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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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획책(劃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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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한 밤. 어제까지만 해도 은은하게 주둔지를 밝혀주던 달빛이 짙은 먹구름 뒤로 숨어버린, 그런 밤이었다.
출진이 나흘이나 남은 덕분인지, 대체적으로 진지 내의 분위기는 평온했다.
달칵.
막사의 문고리를 채운 노구덕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그러다 외투 소매에 한시적으로 박혀 있는 ‘서부연합군 사령부’의 문장이 문득 눈에 띄었다. 쓸데없이 화려하기만 하지, 별로 멋있지도 않은 문장이다. 그나마 쓸모를 찾는다면, 방금 전처럼 순찰을 돌 때 괜한 암구호를 댈 필요가 없다는 것 정도일까?
“구름이 가실 기미가 안 보이는군. 내일은 비가 오려나…….”
“밤안개가 짙은 날은 참 편리해서 좋아요. 예전엔 싫었는데 말이죠.”
“꼭 밤손님이나 할 법한 말이군.”
노구덕은 예고 없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받았다. 첫 대면부터 이런 식으로 등장하더니, 이제는 아예 기척 없이 스리슬쩍 나타나는 게 아주 습관이 되어버렸다.
밤손님처럼 나타난 여인, 아가레스트는 천천히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등잔불이 자아내는 은은한 빛이 타이트한 가죽옷에 드리우자, 아찔하게 굴곡진 몸매가 더없이 고혹적으로 다가왔다.
특히나 눈이 가는 것은 얇은 가죽으로 덧씌워진 흉부를 숨 막힐 듯 압박하는 한 쌍의 거대한 융기다. 그 압도적인 사이즈는 임유진의 그것을 넘어, 퀸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 친구는 닮는다더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가슴이 아깝군.’
아가레스트를 대할 때면 언제나 같은 생각을 하는 그다. 아무리 흉부에 치명적인 흉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도, 그 주인이 정(情)을 잃어버린 석녀라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다. 그건 과거 아가레스트와 가졌던 단 한 번의 관계에서 톡톡히 확인한 사실이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었던 섹스였지.’
반응이 전혀 없는 건 둘째 치고, 아가레스트는 아예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관계 내내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하늘만 바라봤을 뿐. 신음도 없지, 반응도 없지, 움직이지도 않지. 이쯤 되면 체온을 제외하고 시간(尸諫)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다.
찝찝한 기억을 되새긴 노구덕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솔직히 말하면, 굳이 아가레스트를 통해 팔콘에 손을 뻗을 필요가 있었나하는 후회가 드는 게 요즘 그의 내심이었다. 왠지 모르게, 독이 든 성배에 손을 댄 것 같은 찜찜함을 떨칠 수 없었다.
“무슨 생각해요?”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생각.”
“…흐응…? 모를 소리로군요.”
어슴푸레한 홍조가 어린 얼굴을 살짝 갸우뚱한 아가레스트는 깊게 고민하지 않고 그의 정면에 있는 의자 중 하나를 골라잡았다.
“…생각대로였어요. 재미있는 모의를 하고 있더군요.”
“어느 선까지 관계되어 있지?”
“최고 윗선은 바간이에요. 사태가 꽤 재밌는 게, 원래는 남일우 독자적으로 꾸민 짓 같더군요.”
“피에스타 오너가 처음부터 지시한 일이 아니라고?”
“그래요. 어쩌다가 얻어 걸린 거죠. 덕분에 그쪽도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오히려 첫날에는 남일우를 크게 꾸짖었다고 하던데… 모르죠. 일이 더 커지면 태도를 바꿀지도?”
“그렇단 말이지…….”
노구덕은 못마땅한 듯 콧잔등을 씰룩였다. 그의 눈치를 살핀 아가레스트는 픽 힘없이 입매를 터뜨렸다.
“성에 차지 않는 건가요?”
“당연한 소리. 내가 원하는 건 대형 다랑어지, 이도 저도 아닌 꼴뚜기가 아냐. 일을 좀 더 키워야겠어. 다랑어가 군침을 흘리면서 달려들도록, 맛있는 미끼를 던져줘야지.”
“그거라면 어렵지 않아요. 따로 양념을 뿌리지 않아도 남일우가 알아서 움직여 줄 테니까요. 단…….”
은근한 눈길을 보내며 윗입술을 살짝 적신 아가레스트는 애매하게 뜸을 들이며 말했다.
“고기가 먹기 좋게끔 익을 때까지… 그 아가씨가 상당히 괴로운 시간을 보내게 될 텐데, 괜찮겠어요?”
그 아가씨. 안세희를 이르는 말이다.
“…세희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거다. 녀석도 좀 더 독해지지 않으면 안 돼.”
“잔인하군요. 본인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는 건가요?”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일종의 시험이지. 합격하면 계속해서 아이리스의 핵심으로 남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시에는 배제할 수밖에 없어. 나는 클럽에서 소꿉장난을 할 생각이 없으니까.”
가차 없는 대답이었다. 해초처럼 흘러내린 옆머리를 지그시 뒤로 넘긴 아가레스트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저 아둔해 보이는 낯짝 뒤에 숨어 있는 냉정함과 과단성. 꼭 발톱을 숨긴 짐승 같다. 저 냉혹한 면모야말로, 그녀가 복수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구덕을 선택한 이유였다.
“좋아요. 그러면 그 아가씨는 제가 맡도록 하죠.”
“…꽤 흥미가 동한 얼굴인데. 세희가 마음에 들었나?”
“전 순수한 원석에 이끌리거든요. 더럽히는 재미가 있어서. 어차피 그녀에 대한 호위도 병행해야 하니, 상관없을 텐데요?”
“악취미로군.”
“그건 허락인가요?”
“선만 넘지 않는다면, 상관없다.”
“그야 물론…….”
답지 않게 나긋나긋 웃으며 이야기하던 아가레스트의 목소리가 급속히 낮아졌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것은 덤덤히 앉아 내일 있을 회의 일정을 훑어보던 노구덕도 마찬가지였다.
“…….”
의자에 만월처럼 둥근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아가레스트의 몸이 신기루처럼 허공에 녹아들었다. 강력한 주문을 주력으로 삼는 마법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고도의 경지에 다다른 은신술. 허나 그녀의 전직을 생각해 본다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얼마 뒤, 굳게 닫혀 있던 막사의 문이 노크도 없이 젖혀졌다. 분명 그가 들어오면서 채워 두었던 문고리는 어느 틈엔가 풀어져 있었다.
벌컥 열린 문틈으로 성큼 들어서는 무례한 방문자를 일별한 노구덕의 눈두덩이 작게 꿈틀거렸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로군.”
“…총사령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기별 없이 찾아온 방문자의 정체는 연합군의 총사령관 무릴로였다.
불쑥 모습을 드러낸 무릴로는 폭군이라는 별명답게 제멋대로였다. 방 주인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의자에 앉은 그는, 어처구니없는 눈길을 보내는 노구덕을 향해 작게 턱을 까딱였다.
“진중에 웬 박쥐가 한 마리 돌아다니더군. 종적을 쫓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는데. 노구덕 위원, 뭔가 할 말 없나?”
“…총사령관.”
노구덕은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신출귀몰한 아가레스트가 어쩌다 덜미를 잡혔는지 몰라도, 건수를 잡은 것처럼 구는 무릴로의 능글맞은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직무유기를 밥 먹듯이 하는 총사령관이 할 말은 아니라고 보는데. 당신이야말로 내게 할 말이 있거든 똑바로 얘기하는 게 어떻소?”
“호오. 훌륭한 배짱이다. 과연, 숨겨둔 패가 있다는 건가. 하긴, 벌레 냄새를 풍길 때부터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
“…….”
인상을 찡그린 노구덕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히죽 웃으며 일별한 무릴로는 등받이가 삐걱 소리를 낼 정도로 편히 몸을 기대었다.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하지. 간만에 눈에 차는 실력자가 보였거든. 게다가 그런 실력자를 하수인으로 부려먹는 사내라니. 크크크크…. 흥미가 동하지 않을 수가 없잖나.”
“…용건은 그게 전부요?”
노구덕은 여전히 딱딱한 표정이었다. 그는 가급적이면 빨리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폭군 무릴로. 그 전력이 가늠되지 않는 위험한 남자다. 게다가 어비스 쉬라인의 군주라고 알려져 있긴 해도, 그 자세한 이력은 불명. 이런 위험인물에게 많은 패를 보여줘서 이로울 게 없었다.
하지만 무릴로는 쉬이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니지. 내가 겨우 얼굴이나 보자고 찾아왔을 것 같나?”
무릴로는 냉막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연신 입매를 씰룩이며 말을 이었다.
“…제의를 하나 하고 싶다.”
“제의?”
“그 꼬맹이 계집… 신소율이라 했던가? 그 계집의 각성을 도와주지.”
노구덕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처음 신소율이 이마를 땅에 부딪치며 부탁했을 때만 하더라도 냉랭하게 거절하던 그가 아니었던가? 겨우겨우 수수께끼 같은 힌트를 얻긴 했지만, 그건 그다지 쓸모가 없는 조언이었다.
“천 명을 죽여 제물로 바치든지,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든지… 라고 했던 것 같은데. 설마 소율이를 죽이겠다는 말은 아닐 테고, 그쪽에서 제물을 마련해 주겠단 소리요?”
“이해가 빠르군. 밑바닥에서 올라온 이유가 있었어.”
칭찬을 들었지만 어째 하나도 기쁘지가 않다. 껄끄러운 기분을 뒤로 한 노구덕은 퍼뜩 떠오른 의문을 표출했다.
“천 명이나 되는 제물을 어떻게 마련한단 거요?”
“마련할 필요는 없다.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바로 이 몸 안에 있지. 혈정”
“그게 무슨?”
“실망인데. 너구리같은 늙은이가 나에 대한 소문도 듣지 못한 건가?”
그제야 무릴로의 말을 이해한 노구덕의 낯빛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가 떠오른 탓이다.
폭군 무릴로. 그가 어비스쉬라인의 군주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실상 대륙에 알려져 있는 그에 대한 정보는 악명 높은 리버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그의 악명에 늘 함께 따라붙는 잔혹한 일화였다.
무릴로는 스스로 리버 집단을 만들어 두목 행세를 했지만, 이내 알 수 없는 이유로 태도를 바꾸어 자기 손으로 부하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그 처참한 살육극 속에서 죽어나간 리버들의 숫자만 천여 명이 넘는다고 하던가.
‘…하긴, 그런 건 상관없지.’
“그 각성이라는 것, 위험요소는 없는 거요?”
“그 꼬맹이에 대한 안위를 묻는 거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두고 싶군. 동화한 숙주가 사망했을 때 위리놈이 제대로 각성할 확률은 일할 이하. 하지만 천 명의 제물이 준비되어 있다면 아주 안전하게 힘을 받아들일 수 있지.”
“내 말은 악마에 의한 빙의나 잠식을 말하는 거요.”
“그 역시 걱정할 필요 없다.”
신소율의 안위가 걸린 문제였기에 결코 허투루 처리할 수 없다. 그 이후로도 노구덕은 무릴로에게 각성 전반에 관한 것을 꼬치꼬치 캐물었고, 무릴로는 의심스러울 정도로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한참 동안 그의 얘기를 듣던 노구덕의 고개가 마침내 끄덕여졌다.
“…조건이 뭐요?”
“얘기가 조금 길어질 거다. 괜찮겠나?”
“그 정도 시간은 있소.”
“좋다…….”
이어진 무릴로의 이야기는 꽤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의 얘기가 계속되는 동안, 노구덕의 얼굴은 그 경중에 따라 심각하게도 변했다가, 또 어처구니없게 풀어지기도 했다.
“허, 기가 막히는군. 총사령관 당신의 능력도 놀랍지만, 그자들의 정신머리도 보통이 아냐. 이 와중에 그런 생각을…….”
“나쁜 얘기만은 아닐 텐데.”
“…부정하진 못하겠군.”
“크흐흐흐… 역시 재미있군.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넌 이쪽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야.”
“나쁠 게 없는 게 사실이니까. 그런데, 계기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거요? 소율이를 억지로 그림리퍼에게 붙이려 한다면, 그것도 꽤 부자연스러울 텐데. 본인이 납득할지도 의문이고.”
조금 노파심이 섞인 말이었으나, 무릴로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걱정 말도록. 이미 적당한 자를 포섭해 두었으니까. 천인혈(千人血)은 반드시 그 계집애의 손에 쥐어질 거다. 그렇게 정해진 운명이니. 그 외에 관건이라고 한다면… 그래, 절박함이겠군.”
“절박함?”
“절박함, 혹은 갈망. 최초 각성의 동화율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음, 그렇다면…….”
노구덕의 큰 머리가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무릴로의 입에서 ‘절박함’이란 단어가 나온 순간, 어떤 강렬한 텔레파시가 그의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거라면 제가 도맡도록 하죠. 아주 좋은 각본이 떠올랐어요.’
그렇잖아도 노구덕은 당일,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아가레스트를 신소율에게 단단히 붙여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침 당사자가 흔쾌히 나서주니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그건 이쪽에서 알아서 할 문제요. 어쨌거나, 당신의 제안… 받아들이겠소.”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다.’라는 말이 달갑잖게 들리는 것은 왜일까. 너도 같은 부류라고 했던가. 좀 전에 들었던 무릴로의 말이 유독 깊게 와 닿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나도 썩었다는 말이겠지. 흐흐흐….’
이미 온몸에 덕지덕지 썩은 악취가 나는 오물이 묻은 마당에, 더 이상 무얼 두려워할까. 진하게 자조한 노구덕은 휑하니 문을 열고 떠나는 무릴로를 응시하며 히죽, 작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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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어제 퇴근하고 너무 피곤해서 그냥 잠들어버렸네요 ㅠㅠ
오타수정과 리리플을 달지 못했습니다..
속죄의 의미로 아침화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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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하루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