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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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identity
“블러디핀드.”
“아… 발레기우스 님….”
발레기우스가 나타나자 당장이라도 피를 튀길 것 같았던 장내의 분위기가 비교적 느슨하게 풀어졌다.
특히, 하유라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눈꼬리를 앙칼지게 치켜세우던 바이올렛은 양 볼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가 따로 없었다.
안개처럼 흐릿하던 형체가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고, 날렵하게 굴곡진 육체를 의자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댄 발레기우스는 좌중을 돌아보며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바이올렛. 대의를 위해 힘을 모은 동지들끼리 서로 칼을 겨눌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들 앉으시지요.”
“네. 발레기우스 님. 제 생각이 짧았어요.”
“…….”
표독스럽게 독이 올라 있던 바이올렛의 얼굴에 훈훈한 바람이 감돌았다. 냉큼 대답한 그녀는 조금 전까지의 막 나가는 태도가 마치 거짓이었던 양, 요조숙녀처럼 다리를 모으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최훈과 우르슬라, 다른 십존들도 마지못해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단 한 사람… 서릿발 같은 기운을 뻗친 하유라의 얼굴엔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서리여왕, 바이올렛과 따로 할 말이 있거든 제가 나중에 자리를 마련해 드리지요.”
두 눈을 부릅뜨고 바이올렛을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던 하유라는 발레기우스의 확언을 듣고 나서야 풀풀 휘날리는 냉기를 거두었다.
“그 약속, 반드시 이행해야 할 거야.”
“아아~. 좋을 대로 하셔요. 난 언제든지 환영이니깐.”
“쓰레기 같은 계집… 제멋대로 주둥이를 놀리는 것도 오늘까지다.”
“글쎄? 내 생각엔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내 맘대로 지껄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서리여왕 하유라의 면전에서 이렇게까지 뻗대는 걸 보면, 바이올렛 또한 자기 실력에 꽤나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종적이 묘연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남부 지구에서 최고로 꼽히던 마법사가 그녀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자부심이었다.
끝까지 험악한 눈초리를 교환한 두 여인이 자리에 앉자, 곤란한 듯 고개를 내저은 발레기우스는 이내 두어 번 박수를 쳐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예정보다 늦어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저항이 생각보다 완강해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더군요.”
“정신이 붕괴되었는데도 아직 저항할 기력이 남아 있다는 건가? 대단한 의지력이군. 과연 왕가의 후예다워.”
티렐이 새삼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발장난을 치고 있던 앳된 소녀, 우르슬라가 세찬 콧방귀를 뀌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칫! 벌써 수십 명이나 돌려 먹은 걸레가 왕녀는 무슨 왕녀람? 가랑이가 제대로 닫힐까 몰라. 깔깔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듣자 하니 애를 뱄다고 하던데…….”
“누구 새끼인지 어떻게 알겠어? 그년 따먹은 사내놈이 몇인데. 아, 혹시 그쪽 새끼야? 처음 며칠간 그년을 독점한 게 그쪽이잖아?”
최훈의 중얼거림에 빈정거리며 답한 바이올렛은 가늘게 눈웃음을 치며 늑대왕 가리발디를 돌아보았다.
“…….”
눈두덩을 일그러뜨린 가리발디는 그녀 따위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씨근덕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머나, 정말인가? 그럼 강아지를 낳는 거야?”
“…이 망할 계집이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나보군.”
참는 데도 정도가 있다. 아무리 발레기우스의 앞이라지만 늑대왕 가리발디는 본바탕부터 그다지 참을성 있는 위인이 아니었다.
콰지직! 가리발디가 움켜쥔 테이블 귀퉁이가 고밀도의 투기를 견디지 못하고 찰흙처럼 부서져 내리자,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던 발레기우스는 슬며시 표정을 찡그렸다.
“…바이올렛. 절 실망시킬 생각입니까?”
고목 껍질처럼 굳어진 발레기우스의 주위에서 불꽃이 이글거리듯 시커먼 기류가 생겨났다. 그러자 입술을 비죽거리며 가리발디를 노려보던 바이올렛의 안색이 새하얗게 돌변했다.
“아, 아… 바, 발레기우스 님, 저는… 그게 아니라….”
“바이올렛. 더 이상 쓸데없이 분란을 조장한다면 벌을 주겠습니다. 설마 그걸 바라는 건 아니겠지요?”
“네, 네….”
바이올렛은 꼬리를 만 강아지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처연하게 떨리는 보랏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그녀에게선, 매몰차게 말하는 발레기우스에 대한 어떤 적의나 반발심도 찾을 수 없었다.
하유라와 가리발디, 두 십존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안하무인으로 대하던 바이올렛의 도도한 콧대가 단번에 꺾여버린 것이다. 아마도 그녀가 발레기우스를 유독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데에는 모종의 연유가 있는 것 같았다.
말 몇 마디로 바이올렛을 구석에 얌전히 찌그러뜨린 발레기우스는 가리발디를 향해 살짝 고갯짓을 했다.
“늑대왕, 미안합니다. 부디 양해해주시길.”
“…크르르르….”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부수고 바이올렛에게 달려들 것만 같았던 가리발디는 들끓는 목구멍으로 짐승의 울음을 토해내더니, 분기를 폭발시키듯 쾅! 발을 구르며 신경질적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돌아가는 이 상황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일련의 소동으로 회장의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지만, 발레기우스는 그다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그녀로부터 정보를 빼내는 일은 실패했습니다.”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이들의 낯빛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설마 발레기우스가 실패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흠.”
“어허, 그러면 다른 위원회 종자를 생포해야하는 거요?”
“우선 제 말을 좀 더 들어주시지요. 마리우스 때도 그랬지만, 아가레스트의 뇌에도 일종의 락(Lock)이 걸려 있더군요. 다른 정보는 상관없는데, 시스템에 관련된 정보는 철저히 보안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금제를 풀 방도를 찾지 못하는 한 위원회 인간들을 아무리 잡아봐야 무소용이란 소리로군.”
“그렇습니다. 그녀의 정신을 붕괴시키고, 온갖 방도를 동원했지만… 도저히 그 락을 깨뜨릴 수가 없더군요.”
아가레스트. 발레기우스에게 사로잡혀, 온갖 난행을 당하는 와중에도 그 꿋꿋한 기개를 잃지 않던 철의 여인은 끝내 계속되는 고문에 굴복하여 이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녀의 정신을 붕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심복인 이오의 죽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친자매처럼 같이 자란 이오의 처참하기 짝이 없는 죽음은 아가레스트의 굳건한 심지를 뿌리부터 거세게 뒤흔들어 놓았다. 게다가 이오의 죽음은 그녀 자신의 죽음을 가장하기 위한 연극으로 쓰이지 않았던가.
아가레스트는 매일 같이 반복되는 영상 수정을 통해 사지가 찢겨나가는 이오의 모습을 봐야만 했다. 변을 보는 와중에도,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수많은 사내들에게 윤간을 당하는 도중에도……. 가까스로 버티고, 버텨내던 그녀의 정신은 수백, 수천 번이 넘도록 반복되는 이오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끈질기게 버티던 그녀의 정신이 무너지기만을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던 발레기우스는 곧바로 위원회가 숨겨 놓고 있던 제2의 카멜롯을 알아내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마 왕가의 혈족들에겐 모두 동일한 락이 걸려 있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 이건 주문이나 주술 같은 게 아닙니다. 세계를 초월하는 이치… 즉, 시스템 기능을 이용한 아주 강력한 금제이지요.”
“그 시스템의 힘이라는 게 그토록 대단한 건가? 난 무식한 칼잡이라서 잘 모르겠군.”
최훈, 그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 합류한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저 마음껏 살육을 벌이기 위해서 반군에 합류한 자였다. 애초에 그는 시스템이니, 뭐니 하는 복잡한 일에 관심을 가지는 인물이 아니었다.
발레기우스는 최훈의 물음에 빙그레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대단하고 말고요. 아마… 서리여왕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
“시스템의 힘을 직접 몸으로 겪어보니 어떤 느낌이던가요?”
한꺼풀 얼음장을 덮어쓴 채, 줄곧 침묵을 고수하던 하유라의 표정에 미미한 변화가 생겼다. 발레기우스는 그녀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던 일을 마치 옆에서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까득! 하유라는 돌연 불쾌한 잇소리를 내며 애꿎은 입술을 짓씹었다. 발레기우스의 캐묻는 태도도 그랬지만, 갑자기 ‘똥갈보’라는 욕지거리를 내뱉는 오크 늙은이의 낯짝이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불어 둔중한 망치로 내려친듯했던 복부의 통증도. 그렇게 무식하게 얻어맞은 것은 그녀의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너절한 낯짝이 눈앞에 있기라도 한 듯, 말아 쥔 주먹을 바들바들 떨던 하유라는 은빛의 눈썹을 꿈틀거리며 발레기우스의 말을 시인했다.
“내 마력이… 삭제된 것처럼 모두 소멸해버렸다. 불과 몇 초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동안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
“…예상은 했지만 그런 힘이라니… 마력 동결 같은 건가?”
“아니. 마력 동결이었다면 내가 그토록 무력하게 당하진 않았겠지. 그건 말 그대로 내게 주어진 힘이 거둬지는 느낌이었다.”
늘어선 이들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하유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십존급에 달하는 강대한 힘도 시스템이 지닌 권능 앞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단 의미였으니까.
발레기우스는 하유라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리여왕의 말은 사실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렸다시피, 시스템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힘입니다. 헌터의 저널은 시스템에서 부여한 권한. 반대로 말하면 거둬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위원회에는 서리여왕을 무력화시킨 것과 같은 종류의 스크롤이 상당수 있습니다. 제가 위원회의 저력을 얕보면 안 된다고 거듭 말씀드린 건, 놈들에게는 이처럼 알려지지 않은 기상천외한 수단이 여럿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당신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지만… 그런 수단이 실재한다면 조심할 수밖에 없겠군.”
“어허허… 십존을 무력화시키는 스크롤이라니? 별 지랄 맞은 것도 있구려.”
티렐과 앵거스, 라키오라, 최훈 등. 그간 반군의 소극적인 태도에 알게 모르게 불만이 쌓여있던 자들은 비로소 발레기우스의 신중함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크흥… 이제야 게릴라 전 위주로 싸웠던 것이 이해가 가는군. 다 같이 모여 있다가 저런 스크롤에 당하면 떼죽음을 당할 테니.”
“아가레스트를 미끼로 팔콘 가주에게 분열을 사주하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볼 뻔했어.”
“블러디핀드… 왜 스크롤의 존재를 미리 알려주지 않았지?”
티렐의 번뜩이는 안광을 마주한 발레기우스는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스크롤에 대해선 저도 어렴풋이 소문만 들었을 뿐입니다. 괜한 의심은 말아주시길.”
“…그렇군. 헌데,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어.”
“말씀하시지요. 마도왕.”
“시스템을 편집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당신의 말… 아마 사실이겠지. 각자 사정이 다른 우리가 여기 모인 것도, 따지고 보면 근본적인 이유는 그 힘, 시스템 때문일 테고. 하지만 드러난 정황으로 보건대, 수백 년이 넘도록 시스템을 관리해 온 위원회조차 그 힘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아주 일부분만 제어 가능한 것일지도.”
뚝. 쉬어가듯 말을 멈춘 티렐의 안광이 두 눈을 부릅뜬 것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 기회에 제대로 묻고 싶다. 그 힘을 과연 제대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알고 있다면 대답해 줬으면 좋겠군. 시스템은 도대체 뭐지? 이 세계의 의지인가? 아니면 신? 초월적인 그 어떤 무엇인가?”
말문이 틀어 막힐 정도로 난해한 질문이었으나, 그 대답은 맥이 빠질 정도로 쉽게 나왔다.
“말씀하신 것이 모두 맞습니다.”
“뭐라고?”
발레기우스는 빠져들 것만 같은 고혹적인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는, 어리석은 학생들이 궁금해하던 정답을 일러주었다.
“신, 세계의 의지, 초월적 존재… 시스템은 그 모두에 해당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부유하게 된 신의 조각이라고 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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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일 늦게 끝나고 이제야 겨우 한편 올리네요.. 오늘은 이거 제외하고 2연참 목표인데,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거 다음편에 꽤 중요한 떡밥들을 풀어놔야 하는데.. 멀쩡한 정신으로 써야 좀 쉽게 쓰여질 텐데 말이죠. ㅠㅠ.. 너무 피곤하네요.. 자러 가겠습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