪽 적안에선 붉은빛이 일렁였다.
그녀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난…….”
“온다.”
정연신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말했다. 그의 말이 채 온전히 끝나기도 전에 칠사도 역시 그쪽으로 시선을 틀고 있었다.
스악!
공기 중에 희끄무레한 실선이 새겨졌다. 마치 공간이 찢어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짙은 황톳빛 지면을 떠다니던 먼지가 훅 하고 그 수직선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그 틈새에서 웬 인영이 연기처럼 빠져나왔다.
허연 김이 뿜어져 나오는 검을 대충 내려 쥔 모습. 얼마나 신묘한 진기 구조로 공력을 담아낸 건지, 붉은빛이 넓게 스민 칼날에서 치익 소리가 났다.
한껏 달궈진 무쇠가 찬물에 들어온 것처럼.
상리를 벗어난 행태였다. 외도(外道)란 말이 더없이 어울렸다.
“이거 쉽지 않은 건데, 오늘은 성공했구만.”
어떤 마을에서건 들을 수 있을 법한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눈이 뒤집혀 있는 화산 장문인을 떼어내느라 제법 애먹었네만… 달리 어쩌겠는가? 내 짧지 않은 생을 살면서 이토록 엄청난 호기를 부리는 후배가 처음인데.”
몹시 태연한 음성.
스윽.
정연신은 여뢰의 손잡이에 한 손을 올렸다. 상체 군데군데가 저릿하다. 그 모든 게 이곳 항주에서 입은 검흔으로, 실전에서 처음 겪은 패배를 상징했다.
“천극문주…….”
공터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돌멩이가 침음한다. 아직은 앳된 청년의 외양.
하나같이 머리를 묶어 올린 술법사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가마에 타 있는데,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태모산성의 수뇌일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런 천극문주의 현현은 술법무공을 익힌 자들의 눈에도 놀라운 광경으로 비친 듯했다.
‘검법으로 이형공허를…?’
정연신이 삿갓의 맹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길 때였다.
저벅.
거침없는 발걸음이 땅을 짓누른다.
천극문주였다.
그는 등 뒤의 삿갓을 머리까지 올려 쓰며 빙그레 웃었다.
넓은 챙이 그늘을 만들며 백태 낀 눈을 가렸고,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매만 침묵 속에서 두드러졌다.
“실망시키지 말게. 지난번처럼 터무니없는 오지랖을 또다시 부렸다간, 자네는 물론이고 입황성의 칼잡이들을 모두 다시 볼 수밖에 없네. 검객으로서 상종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일세.”
“…….”
“이 이상 다른 말은 필요 없겠지.”
천극문주가 검을 한 바퀴 돌리며 말했다.
포위망 한쪽에 자리한 천극문의 검객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의 몸은 완전히 정연신을 향해 있었다.
싸움에 가세한다면 치명적인 전력이 될 칠사도조차 안중에 두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런 천극문주를 도우려는 걸까. 태모산성 술법사들의 중심에 있던 청년이 문득 크게 외쳤다.
“개진!”
파지직!
순간 태모산성 측 진영에서 푸른 벼락의 줄기가 그물처럼 퍼졌다.
내공을 공명시켜 기세를 북돋는 진법마냥 술법사들 개개인을 이어붙이는 모양새였다. 사방으로 열기가 확 끼쳤다.
초일서의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항주 땅에 하늘의 뜻이 떨어졌으니, 본성의 술법무공만큼 신통한 의술을 지닌 명족이 서호에 있다! 지금은 그자가 주제를 몰라 제 마음에 드는 이에게만 의술을 베풀고 있으나, 태모산성주의 이름을 앞세우면 천하의 신의도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죽음만 피하면 된다! 광야일멸의 요절에 일조하는 자에겐 크나큰 대가가…!”
스윽.
선두에 있던 술법사의 머리가 불현듯 하얀 손아귀에 잡히더니, 곧장 기다란 척추째로 꿈결마냥 쩌저적― 뽑혀 올라갔다.
“목덜미가 못났네.”
매끄러운 음성.
어느새 박쥐처럼 허공을 가로질러 온 칠사도가 태모산성 고수의 머리를 쥐어 들고 있었다.
어떤 발경력이 운용된 걸까. 요사스러운 기질이 어려 있는 핏빛 운무가 일어나 시퍼런 벼락의 줄기들을 짓누른다.
굉장한 무재(武才)가 동반된 진기의 안개였다. 그 붉은 운무는 술법사들이 자아낸 번갯불 따위가 공터 앞 마을로 튀어 오르지 못하도록 대기를 채웠다.
그녀는 뒤늦게 푸확 하고 터진 핏물을 뒤집어썼다.
“…….”
칠사도의 붉은 눈동자는 몹시 맑았다. 언뜻 즐거움이 묻어나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는 뽑아낸 머리를 발치에 툭 던지며 새빨간 미소마저 지었다.
몹시 복잡하게 얽힌 세력 구도 때문이지만, 어찌 됐든 정연신과 칠사도가 한데 묶이는 건 처음 있는 일.
그녀가 모난 돌멩이들을 맡아 줄 것이다.
이제 잊는다.
‘마을이 무사하면 돼.’
정연신은 적측을 향해 뻗어두고 있던 일말의 기감마저 전부 천극문주에게로 돌렸다. 순간 기이한 압박감이 끼쳤다. 날카로운 침들이 온몸을 저미는 듯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야 그 실체가 느껴지는 무공 수위.
틀림없다.
지금 눈앞에 있는 맹인은 드넓은 강호 전역을 모조리 펼쳐도 천하제일검을 논해 볼 만한 존재다. 무
당 장문인, 신검단주, 패검종주와 더불어 천하에서 검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 이미 정연신은 절강에서 그와 맞붙었을 때 스스로의 부족함을 크게 느낀 바 있다.
이 싸움은 엄청난 분기점이 될 터였다.
그는 사저이자 제자인 백미려를 반드시 되찾아 생환할 것이고, 올겨울이 지나기 전에 정식으로 신검단주 용희명에게 도전할 테니까.
“강호의 선배 된 도리로 선수를 양보하고자 기다렸는데, 이래서야 자네가 부른 이들이 전부 오고 말겠군. 눈이 뒤집힌 화산파 장문인도 만만치 않지만… 특히나 소림의 범허대사는 나도 영 껄끄러운 인물인데 말일세.”
그러니 내가 출수하지― 천극문주의 웃음기 어린 음성이 검풍 속으로 스며든다.
한 걸음에 정연신의 지척까지 성큼 다가선 그가 칼을 올려 친 것이었다.
정연신은 순식간에 여뢰를 뽑아 내렸다. 그 일련의 발검 자체가 방어초이자 역공의 검초였다.
쩌어어어엉!
그의 몸이 포탄마냥 뒤로 날아올랐다.
검력에서 완전히 밀렸다. 천극문주의 출수는 무지막지한 강검이었다.
검공(劍功)의 핵심이자 기본이라 할 만한 묘리. 즉, 칼을 강하고 빠르게 휘두르는 데 통달했다. 잠시나마 기질적으로 패협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역시.’
정연신은 생각했다. 종극뢰의 발동 없이는 안 된다고.
화아악!
귓가를 격하게 스치는 바람 소리. 외도제일검의 일격에 실렸던 힘은 정연신을 머나먼 산등성이까지 밀어 올리고 있었다.
어느새 아득히 작아진 천극문주의 입 모양이 보인다. 삿갓의 맹인이 ‘일부러 힘을 뺐군’이라고 중얼거리고 있다. 정연신의 노림수를 눈치챈 모양새였다.
곧이어 천극문주는 한 걸음으로 훅 하고 상공까지 따라붙었다.
“자네, 죽다 살아난 보람이 없는 듯싶군.”
콰릉!
그때 이미 정연신의 몸은 거대한 무채색 연화의 꽃술이 되고 있었다.
단 하나의 커다란 꽃송이, 격렬한 공력으로 전신 세맥과 경혈을 천둥처럼 채우는 환강 공부의 극치. 투명한 잎사귀의 형태를 띤 기운으로부터 웅웅거리는 굉음이 번져 나왔다.
그 순간 정연신은 바람결이 한 올씩 느껴지는 세상에 들어왔다. 절세고수들이 지닌 바 모든 무공을 한 수에 펼쳐내곤 하는 영역이었다.
‘먼저.’
까마득한 허공에서 다리를 뻗은 정연신의 발등이 천극문주의 뒷목에 걸린다. 마치 이삭을 베는 낫처럼.
참야각법(慙夜脚法).
부끄러운 밤을 뜻하기에 참야(慙夜)다. 언젠가 고검진인에게 무례를 범한 뒤, 날이 저물 때마다 몸이 스스로 창안해 나간 무공.
쉬익―
정연신의 상체가 아래로 젖혀졌다. 곧이어 채찍처럼 휘어진 그의 다리가 천극문주를 목째로 지상까지 내던져 버렸고, 매끄러운 곡선을 그린 발끝에서 반투명한 힘의 파동이 터졌다.
콰아아아아앙!!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천극문주의 몸.
순간적으로 산등성이가 크게 흔들리며 자욱한 흙먼지를 뱉었고, 나무 몇 그루가 쓰러지면서 우지끈 소리를 냈다.
이내 태연한 음성이 울렸다.
“초식의 연계가 놀랍도록 자연스러워졌군.”
“목을 부러뜨릴 셈이었다.”
여뢰를 쥐고 산속으로 내려선 정연신이 대답했다. 팔방이 온통 황량한 나뭇가지로 채워진 숲. 싸움터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 속에서 검을 든 맹인이 웃고 있었다. 애초에 쓰러지지도 않고 제대로 착지한 듯, 삿갓은 물론 검푸른 의복에도 먼지 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정연신의 평정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보이지 않지만.’
외도제일검의 호신강기는 엄청나게 견고하다. 자기 자신의 검격마저 견뎌낼 수 있는 내공 방벽을 짜 둔 것처럼.
말 그대로 완성된 절세검객.
검상을 허용하면 그 자리에서 치유가 불가능하고, 권각법이나 금나수로도 치명상을 입히기 힘들다.
몹시 다양한 검법을 달인지경으로 익힌 자이기에 기예로도 압도할 수가 없다. 심지어 일검으로 공간마저 가른다.
‘공월무도 완성해 뒀겠지.’
정연신은 생각했다.
싸움을 어떻게 가져가야 저 목을 취할 수 있을까.
“느껴지지 않던 검이군.”
그때 천극문주가 정연신의 허리 쪽을 턱짓했다. 그는 실제로 두 눈이 보이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가만, 그 소나무 문양은…….”
“삿갓이 거슬린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연신이 불쑥 말했다.
“음?”
“겉치레 탓에 움직임에도 제약이 생길 텐데.”
“아, 호신강기도 햇볕은 못 막아준다네. 군중들 앞에서 강호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려면, 청산유수 같은 입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미끄러운 얼굴 살갗일세. 자네도 아까운 이목구비를 낭비하지 말고…….”
그때였다.
멀리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정연신의 어깨 너머 뒤쪽이었다.
“……?”
고수들의 감각은 물줄기와 같다.
평이한 싸움터에서는 대해처럼 넓게 펼쳐져 있지만, 제 목숨을 위협할 만한 적수 앞에선 폭이 좁은 폭포수마냥 상대에게 모든 기감을 쏟아낸다.
찰나를 오고 가는 초식들을 세밀하게 파악하려면 그래야 했다.
경지가 높을수록, 상대가 위협적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짙다.
때문에 이 순간 행낭과 지게 따위를 짊어진 약초꾼들이 접근해 올 수 있었다. 흉년이 그나마 덜하기로 알려진 항주다.
밭에서 수확물을 기대하기 힘든 만큼, 산신령의 자비를 바라며 이 산과 저 산에서 먹을거리를 찾는 것이다.
대도시를 살아가는 이들의 머릿수가 굉장히 많기에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저희, 저흰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뛰어! 얼른 뛰어!”
두 사람을 보고 기겁한 대여섯 명이 등 돌려 달아난다.
천극문주의 얼굴에 흥미가 어렸다. 언젠가와 유사한 상황. 외도에서 제일간다는 검객이 후배의 성장을 시험해 볼 만했다.
“진기 운용은 고검이 생각날 만큼 유연했네만.”
불현듯 천극문주의 검이 일직선으로 내려왔다. 기다란 궤적이 초승달을 그린다.
순간 그 검로를 따라 무색으로 물결치는 반월형의 참격이 뿜어져 나왔다. 정연신의 옆, 달음박질치고 있는 이들을 향해서.
“모름지기 칼놀림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나?”
콰아아아아아아!
양옆으로 갈라진 공기가 그대로 짜부라진다.
눈 한 번 깜빡이기도 전에 삼십 걸음의 거리를 격하는 일격. 만년한철로 세워진 성벽이라도 반 토막을 낼 수 있을 법한 기세였다.
저런 원거리 검초는 정연신도 본 적이 없었다. 이름 있는 초식인 게 분명했다.
십수 년 전 복건성에 출현한 악귀를 베고 그 내단을 취하는 데 썼다는 천충검해(天充劍海)일지도 모른다.
사박.
그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진 추측들은 이내 정연신의 뇌리에서 멀어졌다. 그는 전에 없이 가벼운 발놀림으로 검격 경파를 마주 보고 섰다.
검을 앞으로 뻗은 뒤에야 발밑에서 낙엽이 부서진다.
여뢰가 울었다.
투명한 해일처럼 너울지는 기운을 짚은 검극이 은은한 빛을 뿌리며 허공에서 커다란 원을 그린다.
우웅―
얼핏 보기에도 몹시 부드러운 태극의 형상인데, 곡선 궤적이 완성되는 속도가 무지막지하게 빨랐다. 경파의 충돌이나 충격파 따위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음…?”
천극문주의 눈썹이 올라간 찰나.
정연신은 검을 쥔 손목을 살짝 비틀었다.
순간 앞서 흘려낸 힘에 종극뢰의 뇌성벽력 같은 힘마저 더해졌고, 어느새 천극문주의 참격을 반투명하게 휘감은 여뢰에서 쿠릉― 소리가 났다.
곧이어 여뢰를 쥔 정연신의 팔이 흐릿해졌고.
콰직!
짧은 순간에 다시금 검을 세우고 있던 천극문주의 삿갓이 그대로 찢어발겨졌다.
“…….”
삼십 보 거리는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