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70
170화
펜 한 자루로 그린 그림에는 소리가 없었고, 때문에 그림 속 여자도 그저 고요하고 평온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잉크로 채운 눈동자는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저 스케치일 뿐인데, 그것도 편지지에 만년필로 짬짬이 그린 것인데. 그런 그림에서도 애정이 묻어날 수가 있었다. 사소한 부분까지도.
눈빛, 입술, 자세와 성기게 잡은 옷의 주름, 턱을 괸 손끝…….
에스페란사는 한참 그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누르듯이 답장을 썼다. 최대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그림 같은 건 본 적도 없는 것처럼. 왠지 편지 속 에스페란사의 말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딱딱하게 느껴졌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답장은 쓰셨습니까?”
기다리던 밀런이 물었다.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보내지 않을 것이다.
“답장 없어.”
“예?”
에스페란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장을 쓴 종이와 시더의 그림을 밀런의 눈앞에서 봉투에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바깥 공기가 들어오니 복잡하던 머릿속이 조금 상쾌해졌다. 에스페란사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밀런에게 말했다.
“오늘 애니는 없어. 오빠 집에서 자고 온다고 했거든.”
이 좋은 호텔을 내버려 두고 사람도 많은 그 집에서 자고 올 만큼 조카들이 반가웠던 모양이다. 밀런은 이마를 찡그렸다.
“테이트 양의 행방이 저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둘이 친해 보이길래.”
“상급 고용인들끼리 친분이 있는 편이 좋으니까요. 테이트 양은 귀부인의 시중을 들어 본 경험이 있지만 하녀로 들어왔으니만큼 시기하는 사람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친분을 표현해서 기강을 잡는다는 말이었다. 눈물겹다, 아주.
본인이 아니라는데 우길 생각은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대신 손짓으로 밀런을 가까이 불렀다. 밀런이 얌전히 고개를 숙이자, 에스페란사는 밀런의 목깃을 잡고 당겼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끔거렸지만 개의치 않고 목소리를 죽여 빠르게 속삭였다.
“시더가 의뢰를 끝내면 둘이 바로 같이 이 호텔로 와. 그리고 코델리아랑 애니를 데리고 스털링을 빠져나가.”
“백작님과 합의된 부분입니까?”
고용인으로서 밀런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이런 부분이다. 에스페란사는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아주 위험한 일이 벌어질 거야. 본토까지는 영향이 없겠지만 네 주인은 노리는 사람이 많으니까 조심하는 게 좋지.”
밀런은 별다른 말을 더 붙이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밀런이 떠나자 방으로 올라온 에스페란사는 다시 편지를 꺼내 보았다. 세 번째 다시 읽고 있을 때쯤 이제야 잠에서 깬 듯한 코델리아가 가운을 여미며 방에서 걸어 나왔다.
“오늘도 나가요?”
“아뇨. 사격장에도 다녀왔고. 아, 혹시 모르니까 무기를 가지고 있어요.”
인벤토리에서 권총을 꺼낸 에스페란사가 코델리아의 손에 총을 쥐여 주었다. 옛날에 에스페란사도 잘 쓰던 것이었다. 권총을 쓸 일은 많지 않았지만. 애니에게도 같은 모양의 권총을 주기 위해 꺼내 두었다. 알라스테어가 오면 쓸 수 있게 여분의 총을 몇 개 더 내놓은 에스페란사는 인벤토리를 닫았다.
코델리아가 조심히 권총을 쥐었다. 손에 감기는 감각이 낯설었다.
“혹시 모르니까요. 육지에 있으면 안전할 테지만, 여파가 얼마나 미칠지도 모르고 내가 예상치 못한 다른 위험이 닥쳐올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여차하면 사람을 쏠 수도 있다는 걸 알아 둬요.”
“사람을…….”
“그럴 일이 없으면 제일 좋겠지만, 만일의 경우에는 망설일 틈이 없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에스페란사의 얼굴은 단호했다.
코델리아는 명석한 소녀였다. 명석한 만큼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하지만 몇 번 입을 달싹인 끝에, 가장 정제된 질문만 내놓았다.
“에스페란사. 파오룬 출신이 아니죠?”
고개가 휙 돌아갔다. 놀란 눈동자를 마주한 코델리아는 빙그레 웃었다. 팔걸이에 턱을 괸 채로 꿈꾸듯이 속삭였다.
“나 그리 눈치가 느린 편은 아니에요.”
에스페란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심코 손에 들린 편지를 자기 몸쪽으로 당겼다. 코델리아가 눈을 찡긋했다.
“사교계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잖아요. 파오룬 식민 전쟁에 출전했던 장교, 무역상……. 당신은 아직 못 봤겠지만 파오룬 귀족도 종종 볼 수 있어요. 그중 누구도 당신 같진 않았죠.”
머쓱한 얼굴로 ‘내가 뭘 어쨌다고요’ 하고 중얼거렸지만, 에스페란사도 알 것 같았다.
“난 못 봤는데, 파오룬 사람들.”
“당신은 사교 활동을 거의 안 했잖아요. 로드 에이번데일이 당신을 데리고 온 자리들은, 그런 사람들이 잘 올 만한 자리는 아니죠.”
이 세계를 알아온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들의 세세한 규칙까지는 알지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관심은 없었지만, 적어도 시더가 이 부분에서 에스페란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세심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점점 그런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당신은 파오룬 얘기를 잘 안 했고, 이상하게 한 번도 와 본 적 없을 스털링에는 익숙해 보였어요. 그리고 당신은 스털링에 던전이 생길 거라는 걸 알고 있잖아요. 마벨우드에 일어났던 재난이 던전인 줄 알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죠.”
허리에 손을 얹은 코델리아가 씩 웃었다.
“그렇죠?”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기 때문에, 에스페란사는 부정하지 않았다.
“분명 처음엔 믿었던 것 같은데. 파오룬에서 배운 신비한 무술…….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는데 믿길래 방심했네요.”
“으으, 속인 쪽이 잘못한 거잖아요!”
그걸 믿은 건 다시 생각해봐도 창피한 일이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던 코델리아가 뺨을 붉히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처음엔 믿었어요. 파티에서까지만 해도요. 하지만 마벨우드에서 예의 그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걸 보고 어떻게 모르겠어요? 많은 상상을 했죠. 아주 많은 생각을 했어요.”
코델리아가 부끄러운 얼굴로 늘어놓은 상상들은 꽤나 깜찍했다. 그리고 그 깜찍한 상상들이 아주 틀리지만도 않았다. 한참 웃던 에스페란사가 말했다.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지만…… 나쁜 의도는 없어요.”
“당연하죠! 누가 그런 걸 걱정한 줄 알아요? 그랬다면 마벨우드에서 우릴 구해 줬을 리 없잖아요.”
“그래요, 이번에도 그럴 거예요.”
동경 어린 눈동자가 에스페란사를 향해 반짝였다.
나쁜 의도는 없다. 하지만 나쁜 결과가 없으리라곤 장담할 수 없었다. 이 싸움에서 에스페란사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에스페란사는 손에 들린 편지를 매만졌다.
“전부 구하겠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최선을 다할게요.”
내일이면 결론이 난다. 던전도, 다리아와의 싸움도, 시더를 이 먼 던바틴까지 오게 했던 문제들도. 그리고 어쩌면, 시더의 외면도.
알 수 없는 것은 두렵다.
조금이라도 빨리 내일이 오기를 바라면서도 또 영영 오지 않기를 바랐다.
* * *
유독 화창하고 청량한 날이었다. 증기를 빼려고 열어 놓은 창문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이 머리칼을 부드럽게 흩뜨렸다.
시더 클라이번은 마지막 나사를 조이고 손을 뗐다.
기존 오토마톤의 틀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의 최신 발명품들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남는 시간에 구조를 조금 손본 덕에 원래의 기계에 비해서는 훨씬 매끄럽게 작동했다.
망원경 부분에 눈을 대 보았다. 렌즈 너머의 시야가 또렷했다. 시더의 입가에 득의의 미소가 서렸다.
약속된 날짜보다 이틀이 빠른 완성이었다.
오토마톤의 마력을 차단한 그는 밀런을 불러 포장까지 마쳤다.
미약한 긴장감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그가 이것을 해군에 인도하고 나면, 모든 것이 시작된다. 정찰선이 출발하고, 던전이 발생하고, 에스페란사는 그 가운데로 뛰어들 것이다.
그 위험 한가운데로. 걱정의 말 한마디 꺼내지 않은 것은 그저 고집일 뿐이었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습관처럼 궐련을 찾다가 한숨과 함께 손을 늘어뜨렸다.
괜찮겠지. 에스페란사는 능숙하고, 던전 경험이 많았다. 충분히 대비가 되어 있으니,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저 기나긴 오늘이 끝났을 때 에스페란사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를 고민하면 된다.
실은 그게 더 큰 문제였다. 얼굴을 마주 보았을 때, 편지에서처럼 평온한 척할 자신이 없었다. 처음 잠깐은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마주하다 보면 결국 미뤄 둔 문제에 결론을 내야 할 때가 온다.
결론을, 결론을…….
시더는 이를 악물고 스스로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다 됐습니다.”
밀런이 포장한 오토마톤을 증기 마차에 실었다. 시더는 느린 걸음으로 마차에 올랐다.
시종, 오토마톤, 그리고 마도 공학자를 실은 마차가 굴뚝으로 증기를 뿜어내며 해군 기지까지 달렸다. 마차로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였다. 시더는 지팡이를 짚은 손을 말아 쥐었다.
마차가 기지의 거대한 문을 통과했다. 군에서 안내하는 대로, 톱니바퀴가 쉴 새 없이 맞물리고 황동 파이프 관이 벽을 가득 메운 기계 장치들을 지나쳤다. 한참 후 도착한 곳은 군함이 끝없이 정박해 있는 만이었다. 물론 사전 안내는 전혀 없었던 일이었다. 군부는 언제나처럼 제멋대로였다. 시더는 한숨을 내쉬며 마차에서 내렸다.
러스틴 준장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노장의 여유로운 얼굴이 시더를 발견하고 얼핏 일그러졌다. 저 나이 든 장군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시더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연기를 뿜은 준장이 대뜸 말했다.
“설치까지 자네가 하지.”
시더는 밀런이 끌고 온 마차를 돌아보았다. 설치를 하고 돌아가는 데 걸릴 시간을 셈해 보자, 자연히 어투가 딱딱해졌다.
“계약서에 없는 내용입니다만.”
“자네는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도 없나? 장인 정신도 없어?”
시더는 비뚜름하게 웃었다. 일이 아니라 취미니까요, 하고 진심으로 대답했다간 정말 말이 길어질 것 같았다. 그런 걸 기대했으면 처음부터 계약서에 적든지.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본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뒤통수에 총이라도 대고 시키신다면 하겠습니다만.”
준장의 그을린 얼굴에 주름이 졌다. 제복 모자 아래로 찡그린 얼굴이 연신 연기를 뿜었다.
“됐네! 역시 아들놈에게 맡겼어야 했어. 듀크 대위!”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듀크 대위가 재빨리 다가왔다. 준장의 명령에 힘차게 대답하고 돌아선 그는 시더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병사들이 몰려와 오토마톤을 배까지 운반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무슨 소리! 직접 설치는 안 하더라도 멀쩡히 설치됐는지는 확인해야 할 것 아닌가? 가뜩이나 예상보다 일찍 만들어 왔는데, 날림으로 대충 해치우고 가려는 건 아닌지 어떻게 믿나?”
미소를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시더는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배에 탈 병사들, 준장 주변에 선 장교들, 그리고 밀런. 그가 에스페란사도 아니고, 이 인원을 다 뚫고 도망칠 방법 따윈 없었다.
러스틴 준장은 권위적이고 꽉 막힌 인물이다. 자기가 한번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서 뜻을 꺾는 법은 없다. 얼핏 듣기엔 그저 고지식하고 곧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런 특성이 좋은 일에만 발휘될 리가 없었다.
“잘못되면 에이번데일 저택으로 청구를…….”
시더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을 때였다.
쾅! 뭔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뱃전에서 시커먼 연기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