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85)
85화 – 우리도 가만있지 않을 생각입니다 (3)
작년 9월 리먼브러더스가 파산 신청을 한 이후로 거짓말같이 선박 발주가 멈춰버렸다.
작년까지는 그런가 보다 했다. 워낙 충격적인 일이었으니까, 정신 차릴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겠지, 하는 생각이었지.
그런데 해가 바뀌고도 선주들은 정신을 못 차렸다. 정신 못 차린 게 선주뿐이겠느냐마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작년 1월에 전 세계 통틀어 발주된 선박이 150척이 넘었다. 1월 특수도 있긴 했지만, 금융위기 전에는 매달 그 정도로 발주가 쏟아졌다.
올 1월에 나온 발주는? 놀라지 마라. 달랑 9척이다. 그것도 금융위기 이후 한 척도 없다가 해 바뀌고 겨우 나온 것이다.
1년에 70~80척을 지어서 내보내야 하는 빅3들은 애가 타도 단단히 탔다. 반년 가까이 한 척도 수주를 못 했으니 말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도 빅3 못지않게 수주를 해야 한다고! 기껏 돈 들여서 조선소 확장했는데, 고추 말리고 있을 수 없잖아! 이러다 통영 명물이 태양초 고추가 되게 생겼다고!
그 상황에서 우진조선이 치고 나왔다. 저가수주라는 그 유혹에 빠져버리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다져 버렸으니, 다른 조선사들이 볼멘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1월에 나온 9척 중 5척은 중국이 자가 발주한 물량이었으니, 시장에 나온 것은 고작 4척이었다. 그걸 우진조선이 다 쓸어가 버렸다고! 그것도 가격 후려쳐서!
대흥중공업 최진석 부사장을 만나러 온 것은 뭐 별 뜻 없다. 그냥 우진조선을 죽여보자는 순수하고 아련한 마음? 겸사겸사 수지맞는 장사도 해 보고.
최 부사장과 적당히 인사도 나눴고, 웃음도 나눴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좌판을 열어보자.
기쁨 게이지가 활짝 열려버린 최 부사장은 무슨 말을 해도 끄덕끄덕해줄 것 같은 표정이다. 자, 이 약 한 번 잡숴 봐.
“그나저나 요새 수주시장이 영 말이 아닙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리 금융위기니 뭐니 해도 어느 정도여야죠. 이 바닥 생활 30년이 다 돼 가는데, 이런 가뭄은 처음입니다.”
“대흥중공업이야 워낙 명성이 높은 곳이라 걱정이 없으시겠지만, 우리 같은 곳은 견적서 한 번 내기 힘들 지경이네요. 누가 자꾸 방해질을 심하게 해서…….”
“우진조선 얘기입니까?”
“하, 부사장님도 알고 계십니까?”
“알다마다요.”
악어 새끼가 흘린 눈물 한 방울에 저렇게 화들짝 놀라며 반응하는 것 좀 봐.
나 같았으면 좀 전엔 문제없다고 해놓고 죽는소리하는 건 뭐냐고 트집 잡았겠지만, 최 부사장은 그저 대화에 흠뻑 빠진 표정이다. 역시 약을 잘 팔면 개똥도 약이라고 환장한다니까.
“우진조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요즘 좀 너무 하는 것 같습니다.”
“허허. 거기가 뭐…….”
“수주가 급한 건 알겠지만, 그렇게 가격 떨궈버리면 우리 같은 곳은 뭐 먹고 살라는 것인지 원. 매달 월급 지급일만 되면 어디 숨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유일조선뿐이 아니에요. 우리도 지금 여러 번 물 먹었어요.”
“아니, 천하의 대흥중공업이 우진조선 따위한테 밀린단 말입니까!”
“허허. 컨테이너선이고 탱커고 선종 안 가리고 후려치는데 당해낼 재간이 없더군요. 안 그래도 어제 대책회의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아하. 그 정도였군요. 저도 그것과 관련해서 부사장님과 얘기를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찾아온 건데, 그럼 제가 잘 찾아온 것이 맞지요?”
“일인불과이인지라고 했지요. 우리의 문제의식에 함께 한다면 헤쳐 나가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허허.”
저가수주로 시장 질서를 흐리는 우진조선에 대한 성토장은 잘 다져졌다. 이제 구라만 잘 풀면 맹물도 만병통치약으로 둔갑해 팔아치울 수 있을 것 같다.
발주시장이 냉랭해질 때마다 나오는 논란이 저가수주이다. 기준이 없으니 자신이 수주 못 했으면 저가수주에 당했다는 식으로 비난하기 일쑤다. 수주했다면? 뛰어난 가격경쟁력이 요인이었다고 자랑했겠지.
애매한 기준이 논란을 키운 경향도 있지만, 우진조선이 요근래 하는 짓은 마음 놓고 욕을 해도 된다. 야금야금도 아니고 그 가격을 한 방에? 욕먹어, 두 번 먹어.
최 부사장이 입을 열기에 앞서 자세를 고쳐 잡는 것이 우진조선 박멸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 대흥중공업 같은 공룡이 어흥 한번 해 줘야 한다고!
“솔직히 저가수주, 저가수주하지만, 그게 기준이랄 게 있습니까? VLCC를 봅시다. 금융위기 이전에는 1억7000만 불까지 올라갔지만, 우진조선이 그걸 1억2000만 불에 수주했다고 해서 저가수주라고 할 수 있습니까?”
“으음. 좀 애매하긴 하죠. 뭐, 야드마다 다르겠지만 손익분기점이 1억 달러 내외로 치니까 마진이 크게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저가수주라고 퉁치기는 어렵긴 합니다. 그래도-”
“맞습니다. 조선사마다 들어가는 품이 다른데 일률적으로 얼마 밑은 저가수주라고 할 수 없지요. 하다못해 금융조달 비용도 크게 차이 납니다. 뭐 자랑처럼 들리겠지만, 우리 대흥은 거의 무이자 수준으로 건조자금을 융통할 수 있지요. 그 차이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 말씀인즉, 대흥중공업도 선가 경쟁에 뛰어들겠다는 말씀입니까?”
“우진이 저렇게 나오는데 우리라고 별수 있습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백약이 다 무효예요. 그저 1원이라도 싸게 들어가는 것이 장땡이라 이 말이지요.”
끌끌.
세계 1위 대흥중공업까지 단가 경쟁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우진조선이 쏘아 올린 작은 공에 이 바닥에서 밥 벌어먹는 사람들 다 죽게 생겼네.
그래서 내가 여기 왔다고. 내가 바라는 난장판 상황이 됐으니, 난 이제 약이나 팔면 되는 거야.
그래, 금융위기 전까지는 뱃값이 비정상적으로 높긴 했어. 덕분에 꿀 잘 빨았고.
이제는 뱃값을 좀 낮추긴 해야 해.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하지 뭐. 그런데 우진조선처럼 크리쿨산 2리터짜리 먹고 3시간 지난 후처럼 마구 떨굴 필요는 없다 이거지.
왜냐? 에코십이란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까!
“부사장님. 그래서 말인데요.”
“네, 말씀하시죠.”
“배 한 척 내보내면 최소한 20년은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럼 유지비도 엄청 많이 들죠.”
“그렇죠. 그래서 요즘 기름값 때문에 운항 못 하고 멈춰 세운 배들도 꽤 많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달리해 보면, 선주들에게는 뱃값도 중요하지만, 유지비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인건비 줄이겠다고 동남아 선원들 채용하는 것도 그렇고.”
“필리핀이 달리 선원 1위 나라겠습니까? 허허.”
“인건비 못지않은 것이 연비가 아닐까 싶습니다.”
“연비 중요하죠. 우리가 연료소모량 1g이라도 줄여보려고 안간힘 쓰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허허. 근데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 얘기를 꺼낸 겁니까?”
“연비가 크게 개선된 선박이 있다면, 뱃값을 조금 덜 낮추더라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만.”
“연비가 크게 개선이요?”
“네, 기존 선박 대비 30% 개선이라면 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놀래라, 놀래라. 당신은 크게 놀래야 한다.
역시나.
“30%요? 허허. 그게 가능합니까?”
“우리가 맨디젤이랑 새로운 타입의 엔진 개발한 건 알고 계시죠?”
“아아, 그렇군요, 그래요. 허허. 그거 처음에 말 많았죠.”
우리와 맨디젤의 사랑의 결실은 대흥중공업 엔진사업부와 WBT엔진에서 제작에 들어갔다. 시제품 제작부터 말이 많았다.
최고 속도가 그것 밖에 안 나오는데 누가 사겠느냐부터 시작해서, 벌크선 엔진을 컨테이너선용으로 만든다는 게 말이 되느냐 등등. 그렇게 말들이 많더니만…….
시대가 바뀌고 나니 어떻게 그런 아이디어를 생각했느냐부터 시작해서 중얼중얼. 하여간 줏대 없는 것들.
“부사장님. 새 엔진과 새 기술을 적용한 선박이 연말에 인도됩니다. 그럼 운항 데이터가 나오고, 브로커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 것입니다.”
“연비 30% 절감에 자신이 있다는 말씀이군요?”
“당연히 자신 있죠. 아마 그 이상으로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30%는 최소 기준입니다.”
“흐음. 그 정도 연비 개선이라면 선주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겠지요. 상황이 이렇다고 해도 배가 필요한 선주는 있는 법이니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연비가 좋은 선박을 선택하겠죠.”
그러니까 원하는 걸 얘기해 봐. 계속 주례사 같은 소리만 하고 있지 말고. 내가 계속 좌판 펼쳐놓고 약 팔고 있는데 딴청만 피우고 있네.
“허허. 그런 설계가 있으니 부러울 것이 없겠습니다.”
“아이고, 과찬이십니다. 뭐 입 발린 얘기 같지만, 이게 우리 유일조선만 잘 먹고 잘살자고 준비한 것 아닙니다. 이 대한민국의 조선업을 위해서! 이 거친 풍랑을 이겨내자는 숭고한 마음으로! 뭐 그렇죠. 하하.”
“그 말인즉, 설계를 공개하겠다는 말씀입니까?”
“설계 공개요? 뭐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공유해야지요. 물론, 들어간 품삯 정도는 필요하겠지만요…….”
“허허. 이거 세일즈가 아주 기가 막히군요. 허허허. 그래서 얼마를 원하는 겁니까? 속 시원하게 말해 보시지요.”
“이게 대화가 어쩌다 이렇게 흘러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진조선 저가수주를 막아보자고 시작한 것이었는데요. 하하. 5%!”
“뭐 이것도 저가수주를 막는 좋은 방안이 아니겠습니까? 허허. 3%.”
“제가 다른 곳이면 모르겠는데, 대흥중공업은 형제와도 같아서 제안 드리는 겁니다. 하하. 5%!”
“허허. 우리 대흥과 유일조선은 형제나 마찬가지죠. 그래도 3%!”
저 노회한 여우 같으니. 뱃값의 10%는 부를까 하다가 지인 할인으로 5%로 낮춰 줬구만, 그걸 또 낮추겠다고 달려드는 것 좀 봐라. 돈도 많은 회사가 왜 이래?
이제는 이름도 가물가물한 그, 이 부장 놈 쫓아내면서 내가 외쳤던 말이 생각났다. 영업은 마! 자신감이지!
“아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전 또 부지런히 통영까지 내려가야 해서 이만 일어나야겠습니다. 주차권 도장 좀 찍어주시죠. 여기 주차비가 어마무시하더라구요.”
“아니,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일어나십니까? 아직 차가 식지도 않았습니다. 허허.”
“하하. 그럼 차 식을 때까지 더 얘기해 보시겠습니까?”
“허허. 본디 돈이 왔다 갔다 하는 문제는 협상으로 풀어가는 법이죠. 따뜻한 차 한 잔 더 가져다드릴까요?”
“좋지요.”
“김 비서. 여기 차 좀 부탁해. 그리고 오늘 일정은 전부 캔슬시켜 줘.”
이뇨작용을 촉진한다는 녹차를 연거푸 4잔이나 마셨다.
유일조선의 향후 10년을 책임질 먹거리인 에코십 설계! 그걸 대흥중공업에 전수하고 얼마를 뜯어내느냐에 대한 심도 있는 철학적인 대화들이 오가는 그런 하루였다.
“좋습니다, 좋아요. 제가 졌습니다. 우리 부사장님을 제가 무슨 수로 이겨보겠습니까? 하하.”
“지긴요. 상생이라고 해 주시죠. 허허.”
“맥시멈 4%, 미니멈 3.5%로 잡고, 나머지 세세한 것들은 실무진끼리 알아서 지지고 볶으라고 하시죠. 차를 너무 많이 마셨더니 오줌보가 꽉 차서 더 이상 못 마시겠습니다.”
대흥중공업에 우리 에코십 설계를 뱃값의 4%를 받는 거로 넘겼다.
너무 싸게 넘긴 것 아니냐고? 네버.
마음 같아서야 10%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실제로 그럴 일은 절대 없다. 누가 미쳤다고 뱃값의 10%나 로열티로 토해내겠냐고. 잘 받아야 1~2% 정도 생각했는데, 흐미. 4%라.
대흥중공업은 초대형선 위주로 건조하기 때문에 배 1척이 최소 1000억이다. 그런 비싼 배를 1년에 80척 가까이 만들어 내보낸다. 에코십 설계 개념만 알려주는 조건으로 앉은 자리에서 3000억씩 처먹는 것이다.
표정 관리하자, 표정관리. 많이 아쉬운 척, 덤덤한 척.
“뭐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고, 세세한 것도 따져봐야겠죠. 그래도 서로 기분 나쁠 일 없이, 서로 이득 봤다고 생각하도록 결론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허허. 물론이죠. 우리가 아무리 형제처럼 지낸다고 해도 따질 건 따져야죠. 그건 그거고. 우리가 또 이렇게 손을 맞잡게 됐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부사장님 덕분에 대흥중공업과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된 것 같습니다. 서로 힘을 합쳐서 우진조선의 콧대를 확 꺾어버리죠!”
“허허. 욕심부려봐야 부질없고 허망하다는 걸 깨우치게 해 줘야지요. 우리 대흥중공업을 너무 우습게 봤어요. 이제 유일조선까지 한 팀이 됐으니, 그 매서운 맛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서로 환하게 웃으며 악수하는데, 아따 마, 저 사람 표정 좀 봐라. 우리 편이었으니 망정이지, 적이었으면 살짝 지렸겠네.
역시 옛말 틀린 것 하나 없다. 적이 될 것 같으면 내 편으로 만들고,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려라. 우진조선은 만만해서 가질 필요 없으니 부숴버리고, 대흥중공업은 덩치도 크고 무서우니까 내 편으로 잘 사육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