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27)
27화 – 내가 아는 미래 (5)
날이 점점 추워지는 것이 겨울은 겨울이네.
회귀해서 좋은 것이 날이 추워져도 뼈마디가 안 시린다는 점이다. 아침마다 A형 텐트 치는 것도 간만에 느껴보는 자신감이다. 역시 사람은 젊고 봐야해.
나뿐이 아니었다. 이 동네, 통영, 거제가 불타는 연말을 보내며 연일 발기찼다. 음, 그러니까 밝고 활기찼다.
거대한 주점으로 변해 버린 이 동네. 이곳에 자리한 조선소들에서 1년 내내 죽어라 배 만들어서 400척 가까이 내보냈으니, 술로 한 해를 마무리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동네 똥개도 만원짜리는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할 정도로 유례없는 호황. 다들 부자가 될 것이란 기대감에 부푼 연말이다.
다들 부자되겠다는 세태가 반영됐을까? 내년에 ‘하필이면’ 국민소득 4만불 시대로 돈 많이 벌게 해주겠다는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다.
‘하필이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망해가는 조선소 앞에서 제사 지낸 사람이니까. 그 망할 해양플랜트 몰빵으로 말이다.
중국 조선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니까 해양플랜트로 도망가야 한다는 개소리는 어떤 놈 작품인지, 지금이라도 그 놈 찾아서 대가리를 해부해 보고 싶다.
빅3가 해양플랜트한답시고 설치면서 날려 먹은 돈이 15조원이 넘는다고!
FPSO 같은 큼직한 해양플랜트 하나가 20억 달러, 그러니까 2조짜리니까 솔깃하긴 하지. 그렇다고 세계 1위 산업을 버려?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요. 에휴, 할 말은 많지만 입 아프니까 안 할란다.
혹시나 누군가가 유일조선은 해양플랜트 안 하냐는 소리 지껄이면, 말 끝나기도 전에 주리부터 틀 것이야.
난 흔들리지 않을 테다. 아직 시간도 넉넉하고 말이다.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라도 내년 대선에서 다른 사람이 당선될 수도 있을 것이고.
계획은 확고하다. 우선은 살아남는데 집중하고, 빅3가 해양플랜트에 미쳐 있을 때 상선 물량 야금야금 뺏어 와서 선박왕이 된다. 상선의 명가, 유일조선!
그 죽이는 타이틀을 위한 일들이 차근차근 이뤄졌다.
“사장님! 여기서 뵈니까 너무 젊어 보이십니다. 하하.”
“아, 그래? 한 20대로 보이나?”
“하하…….”
대학 새내기 같은 표정을 짓는 김태우 사장의 영입이 확정됐다. 부사장급인 영업본부장이 됐으니 이제 김 사장이 아니라 김 본부장이네.
김 본부장 영입과 함께 그리스 아테네 영업 지사도 본격 가동됐다. 김태우 본부장은 이 바닥 곳곳에 퍼져있는 김태우 사단을 데리고 와 듬성듬성 비어있던 자리를 말끔하게 메웠다.
영업뿐 아니라, 설계, 절단, 조립, 의장 등 각 공정에서 짬밥 좀 두둑이 먹은 에이스들로. 능력자들은 다다익선이다. 아따, 김태우 코인 달달하네.
그렇게 회사는 빠르게 아버지 친정체제 구축을 마쳤고, 내가 해야 할 일도 더 늘어났다. 아, 아부지요. 제발 잡일 좀 줄여주세요.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야드 곳곳에 산업안전, 에너지절약 스티커 붙이라는 결재나 하고 있으니 원. 화장실 변기짝마다 금연스티커 붙이는 건 알아서 하면 안 되겠냐?
***
“본부장님, 바쁘십니까?”
아무리 바빠도 할 일은 해야 한다. 난 갈 길이 아주 먼 사람이야. 금융위기의 전조가 시작된 2007년이 코앞이니, 이제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공구리 좀 쳐 놔야지.
그 일환으로 김태우 본부장에게 입사기념 선물 하나 묵직한 놈으로 주러 왔다. 이호균 부장이 싸고 간 똥으로 퇴비를 만들어 밭에 뿌리도록 도움 좀 줘야지.
“어, 유 실장. 어서 와. 내가 뭐 바쁠 게 있나.”
“회사가 많이 어수선하지요? 너무 급하게 성장해서 성장통이 꽤 아픕니다.”
“허허. 뭐 다 그렇지.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 나오는 오스카처럼 되느니, 차라리 성장통 있는 게 낫지 않겠어?”
“아, 네.”
김 본부장은 저 외모와 안 어울리게 등단까지 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냥 양철북이라고 하면 될 걸, 줄줄이 설명하는 걸 보면 참.
전생에 저 사람이 사장되고 나서 툭하면 자기가 쓴 시 낭송하고 그랬었다. 그걸 꼭 점심 먹고 한참 졸릴 때 했었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그 특이한 이력 때문인지, 해외 선주들이 그를 유독 맘에 들어 했다. 와인 잔 든 채로 시 한 편 읊어주면 그렇게 좋아했다나 뭐라나. 하여간 유럽놈들 허세 하나는 알아줘야 해.
“참, 김 차장 말이야. 사람이 생각보다 똘똘하더구만.”
“김진수 차장님 말씀이시죠? 김 차장님이 회사 창립 멤버인데 영입인사들 때문에 부각이 안 돼서 그렇지, 일 하나는 똑부러집니다.”
“귀가 좀 얇은 것 같은데, 그거야 어쩔 수 없고. 암튼 잘 가르쳐놓으면 큰일 할 사람 같아. 빡세게 가르쳐서 내후년쯤에 그리스 보내면 괜찮을 것 같아.”
“좋죠. 안 그래도 이번에 자기가 그리스 가겠다고 자청하는 걸 겨우 말렸습니다.”
이 부장, 보고 있나? 유부남들은 해외 지사에 자기가 먼저 가겠다고 나서는 법이야. 마음껏 술도 마시고 게임도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마다해? 잘 했어. 진짜 간다고 했으면 골치 아팠을 거니까.
“그나저나. 할 얘기 있어서 왔을 텐데, 내 얘기만 계속 했네. 허허. 유 실장도 알겠지만, 나이 먹으면 말이 많아져. 허허.”
이제야 말할 기회를 주는구만. 나도 야부리 함 털어보자.
“본부장님. 우리 회사가…….”
2008년 이후 인도되는 계약에 대해서 계약 취소 요건을 강화하는 문구를 삽입하자는 요청 같은 지시. 이 부장 그놈 갈구면서 맡기려고 했는데 도망가 버렸으니, 아재께서 좀 해 주십사.
“아니, 유 실장. 멀쩡한 계약을 왜 고쳐야 한다고 그러는 것이야?”
“우리가 지금까지는 수주에 집중하느라 선주 측에서 원하는 걸 계약에 다 반영해 줬는데, 이제 우리도 계약 프로세스를 정리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서요.”
김 본부장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알겠다는 거야, 모르겠다는 거야?
“우리 유 실장. 솔직하지 못해. 계약 프로세스야 당연히 내가 점검해서 문제 있으면 수정할 일 아닌가? 빙빙 돌리지 말고 바로 얘기해 보게. 뭐 불안하게 생각한 지점이 있는 건가?”
어머! 저를 그렇게 알몸으로 만들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역시 뱃사람 기질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변화구 던져봐야 소용이 없구만.
긁적긁적.
“제가 기존 계약들 보니까 계약취소 조건들이 선주들에게 유리하게 해석될 여지가 많아서, 살짝 손보는 건 어떨까 싶어서요. 계약해제 사유에 빠져나갈 구멍들도 꽤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180일 이상 인도가 지연되면 선주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돼 있는데요. 선주가 맘만 먹으면 우리가 선수금 다 토해낼 수도 있죠.”
선박 건조계약을 매번 새로 쓸 수 없기 때문에 표준화된 계약서를 사용하는데, 우리나라는 일본놈들이 만든 양식을 주로 쓴다.
헨타이의 나라 일본답게 얼마나 꼼꼼한지 모른다. 그래서 당연히 잘 안 읽어 본다. ‘일본놈들이 이런 건 잘 만들지’ 이러고 넘어가기 일쑤다.
계약서에, 사양서에, RG에 다 합치면 책 한 권 정도 되는데 그걸 언제 다 읽고 있냐. 그것도 영어로 돼 있는데.
물론 난 다 읽었다. 그래서 무조건 뜯어고쳐야 한다는 의지를 불사지르는 중이지.
2007년에 1억 달러까지 치솟은 케이프사이즈 벌크선이 2008년에는 8천만 달러대로 내려가더니, 2009년에는 5천만 달러대까지 급락한다.
1억 달러 주고 계약한 선주들은 속이 뒤집힐 테지. 선주들은 어떻게든 계약을 취소하고 싶어서 온갖 기상천외한 개지랄을 떨면서 시비를 걸기 시작할 것이다.
이를테면,
“뭐라고? 우리 요구 반영하느라 인도가 늦어질 것 같다고? 그럼 너네 잘못이니까 계약 취소.”
“아니, 너네가 스펙 바꿔달라고 해놓고, 왜 우리한테 잘못 떠넘기는데!”
“계약서상으론 우리 잘못 아닌데? 그럼 국제해사재판소 갈까?
“오냐. 가서 누구 잘못인지 판결 한 번 받아보자!”
“너 앞으로 나랑 안 볼 거야? 많이 아쉬울 텐데?”
“시벌, 이렇게 나오기야?”
“그러니까 계약 취소! 선수금 내놔!”
이런 아름다운 대화들이 오가며 재떨이에 담배가 쌓일 것이다. 실업급여 신청과 체불임금 신고하겠다고 통영노동지청에 줄 서 있는 사람들만큼.
내가 바라는 건 이런 개 같은 짓을 못하게 계약서 손 좀 보겠다는 것이다.
그게 금융위기를 덜 아프게 넘길 수 있는 방법이다. 표준 계약서가 아무리 꼼꼼해도 허점은 분명히 있고, 누구도 그 미친 일을 예상하며 허점을 보완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허허. 유 실장.”
“네, 말씀하세요.”
“이건 내가 기분 나빠도 될 일이야.”
“아, 네. 영업에 대한 일인데, 제가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도 회사를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이니까 너그러이 받아들여주셨으면 합니다.”
김 본부장이 정색하며 얘기하는 바람에 뜨끔했다.
영업 총괄하라고 부사장급에 앉혀놨는데, 온지 며칠이나 됐다고 실장이라는 놈이 계약 뜯어고쳐야 한다고 하고 있으니 그럴 만하지. 그래도 어쩌겠어. 회사는 살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업무 분장 때문이 아니야. 회사 일도 그렇고, 조직도 그렇고, 딱 칼로 자르듯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지. 맡은 업무가 다르다고 해서 나 몰라라 하는 것도 안 될 일이야.”
“그건 그렇죠. 그럼 뭐 때문에…….”
“아까 얘기하지 않았나? 솔직하게 얘기하자고. 나는 회장님을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자네는 나를 안 믿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야.”
“아, 그건 아닙니다.”
“자, 보자고. 지금 하루라도 빨리 배 못 받아서 안달이 난 사람들이 가득인데, 계약취소를 우려해서 계약서를 수정하자고? 이해가 될 일인가? 자네가 뭔가 생각한 것이 있으니까 이런 얘기를 꺼낸 게 아니냐 이 말이야.”
회귀한 걸 밝히라는 건 아니겠지? 저 사람도 지금 시황에 대해 하고픈 말이 많은 모양이로군. 이거 또 한참 떠들게 생겼네.
“그러니까 말이죠. 미국이…….”
미국이 주저앉으면, 그 여파가 어떻게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 이젠 달달 외울 정도인 대사를 한 번도 절지 않고 내뱉었다. 마치 직접 경험한 것처럼. 후훗, 직접 경험했으니 리얼하겠지.
“그러니까 유 실장 말은……, 곧 불황이 찾아온다? 음, 사이클상으론 한 번 꺾일 때가 되긴 했지. 꺾이는 타이밍에 선주들이 고점에 들어간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네, 맞습니다. 지금 시황이 뜨거워도 너무 뜨겁습니다. 이러다 한 번 꺾이기 시작하면 속절없이 주저앉을 수 있습니다.”
“허허. 처음부터 이렇게 얘기했으면 얼마나 좋나? 앞으로는 빙빙 돌려서 얘기하지 말자고. 나도 말귀 있는 사람이야.”
저번에 회사 오겠다는 소리는 빙빙 돌려서 해놓고, 이제는 한 식구가 됐다 이건가? 거참, 아주 맘에 들어. 내가 회귀했다는 것 말고 다 얘기해 드리리다.
부연설명 좀 신명나게 해 보려는데, 김 본부장이 선빵을 날렸다.
“내가 말이야. 저번 달에 노르웨이를 갔다왔어. 유 실장, 크리스티안 얀센이라고 들어봤나?”
“그럼요.”
당연히 모를 것이라고 던진 질문에 당연히 안다고 대답했다. 내가 이 바닥 짬밥이 몇 년인데, 그 사람 모르면 간첩이지.
“뭐 그래. 여튼 얀센을 만나서 얘기 좀 했는데, 작년에 봤을 때랑 느낌이 달라졌어. 왜 그럴 것 같아?”
“얀센이 선박 투기꾼으로 유명한 사람 아닙니까? 시황 변동을 감지했다는 말씀입니까?”
물고기들이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오르거나, 새들이 갑자기 떼를 지어 날아가거나. 유명한 지진 전조현상들이다.
해운 바닥에도 귀신같은 감으로 시황 등락을 예측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업가라기보다 무당이라고 봐야지. 얀센이라는 사람도 이 바닥 대표적인 무당으로 꼽힌다.
“그렇지. 얀센 그놈이 선박을 슬슬 내다 팔고 있더라고. 그건 시황 하락에 배팅했다는 소린데, 그러기엔 지금 시황이 너무 좋아. 그래서 그런지 기분이 영 찝찝하더라 이거지. 근데 유 실장 얘기 듣고 나니까 손가락 딴 것처럼 체증이 확 내려갔어.”
“제가 활명수 노릇을 했군요.”
“허허. 아주 100년 전통 부채표야. 자네 말대로 이 호황이 길지 않을 거야. 내 생각도 그래.”
30년 가까운 짬밥에, 임원 자리에 앉아 있어도, 나 같은 초짜 중에 초짜 말을 경청하는 저 자세. 거참, 아름다워. 전생에서보다 훨씬 일찍 데려왔으니, 이번엔 넋 놓고 폭격 맞을 일이 없을 것이란 기대가 스믈스믈 올라온다.
“그래서 말이야. 가만 있자…….”
김 본부장이 책상 달력을 가져와서는 피노키오 할아버지 포즈로 깨알같이 적은 글씨를 쳐다봤다. 아, 진짜 스마트폰! 그게 있으면 저렇게 안경 갈아 끼면서 달력 볼 필요가 없는데!
깨알 글씨 판독이 끝난 김 본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 주부터 유럽 한 번 돌 생각이야. 선주들 만나서 와인 마시면서 노래 한 번 불러줘야지 않겠어? 그편에 계약서 수정도 다 마무리 지을 테니까, 너무 염려 마.”
“아휴, 감사합니다. 혹시나 선주들이 기분 나빠하진 않겠죠?”
“그걸 기분 안 나쁘게 처리하는 게 영업의 기본 아닌가? 허허. 김 차장도 데리고 갈 테니까 출장비 잘 좀 처리해줘.”
그러다마다. 그깟 출장비 몇 푼이 뭐 대수라고. 그래도 비행기는 이코노미로……. 아직 우리 회사가 그 정도로 돈이 넉넉하진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