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495
◈ 명족 나무 (7)
천하목 장로원.
문득 녹색 광채의 알갱이들이 한쪽 문지방 밑에서 슬그머니 올라온다.
주변을 은은하게 밝히는 빛무리. 곧장 장내를 채운 이들의 살갗이 더욱 하얘졌고, 여인의 얼굴에 드리워 있던 음영도 완전히 걷혀 나갔다.
씨족의 제일장로.
여느 명족과 같은 이목구비에 비해 다소 오므라든 볼살을 지녔다.
온화하게 내려앉은 눈매와 대비되는 인상인데, 그 탓에 여유가 없고 강퍅해 보였다.
먼 옛날 건릉제가 친히 내려준 진녹빛 천잠사의 옷자락이 부드럽게 흔들리며 날 선 인상을 상쇄해 줄 뿐이었다.
“선전포고로군.”
그녀가 중얼거린다.
입황성 광야일멸이 읊조린 말은 명백히 그러했다. 짧게나마 격식마저 갖추고 있었다.
일장로의 곁에 있던 금벽자는 둥그레진 눈으로 아! 하며 손뼉을 쳤다.
“이게 그렇게 되나? 목소리는 좋더만요?”
“참으로 광오합니다…! 허락도 없이 이 땅에 들어와선 국검(國劍)이니, 날붙이로 천하를 논한다느니…….”
일장로에게 보고를 올리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선 검객이 푸른 안광을 번뜩인다. 순간 그의 전신에서 보이지 않는 바람이 일어났다.
화악!
그것도 잠시였다. 명족 검객의 옷자락은 거칠게 펄럭이자마자 거짓말처럼 다시금 잠잠해졌다. 금벽자가 그의 어깨에 손을 걸친 까닭이었다.
장삼봉에게 크게 한 수를 배워 도가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알려진 인물. 무위자연이란 말 그대로다.
이 순간 그의 얼굴은 세상사에 무관심한 벼락처럼 허옇기만 했다.
사람의 표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촐랑거리지 마라.”
나지막한 목소리. 마치 음성에서 뇌전이 일렁이는 듯했다. 어느새 눈을 가늘게 뜬 금벽자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근목이 여기 있잖아. 네가 논할 수 있는 친구도 아니고.”
“…송구합니다.”
잠시 흠칫한 검객이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돌연 빙그레 웃은 금벽자가 그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이거 자리를 비워도 되려나?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화 많은 일장로가 나오고 땅부자인 용지 나으리께서 들어갔으니까, 다음은 내 차례잖아요.”
“마연적의 손자가 제 발로 찾아왔네. 눈앞에 닥친 흉몽의 핏줄을 우선시해야 해.”
일장로가 조용히 말했다. 금벽자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글쎄올시다. 우리 나무께서 드시는 기력이 점입가경으로 많아졌는데, 자칫하면 천하가 폭삭 내려앉을….”
“뇌벽.”
“예, 예.”
자신을 달리 부른 일장로의 말에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는 금벽자.
“얼굴이나 볼까.”
파직.
이내 바깥으로 몸을 돌린 그의 소맷자락을 타고 벼락 줄기들이 명멸했다.
* * *
북경에 머물 당시 용희명이 농담처럼 건넨 조언이 있었다.
―신검단주는 대대로 문무겸전이었다. 말싸움과 칼싸움을 두루 잘했지. 어느 한쪽이 밀리면 다른 쪽으로 압도하기도 하고… 주로 네 외조부가 그러는 편이었지. 여하간 섬예 네가 내게서 입신검을 가져가려면, 만천하에 네 입이 불패(不敗)임을 알려야 해. 입황성의 힘은 민심에서 나오는데, 그 민심이란 게 혀와 붓놀림에 따라 이리저리 기울거든.
정연신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생사결에선 패할 수 있다. 그날의 운수를 하늘에 맡겨야 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누군가와 명분을 겨룰 때 밀린다면, 그건 본성의 무인이라 하기 힘들다. 천하에서 가장 떳떳한 검이라 할 수 없다.
대검문천하(對劍問天下).
그렇게 말을 맺은 정연신은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명족들의 도시에 들어선 이후였다. 그는 포위망이 주변의 풍경을 가릴 만큼 두껍게 겹쳐져 갈 때도 움직이지 않았다.
밤낮이 없는 땅.
꽤 오랜 시간을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도 시간이 흐르지 않은 듯했다. 기나긴 명족의 세월처럼.
스윽.
그는 여뢰에 팔을 얹은 채 눈꺼풀을 살짝 내렸다.
아직도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 녹빛 광채들이 손등을 타고 알알이 부서지고 있었다. 별다른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주변이 푸르게 밝을 뿐이었다.
‘이곳 사람들이 더 와야 해.’
앞서 조악한 노랫가락을 내뱉은 이유. 본성 자색의 격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는 사마외도와 같아선 안 된다. 품행과 언동이 모두 달라야 마땅하다. 늘 입황성의 품위를 높여야 하는 신분. 여러 선배들에게 누를 끼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연신의 입장은 존귀한 씨족과 다소 동떨어져 있었다. 그를 묵묵히 포위하고 선 백수십 명의 고수만 봐도 그랬다.
“…….”
다소 어리둥절한 기색들.
어떤 부분도 납득하는 모습이 아니다.
바깥과 이곳이 다르다는 정연신의 시구를 이해 못 할 이가 없는데도, 그것이 어찌하여 문제냐는 느낌이었다.
이 순간 저마다의 얼굴에서 그러한 대답이 묻어났다. 그들은 굳이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정연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출수하겠다는 말이다.”
“…이해가 되지 않소. 우리 도시는 당신네 세상과 무관하오만.”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등 뒤에 걸친 대궁에 걸맞게 기골이 장대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연녹빛 공력의 광채가 일렁이는 눈으로 정연신을 올곧게 바라봤다.
“당신의 조부가 벌인 일들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소. 물론 그자도 우리가 쉬이 용납하기 힘든 사건들을 일으켰지만, 이처럼 근본적인 문제를 걸고넘어지진 않았소. 당신의 언동과 행동은 그저 패악질에 불과하오.”
“패악질?”
정연신이 낮게 되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겐 각자의 협이 있소. 서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면서 자신이 속한 땅을 지키는 것이오. 당신에겐 당신의 나라와 양민들이 그렇고, 우리에겐 이 천하목이 그러하오.”
“…….”
“서로가 살아온 세상이 이처럼 다른데, 심지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오. 당연히 우리 씨족의 거취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도 없소.”
어깨에 대궁을 맨 명족 고수가 차분히 말을 맺는다.
이어 몇 사람이 그녀의 이야기에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거칠게 몰아붙인다기보단, 저마다 영롱한 노랫말을 덧대어 겹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이상 선을 넘지 마세요.”
“당신의 가락은 우리를 납득시키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일국의 검이라고 해도, 천하 씨족의 사대호법을 홀로 감당하진 못할 텐데…….”
“굳이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무지에서 비롯된 실수는 어스름의 물웅덩이와 같은 법. 누구든 무심코 범할 수 있으니, 그 검이 아직 칼집에 꽂혀 있어서 다행이에요.”
제각각의 목소리에 미미하게나마 운율과 가락이 있었다. 풍류를 읊던 항주 사람들도 저들에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정연신은 문득 많은 것을 숨김없이 터놓고 얘기해 준 소년을 떠올렸다. 마을 어르신 종연에 대한 마음가짐이 공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천화야! 신검단주가 됐담서? 황제를 어떻게 설득했길래 네 성질에 입신검을 쥘 수….”
앳된 청년의 음성이 황금빛과 함께 내려왔다.
정연신의 면전이었다.
우웅.
번쩍거리며 인근을 밝게 비춘 광원이 사람의 형태로 빚어지더니, 금빛 일색의 청년으로 화했다. 곧이어 주변에서 금벽자란 수군거림이 물결처럼 번졌다.
“어? 신천화가 아니네.”
그렇게 나타난 청년은 정연신을 보자마자 상체를 뒤로 홱 젖혔다. 크게 놀란 듯한 표정과 함께였다.
“얘 누구야?”
“호법, 그것이…….”
앞서 정연신에게 자격이 없다고 말했던 명족 고수가 청년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바람결에 목소리를 일치시키는 명족 특유의 전음이었다.
정연신은 난입자의 정체를 짐작했다. 정확하게는 금벽자가 어떤 인물인지 안다. 노인장 종연에게 들은 덕이었다.
‘천하목의 네 기둥 중 하나.’
삼봉진인이 베풀어준 공부로 크게 깨달은 절세고수라 했다.
파직, 파지직―
전신에 깃든 뇌기(雷氣)가 정연신의 살갗을 따끔따끔하게 찌르고 있었다. 어떤 무형의 영역이 펼쳐진 듯한 느낌. 몹시 신비롭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장 금벽자의 간합 안에선 쇠붙이를 자유롭게 휘두르지 못하리란 직감이 왔다. 검로가 제멋대로 이지러지는 심상이 그려진 것이었다.
상단전 통찰이다.
어검의 막강한 검력마저 반감시킬 법한 인물. 오랫동안 천하목을 지켜 왔다는 노괴물다웠다.
물론 금벽자의 입장에선 오히려 정연신이 난데없이 등장한 신진으로 보일 터였다.
‘검뢰섬릉식은 봉인한다. 종극뢰 같은 환강류 무공에, 권각법과 보신경으로 맞붙어야…….’
정연신이 여뢰의 칼자루에서 손을 내릴 때였다.
금벽자가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맞다! 흉몽의 손주!”
“흉몽?”
정연신이 중얼거릴 때였다.
“얘네가 한 말이 다 맞아. 구구절절 옳지! 어딜 속세인이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해?”
돌연 금벽자가 그를 향해 삿대질했다.
“너, 여기서 이러면 안 돼! 나중에 더 크면 이불이 남아나질 않을 거라고! 너 정도 자질이면 각법의 절대자가 되어 버릴 수도……!”
“당신들은.”
정연신이 그 말을 끊었다. 부채를 문 신룡을 여뢰에 덧대듯, 천하에서 가장 큰 혀를 지닌 대협의 심상을 이 순간 자신의 몸에 겹치면서였다.
순간 체내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 음성에 실렸다.
“이 나라의 한복판에 천하목을 심고.”
저벅.
한 걸음 나아가자 금벽자와의 거리가 그만큼 좁아진다. 정연신은 온몸을 이리저리 저미는 뇌성벽력의 영역을 느끼면서도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익히 알려진 천하목의 열매를 노리는 사마외도, 외세, 괴력난신의 침입으로부터 황군과 입황성, 구파일방을 천혜의 방벽으로 삼았지.”
“음?”
“심지어 당신들이 걸친 의복은 황실의 포목(布木)이야. 그 윤기와 결… 자금성에서 본 적이 있다. 북경 귀족들이 걸치고 다니더군. 빨아 입기 쉽고, 도검불침의 효험을 지닌 천잠사 옷단. 긴 세월에도 빛이 바래지지 않는다던데.”
“그랬나?”
금벽자가 순박한 얼굴로 자신의 팔을 들어 보인다. 휘황한 금빛 소맷자락이 덧없이 길게 늘어졌다. 하지만 정연신의 말은 그치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 늘어선 석조 기와집의 군집엔 이 나라 철족 장인들의 손이 닿았고, 당신들이 쓰는 문방사우와 여러 찬거리, 심지어 무인들이 먹는 건육도 이곳에선 만들지 못해. 땅 기운을 축낸다면서 가축을 기르지도 않으니까. 애당초 당신들도 알 거다. 나랏돈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곳이면 도찰원과 입황성의 간섭이 불가피하다는 걸.”
주변이 고요해졌다.
스스로 바람을 일으키는 풀잎들만이 발치에서 사삭거리며 몸을 비벼댔다.
그 와중에 정연신은 체내의 능법광륜기를 아홉 차례 회전시키며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이 도시는 나라의 손발과 양민들의 공납에서 비롯된 목숨값을 크게 누리던데. 아니면 여기에도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나? 지금처럼 격조 높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줬으니 공납의 의무를 진다거나, 바깥세상에 힘을 실어 줄 강자를 남몰래 내어준다거나.”
“응……?”
문득 금벽자가 넋 나간 소리를 냈다. 명족 좌중은 저마다 입을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이 땅을 보전하는 힘과 희생을 별세상의 일들로 치부하고, 나라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긴커녕 삶의 기반을 거저 누리고 있다. 나는 이런 자들을 강호에서 익히 봐 왔고, 그들을 사마외도라고 일컬었는데.”
그리곤 정연신은 조용히 물었다.
“당신들은 조금 다른가?”
침묵이 조금 더 깊어졌다.
허공에 떠다니던 녹빛 알갱이들이 적막을 은은하게 부유하는데, 문득 정연신의 시야 한쪽에서 웬 불티가 금빛으로 튀어 올랐다.
“좀 다르냐?”
어느새 금벽자가 옆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곤 팔짱을 낀 모습. 처음부터 정연신과 함께였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
아군이 따로 없다. 불현듯 그렇게 되었다.
인근을 포위하고 있던 명족들의 얼굴 위로 비대한 경악이 번져 나갔다. 고목처럼 잔잔했던 평정심이 갑작스레 부서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연신도 크게 놀랐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고 느릿하게 입을 뗐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모아 검결지를 만들면서였다.
“말이 길었군.”
곁에 선 금벽자가 정색했다.
“아냐, 안 길었어. 더 해도 돼.”
“…이건 궁뢰라는 초식인데, 내 스승의 고향 땅에 취하는 예로 미리 직경을 밝힌다. 일검에 삼 리를 관통할 수 있다.”
“허?”
금벽자가 정연신을 북돋아주다 말고 맹한 감탄사를 내뱉은 순간.
“난 천하목의 실체를 직접 봐야겠다.”
정연신은 맹수의 발톱 자국마냥 제자리에서 격하게 일그러졌다. 몸이 잔상만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곧이어 지면이 꿈결마냥 일직선으로 갈라졌고, 그렇게 찰나를 가로지른 빛줄기는 뒤늦게 먹먹한 굉음을 터뜨리며 도시에서 가장 거대한 전각을 강타해 버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명족 장로원.
천하목의 본신이 자리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