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Live As A Writer In A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689
■ 688화. 당근 (2) □ ᓚᘏᗢ
만약 잡혀계시다면 당근을 그려주세요.
전생에서 고생하거나 고생하고 있을 법한 사람들에게 장난식으로 하는 말이다.
특히 편집 혹은 그림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하는 편인데, 이럴 경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진짜 열심히 했다고 인정 받아 기뻐하거나, 아니면 진짜로 기계처럼 갈리고 있거나.
이곳은 아직 그런 장난이 없으니 후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로만이 이 장난을 알고 있을 확률은 극도로 적다.
‘진짜 어디 붙잡힌 채로 글만 쓰고 있는 건가?’
그런 거라면 당장 로만을 찾아야 된다. 하지만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전개 자체가 크게 모나지 않고 제대로 이어졌으니까. 전개가 이상하게 흘러갔다면 진지하게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개도 멀쩡하고 특유의 암울하면서도 흡입력이 강한 문장력도 그대로다. 전보다 더 암울해진 것 같긴 해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편지를 다시 보냈다. 이번에는 장난이 아니니까 어디 잡혀있다면 당근을 그려달라고. 나에게 확신을 달라고 말이다.
“아이작. 원고가 왔어.”
“벌써? 요즘 일 열심히 하시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새 원고가 도착했다. 나는 아델리아로부터 원고를 건네받고 검수에 나섰다.
혹시 몰라 맨 마지막 페이지부터 확인했다. 헌데 이번에는 당근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
‘뭐야. 진짜 장난이었어?’
조금 안심이 된다. 단순히 영감이 무럭무럭 차올라 탄력이 붙었던 모양이다.
이에 늘 그랬던 것처럼 오타 검수부터 들어갔다. 솔직히 로만은 철두철미한 성격인지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꼬박꼬박 하는 편이 낫다. 중간에 원고가 뒤섞였을 수도 있었으니.
“음?”
그러다 첫 페이지부터 오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본래 ‘살’이라 써야 할 단어가 ‘잘’로 적혀있다.
탄력을 받았던만큼 실수를 범한 모양이다. 나는 그 부분에 체크하고 넘겼다.
‘또 오타네.’
얼마 가지 않아 또 오타가 나왔다. ‘려’로 적혀야 할 부분이 ‘여’로 적혔다.
다시 그 부분을 체크하고 원고를 넘겼다. 이후에도 오타는 간간이 존재했다.
그래도 오타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수정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잘 -> 살] [여 -> 려] [두 -> 주] [제 -> 세] [오 -> 요]여태까지의 오타를 종합하니 명백한 SOS 사인이 드러났다. 이것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로만이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어디에 갇혀서 글만 쓰고 있는 걸까.
당최 무슨 상황인지 구분하기 어려워도 일단 이 사람을 찾는 것부터 우선이다.
오타를 이용해 암호까지 쓴 걸 보면 정신적으로 몰린 게 확실하다.
“케이트 추기경 님께서는 현재 교황청에서 근무하고 계십니다.”
“아직 여기에 없어요?”
“네.”
신전으로 찾아가 케이트를 찾았으나 부재 중이라는 소식만 들렸다.
듣자하니 교황청으로 돌아가 근무 중이라고 하던데, 지난번에 그런 소리를 하고 떠났긴 했다.
다만 그정도로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바쁘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만 연락책이 없는 건 아쉽다.
‘루미너스 님에게 부탁해야 되나······’
단순 심부름을 신에게 부탁하자니 그것도 마음에 걸린다.
[마음에 걸린다고 하지 않았니?]“때로는 양심을 팔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죠.”
물론 마음에 걸린다는 거지, 실행은 별개의 문제다. 문지방을 넘는 건 어렵지 않다.
애당초 사람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는데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되지 않겠는가.
루미너스는 내 대답에 침묵을 고수하더니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현재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다.
[그냥 가만히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다.]“그게 무슨 소리에요? 지금 사람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으음······]내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반박하자 루미너스가 침음성을 흘렸다. 보아하니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이다.
루미너스의 말을 듣는다면 로만에게 별 이상은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가 보내준 SOS 신호는 결코 쉬이 넘길 수 없다.
애당초 나에게 그 암호가 도착한 이상 좌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것까지 무시한다면 로만이 깊은 배신감을 느끼겠지.
루미너스도 더이상 반박할 거리를 못 느꼈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아이를 부르도록 하마.]“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대신 너무 혼내지는 말아주렴. 이건 나도 도움을 준 거라서.]알고보니 루미너스도 한패였구나.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이라 어이가 없어졌다.
도대체 로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신마저 협조한 건지 도통 모르겠다. 직접 확인하는 게 좋겠지.
혼내지 말아달라고 한 걸 보면 케이트가 사고 아닌 사고를 친 모양이다. 그 사건 이후 정신을 차린 줄 알았는데.
[정신을 못 차렸다기보다는······ 다소 성급했다고 봐야겠구나.]“루미너스 님은 뭐하셨나요?”
[난 그 아이를 응원했단다. 단지 네가 이렇게 나설 줄은 전혀 몰랐을 뿐.]“······일단 케이트 씨와 직접 만나서 얘기하겠습니다.”
루미너스마저 이러니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곧장 신전 밖으로 나와 케이트가 오기까지 기다렸다.
그동안 모라로부터 신화 시대에 있던 일에 대해서도 듣고, 피와 강철 외전도 틈틈이 적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사흘 정도가 흘렀을 때쯤, 케이트가 우리 저택에 도착했다.
“케이트 씨.”
“네. 아이작 님.”
“지금 로만 씨는 어디에 계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 ···”
로만의 위치에 대해 묻자 케이트가 흠칫거렸다. 포커페이스인지 몰라도 온화한 미소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뒤이어 그녀는 미소처럼 온화하면서도 담담한 목소리로 내 질문에 대답했다.
“로만 형제께서는 현재 죄를 저질러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형벌이요?”
“네. 아이작 님께서도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알고야 있다. 로만은 교황의 아들이자 이단심문관이기도 한 사람.
그런 자가 신들의 몰락을 주제로 한 소설을 썼으니 충분히 죄라고 할만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 시대를 기준으로 두었을 때다. 내 입장에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거나 다름없다.
“로만 형제께서는 신들의 몰락을 주제로 소설을 썼죠. 루미너스 님을 모시는 몸으로서 그런 소설을 쓰는 건 엄연한 죄입니다.”
“음······”
“그렇다고 연재를 강제로 중단시키는 건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죠. 목소리를 내라는 아이작 님의 교리와 상반되는 일입니다.”
조언도 아니고 ‘교리’라고 하니까 떨떠름해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케이트는 진심을 다해 교리로 받아들인 듯하다.
“하여 로만 형제에게 형벌을 내렸습니다. 완결을 내기 전까지 개인방에서 나올 수 없도록. 음식은 꾸준히 전달하고 있지만 그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습니다.”
“······그거 군만두형 아니에요?”
“군만두형이 뭐죠?”
이 세상은 군만두가 따로 존재한다. 드워프가 안주거리를 위해 발명한 음식 중 하나다.
다만 군만두와 별개로 군만두형은 모를 것이다. 이 세상에 올드 보이 같은 영화가 등장한다면 또 모르지.
아무튼 로만이 군만두형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 별개로 의문이 든다. 케이트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로만이 바보도 아니고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겼을 터. 아무리 케이트가 상사여도 분명 제대로 숨겼을 것이다.
“······혹시 루미너스 님께서 알려주셨습니까?”
“네.”
역시 그렇구나. 루미너스가 알려줬으니 케이트도 눈치챈 모양이다.
나는 아주 훌륭한 신과 신도의 합작에 허탈하게 웃었다. 전후사정을 알게 됐으니 나머지는 이유다.
“왜 그러셨어요? 죄악이라지만 눈 감아 줄 수도 있었잖아요. 저와 협업하고 있다는 것정도는 알고 있었을 텐데.”
“··· ···”
정곡을 찌르는 내 질문에 케이트가 입을 다물었다. 온화한 미소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대신 무언가 들킬까봐 안절부절하며 얼굴을 붉히는 등.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분명 이유가 있어서 적당한 구실을 댄 것 같다. 루미너스의 말마따나 케이트답지 않게 성급했을 뿐.
“화내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왜 그러셨어요?”
“······정말로 화 안 내실 겁니까?”
케이트가 소심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마치 강아지가 잘못했을 때의 표정과 흡사했다.
형언할 수 없는 귀여움에 마음이 사르르 녹는 느낌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괜찮다는 듯이 손을 올렸다.
그에 케이트도 자신감을 얻었는지 두 손을 꼭 맞잡으며 가슴 중앙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는 부끄러움을 담아 답했다.
“멸망을 향해 걸어가는 기사가 완결된다면······ 아이작 님께서 신들의 이야기를 쓰실 거라 생각하셨습니다.”
“네. 그렇죠. 그전까지 외전을 쓸 예정이었고요.”
“저는 그때가 빨리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야만 아이작 님의 씨앗을 받을 날이 앞당겨질 테니까요.”
“··· ···”
그런 거였구나. 나는 얼굴을 붉히며 마음을 고백한 케이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모건 왕의 궁전에서 했던 약속이다. 신화와 관련된 소설을 쓸 때 하룻밤을 보내겠다고.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는 케이트의 빌드업이었으나 나 또한 그녀에게 호감을 가져서 문제는 없었다.
다른 여인들도 케이트를 반기는 모양새다. 광신도적인 면모도 옅어졌을 뿐더러 나에게 꽤 많은 도움을 줬으니.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나요?”
“······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들었습니다.”
신실한 자답게 편법을 사용할지언정 약속은 제대로 지키려는 듯했다. 올곧다면 참 올곧다.
나는 부끄러워하는 케이트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귀여워서 봐준다.
“그런 거라면 저에게 말씀하시지. 그 날을 좀 더 빨리 앞당길 수 있었을 텐데요?”
“하, 하지만 아이작 님께서 괜히 불편해하실까봐······”
“불편한 건 없어요. 덕분에 케이트 씨가 저를 많이 좋아한다는 건 알게 됐네요.”
“우으······”
원래 본심을 들키는 것만큼 부끄러운 것도 없다. 당장 케이트의 얼굴을 보아라.
얼굴이 빨개질대로 빨개졌다. 어떻게든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손으로 덮었지만 어림도 없다.
나는 그 반응을 보고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종교적인 의미가 아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가졌다고.
물론 종교적인 색채가 띠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만의 개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이번 일은 봐드릴게요.”
“자,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대신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요. 듣자하니 체리도 동참하는 것 같은데······”
“체리는 이미 아이작 님에게 은혜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은혜가 그 은혜가 아닐 텐데. 체리는 나에게 은혜를 받았지만 케이트가 원하는 은혜가 아니다.
짓밟혔던 꿈을 일으켜 세워줬으며 더 나아가 작가로서의 명예까지 쥐어줬다. 은혜를 넘어선 구원이라 할 수 있지.
핵융합에 준할만큼 어울리는 두 여인이지만, 이것만큼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체리가 생각하는 은혜와 케이트 씨가 생각하는 은혜는 다를 거예요. 체리에게 어떤 사정이 있으셨는지 알고 있나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 번 물어보세요. 케이트 씨가 설득하신다면 저 또한 체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체리도 나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어둡다 못해 심연 같은 성격으로 다가오지 못할 뿐.
따지고 보면 아델리아와 같은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차이점은 아델리아는 무너지기 직전에 구원받았고, 체리는 무너진 후에 구원받았다.
아델리아는 주변의 응원과 격려로 나와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체리는 아예 주변의 도움부터 거부하고 있다.
자기는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나 뭐라나. 게다가 나에게 버리지만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케이트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아픈 아이에요. 그러니 심도 깊은 상담이 필요할 겁니다.”
“음······ 그러면 아이작 님에게 은혜를 받았다는 건······”
“그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케이트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과연 빛 그 자체인 그녀가 심연 같은 체리의 마음을 끌어올 수 있을지 기대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로만의 군만두형은 그대로 집행하는 것으로 결론났다. 이건 어쩔 수 없다.
나도 로만에게 안타깝긴 해도 집행을 달게 받으라는 식으로 편지를 부쳤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은.
[배신자]오타를 이용한 암호문이었다. 배신자라는, 그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단어.
나는 그 암호를 보자마자 곧장 케이트를 호출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잠깐 로만 씨를 뵈러 갈 건데 괜찮나요? 아, 집행을 봐달라는 건 아닙니다.”
군만두형이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어쩌면 케이트 씨가 원하는 걸 더 빨리 이룰 수도······”
“어서 가도록 하죠.”
통조림형으로 대신 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