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499
◈ 무림 (2)
* * *
황폐해진 평야.
겨울 햇살은 무인의 명줄처럼 짧았다.
화려하게 뻗어 나가던 노을이 어느샌가 먼 지평선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
햇빛은 자취를 남기지 못했고, 어슬렁거리며 그 자리를 거뭇하게 물들인 밤하늘 아래에서 네 사람의 숨결이 하얀 김으로 피어올랐다. 공기가 싸늘했다.
길고도 짧은 시간이 흘렀다.
혈염교주가 있던 자리.
땅이 까맣게 그을린 가운데 곳곳이 허연 서리로 얼룩졌다.
그의 시신은 파편조차 남기지 못했다.
초고수들의 삼매진화와 빙공을 연달아 맞이한 까닭이다. 하후위진과 운소유, 천소소가 출수했다. 입황성 신검단은 후환을 남기는 법이 없었다.
큰 싸움을 치렀다. 이제 그들은 만전이 아니다.
“이 정도면.”
천소소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후위진이 그녀의 말을 끊으며 얘기했다.
“어떤 혈귀도 재생의 공능을 발휘할 수 없다. 핏방울 하나까지 신공으로 얼리고, 부수고, 다시 녹여버렸으니까. 설령 놈이 선대의 진전을 이었을지언정, 전대 혈염교주 본인은 아니야. 더 이상 염려할 것이 없어.”
“…맞아.”
짧게 대답한 천소소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세 사람과 다소 떨어진 채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는 진명조. 장차 섬예를 보필하게 될 사내다.
신검단주 대리가 직접 지명했다고 했다.
입황신창이 머물고 있는 신검대 전각의 주방은 근래에 못 쓰게 된 상태였다. 천소소 역시 악수림이 자리를 지키길 바랐다. 적어도 진명조는 아니었다.
“가자, 급해.”
그녀가 말했다. 합당한 재촉이었다.
근래에 양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황제의 죽음과 흉년을 기해 물자의 수급이 끊어졌고, 어떤 상단도 섣불리 곳간을 개방하려 들지 않았다.
본성의 눈과 귀가 되어 주던 관아의 벼슬아치들조차 연통이 뜸해졌다고 했다.
어떤 거대한 기류가 있었다.
누구라도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천하가 숨죽인 상태였고, 대주들은 제 몸을 살펴 빠르게 돌아가야 했다.
신출귀몰한 여령주가 ‘역천의 대계’를 꾀한다는 모종의 풍문마저 있었으니까. 소문이 사실이라면, 입황성의 처지는 위태롭다는 말도 모자랐다.
하지만 차대 신검부대주는 이 순간 동료들의 내상과 외상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탁한 핏물을 뭉쳐놓은 듯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기만 했다.
“…….”
혈염교 칠사도가 거기에 있었다.
붉은 태사의에 나른하게 앉은 모습. 죽은 혈염교주의 점혈을 홀로 풀어 버린 것이다.
스스로 진혈교주란 명칭을 쓰는 인물답다고 할까. 갸름한 턱을 괸 손등으로 흘러내린 머리칼 몇 가닥에서 절세고수의 여유가 묻어났다.
“이상한데.”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그녀의 하나뿐인 눈동자는 투명하리만치 붉은빛으로 진명조를 흘겼다. 유난히 하잘것없는 벌레를 보는 듯한 눈짓이었다.
“너, 잡혈(雜血)아. 날 어떻게 찾았니?”
그녀가 물었다.
칠사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명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혈대주 진명조다. 성주께서 당신에게 월령신기의 파편을 선사하지 않았나? 지고한 음기(陰氣) 말이다. 우리는 그처럼 익숙한 기운을 추적해 왔다.”
“…기감이 제법이네. 좋아, 고마웠어. 이제 꺼져.”
그녀가 널찍한 태사의에서 가부좌를 틀며 말했다. 당장 운기조식에 임하려는 모습. 하지만 진명조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칠사도의 하얀 눈꺼풀이 치켜 올라갔다.
“주제넘게 호법이라도 서려고? 당장 사라지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야. 그 눈알부터 뽑히겠지.”
그녀가 매끄러운 음성으로 으름장을 놓는다.
진명조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접선을 끝낸다면, 당신이 후회하게 될 거다.”
화악!
순간 칠사도의 새까만 안대에 맺혀 있던 흙먼지가 거짓말처럼 흩어졌고, 하나뿐인 핏빛 눈동자가 무채색으로 번들거렸다.
붉은 바짓단 아래로 가늘게 드러난 발목은 혈염교 보신경 특유의 불규칙적인 기파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출수의 전조였다.
내상이 심할 텐데도 초월성을 드러냈다.
한편 명족 대주들은 진명조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대치를 지켜봤다.
천소소와 운소유가 표정 없는 얼굴로 끼어들 채비를 마친 반면, 하후위진은 미간을 짙게 모으고 있었다.
“이건 불가능한 임무다. 저런 자를 어떻게 설득해서 본성으로 데려가지? 설령 일전에 빈객으로 온 적이 있다고 해도 말이 되지 않아. 저건 이제… 또 다른 혈염교주 아닌가? 걸어 다니는 천재지변이 따로 없는. 그간 저자가 민가를 침탈하긴커녕 혈염교의 지부만 줄지어 박살 냈다 해도, 저 광증에 말이 통하겠냐는 얘기다.”
그가 굵직한 음성으로 동료들의 동의를 구했다.
순간 칼자루를 스윽 하고 한 번 고쳐 쥔 율령대주 운소유의 입이 열렸다.
“혹여 회유가 실패하고 보혈대주마저 큰 부상을 입는다면, 단주 대리가 어떻게 엇나갈지 알 수 없어. 그 성품이면 양양이 큰일을 치르기 전에 본성의 율법이 크게 어지러워질지도….”
그녀로선 드물게 긴 이야기였다. 하후위진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내우외환이 따로 없지. 이 시기에 저자와의 충돌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 한 손이 모자란 형편이니 저 음침한 보혈 놈이라도 몸 성히 건져서 데려가야….”
파앙―!
인근의 대기가 거세게 출렁였다.
칠사도가 진명조를 향해 반투명한 기파를 터뜨린 것인데, 대화가 곱게 풀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진명조는 시커먼 머리칼을 뒤로 격하게 휘날리며 칼바람을 묵묵히 맞고만 있었다.
곧바로 자세를 낮춘 하후위진이 분통을 터뜨렸다.
“이유를 모르겠군! 단주 대리는 왜 하필 저놈을 본성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거냐?! 난 아직도 부대주 지명이 옳은지 모르겠다!”
“평가가 아냐. 존중이랬어.”
천소소가 고개를 저으며 얘기했다. 어느새 그녀의 손 틈새에선 희끄무레한 냉기의 아지랑이가 휘돌고 있었다.
“기질부터 섬예가 가장 닮고 싶어 하는….”
후욱.
불현듯 그녀의 말이 끊어졌다. 땅바닥을 거칠게 긁던 혈공 기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까닭이었다.
“가자. 양양이라고?”
칠사도가 앞장섰다.
언제 태사의에서 내려온 걸까. 새빨간 순혈포가 그녀의 등 뒤에서 사락 하고 매끄럽게 펄럭인다. 혈염교 아신법은 강호에서 손꼽히는 몸놀림이 맞았다.
“명조? 너 숨을 아주 세련되게 쉬는구나. 호흡에서 기파가 안 느껴져. 조금 배울게.”
칠사도가 말했다.
그녀를 본성 자색의 빈객으로 들인다.
신검단주 대리가 내린 일이 성사되고 만 것이다. 어지러운 환란의 시대에, 대총관의 말로는 가장 무겁고 중한 임무였다.
명족 대주들이 입을 다문 가운데 칠사도의 음성이 나긋하게 이어졌다.
“신검대 부대주면 신검대주 옆에 계속 붙어 있는 거지? 본교 씨족 중에서 제일 대성했네. 잡혈은 무슨, 네가 역대 교주들보다 나아.”
“…….”
진명조의 얼굴이 조각처럼 굳어졌다. 곧이어 그가 손을 한 번 튕기자 품에서 웬 두루마리가 치솟아 천소소의 손아귀로 떨어져 내렸다.
툭.
그녀의 곁으로 다가선 하후위진이 두루마리를 내려다봤다. 한 통의 서찰이었는데, 표면에 ‘정 공 친전’이란 글귀가 용의 몸통처럼 웅장하게 새겨져 있었다.
“편지가 뭐 이리 두꺼워?”
그의 말에 진명조가 짧게 대꾸했다.
“그게 내 역할을 조금 줄여 줄 겁니다.”
“그럴 줄 알았다. 박쥐 아니랄까 봐 벌써부터 직무를 태만하게… 이 서신이 뭐길래?”
“마검(魔劍) 구결.”
무형검.
궁지에 몰린 보혈대주의 비책이었다.
사람의 진심이란 글줄만으로 전하기 힘든 법. 간절히 사직을 청하는 편지에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 실렸다.
정연신이라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그 구결을 토대로 자신만의 무형검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내 제비는 다른 용무를 보러 갔으니, 천 대주가 단주 대리께 보내 주십시오.”
“…….”
압도적인 배포.
명족 대주들은 서찰의 정확한 내용을 모른다.
그저 정연신의 결정을 이제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됐을 뿐이다.
마침내 하후위진의 입이 굳게 봉인되었고.
저벅.
진명조가 시체처럼 서늘한 얼굴로 걸음을 내디뎠다. 반박귀진(返璞歸眞). 아무런 기세도 없는 발밑으로 황야의 흙먼지가 작게 맴돌다 연기처럼 흩어진다.
혈염교주의 시신이 있던 자리에선 불현듯 돌개바람이 일어나 보혈대주의 까만 가죽신으로 빨려 들어갔다.
확고한 신검부대주였다.
* * *
존귀한 씨족들의 도시는 모처럼 소란스러웠다. 굵직한 나무줄기들이 성벽마냥 올라간 곳엔 귀가 긴 아이들이 앉아서 발장구를 쳤고, 나무 군데군데에서 경계를 서는 고수들의 볼살은 드물게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천하목의 중심부였다.
주씨 황족들이 친히 물자를 전하러 올 때도 데면데면했던 이들이 아니다. 저마다 이따금 누군가의 이름을 속삭였다.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폐허가 된 씨족 장로원의 전각이었다.
정연신은 짧은 말을 내뱉은 뒤로도 경계심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이곳에 모인 전력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천하목의 사대호법. 셋만 만났을 뿐인데도 한 명 한 명이 고강했다.
이 도시가 적대적으로 돌변한다면 목숨을 건사하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아니, 반드시 죽는다.’
그는 생각했다.
시야에 자신과 함께 둘러앉은 세 사람이 들어온다.
용지검공과 금벽자, 그리고 치천궁백. 제각각 판이한 무공을 헤아리기 힘들 만큼 긴 세월간 익힌 자들. 절세고수 세 명의 합공을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입황성주가 와야 할 일이었다.
“차가 입에 맞지 않나?”
여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씨족의 제일장로가 아랫사람들을 물린 채 다탁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보자기를 건네주거나, 찻물을 다시 데워주는 둥의 움직임과 함께였다.
앞서 정연신이 부러뜨린 다리를 스스로 맞췄다.
체내의 강대한 진기를 부목으로 삼아 부서진 뼈를 고정시킨 모양새였는데, 찢긴 경혈이 큰 통증을 일으킬 텐데도 전혀 쉬지 않았다.
그리고 정연신은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쉽게 믿기지 않는 일. 이전처럼 어떤 정보도 공유하지 않던 이들이 아니었다. 당장 입황성주에 관한 비밀부터 그랬다.
오늘날처럼 외유가 길어질 때면, 그녀는 반드시 이곳에 와서 오랫동안 머무른 뒤에 본성으로 길을 나선다고 했다. 이번 방문 역시도 같은 맥락이란 이야기.
이유마저 들을 수는 없었다.
금벽자가 신난 얼굴로 모조리 말해 주려는 것을 용지검공이 막아버린 탓이다. 정연신도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입황성주가 직접 말해 줄 때 들어봄 직한 얘기였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선 언제 오십니까?”
“이제 다 됐을걸. 원래 그분이 한번 나갔다 오면 좀 오래 씻어. 운기조식도 하고 세욕도 하고… 바깥에서 탁기를 묻혀오면 천하목이랑 합일(合一)을 못 하거든.”
금벽자가 대답했다.
곧이어 그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 않나? 건릉이 재재작년에 죽었다며? 이게 벌써 몇 년째야? 몸 불겠다, 찾으러 가자.”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금벽자의 헛소리에 만성이 된 까닭일까.
정연신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건릉제 사후 이 년이면, 자신이 무덤가에 묻히고 남았을 시기. 타고난 명줄을 어찌하지 못한다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것이다.
기분이 가라앉을 때였다.
“그 힘.”
용지검공이 느릿하게 입을 뗐다.
“능법광륜기라 했나.”
“예.”
“임시방편이라고?”
“기운은 소모되는 것이고, 천하목의 흡인력은 심연처럼 깊습니다. 제가 이 도시에 계속 머무르지 않는 한 빠르게 본래의 굶주린 상태를 되찾겠지요.”
“…….”
“사람의 힘으로 끝을 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스승님께서도 알고 계셨을 겁니다.”
정연신은 조용히 말을 맺었다.
그리고 내심 염려했다. 천하 전역이 심상치 않은 이때, 이 씨족의 도움을 조금이라도 얻어 볼 셈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총관부에서 날아온 서찰에 십삼천의 준동이 적혀 있었다. 그 움직임이 몹시 거대하다는 첨언과 함께였다.
‘사대호법 중 두어 명이 잠시나마 양양을 살펴 준다면…….’
본성 걱정을 조금은 덜어낼 텐데.
하지만 세상사는 어려웠다. 당장 찻물을 따라주던 일장로의 표정이 굳어진 것이다.
“임시방편이라면, 얼마나…?”
“사흘을 넘기기 힘듭니다. 그 뒤엔 제가 다시 진기를 주입해야 합니다.”
“…….”
“그마저도 본질적인 해결책이라 할 수 없지요. 당장 천하목이 제 역할을 하는 데에 필요한 기운이 있고, 제 조치는 임의로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격이라서….”
정연신은 담백하게 사실을 얘기했다.
사대호법이 아주 잠깐 몸을 뺄 수는 있어도 씨족 전체가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는 없다.
이곳에서 양양까지의 거리가 얼마인지는 별론인 데다, 명족이 근본적으로 해방되었다고 보기 힘든 것이다.
그건 인간이 해낼 만한 일이 아니다.
정연신은 처음으로 벽을 느꼈다. 달마와 장삼봉, 초대 천마와 같이 고금제일을 다투는 인물들이 한데 모여 논담이라도 나눠야 해결책이 나올 터였다.
“이런…….”
일장로가 찻잔을 내려놓는다. 용지검공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치천궁백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정연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금벽자만 희희낙락했다.
“왜? 난 숨도 돌리고 좋은데. 이참에 뽕잎이나 말러 가야겠다. 너도 한 잎 줄까? 예전에 건릉이 거기에 불붙여서 연기를 피워 마셨는데, 이게 아주 그냥…….”
“그래, 숨을 돌렸지. 그것만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씨족의 어느 누구도 배은망덕하게 행동해선 안 돼.”
일장로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좋은 꿈을 꾸던 중에 억지로 일어난 듯한 음성.
정연신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정가장에서 산 세월이 훨씬 길기 때문일까. 기대를 접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자질만으로 무엇이든 가능했다면, 그의 강호행이 상실로 얼룩져 있지는 않았을 터였다.
‘스승님의 목적이 무엇이었든, 양양에는 나 홀로…….’
그때.
탁―
부드러운 손이 그의 뒷덜미를 짚는다. 몹시 따스한 감촉. 여러 가지 느낌이 꿈결처럼 동시에 끼쳐 왔다.
목 아래의 솜털이 느릿하게 짓눌리고, 살갗에 와닿던 시간 감각이 두꺼운 이불처럼 뭉개지는 한편, 목덜미에서부터 아래로 민들레 꽃잎마냥 온몸을 쓸어내리는 산들바람까지.
굳이 뒤돌아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입황성주였다.
정연신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기가 싫었다.
“섬예.”
영롱한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다가 느리게 흩어진다. 문득 정연신의 시야 한쪽에 웬 금팔찌가 비쳤다.
스승이 가져온 물건인 듯한데, 어린아이가 새긴 것마냥 삐뚤빼뚤한 나뭇잎 문양이 허공에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순간 정연신의 시야가 바뀌었다.
후욱!
머릿속에 울린 소리였다.
합일.
자색 장포를 걸친 청년의 뒷모습이 내려다보였다. 언젠가 천하목의 조각을 먹었을 때와 같다. 이 순간 정연신은 입황성주의 육체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품행에 완전히 경악한 주변의 눈길을 한 몸에 받으면서.
심연으로 파묻히는 듯한 느낌.
감각이 달라졌다.
‘저건…?’
정연신은 입황성주의 눈으로 바라본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심장 깊숙한 곳에 티끌 같은 광채가 무당파 송문고검의 형상으로 세워져 있었다. 어쩐지 코끝으로 스미는 날붙이 특유의 쇳내와 함께였다.
정확하게 자각된다.
암천제가 주고 간 도가 삼청력이었다.
곧이어 입황성주가 그를 향해 조금 기울어져 있던 상체를 세웠다.
화악.
궁장과 같은 연둣빛 옷자락을 긁으며 일어난 칼바람이 다탁 아래를 베어버린다. 쿵 소리와 함께 탁자가 단처럼 내려앉았다.
그 중앙으로 자연스럽게 제자를 인도한 그녀가 정연신과 마주했다. 그때쯤 허공에서 녹아내리던 금팔찌는 떨어지다 만 물덩이처럼 둥실 떠 있었다.
입황성주의 기다란 손가락이 그곳을 스쳤다.
사락.
황금이 묻은 손끝이 정연신의 어깨에 닿기까지 찰나였다.
천천히.
그녀는 본래 거뭇했던 황(荒) 자를 금빛으로 덧칠해 나갔다.
몹시 부드러운 손가락의 감촉이 정연신의 어깨를 간질였고, 영원 같은 시간이 흐른 끝에 길게 획을 친 글귀가 양어깨를 채웠다.
어느새 정연신은 자신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
눈이 마주친다.
그들은 몸을 겹쳤고, 감각을 섞었다. 별다른 안부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입황성주의 진녹빛 눈동자 또한 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둘을 내어줄 터이니.”
그녀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다녀오거라.”
그것은 출정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