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564
악당이 살아가는 방법 외전-91화
‘…..끝났다.’
랏시는 네브라가 죽는 순간 더 이상 승기가 없음을 깨달았다.
전체적인 전력에서 밀리는 해방 전선이 그나마 승기를 잡기 위해서는 강자들을 이용해 변수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는데 단 한 곳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유성훈을 잡을 수 있다고 자신하던 네브라는 사지가 잘려 나간 비참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 했고 미리내를 상대하겠다며 천여 명의 무인들과 김이현을 이끌고 간 송일학은 싸늘하게 식은 시체가 된 지 오래며 제임스는 진작에 연락이 두절됐다.
수의 이점을 이용하고 싶어도 어중이떠중이 지휘관들로는 세르게이와 볼프, 루시아가 버티고 있는 정예를 뚫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자유연맹이 강할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까지 강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손도 발도 쓰지 못하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 이대로 버텨 봤자 득 될 게 없다는 판단을 내린 랏시는 퇴각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중군과 후군…… 아니 후군에만 퇴각 명령을 내리고 선봉과 중군에게는 후군이 물러나는 타이밍에 맞춰서 광견 작전을 펼치라고 전달해.”
광견 작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광견 작전은 특수한 최고급 마약과 포션을 이용해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싸우는 버서커를 만드는 작전이었다.
개별로는 별다른 효과를 볼 수 없고 두 개의 약이 섞여야만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명령이 하달된다면 사람들은 일체의 망설임 없이 약을 먹을 것이다.
“과, 광견 작전은 도저히 방법이 없을 때 적과 공멸하기 위해서 쓰는 것 아니었습니까? 게다가 선봉과 중군을 미끼로 던지고 후군만 도주한다는 건 처음 계획과는 완전히 다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목은 채찍에 찢겨져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네브라나 제임스 같은 지휘관에 비하면 매우 온건하다고 할 수도 있었던 랏시가 거의 처음으로 보인 무력 행사에 사람들은 당황해하며 명령을 하달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재 남은 병력은 10만가량. 이 중 절반이라도 무사히 살려서 돌려보내야 한다.’
전투 중 사상자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순간은 서로 맞서서 싸울 때가 아니라 한쪽이 일방적으로 패퇴하고 도망가는 순간이다.
지금같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명령을 전달하고 전열을 가다 듬어 일사불란하게 퇴각하는 것은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자유연맹이 그걸 그냥 놔둘 리도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절반을 제물로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나머지 절반을 조금의 손해 없이 완벽하게 돌려보내는 게 낫다. 그렇게 해서 절반의 병력을 건져 봤자 어차피 자유연맹과의 싸움에서는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을 테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랏시가 노리는 것은 자유연맹과의 전투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안위뿐이었으니 말이다.
‘최대한 많은 병력을 온존한 채 되돌아가면 자유연맹도 함부로 나를 건드릴 수 없을 거야. 그리고 더 좋은 조건으로 항복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남아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나만큼은 무조건 살아남아야 해.’
해방 전선이라는 거대한 세력의 간부에서 모든 것을 잃고 일개 시민으로 돌아간다는 게 아쉽기는 했지만 어차피 원래부터 맨손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몸이다.
살아만 있다면 언제든지 기회는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기수를 돌리려는 순간 하늘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가려고? 조금만 더 있다 가지 그래?”
“맹주. 유성훈.”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커다란 빛의 날개는 아주 좋은 사격 표적지였지만 그 누구도 그 날개의 주인을 향해 공격을 날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무리 마약에 취해 있다고 한들 방금 전 네브라와 펼친 천외천의 전투를 보고도 공격을 날릴 만한 담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견제는커녕 모두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훈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허겁지겁 도망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랏시는 피가 날 정도로 강하게 입술을 깨물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 했다.
“……저희 협상하죠.”
“협상? 승패가 이미 뻔히 갈린 시점에서 굳이 협상을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는데?”
“떠볼 필요 없어요. 당신이 직접 저를 찾아왔단 건 분명 저에게 뭔가 바라는 게 있다는 거겠죠. 그리고 현재 상황에서 당신이 할 말은 십중팔구 협상 제안이겠죠. 더 이상 무의미한 피해를 늘리고 싶지는 않을 테니.”
“흠, 계속해 봐.”
공식 석상에서는 보여 주지 않는 가벼운 태도나 말투가 신경 쓰였지만 네브라에게 유성훈의 진짜 모습에 대해 들었던 랏시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저희들에게는 아직 광견 작전이라는, 모든 병력들은 미쳐 버린 광전사로 만드는 마지막 동귀어진의 수단이 남아 있어요. 죽을 때까지 미쳐 날뛰는 병력을 제압하려면 자유연맹도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제 제안을 받아들여 주신다면 그 작전을 중지하고 자유연맹에 무조건 항복하겠어요.”
“그리고?”
“그 대신 제 안전만큼은 확실히 보장해 주세요. 해방 전선과 관련되어 있다는 과거를 완전히 지우고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주기만 하면 끝이에요. 그렇게 된다면 최소한의 피해로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게 되겠죠. 어떠신가요?”
“흠 흠”
“……..”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성훈을 바라보는 랏시의 속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생각 할 때 이 제안은 반드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한 명의 안전을 확보해 주는 대가로 앞으로 발생할 수만, 어쩌면 수십만의 피해를 줄 일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성훈은 상식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싫은데?”
“……예?”
“광견 작전인지 펼쳐도 우리 입장에서는 손해가 없어. 이 싸움에 동원된 사람들은 전부 여유 생명이 한 개 이상 존재하고 있거든. 죽어 봤자 반나절가량 무기력 상태에 빠지고 아이템 몇 개를 잃는 게 전부. 맹주로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극단적으로 말해서 전부 죽어도 별문제는 없어.”
상위 도시의 가장 큰 강점은 바로 단 한 번도 도시 병합전에서 패배를 겪지 않아 그만큼 여유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강제 미션이나 여러 번의 전투를 거치면서 그런 사람들의 숫자는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세 개 도 시에서 긁어 내자 순식간에 십만 병력을 편성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랏시는 자유연맹의 자신감의 근원이 죽어도 한 번은 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면 말짱 황이다.
랏시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수를 생각해 내려 했다.
“부, 불만 세력을 수습해서 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관리해 드릴게요!”
“다 죽여 버리면 되는데 굳이 관리할 필요까지야.”
“항복한 사람까지 전부 다 죽이는 건 자유연맹과 맹주님의 위신을 두고두고 떨어뜨릴 거예요! 효율적인 선택을 하시라구요!”
“이미 가진 게 넘쳐서 몇 번 비효율적인 선택을 하더라도 손해 볼 게 없거든?”
과거에는 원활한 사태 수습을 위해 루시아를 끌어들여야 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성훈의 신뢰도와 명성은 그때와 비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상승했고 해방 전선이 벌인 악업은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확했다.
성훈이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랏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정말로 협상할 마음이 없어. 그러면 대체 왜?’
“대체 왜 절 찾아온 거죠?”
“별건 아니고 화풀이하려고. 대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렇게 물고 늘어졌던 거야? 너 때문에 계획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깽판 부리려던 걸 대체 몇 번이나 참아야 했는지. 어!”
“그게 대체 무슨”
“다시 일어나면 그때 모든 걸 알게 될 거야. 지금은 조용히 잠들려무나.”
“………”
쓰러지기 직전 랏시가 중얼거린 작은 소리를 용케 캐치해 낸 성훈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목숨은 살려줄 테니.”
랏시는 엘리의 훌륭한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랏시를 어깨에 들쳐 멘 성훈은 날개를 펼쳐 공중에 날아올라 전장을 둘러보았다. 지휘부를 전부 잃어버린 해방 전선은 이제 일방적으로 당할 일만 남았다.
본래 이 정도로 승패가 명확한 상황에서는 랏시가 말했던 것처럼 협상을 통해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지만 성훈의 생각은 달랐다. 어차피 골수까지 마약에 중독된 쓰레기들을 살려 둬봤자 분쟁의 원인이 되면 원인이 되지 좋은 점이 하나도 없다.
지금부터는 해방 전선이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은밀히 지원하거나 새로운 지휘부와 협상해 밀고 당기는 과정을 통해 전쟁이라는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해방 전선의 사람들을 죄다 쳐낼 생각이었다. 그건 비유하자면 식사가 끝난 이후의 설거지, 뒷정리와 같은 것. 네브라를 죽이고 랏시를 사로잡은 것으로 지난 1 년간 심혈을 기울여 진행해 온 에너미 메이커 계획은 훌륭하게 끝을 맞이한 것이다.
“아 재밌었다! 아주 훌륭하고 유익한 시간이었어.”
누가 들으라는 듯이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린 성훈은 그대로 날개를 움직여 밤하늘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
평원에서의 대회전으로부터 2개월이 지난 시점에 해방 전선이 무조건 항복 의사를 밝히게 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한때 50만까지 불어났던 해방 전선의 병력 중 남은 것은 고작해야 5 만. 노예들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하위 도시의 사람들만 뽑자면 개전 때의 채 십분지 일의 인원도 살아남지 못한 처참한 패배였다.
그에 반해 자유연맹의 피해는 전부 합쳐 사상자 1 만 5천 명가량이 전부였다. 그나마 그 사상자들도 대부분 초기 전쟁에서 죽어간 토론토인 들뿐, 해방 전선과의 전투를 치르면서 성훈은 언제나 여유 생명을 가진 자들이나 탑 랭커를 앞에 내세워 피해를 최소한도로 줄였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전쟁으로 입은 피해 역시 토론토의 황폐화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전쟁을 치르고도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넘쳐났다.
“의장 자리에서 은퇴하겠다고요?”
“예. 전쟁은 이겼지만…… 아시잖아요. 저에 대해서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더 이상 의장직을 수행하는 건 무리예요.”
어딘지 모르게 초연한 루시아의 미소를 바라보며 성훈은 순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물론 아주 약간일 뿐이었고 금세 다시 포커페이스를 되돌아왔다.
“그래서 의장직에서 물러나시고 앞으로 뭘 하실 겁니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성훈 님의 길드인 무명 길드에 들어가고 싶은데요.”
“예에?”
“성훈 님도 당황하시네요.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것같아요.”
“아, 아니 잠깐. 지금 제가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무명 길드로 들어오시겠다고 하신 겁니까?”
“예, 성훈 님의 밑에서 일하고 싶어요.”
“이해할 수가 없군요. 루시아 님이라면 봉사 조직이라도 꾸려서 살아남은 해방 전선의 사람들이나 빈민들을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제 밑으로 들어오려는 건지……”
“이번 일을 겪고 나서 많이 고민했어요. 저는 나름대로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고 안전해질 수 있는 길을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저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될 사람 수십만이 죽고 불행에 빠졌어요. 더 이상 저는 제 의지로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겠어요.”
거지에게 준 돈이 나쁜 일에 쓰일까 봐 돈을 적선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린 사람의 범죄자나 살인마가 되어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을까 봐 죽어 가는 사람이 있어도 치료해 주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성훈 님은 순간적으로는 악해 보일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언제나 최대다수가 행복해질 수 있는 선택만을 했어요. 그러니 저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려 주세요. 제가 어떻게 말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모든 걸 대신 결정해 주세요.”
생기를 잃고 죽어 버린, 어딘지 모르게 유키코를 연상케 하는 눈을 바라보며 성훈은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루시아가 이렇게 변해 버릴 줄은 몰랐다. 그래도 머리와 달리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여 루시아의 말을 받아 주고 있었다.
“좋습니다. 루시아 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죠. 대신 제 밑에서 일하겠다고 하신 이상 더 이상 제 방식에 트집을 잡으시면 안 됩니다?”
“…….걱정 마세요.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