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23
◈ 남존 (2)
* * *
땅거미마저 자취를 감춘 시간대였다. 거무스름한 바람줄기가 위에서 아래로 불어 내려가다 덧없이 흩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이따금 대지를 가득 채운 모래바다와 스산하게 몸을 부대끼면서.
달이 없다.
별무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두운 밤은 아니었다. 석양의 끄트머리에서 뽑혀 나온 듯한 보랏빛 기류가 강물처럼 길게 넘실거렸기 때문이다.
마치 젊은 화공의 붓질마냥 힘 있고 거대하게 하늘을 가로지른 그것은, 언뜻 보기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거인의 날숨처럼 흐리게 일렁이고 있었다.
저벅.
당당한 걸음걸이로 그 아래를 지나던 사내는 돌연 멈칫했다가 입을 열었다.
“발경 파동… 경파의 흔적인가? 흔한 극광(極光:오로라)인 줄 알았건만…….”
속삭임에 가까운 중얼거림. 심신을 짓누르는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굳이 소리 내어 말한 것이다.
그는 밤하늘을 힐끗 올려다봤다.
동시에 죽어가는 노을을 닮은 기류가 출렁였다. 마치 사람의 눈꺼풀처럼.
불가해(不可解). 이해할 수 없다는 말 그대로다. 어떤 고수라도 섬뜩함을 느낄 광경이었다.
“…….”
사내의 푸른 눈동자에 공포가 스쳤다. 유난스럽게 뚜렷한 턱선도 경련하듯 움찔거렸다.
그가 타고난 권위적인 기질마저 잠시나마 사그라들 정도였다.
천통사자(天通使者) 북궁명(北宮溟).
무수히 많은 북해빙궁의 소궁주들 중에서도 열 손가락에 꼽히는 사내의 걸음이 빨라졌다.
‘사람이 부릴 수 있는 조화가 아니다. 궁주께서 옳은 판단을 하셨어.’
그렇게 광야를 가로지른 끝에 북궁명이 도착한 곳은 웬 장원이었다. 거의 궁궐에 가까울 만큼 커다란 전각들로 이루어진 장소.
문지기는 없었다.
담벼락과 지붕, 장원 내부에 펼쳐진 소로(小路)를 가득 채운 자들의 숨소리만 가득했다.
저마다 걸친 옷의 색채와 복식이 모두 달라 통일성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럼에도 대기를 강렬하게 저미는 무형의 기파만큼은 똑같았다.
삼백여 명.
우두커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땅을 은은히 파헤친다. 게다가 대기마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후우―
북궁명은 흉부에 공력을 실어냈다. 장원의 문지방을 넘어서자마자 호흡이 급속도로 힘들어졌던 탓인데, 내부를 억지로 수축시킨 뒤에야 숨이 조금 틔었다.
‘명교의 마인(魔人)들.’
달과 별을 집어삼킨 밤하늘에 걸맞은 기파.
빙궁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옛 명교는 입황성에게도 체면를 굽히지 않았다고 했다.
북궁명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한 손으론 투명한 옥구슬을 들어 보이면서였다.
“들어가도 되겠소? 보다시피 이건 빙정의 조각이고, 나는 빙궁에서 나온 사자요. 본궁의 뜻을 전하러 왔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눈치껏 발을 뗐다. 사람 같지도 않은 존재들이 당장 덤벼들지 않은 것으로 족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출입을 허락받은 것이었다.
저벅.
형형색색의 기화이초들이 자라있는 화원을 지나, 술 내음이 가득한 장원의 안쪽에 이르기까지.
북궁명은 좌우를 둘러보지 않으려 애쓰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모시는 북해빙궁주는 북방에서 가장 무서운 심기를 지닌 인물이다.
하지만 빙궁에 드리운 그녀의 존재감과 별개로, 명교인들이 모인 이 땅은 그림자마저 발밑으로 빨려들어갈 듯한 느낌이 있었다.
‘빌어먹을. 아래에서 살던 괴물들이 뭐 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올라와선…….’
그는 애써 얼굴을 굳힌 채 시선을 들었다.
어느새 그의 눈앞엔 굉장히 화려한 가산(假山)이 펼쳐져 있었다. 조약돌을 쌓고 바위를 깎아 만든 계곡의 조각품. 물 대신 술이 졸졸 흐르는 게 향락의 극치다.
그 봉우리 하나를 한쪽 발 앞코로 디딘 여인의 자태도 신비로웠다.
균형감을 연마하는 걸까.
유난히 새까만 머리칼을 등 뒤로 늘어뜨린 검객이었다.
그녀의 허리를 휘감은 비단은 서역에서만 들어온다는 흑성단(黑星緞)이고, 그 요대에 꽂힌 검의 칼자루에는 거칠 황(荒) 자가 새겨져 있다.
전설상의 소수마공을 온몸으로 대성한 것처럼 희디흰 얼굴에, 몹시 서늘한 무표정을 지닌 여인.
내원에 막 들어선 북궁명에게 눈길조차 두지 않는다. 마치 장내에 장식된 조각상처럼.
‘황…? 설마 입황성의 고수일 리는 없고.’
하지만 북궁명은 그녀를 오래 살피지 못했다.
[제법 조예가 있는데.]“본파의 덕목이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유희와 풍습을 염두에 두지.”
가산 너머.
웬 나무 평상에서 바둑을 두고 있던 두 사람 중 하나가 고개를 틀었기 때문이다. 삿갓을 깊숙이 눌러쓴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내였다.
“애석하지만 내가 선객이오. 여령에서 왔소.”
삿갓 아래에서 기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어 삿갓의 사내가 조용히 물었다.
“그쪽은 빙궁이라고?”
하지만 북궁명은 그를 흘끗 보기만 했을 뿐, 굳이 말을 섞지 않았다.
당장 삿갓 사내의 맞은편에 있는 여인의 존재감이 아득한 느낌으로 하늘을 아우르고 있었던 까닭이다. 희미한 보랏빛으로 펼쳐진 극광의 주인이 이곳에 존재했다.
고금을 통틀어 가장 연배가 낮은 서장제일인(西藏第一人).
명교주 소천무적이었다.
“음.”
한쪽 무릎을 비스듬히 세우고, 그 위에 팔꿈치를 걸쳤다. 극한의 권태로움이 묻어나는 광경. 한 손으로 바둑돌 한 알을 굴리는 모습도 그랬다.
한편 은은하게 쏟아지던 극광의 빛무리는 오뚝한 콧대에서 음영과 함께 부서지고 있다. 혼백을 앗아가는 이목구비였다.
북궁명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대의 얼굴은 몽환적이지 않았다. 그 자체로 극강의 무공을 연상케 하는 전율적인 미(美)였다.
‘명교주는 말 몇 마디에 사람을 교도로 만든다더니…!’
천마란 옛부터 존재 자체로 사람을 홀린다고 알려져 있었다. 몸가짐, 용모, 무공이 모두 압도적인 비인(非人). 지금 보니 구전에 틀린 바가 없었다.
다행히 당대 명교주는 존재감만큼이나 거침없는 인물이었다. 북궁명이 넋을 일을 틈조차 주지 않고 말을 종용하는 그녀.
무심한 음성에 팔방이 웅웅거린다.
북궁명은 귓전에서 북이 울린 듯한 충격을 느꼈지만, 빙궁주의 직계 된 체면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았다.
“…명교주께 아룁니다. 북상을 멈추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하가 흉흉하다. 장차 본교의 고수들이 삶을 도모할 안가(安家)가 필요할 만큼.]우회적인 대답이었다.
북궁명은 그 짧은 문답으로 명교주의 성품을 헤아렸다.
누구에게도 속내를 터놓지 않는 기질을 직감적으로 꿰뚫어 본 것이다. 굉장히 험한 빙궁의 후계 싸움에서 눈치를 연마시킨 덕분에.
‘이쪽은 내내 솔직해야겠군. 그래야 신경에 거슬리지 않을 거야.’
그때였다.
“예상치 못한 일입니다만… 한결 이야기가 편해졌습니다. 선객이니만큼 제 말이 먼저겠지요?”
북궁명과 함께 명교주를 알현하게 될 줄 몰랐던 걸까. 삿갓의 여령 고수가 바둑판에 백돌을 두며 말을 이었다.
“당대 명교의 전력은 십삼천을 통틀어 명백히 제일입니다. 무엇보다 전면전도 아니고 저들이 지닌 빙정(氷精)을 탈취하는 것뿐이라면 능히 해볼 만하지요. 교주께서 손을 거들어주시면 더욱 쉬울 겁니다.”
“……!”
북궁명은 곧장 깨달았다.
명교주가 저 사내의 청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목숨은 여기서 끊어질 것이다. 빙정에 대한 음모를 들은 빙궁 사람을 살려둘 리 없었다.
그때였다.
[음… 대가는?]“귀하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삿갓 사내의 대답이었다.
그 말에 소천무적의 입매가 묘한 호선을 그렸다.
거기까지였다.
찰나지간 북궁명의 시야가 온통 시커먼 광채로 채워졌고, 하늘에 펼쳐져 있던 극광의 기류도 보랏빛에서 거무스름한 묵색으로 물들었다.
* * *
입황성 신검단주가 예하 무인들의 최고 상관으로서 첫 번째로 지녀야 할 덕목은 무엇인가.
정연신은 어릴 적부터 온갖 성현들의 글귀를 읽은 사람이다. 당연히 답을 알고 있었다.
‘포용력이야. 동료들을 감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돌로 깎인 거대한 원탁을 둥글게 둘러싼 좌석들. 하나같이 귀한 대리석으로 깎여 있다. 게다가 회백색 등받이들은 어지간한 장정의 키를 능가한다.
다시 보니 그 생김새도 낯익었는데, 장강의 앞 물결로 밀려난 용씨 아무개가 언젠가 문 너머에서 만든 태사의(太師倚)와 같았다.
모두 열여덟.
입황성 원평일검장이다. 지금은 정연신을 포함하여 여덟 자리가 채워져 있었다.
천림대주, 선목령주, 율령대주, 무극전주, 그리고 상반신에 붕대를 감고 들어선 남궁화신의 변함없이 올곧은 시선이 단주 대리에게 집중된 광경.
죽은 동료들을 마음에 묻지 않은 자가 없다. 그럼에도 누구 한 명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지 않는다.
일부러 병가지상사를 익숙하게 대하는 이들 틈으로, 실내의 먼지가 별무리마냥 소리 없이 흘렀다.
곧이어.
“회합을 시작하겠습니다.”
정연신의 말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동시에 그의 바로 오른쪽, 사실상 두 번째 상석인 곳에 앉은 신혈극마 진명조가 보일 듯 말 듯 경련했다.
장성한 후배의 모습에 깊은 감회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
왼쪽 좌석엔 미간을 잔뜩 모은 악수림이 있었다.
열대여섯의 얼굴에 몹시 어울리는 표정. 그처럼 이 순간 입황성 제일의 기수(旗手)가 자신의 독문병기를 발아래에 내팽개치고 있지만, 정연신은 자신이 겪지 않고 넘어간 질풍노도의 시기를 섣불리 헤아리려 들지 않았다.
바로 대인(大人)의 자세였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보급은 이미 해결되었으니 안건에서 배제했습니다. 다음으로는 편제를 짜야겠지요.”
“할 말이 많은 주제네. 이건 칠주야를 논해도 모자란 일이야. 당연히 다들 끼니도 넉넉히 챙겨 먹고 왔을 거고…….”
옆에서 끼어든 악수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연신의 차분한 목소리가 그녀의 음성을 내리눌렀다.
“완성되었습니다.”
“예…?”
악수림의 반문이 존대로 울린다. 몹시 어려운 일이었으니 놀랄 만했다. 정연신은 홀로 고개를 주억이며 손을 튕겼다.
파라락―
품에서 웬 두루마리가 치솟아오르더니 원탁의 중앙에 놓인다. 한쪽에서 고개를 갸웃한 천소소가 검지를 펴자 두루마리도 넓게 펼쳐지며 그 내용을 드러냈다.
성공적인 첫 회합을 자신하는 것마냥 흔들림 없는 목소리와 함께였다.
“먼저 신검대입니다. 일전에 용 선배님을 가둔 천라지망의 보급망을 끊고 살아 돌아온 신검대 인원은 그대로 데려가되, 각 대에서 몇 명을 차출했습니다. 대주와 부대주 외 신검대원은 전원 청색으로 구성할 요량입니다.”
정연신의 말대로 첫머리에 신검대의 편제가 적혀 있었다. 말 그대로 일필휘지. 고민한 흔적은 두어 군데밖에 없었다.
[단주 대리 겸 신검대주 정연신 휘하.신검부대주, 신혈환성(神血煥星) 진명조.
신검대원, 입황신협 헌원창.
신검대원, 신검예필(神劍銳筆) 연소하.
신검말단, 태염룡 황보 아무개.
신검대원, 복은권(伏隱拳) 삼복.
신검죄수, 적포광혈(赤袍狂血).
신검대원, 사월궁귀 위예령.
신검대원, 혜도(慧刀) 오월향…….]
가장 앞에 쓰인 대리란 글귀가 다소 희미했지만, 거기에 신경을 쓰는 이는 없었다.
불현듯 원평일검장 안팎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기파들 탓이었다. 몹시 강대했다.
우우우웅―!
찰나지간 발작적으로 자리를 박찬 인물이 둘.
바깥에서 구름을 유영하는 신룡마냥 부드럽게 쇄도해 오는 기척이 하나.
‘…불복인가?’
정연신의 얼굴이 미미하게나마 충격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