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223)
223화 – 쟤네들 꼬라지를 보니까 어째 하나도 안 아쉬운 것 같습니다
추위가 막바지 맹위를 떨치는 와중에도 WBT그룹과 계열사 인수를 위해 진행한 협상은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안타깝게도 그 열기는 몸이 뿜어내는 스팀 때문이었다. 이 새끼들이 자꾸 열 받게 하네? 아시바리 걸고 싶은 마음을 겨우겨우 참아냈다.
예상대로 실무협상은 전혀 합의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기업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너무 다른 거 아닙니까?”
“기준이 다르다고 한들 가치가 그리 차이 날 리가 없어요. 그쪽에서 WBT엔진을 아무리 높게 평가한들, 시장에서는 그렇게 안 본다니까요. 제발 현실을 자각합니다, 쫌!”
“아, 뭐가 됐건 우린 도저히 그 가격에 못 내놓겠습니다. 아니, 지금 주가를 봐도 답이 나오는데……. 우릴 자선사업가로 아나, 거 참.”
WBT그룹에서 협상을 담당하러 나온 실무단 대표는 며칠째 저 지랄이다.
하나도 아쉬울 것이 없는 게 우리 쪽이지만, 저런 말을 들으면 괜히 오기가 생겨서 당장이라도 사고 싶어진단 말이지.
“보소. 못 내놓겠다는 겁니까, 아니면 협상을 결렬시키겠다는 겁니까?”
“그렇게 가격을 후려쳐놓고, 우리 보고 계속 앉아있으라고 하는 것도 경우가 아니지 않습니까?”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도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 마음대로 하세요. 누굴 호구로 아나……. 다시 얘기하지만, 지금 주가에 20% 붙인 가격, 지분 전량 인수. 이 조건뿐입니다. 경영권 프리미엄으로 20%밖에 안 붙인 건 최대한 배려한 겁니다. 아시겠어요?”
“좋습니다. 그럼 협상결렬을 선언하겠습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입니다. 다음에 길 가다가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죠.”
실무협상에서 협상결렬을 선언한 것만 이번이 세 번째이다.
협상결렬을 선언하고 빠이빠이하고 나면 이틀이나 사흘 후에 여지없이 걸려오는 전화. 우리 요구를 최대한 반영해볼 테니까 다시 얘기해 보잔다.
협상재개로 인수조건이 조금씩 유리해진 건 맞지만, 뭔가 맘에 들지 않는다. 아쉬운 건 저쪽인데, 왜 우리가 매달리는 것 같지?
네 번째 협상이 재개되기에 앞서 마일드금융투자 박한철 대표와 대책회의 시간을 가졌다.
“이번에도 결렬이야? 세 번째인가? 내가 바빠서 협상에 참여 못 하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하하.”
“저 몹시 시무룩합니다.”
“아무래도 WBT 그놈들이 약을 제대로 빨고 나왔나 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나올 리가 없잖아?”
“삼촌. 쟤네들 꼬라지를 보니까 어째 하나도 안 아쉬운 것 같습니다.”
“그 얘기가 진짜였나 보구나.”
박 대표가 뭔가 알고 있다는 눈치로 시중에 떠도는 소문을 전해줬다. 역시나 끌려간다는 느낌을 나만 느끼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어.
“얘기 들어보니까 김재기 부사장이 협상단 결재라인에서 빠졌다고 하더구나.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 소문이 맞다면 협상단 기류가 바뀌었다고 봐야지.”
“김 부사장이 빠졌다고 이렇게 달라질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세 번을 만났는데, 회사를 팔겠다는 의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김재기 부사장이야 어떻게든 매각을 성사, 그것도 빨리 마무리 지으려고 한 사람이야. 그 사람이 WBT그룹에서 재무통으로 뼈가 굵은 사람이라 회사의 다급한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겠지.”
“진두식 회장이 김 부사장을 빼버렸다는 건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건가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리 뻣뻣하게 나올 수 있습니까? 계열사 매각 안 하면 당장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인데요.”
“확실한 건 WBT엔진이랑 중공업을 살 만한 회사는 유일조선밖에 없다는 것이지. 그걸 알면서도 배짱을 부리는 건 그냥 배짱이거나, 아니면 다른 돈줄을 찾았다는 건데…….”
“다른 돈줄이 있을 수가 없어요. 이 바닥이 조금 회복됐다고 해도 여전히 어렵거든요. 암울한 이 바닥에 누가 몇천억씩 들여서 들어오려고 하겠습니까? 내가 거금 들여서 회사 사주겠다는데도 마다하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아니야. 대타가 있을 수도 있어. 요새 들리는 얘기가 있거든.”
대타? 머릿속에 남아있는 전생의 기억들을 헤집기 시작했다.
전생에 WBT그룹이 매각에 성공한 계열사는 WBT유럽과 WBT에너지 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실패했고, 결국 그룹은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됐었다.
분명 내 기억엔 WBT엔진이 매각되지 않았다. 그러니 대타가 있을 리 없다. 현생에서 그걸 살 회사도 당연히 없다.
그러나 여의도 금융가의 찌라시 애독자인 박 대표는 내 생각이 틀렸음을 지적하고 나섰다.
“연성아, 이건 그냥 소문 몇 개로 내가 추측하는 건데 말이야.”
“운 띄우는 것부터 괜히 불길한데요?”
“WBT그룹 진 회장이 일본 쪽에 인맥이 꽤 있거든.”
일본? 흐음. 그래, 일본. 뭔가 감이 오긴 해.
“너도 알겠지만, 일본경제가 종합상사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말이 종합상사이지 실제론 투자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사모펀드처럼 회사 사고 팔아서 돈 버는 게 메인인 거지.”
“일본 쪽 자금이 붙었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그게 아니고서야 저것들이 협상을 세 번이나 결렬시킬 정도로 고자세로 나올 이유가 없지 않겠어? 카드 두 장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 의심이 아닐까 싶다.”
“결론은 아직 배가 덜 고프고, 정신을 덜 차렸다는 소리겠네요.”
“결론은 WBT엔진 사고 싶다면 돈을 더 내라는 것이겠지.”
일본 자금하니까 기억난다. WBT그룹이 WBT에너지라는 회사를 일본 라우드니스상사에 넘겼는데, 협상을 개판으로 해서 헐값으로 넘겼다는 것 말이다.
최소 1조 원은 받아냈어야 하는데, 6500억에 넘겼다고 시끌시끌했다. 일본 상사는 그걸 반년도 안 돼서 30% 더 붙여 국내 대기업에 되팔아서 또 시끌시끌. 국부유출 어쩌고, 하도 떠들썩해서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기억이 난다.
박 대표 지적대로 WBT그룹이 일본 자금을 끌어온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당장 급한 불을 끌 수 있을 테니까.
배짱부린 이유가 다 있었구만? 저놈들이 저울질하면서 돈을 더 받아낼 심산이라면, 나도 똑같이 응해줄 것이다.
“삼촌. 저놈들 콧대 좀 살짝 부러뜨려줘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주먹이라도 휘두르겠다는 소리냐?”
“저놈들이 현재 주가에 20% 붙이겠다는 것이 마지노선이라고 고집부리고 있잖아요?”
“그렇지.”
“그럼 주가를 확 떨어트리면 그런 개소리를 못 하지 않겠습니까?”
“말이야 쉽지. 어설픈 소문 내봐야 주가는 꿈쩍도 안 해. WBT엔진이 4만 원을 넘보다가 지금 흘러내려서 1만5000원대까지 떨어졌잖아? 악재란 악재는 대부분 반영됐다고 봐야지. 더 이상 빠지기 힘들다는 소리야.”
“상장폐지도 가능할 정도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죠.”
박 대표의 눈빛이 달라졌다. 신기 가득한 놈으로 소문 자자한 내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얘기를 하니, 뭔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확 들었을 것이다.
“무슨 수가 있는 모양이지? 그래서 내가 도와줄 일이 있어?”
“안 그래도 회사 일로 바쁘신데 귀찮게 해 드리면 안 되죠. 협상은 새로 뽑은 유능한 직원이랑 잘 해보겠습니다. 협상 끝나고 뒤처리만 부탁드릴게요.”
“오호. 이쪽 전문가 하나 데리고 왔나 봐?”
전문가는 개뿔. 놀 만큼 논 이유선이 이제 월급 받겠다고 우리 회사 들어오겠다고 하니, WBT그룹과 지랄 같은 협상에 따라다니면서 정신교육 좀 받게 해줘야지.
협상은 협상대로 진행하고, 난 나대로 WBT놈들 콧대를 분질러줄 일에 착수해야겠다. 솔직히 잘 될지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기사 몇 개 봤던 기억이 전부니까.
그래도 결론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저질러 보는 거지 뭐. 집이 무너졌다고 해서 구경 갔는데, 무너진 집이 자기 집인 걸 아직 모르는 WBT그룹 놈들한테 인생의 쓴맛 좀 보여주자고.
***
무더위가 맹위를 펼치는 한여름이다. 그러나 공활한 가을 하늘처럼 가슴이 휑한 기분이 가득했다. WBT그룹 김재기 부사장 말이다.
유일조선과 계열사 매각에 대한 큰 틀의 합의를 끝냈을 때까지만 해도 한숨 돌렸다는 안도감이 밀려왔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협상 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하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다. 난관이라기보다 기세 싸움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과정이 어찌 됐건 결과는 달라질 것이 없을 테니까.
그는 그리 믿었다. 결국 유일조선은 WBT엔진은 물론, 부랴부랴 합병해서 만든 WBT중공업까지 인수하리라 봤다. 그렇게 1조 원 가까운 자금이 들어오면 그룹 유동성 위기도 큰 고비는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협상 타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고, 자꾸 시간만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에 그룹의 자금사정은 더욱 악화됐고, WBT그룹의 위기에 대한 수근거림도 커져갔다. 그룹의 자금관리를 총괄하는 그로서는 답답할 노릇이었다.
답답한 상황에서 믿기 어려운 말까지 전해 들었다.
“부사장님. 얘기 들으셨습니까?”
“무슨 얘기 말이야?”
“일본 라우드니스상사가 재무적 투자자로 나선다고 합니다.”
“뭐? 그게 진짜야? 누가 그래?”
“비서실에서 접촉하고 있다고 합니다. WBT에너지 지분 일부를 매각하려고 한다는데요, 아무래도 회장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사안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 부사장은 빡 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았다. 지금 엄청 빡 쳤으니까.
일본계 자금을 받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 강조했건만…….
당장 회장실로 처들어가 진 회장의 잘못된 결정을 멈춰 세워야 했다. 알짜 계열사를 헐값에 넘길 위험이 커지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
“그게 정말입니까? WBT그룹이 일본 자금을 끌어온다구요?”
내 방에 찾아온 시황분석팀 윤두병 팀장의 보고에 놀람과 감탄, 쾌재, 분노 등등 오만 감정이 담긴 반응을 보여줬다. 사실 연기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윤 팀장의 노고를 생각해서 금시초문이었다는 반응을 보여주는 것뿐. 직원들 사기까지 생각해주는 나란 녀석은…….
“네, 확실합니다. 제가 나름 일본 소식통 관리를 제대로 했습니다.”
“오호라. WBT 이 새끼들이 하나같이 모가지에 깁스를 하고 다니길래 요즘 유행하는 패션인가 했더니, 딴 살림 차릴 생각을 하고 있었군요?”
“투자자로 나선 라우드니스상사가 한 10년 전부터 해외 M&A 분야에서 힘을 쓰고 있거든요. 작년에만 3000억 원이 넘는 수익을 냈는데, 앞으로 더 커질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해외기업들에 투자해서 엄청 뽑아내고 있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WBT놈들이 장기 적출될 상황인 것도 모르고 시시덕거리고 있다는 말씀이죠?”
“장기 적출까지는 아닐 겁니다. 그래도 걔네들이 그거 믿고 우리랑 협상에서 뻣뻣하게 나오는데, 그러다 큰코다칠 겁니다.”
WBT그룹이 일본 라우드니스상사로부터 돈을 끌어오기로 했단다. 이로써 WBT엔진 살 생각 없으면 꺼지라는 식으로 당당하게 나오는 이유를 확실하게 깨닫게 됐다. 그럼 나도 준비했던 것들을 풀어내면 될 것이다.
“그래서 뭘 팔아서 얼마나 받아온답니까?”
“확정된 건 아닌데, WBT에너지 지분 40%가량을 5000억에 넘기는 걸로 얘기하고 있답니다. 소식 전해준 일본 소식통이 그쪽에 있어서 확실할 겁니다.”
“WBT에너지라면 1조 넘게 받아낼 수 있을 텐데요?”
“WBT가 지분의 82%를 가지고 있으니까 경영권 유지할 정도만 남기고 넘긴다는 소리죠. WBT에너지가 그룹 내에서 유일한 캐시카우라 좀 더 빨아먹겠다는 의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뭐가 됐건 들어올 돈은 5000억 정도라는 거잖아요?”
“5000억이면 유동성 위기를 일단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거 참, 어이가 없네요. 걔네들은 5000억으로는 어림도 없을 건데요. 회사가 어떤 지경인지 모르는 거 아닙니까?”
“일단 급한 불을 끌 수 있으니까요. 우리와 협상에서 아쉬울 것 없다는 것이겠죠. 사고 싶으면 돈 더 내라, 이거죠.”
역시나였다. 5000억이 아니라 4000억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그거야 바뀔 수 있는 것이니까.
WBT그룹이야 5000억 원 수혈했다고 좋아하겠지만, 내년엔 피눈물 흘릴 것이다. 6000억을 더 받고 팔아야 할 WBT에너지를 2500억만 받고 넘길 테니까. 1조짜리를 7500억에 파는 WBT그룹의 클라스!
뭐가 됐건, 바로 일본으로 날아가자고.
왜 일본이냐고? 거기가 작업 치기 좋으니까. 나도 일본 덕 좀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