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he youngest son of the golden spoon life RAW novel - Chapter 80
※?8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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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내 나이 또래의 친구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었는지 관심이 없었다. 뉴스에 어떤 내용이 흘러나오더라도 학력고사의 마지막 세대인 우리는 ‘재수는 없다’라는 명목으로 92년 끝자락을 암울하게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93년 2월, 고등학교 졸업식에서의 친구들의 표정을 보면 누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한다면 내가 속한 특별반의 50여 명 중, 몇 명만 제외하고는 모두 스카이에 합격했다. 그 몇 명 중에 하나가 근철이지만 그는 약대라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 시절 분위기는 전공 따윈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라서 오직 대학간판만 보고 들어가야 했지만 근철이는 의사들을 부리는 약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졸업식의 공식 일정이 끝나기 직전에 담탱이가 서울대 합격생들만 따로 모이게 했다.
합격생들은 나를 포함하여 모두 18명이었는데 담탱이를 중간에 두고 기념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나의 모교 태종고등학교는 전통이 하나 있는데 서울대 합격생을 배출한 학급의 담임과 학생이 졸업식에 사진을 찍어 1층 현관에 1년간 전시를 한다.
올해는 특별반에서만 서울대 합격생들이 나오는 바람에 단 한 장으로 그쳤지만 합격인원은 작년보다 5명이나 더 많아졌다.
내 졸업식엔 대단하고 위대하고 찬란하신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대신에 최명희 사장이 작은 형과 함께 와 주셨다.
꼭 온다던 누나는 전국 대학생 연극대회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 있는 터라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그런데 나만 애타게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 같은 미경이 또한 아르바이트 때문에 오지 않았다.
내가 장미경이란 여자를 사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내 배경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이라도 봐 줬으면 좋겠다.
지금 현재 내가 한 달에 지원 받고 있는 금액은 그녀가 아르바이트로 번 돈의 열 배가 넘는다. 왜 그녀는 다른 여자들처럼 내 돈에 대해 탐을 내지 않는 것일까….. 처음엔 그 점이 좋았지만 지금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여전히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있지만 어느 순간 그녀에게 발길을 끊으면 우린 자연스레 헤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런 걱정이 요즘 들어 심해지고 있다.
구체적인 내 목표가 정해지자 나는 집중하기 시작했다. 엘씨기획사에서 경영수업을 구슬아 선생에게 배우고 있고, 새엄마이자 기획사 사장인 최명희 사장이 직접 지시한 프로젝트 때문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오늘은 졸업식이라서 구슬아 선생과 함께하는 수업 일정은 없었다.
그래서 최사장과 작은 형과의 식사자리가 끝나자마자 졸업 선물로 아버지께서 선물을 해 준 스포츠카를 타고 미경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현대에서 만든 스포츠카인 스쿠프는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데 10초도 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젊은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 했다.
아버지는 졸업선물로 외제차도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국산차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내가 벌어서 더 좋은 차로 바꿔 나가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빙그레 웃어주셨다. 그나마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는 표정이 많이 좋아지셨다.
작년부터 드문드문 생기던 편의점은 올해 들어 부쩍 많아졌다. 미경이는 학교 주변에 새로 생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방학이라 낮엔 공장에서 완제품을 포장하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저녁부터는 편의점 알바를 뛰었다. 방학 초창기엔 알바를 무려 3개씩이나 했지만 그나마 지금은 하나를 줄인 상황이었다.
[때대대댕, 때대댕!]편의점 문을 열자 출입문 위에 달아 놓은 작은 종이 울렸다.
“어서오세….. 어머, 민우야! 여긴 어쩐 일이야? 아! 맞다! 오늘 학교 졸업식이었지? 미안….. 보시다시피 방학 내내 돈 벌기 너무 힘들어. 이해해주라….. 설마 삐진 건 아니지?”
“누나가 안 오니까 내가 와야지. 그래도 실력 있는 과외선생님 덕에 영광스런 졸업식이 되었는데 감사인사는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왔어.”
“에휴, 어떡하지? 나 여기 비울수도 없는데?”
“얼굴 봤으면 됐어. 저녁은 제 때 챙겨먹고 있는 거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다 줄까?”
“방금 먹었어. 괜찮아…..”
“앞으로 남자친구 역할을 톡톡히 할 텐데 예행연습이라 생각하고 먹고 싶은 거 사달라고 해.”
그러자 미경이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녀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나는 뭔 말이라도 해보라고 독촉하진 않았다. 그저 그녀가 입을 열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민우야….. 우리 과외 했을 때 했던 말 때문에 그러는 거구나.”
“기억하고 있어?”
“당연하지….. 진심이었거든.”
“그러면 지금 난 어때? 작년에 과외 했던 고3 짜리 학생이 아니라 남자로서 난 어때? 누나가 그랬잖아? 누나가 반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내 마음을 받아준다고….. 아직 아닌 거야?”
“민우야….. 난 말이야, 누굴 만날 여유가 없어. 돈 많이 벌어야 하거든. 내 등록금도 내가 해결해야 하고, 내 생활비도 내가 해결해야 돼.”
“내가 해결해 주면 안 돼?”
내 말에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 일이야. 내 몫이고….. 이걸 남에게 떠넘길 생각은 없어. 내가 처한 상황이니까 내가 극복해 내야 해.”
“그게 언제 끝나는데? 도와주지도 마라, 만날 시간도 여유도 없다, 그러면 어쩌라는 거야? 마냥 기다리라는 거야 뭐야?”
“내가 기다려 달랬니?”
“뭐…..?”
“민우 네가 일방적으로 다가 온 거야…..”
“누나도 내가 좋다면서?”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었다.
“민우야. 미안하다. 내가 지금 너랑 왜 이런 얘길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집안 화려하고 인물 좋은 애가 왜 나 같은 사람에게 매달리고 있는 거야? 민우 너랑 어울리는 여잘 만나! 이제 대학 가면 넌 엄청난 인기남이 되어 있을 거야. 많은 여자들을 만나겠지. 그러면 나 같은 건 자연스레 잊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 서로 좋은 모습으로 기억하자. 민하 선배가 있긴 하지만 내가 또 다른 너의 누나가 되어줄게.”
“하아….. 작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나, 누나와 나이가 같아. 사실대로 말하면 부담스러울까봐 그냥 얘길 안 했어.”
“그래? 그렇구나. 숨길 필요 없었는데….. 근데 달라질 건 없어. 누나가 아니라면 친구가 되어줄게. 그냥 가끔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얼굴 보러 와도 돼. 괜히 나 때문에 창창한 네 앞날을 망치려고 하지 마. 난 내 수준에 맞는 사람과 만날 거야. 그런 기준을 딱 정해 놨어. 그러니까 사귀자는 그런 말은 이제 하지 마.”
나는 할 말이 많았지만 그녀가 너무 거세게 나를 밀쳐내는 느낌이라 그저 멍하게 그녀를 바라만 보며 서 있었다. 지금껏 그녀에게 완벽한 남자가 되려고 노력했는데 그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다시 만난다면 편한 친구사이로 만나. 그럴 수 있지? 그렇게 한다고 약속해 줘. 응? 민우야!”
나는 대답하지 않고 편의점을 나와 버렸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내치는 그녀가 미웠다.
그녀는 이유랍시고 여러 가지를 말했지만 그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는 그 날, 생전처음으로 술 생각이 났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JBS 방송국 별관으로 차를 몰았다. 큰길가 공중전화 박스 앞에 차를 세운 나는 기획탐사팀으로 전화를 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원하던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네, 반갑습니다. 기획탐사팀 배현지 작가입니다.
“누나, 저 민우에요…..”
-오랜만이구나, 민우야! 방송 날짜 때문에 전화했어?
“아니요. 방송일은 김피디님께 들었습니다. 사실 누나랑 단 둘이 술 한 잔 하고 싶어서요.”
-어머, 민우 너….. 뭔 일 있구나? 나 지금 하고 있는 게 있는데 마무리만 하면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네. 천천히 마무리 하세요. 별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좀 오래 기다릴 거라 생각했는데 배현지 작가는 10분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오늘 왜 이리 잘 차려 입었니?”
“오늘 졸업식이 있었어요.”
“아…..! 졸업 시즌이지? 졸업 축하한다, 민우야!”
“축하 선물로 술 사줘요.”
“호호홋, 무슨 일이래? 난 아직도 지금 상황이 믿기지가 않네?”
“그냥 술 한 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떠오르는 얼굴이 누나뿐이더라고요.”
“그래, 나 밖에 없지? 일단 가자! 이 근처는 보는 눈이 많아서 패스! 이태원 쪽으로 갈까? 아님 홍대? 아예 종로 골목 한 번 탐사할래?”
“그냥 누나 집으로 가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혼자 살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내가 얘길 했던가?”
“적어도 세 번 정도 들은 것 같아요. 그냥 주변 시끄러운 소리 들리지 않고 누나랑 단 둘이서 술잔을 기울이고 싶어서 그래요.”
“나야 무조건 환영이지.”
“제 차가 생겼어요. 타고 가요.”
“우와, 이거니? 아하! 졸업 선물로 받았겠구나?”
그녀는 길가에 세워진 스쿠프를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구경했다.
“민우야, 여기 누구누구 태웠니?”
“우리 식구들 말고는 태운 사람 없어요.”
“정말? 그러면 너희 식구들 말고는 내가 처음이네?”
“빨리 타요.”
나는 운전석 쪽으로 왔다가 그래도 본 건 있어서 배현지 작가가 서 있는 조수석 앞으로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고마워…..”
“뭘요. 발 조심하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