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uin A Love Comedy RAW - Chapter (382)
EP.382 합동 수학여행
“야. 따라와.”
거만하게 세탁실을 가리키는 렌카.
죽도를 잡고 대충 훙훙 휘두르고 있던 나는, 주변의 부원들이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는 걸 느꼈다.
렌카의 분위기를 보니 죽도를 가지고 장난을 쳤다며 혼을 낼 줄 아나보지?
물론 그걸 언급하긴 하겠지만, 본래 목적은 전혀 다른 걸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해진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렌카를 따라 세탁실 안으로 들어갔다.
팔짱을 낀 채 문을 향해 턱짓을 하는 그녀를 보며 순순히 세탁실 문을 닫은 내가 말했다.
“왜요?”
“죽도 가지고 장난치면 돼?”
“장난 친 거 아니고, 오랜만에 손에 잡아서 잘 맞나 확인해본 거예요.”
“어쩌라고. 오랜만에 잡질 말든가. 이게 다 연습을 게을리 해서 그래.”
음음. 오늘따라 굉장히 반항적이구나.
어깨를 으쓱인 나는 이곳에 숨겨둔 사탕을 꺼내 포장지를 뜯으려고 했다.
그러자 렌카가 인상을 팍 구겼다.
“필요 없어.”
“이거 달라는 뜻으로 부른 거 아니었어요?”
“뭐래…! 내가 사탕 하나 먹자고 너 따윌 따로 부른 줄 알아?”
“따위?”
“아 어쨌든…! 그거… 치나미랑 같이 모이라고 한 거 있잖아.”
부원들이 있는 앞에선 도도하던 렌카의 태도가, 육체관계와 관련된 화제가 튀어나오자 순식간에 소심소심해진다.
우리 렌카는 매번 한결같아서 좋다.
“예. 스승님이랑 얘기해봤어요?”
“아니… 나나 치나미나 지금 엄청 집중해야하는 상황이잖아. 그런데 네가 그런 말을 해버리면 집중이 되겠어?”
요컨대, 대회에 신경을 쏟을 때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뒤로 미루자는 소리다.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되지 굳이 돌려서 하는 이유가 뭘까.
아마 내가 보복 같은 거라도 할 줄 알았나보다.
“그래요? 알았어요.”
대수롭지 않은 듯한 내 대답에 놀랐는지, 렌카의 눈이 동그래졌다.
“진짜?”
“예.”
“왜?”
“뭘 왜예요? 일 리 있는 말이니까 승낙한 건데. 혹시 대회 전에 해주길 바라고 절 떠본 거였어요?”
“무, 뭐라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이 성욕에 미친놈아…!”
“지금 내가 욕을 들어먹어야하는 상황인가?”
“네가 이상한 사족을 덧붙이니까 그런 거지…! 어, 어쨌든 미룬다고 했다?”
“그럴게요.”
“다른 말 하면 안 돼?”
“알았다니까요.”
미심쩍은 눈으로 날 흘겨본 렌카가 말했다.
“그래… 그럼 이제 나가.”
“여기서 볼일 있어요?”
“아니.”
“나는 볼일 있는데, 그럼 부장이 나가야하는 거 아니에요?”
“무슨 볼일이 있는데?”
“온 김에 빨래하려고요.”
“나갔다가 나 나가면 다시 들어와서 빨래해.”
“너무 억지 아니에요?”
“너한텐 이래도 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진심인지 아닌지 헷갈릴 만큼 애매한 말로 우겼다면 교육을 시켰겠으나, 대놓고 황당한 말이라서 그냥 웃음만 나온다.
그녀 나름의 애정표현이 무척이나 귀엽다고 생각하며, 나는 렌카를 예고도 없이 꼬옥 껴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엉덩이를 마구 토닥인 후,
“무, 뭐하는 거야…! 이 정신 나간 또라이 새끼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그녀가 발로 땅을 구르며 성을 내는 모습을 무시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
평화롭지만 히요리 때문에 다소 불안한, 그런 나날이 지나가고…
곧 수학여행을 앞둔 시험 날이 다가왔다.
“다들 자리 한 칸씩 떼어서 앉아.”
교탁에 선 미유키의 지시에,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리를 배치하는 학생들.
그들을 둘러본 나는 게으름을 잔뜩 피우며, 내 책상만 창가에서 살짝 옮겨놓았다.
그러자 날 주시하고 있던 미유키가 말했다.
“마츠다 군, 호노카 것도 옮겨줘.”
“그게 누군데.”
“진심이야?”
“아니.”
반 곳곳에서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볍고 시답잖은 농담에도 웃는 걸 보니 시험이란 단어에서 주는 무게감이 상당했나보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부반장의 책상을 떼어놓은 나는, 내 자리에 앉아 의자 등받이에 몸을 잔뜩 기대었다.
교실의 책상이 대부분 잘 배치되자, 미유키가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공부 열심히 했으니까 이번에도 10등 안쪽에 들어보자.”
“그건 불가능해. 2학년 수업은 어려워.”
“해보지도 않고 벌써 포기하는 거야?”
“열심히는 할 건데, 기대는 하지 마라.”
“열심히 하는 거면 족해. 이따가 집에 돌아가서 가채점해줄 테니까 풀었던 시험지는 버리지 마.”
“꼭 해야 되냐? 어차피 결과는 똑같잖아.”
“시험 결과는 수학여행 뒤에 나오는데, 미리 대충이라도 아는 게 좋지 않아?”
“별로 안 궁금한데… 그냥 집이나 마저 짓고 산책이나 하자.”
게임을 말함이었다.
내 말에 담겨있는 속뜻을 알아차린 미유키가 실소를 터뜨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가기 전에 영화도 한 편 보든가 하자. 이번에 개봉한 거.”
“난 좋아. 근데 무슨 영화야?”
“액션 코미디. 머리 비우고 볼 수 있는 거래.”
“엄청 마음에 드는 장르네?”
“그러냐?”
“응. 잔인한 거 아니지?”
최근에 본 영화가 조금 고어했는데, 그게 잊혀지지 않았나보다.
킥킥거린 나는 내 어깨에 닿은 미유키의 기다란 머리카락 몇 올을 집게손가락으로 만지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아니야.”
“그럼 됐어.”
어깨를 바짝 세운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스크린을 보다가, 깜짝 놀랄만한 장면이 튀어나오면 자신의 발을 동동 굴렀던 장면이 생각난다.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민폐를 끼칠까봐 입을 콱 틀어막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었는데…
가끔 집에서 공포나 스릴러 영화를 보면 아주 좋을 것 같다.
“시험 잘 봐, 켄 군.”
뜬금없이 훅 튀어나온 이름.
그에 움찔한 내가 미유키를 바라보니, 환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름으로 불린 건 정말 오랜만이다.
연애 초창기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드는구나.
날 격려해주려는 의도였다면 미유키는 실패했다.
시험 전에 저런 말을 해주는데 집중이 되겠는가?
이번 시험은 망했다. 미유키가 왜 이렇게 못 봤냐고 날 나무라면, 이 핑계를 써먹어야겠다.
**
시험이란 것은 왜 존재할까.
이런 건 무식한 내가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다.
머리에서 김을 풀풀 뿜어내며 당일의 시험을 모두 끝마친 나는, 미유키 주변에 학생들이 몰리자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도 인기가 많지만 시험 땐 특히나 더하다.
이러면 한 시간 뒤에야 집으로 돌아가겠거니 싶다.
“마츠다 군, 어디 가?”
교실을 빠져나가려는 날 향한 미유키의 물음.
책상에 몰린 학생들 사이에서 목을 빼꼼 내밀고 큰 목소리를 내는 그녀에게, 나는 매점에 들렀다 오겠다고 말하고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거나, 죽상이거나.
시험기간만 되면 죄다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감상하며 매점으로 걸음을 옮기던 나는, 운동장 스탠드에서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자그마한 머리 한가운데에 잡초처럼 뽈록 튀어나온 바보털.
저것을 마구 건드리고 싶다는 충동을 참아내며 바보털의 주인에게 다가간 내가 말했다.
“여기서 뭐하냐?”
그러자 히요리가 반가운 기색을 팍팍 뿜어내며 날 돌아보았다.
“마츠마츠! 여기 앉아요.”
자신의 옆자리를 팡팡 두드리는 히요리.
딱딱한 스탠드를 강하게 쳐대는데 손은 안 아픈가?
그러한 생각을 해본 나는 그녀에게 딱 달라붙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나 가깝다고 느낄 정도의 거리를 두고 스탠드에 엉덩이를 붙였다.
“미츠시마는 어디 가고 또 혼자야?”
“다른 애들이 미호한테 몰려서 몰래 빠져나왔어용.”
그럴 줄 알았다.
미호는 미유키 포지션이 맞다니까.
그나저나 히요리의 표정이 은근히 괜찮다.
시험에서 의외의 호성적을 기록한 건가?
“시험은 잘 봤어?”
“잘 봤을 것 같아요?”
“아니.”
“맞아요. 엄청 못 봤어요. 다 찍었엉.”
“그걸 왜 자랑스럽게 말해?”
“공부를 못하는 걸 못한다고 하는 게 어때서요?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한 거냐고 하지는 말아주세요.”
“나 아무 말도 안 했다.”
“이게 다 선배가 맨날 잔소리해서 그래요. 선배는 시험 잘 봤어요? 아는 문제 많이 나왔어?”
“적당히 나오긴 했어.”
“다행이네요. 짐은 다 쌌어요?”
“아직.”
“여행이 코앞인데 준비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니에요?”
“넌 벌써 준비했어?”
“당연하죠.”
수학여행을 크게 기대하고 있는 건 알았지만 벌써 준비물을 챙겼을 정도라…
장하다. 당일에 쌀 것 같았는데 이 정도면 기대이상이다.
“한 번 봐봐요.”
히요리가 자신이 찍어놓은 사진을 내게 보여주었다.
휴대폰 화면에 보이는, 가방 옆에 오와 열을 맞춰 늘어져있는 각종 물품.
있을 건 다 있는 그것들을 살핀 내가 물었다.
“수영복은 저번에 보여줬던 걸로 입고 가게?”
“네.”
“너무 남사스럽지 않냐?”
“할아버지 같은 말투 쓰지 말아줄래요?”
“걱정돼서 하는 말이잖아.”
“뭐가 걱정되는데요?”
뭐긴 뭐야. 남들이 대놓고 널 쳐다볼 게 분명하니까 그렇지.
학생 신분인 주제에 그런 수영복을 입는 건 풍기문란이란다.
벌점 3점 추가. 조만간 엉덩이를 때려주어야겠다.
하지만 나에게만 보여준다면 참작할 여지는 충분하다.
“됐고, 가디건 하나 챙겨.”
“왜요?”
“그냥 챙겨.”
“알았어용.”
보수적이게 구는 내가 은근히 마음에 들었을까?
입꼬리를 슬쩍 올린 그녀가 내 다리에 약한 주먹질을 했다.
그녀만의 애정표현인가? 나쁘지 않다.
딱딱한 허벅지 감촉에 놀랐는지 잠깐 눈을 끔벅인 그녀는, 이내 평상시의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선배도 짐 다 싸고 저한테 검사 받아요.”
“알았어. 근데 검사할 게 있나?”
“불순한 물건이 있는지 확인해야 해요.”
불순한 물건이라… 콘돔 같은 걸 말하는 건가?
음란한 내 머리로는 그것밖엔 생각이 안 난다.
“빼먹은 물건이 아니라?”
“그런 목적도 있긴 있죠. 저희 매점 가요.”
내 손목을 잡아끄는 그녀.
손톱에 칠해져있는 빨간 네일이 참 예쁘다고 생각하며, 나는 미동도 않는 내게 애교 섞인 짜증을 부리는 히요리의 성화에 못 이긴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마치 친한 소꿉친구를 대하듯 그녀와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한가로운 교정을 거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