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76)
76화 – 유일조선의 무서움 (2)
IMF가 터졌던 1997년 겨울만큼 추운 겨울이다.
IMF 때야 당장 뭐라도 안 하면 큰일이 날 상황이라 무지하게 추웠지만, 지금은 애매한 추위이다.
분명 위기는 맞다. 그런데 당장 체감되진 않는 위기이다. 그래서 더 무서운 위기일지도 모른다.
태풍이 필리핀 어디쯤에서 발생했는데, 이동 경로가 우리나라를 관통할 것으로 예측된다는 뉴스를 봤을 때의 그 느낌일 수도.
그래서인지, 우진조선 본사가 위치한 종로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계획했던 수주가 계속 어그러져서 목표했던 수주계획 달성이 불가능해졌고, 내년엔 더 힘들어질 것으로 예상됐지만, 그냥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곧 죽어도 대기업 가오는 지켜야 한다는 곤조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우진조선 안상식 부장도 근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한가해졌지만, 온갖 바쁜 척을 다 하며 근처 커피숍에 몸을 들이밀었다.
“어, 형! 여기요.”
“이 기자. 바빠 죽겠는데 왜 이렇게 치근덕거려?”
“형이 언제 한가한 적 있었나? 이러면서 얼굴도 보고 그러는 거지.”
안 부장은 바쁜 내색을 하면서도 내선일보 이곽희 기자의 손을 반갑게 잡았다. 개똥도 약에 쓰려니 딱하고 나타난 꼴이랄까.
“참. 형 축하해.”
“난데없이 무슨 축하?”
“우진조선 실적이 사상 최대라고 하던데? 10조-1조 클럽 가입이 확실하다고 그러더라고.”
“에이, 그러면 뭐하냐. 나한테 뭐 떨어지는 것이 많아야 좋은 거지. 올해는 성과급도 없을 것 같아.”
안 부장은 이 기자가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기자 말대로 올해 우진조선이 매출 10조에 영업이익 1조 달성은 확실했다. 2년 전엔 아주 좋았으니까.
문제는 내후년부터다. 올해 175억 달러를 수주하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난데없는 금융위기로 겨우 절반을 넘길 정도로 죽을 쒔다. 2020년 매출 40조 원 달성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은 개뿔.
“에이, 엄살은. 순양중공업은 확실히 제치겠던데? 이제 빅3가 아니라 빅2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하.”
“거긴 모기업이 빵빵하잖아. 우리는 뭐……. 이번에 회사 인수도 나가리나고. 일이 참 안 풀려.”
“리먼브러더스가 망할 줄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어? 현진그룹도 어쩔 수 없지. 뭐 인수 무산되면 좀 어때? 우진조선도 아쉬울 것 없잖아? 나중에 더 비싸게 팔면 되겠지.”
안 부장은 인수 나가리난 것을 생각하니까 짜증이 확 솟구쳤다.
외국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주인 없는 회사라고 하면 높은 자리 앉았던 나랏님들이 잠시 쉬어가며 은퇴자금 챙기는 용도에 불과했다.
우진조선 고위직들 면면을 보라지.
연봉 몇억씩 받는 놈들은 죄다 낙하산뿐이다. 게네들 하는 일이라곤 선후배들이랑 전화 통화나 하다가 골프 라운딩이나 하는 것이 전부다. 예전 우진그룹 시절부터 똘똘 뭉친 직원들 아니었으면 진즉 나락으로 떨어지고 남았을 것이다.
안 부장은 산업은행이 우진조선을 매각한다고 했을 때, 진짜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현진그룹이 무려 6조를 배팅하며 사겠다고 했을 때 그 기대감이 극에 달했다.
현진그룹이 프로야구팀의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를 우진조선 인수로 달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현진그룹이 어떤 곳인가?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곳이긴 해도 의리 하나는 끝내주는 곳 아닌가!
그러나 기대감도 허상이었다.
현진그룹은 이러다 우리도 망하겠다면서 우진조선 인수 불가를 선언했다. 이제 이슈는 인수하느냐 못 하느냐가 아니라 4천억에 달하는 계약금을 돌려받느냐 못 받느냐로 넘어갔다. 우진조선 주인 찾기가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이게 다 그 같잖은 유일조선 때문이다.
안 부장은 그렇게 확신했다. 물론 금융위기라는 초유의 사태가 결정적이긴 하지만, 유일조선이 가는 길마다 태클을 걸었던 것도 주효하게 작용했다고 믿었다.
“이 기자야. 난 솔직히 그래. 현진그룹도 사정이 있으니까, 인수한다고 했다가 못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이번엔 좀 특수한 상황이었지. 자칫 둘 다 심각한 위기에 빠졌을 수도 있으니까.”
“그거야 이해하지. 근데 이번 인수전 진행될 때 계속 방해했던 놈이 있었던 거 알어?”
“대흥중공업?”
“아니. 걔네야 페이스 메이커 노릇하면서 우리 몸값 올려준 고마운 애들이고. 유일조선이라고 쥐똥만 한 회사가 있는데, 우리 앞길을 계속 막아섰다니까.”
“유일조선? 요새 잘 나간다는 게네?”
안 부장은 이 기자가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이자, 아주 반가웠다. 잘만 풀어내면 맛있는 기삿거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머스트랑 사이좋은 거 알지?”
“우진조선이랑 머스트 관계야 이 바닥 사람들은 다 알지.”
“머스트가 연초에 40억 달러짜리 대형 계약을 준비했었다고. 당연히 우리한테 올 물량이었지. 슬롯 다 비워놓고 계약만 기다렸다고.”
“아, 맞아. 작년에 머스트가 대규모 발주할 거란 소문 무성했었는데, 그 뒤로 얘기가 없더라고. 그거 어떻게 된 거야?”
“그걸 유일조선이 죄다 먹어버렸다니까.”
“뭐? 진짜야? 그거 오피셜이야?”
“머스트에서 공식 발표를 안 했으니까, 오피셜이라고 하긴 뭐하고. 우리랑 유일조선이 최종협상자로 올라갔단 말이야. 근데 우리가 떨어졌어. 그럼 누가 먹었겠어?”
“그래서 유일조선이 40억 달러를 다 먹었다고? 그거 말이 돼?”
“내 말이.”
“저가수주 아니야? 그거 아닌 이상 유일조선 따위가 그럴 수가 없잖아? 시발. 그거 국부유출이네.”
이 기자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안 부장은 이 정도로 흥분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분위기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니 크게 개의치 않았다.
“유일이 우리랑 경쟁할 급이 아니잖아? 그런데도 머스트, 그 많은 물량을 독식했어. 답은 딱 하나 아니야?”
“와. 그거 우진조선이 먹었으면 현진그룹이 인수 포기하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게 2011년까지 매달 2척씩 인도하는 스케줄이라 요즘 같은 시국엔 딱이지. 근데 그것뿐만이 아니야.”
“뭐 또 있어? 아니, 나도 유일조선 지켜보고 있는데, 이 새끼들 하는 짓이 이상하더라고.”
안 부장은 북만 쳤는데, 장구와 꽹과리까지 치는 이 기자가 기특해 보였다. 전생에 유일조선과 원수를 졌나 싶을 정도로 달려드니 말이다.
불씨만 건넸는데 활활 타오르는 꼴을 보고 있자니, 오만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머스트 그 물량만 받아냈어도 내년 정기 인사 때 상무보 승진이 확실했을 것이다.
대기업 임원. 꿈조차 꾸기 어려울 정도 얼마나 높은 자리인가! 2년만 버텨도 노후가 보장된다는 그 자리. 내년에도 부장 명함 돌려야 하는 건 다 유일조선 때문이다.
안 부장은 그 이상한 사고구조에서 나온 결론으로 이 기자를 더욱 부추겼다.
“유일조선이 왜?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
“거기 유 실장이라고 오너 아들 하나가 낙하산으로 들어갔거든. 서른도 안 된 피라미가 뭘 알겠어? 근데 엄청 설치고 다니더라니까. 작년에 야드 확장하는 거, 그것도 그놈이 저지른 일이잖아.”
“유 실장? 그놈 잘 알지. 솔직히 나도 이 바닥에서 한 싸가지 하는 걸로 유명한데, 그놈은 나보다 더하더라. 나야 인정이라도 받잖아? 그놈도 뭣도 없으면서 엄청 나대더라고.”
“아니, 야드 확장하는데, 그걸 대흥중공업 투자받아서 한다는 게 이해가 돼? 그거 백퍼 야로가 있는 거야. 젊은 놈의 새끼가 벌써부터 그러면 나중에 어찌 되겠어?”
이미 두 사람 사이에서 유연성은 천하의 개쓰레기가 돼 있었다. 안 부장은 처음 말을 꺼낼 때만 해도 그 정도까지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이 기자의 악담에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암튼. 그거야 뭐 영업하다 보면 숱하게 있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쳐. 근데 이번에 완전 제대로 뒤통수 맞았잖아.”
“왜왜? 또 무슨 일인데?”
“말을 많이 했더니 목마르다야. 커피 한 잔만 더 받아와 봐.”
“아 나, 진짜. 형 나 내선일보 기자야.”
“아주 벼슬 나셨어. 잔말 말고 리필 좀 해 와. 이 나이에 내가 가리?”
이 기자가 구시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구두쇠가 식당에서 만나면 지나가는 사람이 계산하고, 두 싸가지가 커피숍에서 만나면 덜 싸가지가 일어나게 되는 법이다.
추위가 엄습한 겨울이지만,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안 부장의 불타는 속을 식혀줬다.
“아, 좋다. 아무리 추워도 역시 커피는 아이스지.”
“그래서 유 실장 그놈이 무슨 뒤통수를 쳤는데?”
“유 실장 그놈 짓인 것까지는 모르겠는데, 유일조선 짓은 분명해.”
“아니,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이 기자야. 우리가 2020년 플랜 세운 거 알고 있지?”
“종합 엔지니어링그룹으로 탈바꿈하고 매출 40조 찍고, 그거?”
“어, 맞아. 그 플랜에 맞춰서 차세대 선종 개발 준비하고 있었다고. 가스로 움직이는 대형선 말이야.”
이 기자는 어느새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부지런히 적고 있었다. 안 부장은 모른 척해 줬다. 취재가 뭐 별건가.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 하면서 슬쩍슬쩍 정보 건네주고 그러는 거지.
“가스추진엔진 말하는 거잖아? 그거 대흥이랑 순양도 개발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우리가 제일 먼저 준비했다고. 특허출원도 가장 먼저 냈고. 근데 유일조선이 새치기를 했다니까.”
“새치기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기존에 LNG추진선이 있긴 해. 근데 LNG선 말고는 적용하기가 힘들어. 그래서 우리가 일반 상선도 LNG추진이 가능하게 만들 생각이었다고.”
“그러니까 컨테이너선이 벙커씨유 말고 가스로 움직인다?”
“그렇지. 그렇다면 핵심이 엔진이잖아? 4행정이냐 2행정이냐 차인데, 대형선이라면 당연히 2행정이지. 그러니까 디젤이냐 가솔린이냐 그 차이라고 보면 돼.”
“뭐, 그래.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쳐.”
“무식한 놈. 아무튼, 우리가 개발할 것이 2행정 대형 저속엔진과 찰떡궁합이야. 당연히 맨디젤이랑 같이 움직여야 하잖아? 우리 나름대로 준비해서 맨디젤한테 제안을 했는데, 단칼에 거절당한 거야. 시바.”
“왜? ……. 설마 유일이 맨디젤이랑 먼저 하고 있었던 거야?”
“알아보니까 기자재업체들 모아서 지들끼리 하고 있더라고. 맨디젤이랑도 진즉 같이하고 있었고. 근데 결정적인 것이 특허야.”
“특허는 왜? 형네가 제일 먼저 출원 냈다면서.”
안 부장은 빨대에 입을 댔다. 살짝 흥분했더니 몸에서 열이 났기 때문이다. 유일조선 그놈들은 아무래도 수상했다. 회사에 스파이를 심어뒀는지, 간발의 차로 계속 먹거리를 뺏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시바. 출원만 먼저 내면 뭐해. 떨어졌는데.”
“특허가 안 나왔다고? 천하의 우진조선이?”
“아, 시바. 그렇다니까. 독창성이 인정되지 않는대. 유일조선이 기자재 업체랑 같이 낸 건 특허 나왔고.”
“그럼 유일조선이 가스추진엔진 쪽으로 특허를 받았다는 거네?”
“내년엔 국제 특허까지 마무리한다고 하더라고. 이제 LNG추진선 만들 때마다 유일조선한테 로열티 줘야할 지도 모른다니까. 아니, 매출 1조 겨우 넘는 회사 주제에, 그게 말이 돼?”
말을 하면서 좀 그랬다. 매출 규모와 기술개발이 무슨 관련이 있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 부장은 그냥 밀어 붙었다. 사사건건 앞길을 막아서는 유일조선이 그만큼 괘씸했다.
“그것도 뭔가 야로가 있는 거네. 아니, 게네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그걸 개발했겠어? 이거 좀 파봐야겠는데?”
“그렇지? 뭔가 좀 수상하지?”
“당연히 수상하지. 칠산그룹 봐. 너무 심하게 잘 나간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까 전 정권에서 엄청 밀어줘서 그런 거라잖아. 갑자기 확 뜨는 회사들은 다 야로가 있다니까.”
“뭐 거기까지는 모르겠고. 암튼 유일조선은 좀 그래. 키코도 가입 안 했어. 그거 이상하지 않냐? 우리 회사도 키코 때문에 손해 좀 봤는데, 걔네는 아예 가입 자체를 안 했다고 하더라고.”
“와. 장난 아니네. 금융 쪽에 뒷배 좀 있는 거 아니야? 아니면 신내림이라도 받았든가.”
“신내림 받았나 보지 뭐. 하하.”
“하하.”
안 부장은 오늘 커피값은 벌었다고 생각했다. 이 기자 저놈이 부지런히 적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조만간 사달이 나겠구나 싶었다. 떡잎이 심상치 않을 때는 빨리 밟아줘야 하는 법이다.
대한민국이란 울타리 안에 있는 동종업계니까 동료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이 바닥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약육강식, 적자생존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