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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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월척
193# 월척
창백한 보름달이 달무리 뒤에 숨어버린 늦은 밤.
먹이를 찾아 헤매는 듯, 거대한 전각의 처마에 날아든 한 마리 야조(夜鳥)가 있었다.
부엉이? 올빼미? 아니… 자세히 보니 그건 새라고 보기엔 너무 덩치가 컸다. 처마에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전각 아래로 스산한 눈길을 보내는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이정한. 발레기우스의 사도로서 세간에 도살자란 흉명을 떨치는 그가 북부연합의 심처에 숨어든 것이다.
거무튀튀한 도끼만 들었다 하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참살하는 인간백정이 이 자리에 왔다는 건, 다른 걸 의미하지 않는다. 살인 외에 달리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실제로 이 흉금(凶禽)이 노리는 건 두 명의 목숨이었다.
‘강옥교, 여위량.’
이정한은 목표들의 이름을 되뇌며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한 맞은편 전각을 노려보았다.
듀폰에서 가장 높은 건물. 북부연합의 임시맹주로 활동하고 있는 강옥교가 기거하는 곳이다.
‘오늘은 7층. 왼편에서 네 번째 방이라고 했던가.’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는 우두머리들이 으레 그렇듯, 아직 입지가 불안한 강옥교 또한 매일 같이 잠자리를 바꾸었다.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오늘은 7층의 왼쪽 네 번째 방이다.
북부연합에서는 극비로 취급되는 정보일 테지만, 이정한은 그녀에 대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비록 명왕이 죽긴 했어도, 듀폰에는 그가 남긴 잔뿌리들이 아직 건재했기 때문이다.
강옥교의 위치뿐만이 아니다. 그곳까지 잠입할 수 있는 최단의 루트, 경비병들의 수와 교대 시간, 중간 중간에 위치한 함정들까지… 이정한은 북부연합의 최대 심처를 손바닥 안에 그려진 지도처럼 꿰뚫고 있었다.
북부연합의 중심지이니만큼 호위들의 수준도 상당한 수준이다. 예전의 그였다면 감히 잠입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의 용담호혈(龍潭虎穴).
허나 그것은 말 그대로 예전의 얘기다. 발레기우스가 시간을 들여 손을 본 이정한의 능력은 이미 십존급에 도달한 상태. 활동무대가 주로 음지였기에 이름만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실질적인 그의 힘은 다른 십존에 비해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 그토록 갈망하던 힘을 손에 넣은 것이다.
애초에 그 힘을 얻기 위해 발레기우스에게 영혼을 바쳤을 터다. 그러나… 양잿물처럼 혼탁한 이정한의 눈빛에선 어떤 만족감이나 희열도 느껴지지 않았다.
‘속전속결로 끝낸다.’
전각 외부에는 차기 신의 조각 후보들이 대기하고 있다. 강옥교와 여위량을 죽이면 자연스레 그들이 지닌 힘이 그릇들에게 흘러들 것이고, 그들을 데리고 복귀하면 작전은 끝난다. 이런 일을 밥 먹듯이 반복했던 이정한에겐 일상이나 다름없는 임무였다.
이정한은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처 없이 흘러가는 구름 무리가 희끄무레한 만월에 겹쳐지는 순간, 처마에 얹혀 있던 그의 그림자는 정면의 전각에 도달해 있었다.
강화합금으로 만들어진 창살을 소리 없이 잘라낸 이정한은 손쉽게 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지금쯤이면 복도를 순회하는 경비병들이 교대를 위해 아래로 내려갔을 터. 제한 시간은 약 2분 정도지만… 그에겐 그것이면 충분했다.
10초 내로 강옥교를 처리하고, 1분 내로 옆방에 있을 여위량을 제거한다. 그게 이정한의 계획이었다.
‘먼저, 강옥교.’
먹물처럼 새까만 동공이 커다랗고 화려한 침대로 향한다. 발기척을 죽이며 침대로 다가간 이정한은 가운데가 불룩 솟아 있는 침대 중앙을 단번에 베어냈다.
스각!
작은 손도끼가 섬뜩한 호선을 그리고, 깔끔하게 양단된 침대의 절단면으로 선연한 핏물이 흘러나왔다.
‘돼…지…?’
잘려 나간 침대의 단면을 직시하는 이정한의 동공에 커다란 떨림이 일었다. 맥없이 양단된 침대에 누워, 뜨끈뜨끈한 핏물을 쏟아내고 있는 건 그가 노리던 강옥교가 아니었다.
그건 돼지. 사람처럼 보이도록 비스듬히 눕혀 놓은 돼지였다.
‘함정!’
허탈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함정에 빠졌다는 걸 직감한 이정한은 곧바로 창가로 몸을 날렸다. 이미 퇴로가 막혔다는 것도 모른 채.
“벌써 가려고요? 모처럼 수고하면서 왔는데, 좀 더 즐기다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정한은 가까스로 발을 멈추었다. 언제 들어온 것일까? 그가 침입한 창틀에는 금발을 뒤로 묶어 넘긴 여인이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교태로운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작게 숨을 쉴 때마다 터져버릴 듯 출렁이는 풍성한 가슴이 눈을 어지럽힌다. 비대하리만치 거대한 가슴에 비해 허리는 개미처럼 잘록하고, 창틀에 뭉개진 엉덩이는 고무공처럼 탄력이 넘쳐 보인다. 그렇잖아도 발칙한 몸매가 딱 달라붙는 가죽옷을 입어서인지 더욱 요염하게 느껴졌다.
허나 이정한은 여인의 육감적인 몸매에 현혹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정신머리가 없었다는 게 맞다.
크게 부릅떠진 그의 눈은 시종일관 여인의 하얀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아가레스트?”
“빙고.”
연지보다 붉은 혀가 윗입술을 핥고 지나간다. 뱀처럼 싸늘한 그녀의 시선을 마주한 이정한은 땅을 박차며 뛰어나갔다. 아가레스트가 아닌, 뒤쪽의 방문을 향해서였다.
도주를 감행하는 이정한이 가소롭게 보인 것일까. 피식 입매를 터뜨린 아가레스트는 가느다란 검지손가락을 위로 치켜세웠다.
“모습을 보여라, 전능의 탑.”
화악!
공간이 격변을 일으켰다. 화려한 침대와 피 흘리는 돼지의 사체, 고풍스러운 실내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황폐한 평야가 나타났다. 오래전 군대 간의 격전이 있었던 듯, 낡은 투구와 갑옷, 이 빠진 무기 따위가 어지러이 널려 있는 평야였다.
오래된 격전지의 중앙에는 금빛의 첨탑이 고고하게 솟아 있었다. 발할라의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영광의 결정체, 전능의 탑이다.
과거 발레기우스에게 한 번 파훼된 역사가 있지만, 그건 상대가 너무 나빴을 뿐이다. 진체를 드러낸 전능의 탑은 발레기우스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패배를 허락한 적이 없었다.
권능의 공간에 이정한을 가둬놓은 아가레스트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었다.
“이제 어떡하죠? 도망칠 길이 막혀버렸네요.”
“…어떻게 알았지?”
“뻔하잖아요? 명왕이 죽었으니, 발레기우스라면 당연히 나머지 신의 조각들을 회수하기 위해 사냥개를 보내겠지요. 십중팔구는 당신이 올 거라 생각했어요.”
“내게 흘린 정보도 모두 조작된 거였나.”
“그렇지요. 명왕의 잔재는 벌써 오래전에 깔끔하게 치워냈어요.”
한마디로 철저하게 계획된 함정이라는 말이다. 그가 이곳에 오리란 것도, 심어둔 밀정에게 접촉하리란 것도 모두 알고서 파둔 함정.
진퇴양난에 빠진 이정한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보이는 황폐한 땅… 이건 눈속임 같은 게 아니다. 아가레스트의 권능으로 발현된, 엄연히 실재하는 공간이다. 그가 속한 세계가 아니라 이차원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전능의 탑은 십존들의 수많은 자기류 중에서도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축에 속하는 기술이다. 이 공간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면 아가레스트의 힘이 다하거나 그녀를 제압하는 것밖엔 없다.
‘싸울 수밖에.’
이정한이 굳은 안색으로 손도끼를 들어 올리자, 반개한 아가레스트의 눈매가 새우처럼 휘어졌다.
“좋아요… 그렇게 발버둥 쳐야 재미가 있죠.”
말과 몸짓에서 보란 듯이 여유가 흘러넘친다. 패배는 절대 염두에 두지 않은, 명백한 강자의 오만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정액이나 받아먹던 암퇘지가… 오랜만에 만나니 기가 살았군.”
“…하.”
아가레스트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지워졌다. 이정한은 그 틈을 노려 손도끼를 내던졌다.
쐐액! 총탄처럼 쇄도한 손도끼가 아가레스트의 미간을 정확히 관통했다. 머리가 날아간 아가레스트의 몸이 연기처럼 흩어지는 순간, 이정한의 머리 위에서 서슬 퍼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운 줄도 모르고 제 무덤을 파는군요.”
“흡!”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이정한의 손도끼가 또다시 섬광을 뿜어냈다. 진한 투기가 맺힌 이정한의 도끼는 위에서 나타난 아가레스트의 몸뚱이를 정확히 사타구니부터 머리까지 두 동강으로 쪼개버렸다.
유령처럼 사라졌다, 또다시 멀리서 모습을 드러낸 아가레스트는 이정한의 굵은 팔뚝에 돋아난 네 개의 반점을 보더니 진득한 조소를 흘렸다.
“그게 발레기우스의 선물인가요? 네 개의 충왕각인? 호호호. 당신의 능력은 그 사람에 비하면 어린아이에 불과해요.”
본래의 호리호리하고 날렵한 몸뚱이가 거악(巨嶽)처럼 부풀었다. 네 개의 충왕각인을 활성화시킨 이정한의 몸은 노구덕의 발동 상태와 굉장히 닮아 있었다.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그의 전신에는 노구덕에게선 볼 수 없었던 막대한 투기가 운무(雲霧)처럼 휘감겨 있다는 것과, 손톱과 이빨 등이 짐승처럼 길쭉하게 자라났다는 것이었다. …꼭 라이칸스로프처럼.
비웃음을 머금은 아가레스트는 그 힘의 출처에 대해서도 간파하고 있는 듯했다.
“그건 브루탈샤드의 힘? 완전히 괴물이 다 됐군요. 늑대왕의 부하들처럼 어정쩡한 복제품 같지는 않고… 발레기우스가 당신에게 브루탈샤드를 넘긴 건가요?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사냥개 노릇할 맛이 나겠죠. 충왕각인과 상성도 잘 맞을 테니…….”
“죽어라!”
커다랗게 포효를 터뜨린 이정한은 손도끼를 십자로 교차하며 휘둘렀다.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은 완력과 투기의 조합은 아가레스트의 권능으로 생성된 공간까지도 한순간 뒤틀리게 만들 정도였다.
대기가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것을 본 아가레스트는 이제까지의 여유를 걷어냈다.
“타이달 웨이브.”
첨탑의 꼭대기에서부터 일어난 황금빛 해일이 순식간에 불어나 그녀의 전면을 뒤덮었다. 아가레스트가 불러낸 금빛의 물결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정한의 투기와 몸뚱이를 집어삼켜버렸다.
“크아아악!”
금빛 해일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이정한의 상태는 전신 화상을 입은 것처럼 흉측했다. 그러나 그는 벌겋게 익어버린 몸뚱이에도 아랑곳 않고 도끼를 휘둘렀다. 굵은 힘줄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육체는 빠른 속도로 재생을 이뤄내는 중이었다.
“사람인지, 라이칸스로프인지….”
감겨있던 눈을 만개한 아가레스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우아하게 이정한의 공격을 흘려 넘겼다.
그녀가 가진 또 다른 무기, 천리안의 힘이었다.
미친 듯이 도끼를 휘두르는 이정한의 공격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고, 벽력보다 위력적이었다. 그러나 천리안을 통해 이정한의 투로를 훤히 읽고 있는 아가레스트는 어렵지 않게 그의 공세를 전부 회피해냈다.
천리안을 벗어나려면 공격 자체가 그녀의 인지범위를 뛰어넘거나, 그녀보다 강대한 마력으로 능력 자체를 봉쇄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정한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닿을 듯 말 듯하면서 절대로 잡히지 않는 상대로, 의미 없는 숨바꼭질을 반복하던 이정한은 가쁜 숨을 토해내며 이를 갈았다.
‘또, 또, 또…!’
예전, 노구덕에게서 느꼈던 그 격차의 벽. 겨우 뛰어넘은 줄로만 알았던 그 벽이 또다시 망령처럼 나타나 앞길을 가로막는다.
분통이 터졌다. 만인지상의 힘을 얻고자 모든 걸 바쳤는데, 또다시 이런 상대라니. 억울하고 원통해서 절로 이가 갈렸다.
‘그동안 난 도대체 뭘 위해서…!’
“십존에 달한 힘으로도 부족하단 말이냐!”
“십존 수준이니까, 부족한 거죠. 더 노력하세요.”
“노력? 노력이라고?”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오로지 힘을 얻기 위해 인간이길 포기하고 사람을 사냥하는 백정이 되었다. 인륜에 반한지는 오래고, 짐승들의 신기를 몸 안에 받아들였다.
여기서 뭘 어떻게 더 노력하란 말인가. 다시 태어나기라도 하란 소린가?
“…네 심장을 꺼내먹겠다. 그러면 더 강해질 수 있겠지.”
“어머, 무서워라. 협박인가요?”
아가레스트를 노려보는 이정한의 눈이 깊숙하게 가라앉았다. 다음 순간, 충왕각인이 새겨진 그의 팔뚝 위에서 또 하나의 반점이 눈이 뜨여지듯 생겨났다.
벌레교단의 교황만이 지닐 수 있다는 다섯 번째의 각인. 오왕각인(五王刻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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