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565
악당이 살아가는 방법 외전-92화
“……..그렇다면야 뭐.”
어차피 모든 걸 잃어버린 루시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지만 네브라, 아니 아르벤을 추억하기 위해 특별히 거두기로 했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루시아가 방에서 나가고 혼자 남은 성훈은 아무것도 없는 구석을 바라보며 말했 다.
“왜 숨어 있는 거야?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아뇨, 그냥 재미있는 구경을 할 수 있을까 해서……”
“재미있는 구경?”
“남자랑 여자랑 있으면 할 일이 하나밖에 더 있나요?”
한 손에는 팝콘을, 한 손에는 음료를 들고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사종원의 모습에서 뭔가를 떠올린 성훈은 살짝 이마를 찌푸리며 딱밤을 날렸다.
“난 오로지 미리내 일편단심이다.”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지난 1년간 이정으로 활동할 때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극비리로 몇 번……”
“오케이, 거기까지!”
사종원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은 성훈은 기감을 최대까지 확장해 혹시 모를 미리내의 등장을 경계했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거듭해 확인하고 난 이후에야 자신과 사종원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성훈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제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전 이 세계 최고의 암살자라고요. 평소에는 불가능해도 아이템도 제대로 착용하지 않고 반지 때문에 능력치가 제한당하고 있는 형의 눈을 속이는 건 일도 아니라구요.”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러면 왜 몰래 붙어 있었던 건데?”
“그, 그냥 어쩌다 보니…… 어쨌든 형은 미리내 누나가 있는데도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어요?”
“시, 시끄러! 영웅호색이라는 말 몰라? 그리고 악당이 나쁜 짓 좀 하는 게 뭐가 문제야? 솔직히 미리내는 아직도 너무 무서워서 조금이라도 화난 것 같으면 집에서 숨도 못 쉬고 지낸다고! 나한테는 휴식이 필요해!”
가정의 불화가 곧 생명의 위기와 직결되는 성훈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연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제임스와 친해지려 하다 보니 우연히 그렇게 됐다. 유성훈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 이정으로 벌인 일이니 문제 없지 않느나라는 변명을 꺼내 놓던 성훈은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그저 제발 미리내에게는 비밀로 해 달라며 빌 수밖에 없었고 결국 부탁 몇 개를 들어주는 것으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진짜 주변에서 날 가만히 놔두지 않는구나.”
“다형이 자초한 일인데요?”
“됐고 일 애기나 하자. 최종적으로 남은 해방 전선의 잔당이 총 몇 명이지?”
“대략 3만가량 정도 될 거예요.”
얼핏 보면 꽤 많이 살아남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네 개의 하위 도시를 전부 합쳐 3만이라는 이야기는 한 도시당 채 1 만 명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상 하위 도시들은 소멸했다고 봐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 해방 전선의 잔당들에 대한 처우가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다.
마약 중독자, 미쳐 버린 자, 타락해 버린 자들로 이루어진 이들은 재교육시켜 사회에 재편입 하는 건 불가능했고, 감옥에 가두자니 저런 놈들을 가두고 먹이는 데 쓰이는 세금이 아깝다는 사람들의 반발이 상당했다. 가장 간편한 길은 랏시에게 말했듯이 깔끔하게 목을 날리는 것이었지만 3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그냥 죽여 버리자니 왠지 모르게 손해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사람들은 그냥 풀어 주는 걸로 하지. 대신 한 도시에 몰아넣어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기들끼리 알아서 살라고 하자고.”
“지금 남은 사람들 수준이랑 인성이 다 거기서 거긴 거 아시죠? 그런 놈들을 한 곳에 몰아 놓고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면 엄청나게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은데요.”
“그러라고 살려 주는 거야. 승자가 패자의 사정까지 생각해 줘야 해? 억울하면 애초부터 전쟁을 일으키지 말던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해방 전선을 키우고 일이 이 지경까지 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성훈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새롭게 실험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아니 총인구를 절반으로 줄이고도 또 실험할 게 남았어요? 이번에는 또 얼마나 죽이실 건데요?”
“누가 들으면 내가 살육에 미친놈인 줄 알겠 다. 이번 실험은 성격이 약간 성격이 다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브라가 밭 갈고 거름 뿌리고 물 주면서 애지중지 키운 난초였다면 이번 소재의 모토는 내버려 둬도 알아서 잘 자라나는 잡초거든.”
“잡초?”
“됐고, 오랜만에 화원에 가 보자. 그동안 이것 저것 한다고 너무 바빠서 그쪽에는 신경 쓰지도 못 했네. 너무 오랫동안 혼자 방치했다고 엘리가 삐지지는 않았을까 걱정이네.”
“에이, 그래서 특별히 새로운 친구도 마련해 줬잖아요? 그리고 특별히 기분 풀어 주려고 새로운 도구도 잔뜩 챙겨 왔으니까 절대 섭섭해하지 않을 거예요.”
어디에 쓰는지 용도를 짐작할 수도 없는 기구를 꺼낸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사종원을 바라보며 성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내 주위에는 다 이상한 사람들밖에 없다니까.’
***
김이현이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본 것은 새하얀 세계였다. 특별한 장식이나 상징물 같은 건 없었지만 사방에 신성한 기운이 일렁이는 새하얀 세계는 보는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경건하 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뺨을 꼬집고 제자리에서 뛰어보던 김이현은 묘하게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죽은 건가?”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뚜렷이 떠오른다. 송일학을 비롯한 무인들이 미리 내에게 죽은 이후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마냥 도망가기 시작했고 그러던 와중 우연히 볼프를 만났다.
아니, 아마 일부러 찾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피로 전신을 물들인 볼프를 보는 순간 그 동안 마음속에 억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터지고 말았다.
‘죽여! 차라리 죽여! 이제 더 이상 네놈의 이 미친 짓에는 어울려 주지 못하겠다! 신이고 구원이고 생존이고 다 상관없으니 이제 그냥 나를 죽이라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김이현 님? 지금까지 저희 둘이 힘을 합쳐 참 많은 사람을 그분의 곁으로 보내드리지 않았습니까? 아직 이 세계에는 저와 김이현 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불쌍한 어린 양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죽여! 죽이지 않으면 내가 너를 죽이겠다! 그러니까 죽이라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사이비 종교를 만들고 사람들을 장기 말로 이용하던 김이현이었지만 적어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은 가지고 있었다. 신을 믿고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사람들을 홀리고 죽이는 볼프의 방식에 이미 몸도 마음도 지칠 만큼 지친 지 오래였다.
김이현이 해방 전선에 온 진짜 이유는 볼프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해방 전선을 진심으로 도와 자유연맹을 무너트리고 볼프를 죽여 이 지옥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모든 게 실패로 돌아갔다. 해방 전선은 졌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전도시킨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더 이상 이렇게까지 살아남아서 뭐 하냐는 생각이 들었다.
‘신? 지금까지 죽여 온 사람의 숫자가 다섯 자리가 넘어가는 희대의 살인마인 네놈이 정말로 신의 곁으로, 천국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하나? 정말로?’
‘……이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군요. 김이현 님,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알다마다! 네놈이 미쳤다는 걸 모를 리가 있나! 신을 믿는다면 천국에 간다고? 흐흐흐, 그 개소리가 사실이라면 오늘 너나 나 둘 중 하나는 천국 구경을 해 보겠구나!’
그 말과 함께 메이스를 들고 달려가던 것까지가 김이현의 마지막 기억이었고 이 새하얀 공간에서 다시 깨어난 것이다.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
지금껏 자신을 억누르 던 죄책감과 마음의 짐을 털어 낸 것만으로도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김이현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맞잡았다.
자신이 기도를 올릴 자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도를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베길 수 없었다. 드디어 그 악마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손에 넣은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기도를 올리시다니. 역시 김이현 님의 신앙심은 굳건하군요.”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김이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사시나무처럼 온몸이 떨려 온다.
이빨이 딱딱 거리며 부딪힌다.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심장은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미친 듯이 박동해 오는데 머리는 잠에서 막 일어난 듯 몽롱하기만 했다. 자비심 넘치는 이 다정한 목소리는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독실하신 분을 보내 드려야 한다니.”
“으, 으, 으아아아아아!”
낡은 사제복을 걸친 볼프가 사신처럼 서 있었다.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도망가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이고 일어서고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어,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네놈이 여기에 있는 건데?! 나, 나는 죽었어! 나는 죽어서 자유가 됐다고! 그런데 대체 왜!”
“뭔가를 착각하신 것 같군요. 김이현 님은 멀쩡히 살아 계십니다.”
“그, 그럼 여긴?”
“여기는 제가 만든 특별한 방입니다. 지칠 때마다 이곳에 와서 기도를 올리면 몸과 마음이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죠. 좋지 않습니까?”
“……대체 왜?”
충격 때문에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김이현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질문을 던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볼프는 조금도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침착하게 답해 줬다.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김이현 님을 그분의 곁으로 보내 드리기 위해서죠.”
“그러니까 날 죽여야 하는 것 아니냐고! 대체 왜 날 살려서 이런 곳에 데려온 건데?”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제 불찰이 큽니다. 제가 그분의 곁으로 보내 드리는 사람의 조건이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리신 겁니까?”
나이도, 성별도, 사상도, 출신도, 종교도 다 상관없다. 볼프가 보는 것은 단 하나. 그 사람이 신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다. 그 사실을 떠올린 순간 김이현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제가 죽이는 사람은 오로지 신을 믿는 사람 뿐, 하지만 마지막 순간 김이현 님은 신과 믿으면 구원받는 사실을 부정했습니다. 즉, 이대로 죽어 버린다면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아직 죽어서는 안 됩니다. 자격을 갖춘 이후에는 그분의 곁으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스롱!
볼프의 손에 들린 낡고 빛바랜 단검과 십자가를 바라보며 김이현은 경기를 일으켰다. 지금까지 볼프를 도우면서 저 단검과 십자가로 사람을 해체하는 작업을 몇 번이나 보아 왔다.
압도적인 신성력을 이용해서 절대로 죽지 않고, 쉬게 하지도 않고 죽기 위한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그런 고문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던 김이현은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내 질렀다.
“나, 난 신을 믿어! 신을 믿는다고!”
“제가 지금까지 구원해 준 사람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정확히 31,852명입니다. 그 많은 사람에게 전도를 하다 보니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 지는 쉽게 구분할 수 있게 됐죠. 그리고 아쉽게도……”
서걱!
“김이현 님의 외침에는 진심이 담기지 않았습니다.”
“끄아아아아!”
고통받는 것에 익숙해진 전사도 아니고 항상 후방에서 버프나 회복만 걸어 주던 사제인 김이현이 신경이 집중되어 있는 귀를 베이는 통증을 참아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귀가 있던 자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러 대는 김이현을 자애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볼프는 십자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분의 곁으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