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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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밀회(密會)
노구덕의 대답을 들은 실렌은 입술을 동그랗게 말며 나지막한 휘파람 소리를 냈다.
“휘이이~ 대단한 자신감이시네. 비장의 무기가 있다면 저도 좀 알고 싶은데요.”
“어려운 건 아냐. 무사수행이 박지현의 로망이라면, 그보다 더 매력적인 걸 들이대면 되는 거지. 그 이상은 데모나한테 물어보든지. 그 녀석과 관련되어 있으니까.”
“하아… 그 데모나 씨가 잘도 대답해 주겠네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실렌은 테이블 위에 놓인 얇은 서류철을 가리켰다.
“저건 뭐죠?”
“랄로에게 부탁한 자료야. 지금이 약속 시간 두 시간 전이니까… 대충 1시간 이전까지 박지현과 그 배성길이란 놈이 칸다무어에 들어와서 뭘 했는지, 어디에 숙소를 잡았는지, 중간에 들른 곳은 없는지… 짤막한 정보가 적혀 있지.”
“흠? 그런 거라면 인편으로 전달하라고 해도 됐을 텐데…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었어요?”
“말했잖아. 박지현을 만나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다고. 그 전에 하고 싶은 게 있어서.”
노구덕은 그렇게 말하며 얇은 서류철을 뒤적거리더니, 그 사이에 끼워져 있던 화려한 무늬의 책자 하나를 찾아냈다. 겉표지에 ‘Catalog’라는 글자가 금박으로 입혀져 있는 걸 보니, 모 상품군의 카탈로그인 모양이었다.
“그건…?”
“칸다무어의 상주 인구는 중도시 수준이지만, 유동 인구만 따지자면 대도시에 못지않아. 그만큼 교역이 활발하다는 뜻이지. 특히 칸다무어 야시장에는 없는 게 없다고 하더라고. 이건 칸다무어 야시장에서도 유명한 쥬얼리샵의 카탈로그야. VIP용이지. 별의별 희귀한 보석, 장신구들이 다 있더라고.”
칸다무어 야시장이라면 서부에서 주로 활동하던 그녀도 들은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일이 끝나면 임유진과 신소율을 설득해서 그곳에 잠깐 들러보자고 노구덕에게 조르려고 했을 정도. 그런데 그곳에서도 유명한 쥬얼리샵의 카탈로그, 그것도 VIP용이라니… 실렌은 갑자기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담은 눈으로 노구덕을 쳐다봤다.
“…쥬얼리샵이라면… 뭘 사시려고요? 아니, 그보다 이거… 선물용?”
“아아, 그게 말이지. 저번에 왜, 유진이에게 ‘아비가일의 소망’을 선물해 줬잖아. 그 뒤로 소율이가 너무 부러워하는 것 같더라고. 하지만 아비가일의 소망 같은 매물을 갑자기 구할 수도 없잖아? 그래서 이걸 가져온 거야.”
그러면 그렇지.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그에게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던 걸까. 실날같은 기대를 하고 있던 실렌은 크게 낙담하여, 무심결에 목구멍까지 치민 말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저는요?”
“응? 너?”
순간 실책을 깨달은 실렌은 두 손을 마구 허우적거리며 횡설수설했다.
“아, 아, 아니! 호호… 저, 저는 왜 데려왔는지… 맞아요! 그게 궁금해서…….”
어색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노구덕은 문득 입매 사이로 피식거리는 소리를 냈다.
“소율이랑 친하다며. 유진이가 그러더라. 그리고 뭐… 내가 여자 쥬얼리에 대해서 뭘 안다고. 이왕이면 같은 여자가 골라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데리고 온 거지.”
“네…….”
“그리고 줄 것도 있고.”
“네?”
“어디 보자… 이쯤인가?”
노구덕은 테이블 아래 서랍을 열어 검은색 천에 휘감긴 무언가를 꺼냈다. 검은 천으로 둘러싸인 둥근 물체는 테이블 위에 닿자, ‘텅!’하는 맑고 가벼운 소리를 냈다. 아마도 금속 재질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멍하니 노구덕이 꺼내든 물체를 바라보고 있던 실렌은, 이윽고 검은 천이 벗겨지면서 물건의 정체가 드러나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물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서클렛(Circlet). 순은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얇은 베이스에, 중앙에는 손톱만한 녹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보이는 재질만으로는 화려함이 과하다 싶을 수도 있겠지만, 보석을 둘러싼 단아한 백금 장식이 그 화려함이 천박함으로 흐르지 않도록 우아하게 받쳐 주고 있는 고급스런 머리장식이었다.
“…….”
넋을 놓은 채 서클렛에 정신이 팔려 있는 실렌의 귓가에, 노구덕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쉽게도 유진이에게 줬던 ‘아비가일의 소망’처럼 내력이 있는 물건은 아냐. ‘호수의 지혜(Wisdom of the lake)’라는 물건인데, 신성력 증폭과… 음, 뭐라더라? 어, 맞다. 치유력 향상에 효과가 있다더라. 솔직히 성능보다는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산 녀석이야. 중앙의 마력석이 네 머리색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너, 우냐?”
“아, 아니에요.”
방울진 눈물이 볼 살을 가로지르는 것도 모르고 있던 실렌은 황급히 얼굴을 가렸지만, 얼굴 한복판에 선명하게 남은 눈물자국을 가릴 순 없었다. 그것을 본 노구덕이 손수건으로 눈주변을 닦아주려고 하자, 실렌은 손사래를 치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
“괘…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어허, 이리 오지 못해?”
“괜찮다니깐…….”
노구덕의 억센 팔을 뿌리치지 못한 실렌은 결국 순순히 그의 손에 얼굴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노구덕은 그녀의 눈가부터 볼, 턱을 꼼꼼히 닦아주면서 괜한 말을 덧붙였다.
“하여튼 여자들이란… 무슨 머리띠 하나에 눈물까지 쏟아? 그렇게 감동적이었나?”
“내, 내가 그렇게 눈물이 헤픈 여자인 줄 알아요? 그냥 이런 걸 받아 본 게 처음이라서……. 잠깐 적응이 안 되었던 것뿐이에요.”
그 믿기지 않는 말에, 노구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처음이라고? 솔직히 말해라. 거짓말이지?”
“…어떻게 한번 해보겠다고 주는 선물은 있었죠…. 그런 건 다 거절했어요. ‘어떻게 한 뒤’에 받은 선물은 정말 처음이라고요.”
“어떻게 한 뒤라니… 우리, 말은 바로 하자. 처음에 유혹한 게 누군데.”
“네~이. 그럼 ‘진심이 담긴 선물’로 정정할게요.”
대충 대꾸한 실렌은 이내 언제 눈물을 보였냐는 듯, 은빛 서클렛을 만지작거리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예뻐요. 이거 진짜 저 주시는 거죠? 무르기 없기예요?”
“이게 날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한번 써볼래?”
“후훗. 나중에요. 이거 지금 쓰면… 스위치가 켜질 지도 모른다구요?”
노구덕의 허벅지 위로 요염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실렌은 그의 두꺼운 목덜미를 감싸 안으며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 스위치 아직도 안 켜졌나? 난 처음부터 켜놓고 있었는데.”
노구덕은 능글맞게 그녀의 말을 맞받아치며, 새하얀 허벅지가 보이도록 말려 올라간 그녀의 치맛자락 안으로 슬쩍 손을 집어넣었다.
그 엉큼한 손길이 싫지만은 않은 듯, 실렌은 그의 가슴팍에 옆얼굴을 지그시 기대며 말했다.
“사실… 조금 감동받기는 했어요. 오너는 돈이 많은 사람이라 이 정도 선물은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어쨌든 가족들 말고는 처음으로 받는 선물인 걸요. 소중히 쓸게요.”
실렌은 줄곧 자신은 3순위라도 상관이 없다고 얘기하곤 했다. 그러나 세상 어느 여자가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을까. 그 말이 본심이 아니라는 것은, 방금 그녀가 흘린 눈물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가족…? 그렇군. 그러고 보니 네 얘기를 좀 듣고 싶은데. 괜찮을까?”
헌터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살아간다. 임유진이 그랬듯, 김정인이 그랬듯… 가족을 남기고, 기반을 버리면서까지 이곳에 와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으리라. 그 이유가 단순히 ‘부귀영화’를 위해서라고 할지라도, 노구덕은 실렌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실렌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듯, 그의 시선을 슬며시 피했다.
“…별로 재밌는 얘기는 아니에요.”
“재밌는 얘기를 해달라고 한 게 아니잖아. 난 남편이라고. 데리고 살 아내의 사정 정도는 알아도 되잖아?”
실렌은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한순간이지만, 노구덕은 ‘아내’라는 말에 그녀의 몸이 움찔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그녀를 지칭할 때 ‘아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호호… 오너가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데려가길래, 오늘도 그냥 가볍게 한판 하고 오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이런 전개가 된 건지 모르겠네요. 나쁜 기분은 아니지만요….”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실렌은 노구덕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 이야기가 끝나면, 오너도 과거 얘기를 해주세요. 배우자라면… 그게 공평하잖아요.”
“물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피던 실렌은, 노구덕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뛸 듯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즐거워하는 그녀의 얼굴은, 그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미리 일러두지만, 정말 싱거운 얘기예요. 어디에나 있을 법한 그런 얘기죠.”
“알았다니까.”
자신 없는 목소리로 보험까지 들어둔 실렌은 그제야 아주 오래된,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던 묵혀둔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살던 세계는 이데아라는 곳이에요…….”
실렌의 이야기 속에서 묘사된 지구와는 다른 세계, 이데아는 철저한 계급제도를 근간으로 한, 지구에 비하자면 문명의 발전이 극히 더딘 사회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중세 유럽 정도라고 할 수 있을까. 차이점이 있다면 이데아에는 ‘마법’과 ‘연금술’이 있어 과학기술을 완벽하게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렌은 그런 사회의 가장 천대받는 계층인 농민 가정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집은 위로 부모님과 다섯의 언니, 오빠가 있는 대식구였다.
“이데아에서 농민은 법적으로 자유민이지만, 실제로는 해당지역의 영주에게 소속된 농노나 다름없어요. 영주의 땅을 임대해서 소작하기 때문에, 영주에게 지대를 바치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죠.”
빈한한 농민 가족의 생계는 그 해의 농사실적에 따라 좌우되곤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실렌 가족을 부리는 영주는 흉년이 들었다고 해서 지대를 낮춰주는 호인이 아니었다. 흉년이 들면 지대는 예년 그대로, 풍년이 들면 풍년세라고 해서 그만큼 세금을 더 거둬가는 전형적인 영주였다.
“악질이군.”
“악질이요? 아뇨… 거기선 그게 보통이었어요.”
씁쓸하게 대답한 실렌은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녀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그 지역에 유례없는 대흉년이 들었다. 그녀의 가족은 할당된 지대를 납부하지 못했고, 그녀의 둘째 언니는 이미 혼인을 한 첫째 언니를 대신해서 영주의 성으로 불려갔다. 실렌의 부모님은 둘째 언니가 영주성의 하녀로 들어갔다고 말해주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또다시 흉년이 들었고, 그녀는 한 살 터울인 다섯째 언니를 또다시 영주성으로 떠나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둘째 언니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다시는 다섯째 언니를 볼 수 없었다.
스물두 살이 되던 해에는 가족이 살고 있던 마을 외곽에 전염병이 돌았다. 마을 외곽의 부락을 거의 몰살시킨 흉악한 병이었다. 그녀는 이 병으로 셋째 오빠와 첫째 언니 부부, 부모님을 잃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혈육이라고는 영주성에 불려가 생사조차 모르는 두 언니와 유약한 넷째 오빠 밖에는 없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기억일 텐데도, 그녀의 음성은 빛이 바래기라도 한 것처럼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심장이 바스라지는 슬픔은 이미 예전에 증발해버린 것일까.
“가족이 다 죽은 마당에 일할 정신이 남아 있었겠어요? 넷째 오빠는 나까지 성에 팔려 가느니, 차라리 도망가자고 했어요. 성 외곽의 보초 두 명을 매수했으니, 밤에 도망치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했죠. 저는 알았다고 했고, 오빠와 저는 그날로 짐을 싸서 성벽으로 도망갔어요.”
“…….”
“…후우…. 하지만 그건 함정이었죠. 전염병이 돌아 영지민들이 이탈할 걸 예상한 영주가 병사들에게 미리 지시를 내려놓았던 거예요. 결국 현행범으로 잡힌 오빠와 저는 꼼짝없이 영주성으로 압송되었어요.”
잊고 있었던 당시의 감정이 북받치는지, 지그시 입술을 깨문 실렌은 촛불처럼 일렁이는 눈으로 노구덕을 바라봤다.
“…오빠는 제 앞에서 맞아 죽었어요. 영주는… 제 얼굴을 보더니 어떤 방에 가둬놓더군요. 저는 방 안에서 절 감시하고 있던 늙은 시녀에게 언니들의 행방을 물었어요. 언니들이랑 저는 외모가 많이 닮았거든요. 그 시녀는 한눈에 제 언니들이 누군지 알아봤어요. 차라리 알아보지 못했으면 좋았을 걸…….”
그녀의 마지막 말에는 짙은 회한이 서려있었다.
“영주는 가학적인 성벽이 있어서, 성노로 사들인 여자들은 반년을 넘기지 못한다더군요. 네, 모두 죽거나 자살을 한다는 거예요. 둘째 언니는 한 달… 다섯째 언니는 세 달… 모두 자살이었죠.”
가족을 모두 잃고 절망하던 실렌의 앞에 나타난 스카우터. 그 존재는 그녀에게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카우터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데아를 떠나 헌터로서 스퀘어의 주민이 되었다.
“……허.”
그 기구한 가족사에 노구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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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도 끝났겠다, 이번달도 열심히 달려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