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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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죽음의 군주
대(大) 신성주문 아벨의 수호를 종잇장처럼 찢고 들어와, 그 술자인 카산드라의 목을 무참히 가르고 지나간 대낫은 이어 말을 잃어버린 나머지 사제단에게 그 흉험한 칼날을 들이댔다.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칼날이 마치 눈알이 달린 양 자신들을 노려보자, 사태를 파악한 사제단의 안색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피에 절어 쓰러진 카산드라의 시체, 그리고 찢겨버린 아벨의 수호…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건 분명히 현실이었다.
“피, 피해야……”
사각!
더듬거리며 말하던 여사제의 육신이 머리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정확히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아니, 깔끔하게 죽은 그녀는 사실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 뒤, 참격의 경로에 있었던 사제들 중에는 어깻죽지만 뭉텅이로 잘려나가 허연 갈빗대를 드러내거나, 몸이 애매하게 절단되어 내부 장기를 훤히 내보인 채 숨을 깔딱이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단 한 번의 참격에 스무 명에 달하는 사제들이 썰려나갔다. 카산드라를 죽이고, 다시 수십의 희생자들을 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3, 4초. 작은 내를 이룬 핏물에서 스며 나오는 강렬한 혈향은 경직되어 있던 사람들의 사고를 일깨우기 충분했다.
피범벅이 된 장내는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끼아아아아!”
“도망쳐어어엇!”
기가 꺾여버린 사제단은 겁에 질린 양떼처럼 각자 살 길을 찾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하는 데에는 대장과 대원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아벨의 최고위 신성 주문이 깨져버린 이상, 그림리퍼의 발길을 잡아 둘 주문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사제단이 죽기 살기로 향하는 곳은 로렐라이 성벽. 사령부가 진을 치고 있는 연합군의 본대였다.
허나,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그림리퍼가 아니다.
“히이익!”
“흐아아아…!”
죽을 둥 살 둥 달려가던 사제들이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멈추었다. 어느새 훌쩍 그 위를 날아온 대낫이 퇴로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奇事)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중에 부유하고 있는 대낫으로부터 짙은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일단의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를 감싼 낡아빠진 검은 로브자락이 땅에 이끌리고, 끝없는 어둠 속, 번들거리는 붉은 눈알이 화룡정점을 이루듯 그 흉흉한 빛을 드러냈다.
-사아아아아!
…사제단의 퇴로를 가로막으며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또 하나의 재앙. 또 하나의 그림리퍼였다.
“그림리퍼가 둘이라니!”
“이게 어떻게 된 거요! 예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잖소!”
사령부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전사단의 후미를 쫓는 그림리퍼가 멀쩡히 다가오고 있는데, 로렐라이 성벽 앞, 본대와 다른 부대가 이어진 교차점에 또 하나의 그림리퍼가 나타났다.
“…미치겠군.”
모두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가운데, 레전더리 오너는 무심결에 이마를 짚었다. 이제는 정말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뚜렷한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과거의 데이터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고, 당장 현장엔 재앙급 카름이 둘로 늘어났다. 여기서 대체 어떻게 해야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확실히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사제단은 살려야겠지. 예비대 전원을 투입합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의 발목을 막아야 합니다.”
“레전더리 오너! 자, 잠깐만! 예비대라니… 예비대 전력으로 어떻게 저놈을 막으란 말이오!”
이의를 제기한 이는 지금껏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피에스타 오너, 바간이었다. 그가 가당치 않다는 듯 이의를 제기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성벽 내에 대기하고 있는 예비대에는 물의를 일으켜 정식 부대에서 제명당한 남일우와 문형식, 그레이스 등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어쭙잖은 내 식구 감싸기다. 레전더리 오너는 그런 바간을 무섭게 노려보며 불 같이 화를 냈다.
“막으란 소리가 아니잖소! 시간을 벌라는 말이오!”
“그게 그 말 아니오? 지금 이 상황에 나가라는 건 죽으라는 소리밖에…….”
“제기랄! 다른 이들은 그걸 몰라서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럼 사제단을 다 죽게 내버려두란 말이야! 적어도 전사단이 도착할 때까진 시간을 끌어야 할 것 아닌가! 아니면, 마법사단에 사제들이 휘말려도 상관없으니 무차별폭격이라도 하라고 말할까!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하시오!”
“……!”
난데없는 폭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바간은 벌겋게 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다가, 주위에서 곱지 않은 시선들이 쏟아지는 것을 느끼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같은 라인이었던 오너들도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으니, 지금 그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지 알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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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렐라이의 성문이 열리고, 굳은 얼굴을 한 수백의 헌터들이 대열을 드러냈다. 사지(死地)로 향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어렵사리 무기를 꼬나 쥔 그들의 표정에선 한 점의 전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양 그대로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떠밀려 나선 모습들이다. 아니, 명령불복종시 즉시 참형이라는 엄포만 아니었어도 진즉 등을 돌리고 도망쳤을지도 몰랐다.
‘씨발, 씨발, 씨발, 씨발!’
그 중간 대열에 낀 남일우는 연신 욕지거리를 되뇌며 전방을 주시했다. 성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것은 서슬 퍼런 위용을 뽐내는 대낫. 벌써 백에 가까운 인원을 잡아먹은 사신의 칼날이었다.
‘저런 거랑 어떻게 싸우라고! 씨팔놈들! 우릴 고기방패로 쓰겠다는 거잖아!’
그림리퍼의 공략이 예정대로 순순히 진행되었다면 기쁜 마음으로 나섰을지도 몰랐다. 그거야말로 전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진행된 전황을 들은 바, 저놈은 예상된 규격을 한참이나 뛰어넘은 괴물이었다.
저걸 막으라는 건 그냥 죽으라는 소리나 진배없다. 말이 시간끌기지, 십존도 하지 못한 일을 오합지졸 예비대로 어떻게 하란 말인가?
실상 사령부의 판단은 예비대를 먹잇감으로 던져줘서 사제단을 살리겠다는 의미였다.
“오빠… 괜찮을까요?”
“내가 어떻게 알아, 썅년아! 맨날 찾는 신에게 기도나 하던지!”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그레이스에게 화풀이를 한 남일우는 투견처럼 숨을 씨근덕거렸다. 지금 그에겐 모든 게 거슬렸다. 질질 짜고 있는 저 짜증나는 계집도, 그 계집을 위로하는 문형식이란 놈도, 뒤에서 쥐 죽은 듯이 따라오고 있는 이태양도. 그냥 이 장소, 이 사람들 전부가 빌어먹을 것들이었다.
‘적당히 싸우는 척 하다가 내빼자. 저놈,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것 같진 않으니까… 자극만 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살 수 있어.’
그에게 다행이라면, 그림리퍼가 지나치게 여유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꺼번에 몰살시키면 재미가 없다는 것일까. 놈은 꼭 도망치는 이들을 쫓아서 죽이는 것을 여흥으로 삼고 있는 것 같았다.
‘망할 사제단 놈들. 굼벵이도 아니고 느려 터져서는… 내가 뭣 때문에 저놈들 대신 나서야… 응?’
뱀처럼 영활하게 굴러가던 눈알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저마다 살 길을 찾아 도망치고 있는 사제단 중, 아주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얀 법복을 나부끼며 도망치고 있는 앳된 여인. 그녀는 남일우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장본인, 안세희였다.
남일우의 음험한 인상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로 인해 겪어야만 했던 치욕과 고초가 다시 되살아난 탓이다. 실상 전적으로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었지만, 그는 그따위 사실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저 개 같은 년… 잠깐만, 이거 잘하면…….’
문득, 일그러진 입매가 잔혹한 호선을 그렸다. 갑자기 아주 사악한 계획이 떠오른 남일우는 처한 상황도 잊고 음흉한 미소를 떠올렸다.
‘…저 쌍년한테 제대로 엿먹일 수도 있겠는데.’
헐겁게 풀어진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그래, 그런 수가 있었군. …전장에는, 시체가 많은 법이니까.’
섬뜩한 칼날을 쳐든 남일우는 조금 전까지의 처진 인상을 지우고 힘껏 한 발을 내딛었다. 당장이라도 떠오른 생각을 실천하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근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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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아저씨는 어딨지? 지현 언니랑 두식 오빠는?’
시먼을 따라 전장에 난입한 신소율은 다급히 눈을 굴리며 노구덕부터 찾았다. 그러나 주위 헌터들이 무질서하게 퇴각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구덕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더욱이, 이쪽에도 또 다른 그림리퍼가 도사리고 있는 한,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대낫을 날려 보냈던 첫 번째 그림리퍼의 손에는 어느새 또 다른 대낫이 들려 있었다. 두 번째 그림리퍼로 변한 대낫과 완전히 동일한 무기였다.
로렐라이로 향하는 놈의 걸음을 붙들어두고 있는 것은 백여 명으로 불어난 결사대. 전사단 공격대와 수비대의 최정예만을 결집해 모아 놓은 전사단의 핵심 전력이었다.
대륙 어디에 내놓더라도 꿀릴 것 없는 전력이었으나, 상대는 상식 밖에서 존재하는 터무니없는 괴물. 애초에 전 부대의 힘을 동원해서도 막지 못한 그림리퍼를 백 명의 결사대가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론적으로는, 분명히 그러할 텐데……. 이두식이 끼어 있는 결사대를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보던 신소율은 크게 눈을 치떴다.
‘막고… 있잖아?’
놀랍게도 결사대의 항전이 먹혀들고 있었다. 마법사단 일부 부대의 화력지원과, 유격대 다수의 도움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각 대의 대장들이 주축이 된 결사대는 확실하게 그림리퍼의 발목을 묶어두고 있었다.
“약해졌군.”
“뭐, 뭐라고요?”
황급히 돌아본 시먼의 얼굴에선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회심의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놈은 두 마리 토끼를 노리고 있는 거다. 퇴로를 막아 이 평야의 병력을 모두 잡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그 덕분에 현저히 약해졌어. 분신을 만든 탓에 힘이 반으로 줄어든 것이겠지. 둘로 나누면 딱 절반… 아주 깔끔한 공식이야.”
그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결사대와 싸우고 있는 그림리퍼의 대낫은 여전히 위협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이전처럼 무지막지하게 강한 것은 아니었다. 콜트레인이나 심준호, 바르트라 같은 강자들은 무척 버겁게 보이긴 해도 놈의 일격을 차근차근 막아내고 있었고, 심지어는 그 틈으로 반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시먼의 말에 설득당한 신소율은 재차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라고 말로 설명은 못하겠는데… 이 남자, 암만 봐도 수상쩍었다.
“저기, 전혀 놀라는 표정이 아닌데요? 알고 있었어요?”
“설마.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고 한다면… 지금이 놈의 허를 찌를 적기라는 거지. 약해진 목표, 시선을 붙들어두고 있는 미끼… 더없이 이상적인 상황이야.”
슬쩍 음흉한 웃음을 내보인 시먼은 품에서 거무튀튀한 단검을 꺼냈다. 빛마저 빨아들이는 칙칙한 묵색으로 도색된 검신이 어쩐지 가슴을 서늘하게 물들이는 기분 나쁜 단검이었다.
본래 그가 사용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띤 단검을 본 신소율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중요한 결전에서 손에 익지 않은 무기를 쓰다니?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신소율은 저 기분 나쁜 단검에게서 왠지 모르게 굉장히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
‘꼭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작전은 알고 있겠지. 두 번 설명하지 않겠다.”
“저, 대장….”
“돌입한다.”
“…치잇!”
여느 때처럼 그녀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돌아선 시먼의 뒷모습을 지그시 노려보던 신소율은, 이를 갈며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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