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420)
00420 진격의 불곰 =========================================================================
쾅!
프랑스 대통령, 볼랑드는 속보를 보다 말고 탁자를 거칠게 내리쳤다. 화면에서는 한창 러시아 키틴 대통령의 연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감히 누가 CERC를 사찰한다는 거야!”
CERC는 유럽의 공동 자존심이다. 유럽의 자본, 정치, 기술이 집약된 선진화된 과학도시다. 당연히 유럽의 강대국인 프랑스의 지분도 많이 차지하고 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밤 바이러스가 인재라고? 그럼 CERC가 백신을 팔아먹으려고 고의로 밤 바이러스를 만들어서 유포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각하, 키틴 대통령의 성격을 고려하면 벌써 움직임에 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대비를 하셔야 합니다.”
“제까짓 게 움직이면 뭘 어쩐다는 건가? 감히 유럽과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기갑 군단을 움직이면 먼저 자기들 나라부터 괴수들이 난리 칠 걸?”
현대 사회는 소규모 국지전도 괴수 눈치를 봐야 하는 판이다. 조그만 소란이 일어나도 놀란 괴수들이 난리를 친다. 그게 바로 전쟁이 사실상 사라진 이유다.
그러나 전쟁이 사라지고 군비 감축이 이뤄지긴 했어도 군대 자체를 포기한 나라는 없다. 군대는 꼭 다른 나라와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괴수로부터 국민을 지키기 위한 자위 수단이기 때문이다. 괴수 잡는데 별 도움은 안 되지만 공격대가 출동할 때까지 시간을 끄는 역할 정도는 한다.
“하지만 각하, 몇 년 전 러시아가 중국을 침공했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육한 레드 몹을 이용하면 다른 괴수들이 난리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러시아에 사육한 레드 몹이 어딨…… 허, 설마?”
“이미 제니스 공격대와 협의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러시아가 혼자서 저리 강경하게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미국도 CERC를 통해 유럽에 한 발쯤 걸치고 있는 형국이다. 러시아가 아무리 세계 패권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강대국이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 혼자 반발하고 나서는 것은 부담스럽다.
하지만 한국, 아니 유지웅과 이미 협의가 되어 있다면? 추정 자산만 1경이 넘어가는 세계 제일의 부자 가문이자, 안전지대의 독점 설치자이며, 유일하게 국가 간 전쟁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인물 아닌가.
그런 인물이 뒤에서 받쳐준다면 러시아로서는 해볼 만하다. 적어도 미국은 함부로 군사력을 투입할 수 없다. 유지웅의 눈치도 있는데다가, 대규모 군사를 일으켰다가는 괴수들의 난리에 뭐 해보기도 전에 피해만 입을 테니까.
“그 부분을 빨리 알아보게. 서둘러!”
“알겠습니다!”
* * *
한편 독일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발 등에 불, 아니 폭탄이 떨어진 상태였다.
유럽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인 독일은 당연히 CERC에도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독일 수상도 볼랑드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뒤에 유지웅이 있을 거라 예상했다.
문제는 ‘유지웅이 왜?’라는 것이다.
“아무리 한국이 안전지대로 도배가 되어 있다 해도 밤 바이러스로부터 100% 안전한 것은 아닐 텐데.”
“그렇습니다. 공기 감염은 몰라도 체액 감염은 막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제니스 공격대장도 그걸 잘 알 겁니다.”
“근데 왜 CERC를 건드리는 건가?”
독일 정부의 판단도 처음 한국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설령 밤 바이러스가 CERC의 자작극이라 해도 이미 판세는 너무 기울었다. 그러나 안전지대를 틀어쥐고 있는 한국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물밑 압박으로 CERC의 백신 놀음에도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이렇게 러시아를 앞세워서 대놓고 싸우자고 나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럼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실리가 적어진다.
“수상 각하. 밤 바이러스가 CERC의 자작극이라는 주장은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정부부서의 분석으로는 여러 모로 이상한 점이 많다고 합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우리 정부의 방침은 변하지 않네.”
수상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외교부 장관은 직감적으로 수상이 뭔가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우리 독일은 CERC에 유럽 국가 중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 나라일세. 어떤 경우라도 CERC를 보호해야 하지. 그게 우리 독일의 이익이 되니까.”
“한국과 척을 지면서까지 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일입니까?”
“한국이 현대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인 건 사실이야. 하지만 양보할 수 없는 문제도 있는 법일세.”
“…….”
“게다가 아직 한국이 나선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일단은 러시아가 혼자서 CERC를 사찰하겠다고 난리를 치는 단계야. 아직은 한국에 대해서 얼마든지 발을 뺄 수 있어.”
올해 갓 취임한 수상은 정책 ‘실적’에 목말라 있었다. 그래서 무리를 하려는 것일까.
그렇다 해도 뭔가 이상하다. 딱 짚어 말할 수 없지만, 장관은 저것이 수상 본연의 의지는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각하. 그것은 수상 각하의 뜻입니까? 아니면 수상 각하를 당선시킨 자들의 뜻입니까?”
“…….”
대답 없이 차분히 바라보는 눈길에서 장관은 자신의 예감이 맞았음을 느꼈다.
* * *
“러시아가? 사찰을?”
러시아의 성명 발표는 백악관 역시 뒤집어 놓았다. 휴식을 즐기고 있던 비시는 비상이 걸린 집무실로 돌아와야 했다. 참모진이 둘러앉은 가운데 비시는 요약한 보고를 받으며 대책 수립에 골몰했다.
“러시아는 밤 바이러스가 백신 장사를 위한 CERC의 자작극이 아니냐는 의심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런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요 언론에서 비중 있게 다룬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러시아가 이번에 그걸 건드린 겁니다.”
“러시아도 밤 바이러스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
“예. 5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사찰을 한다고? 다른 곳도 아니고 CERC를?”
CERC. 유럽 합동 결정체연구기구.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그리스 등 13개국이 조인해 성립된 이 연구기구는 단순한 과학시설이 아니다. 유럽의 자존심이며, 국가는 아니지만 유럽 안의 또 다른 강소국이나 마찬가지다.
로스차일드, 록펠러 등 수많은 굴지의 부호 가문들도 직접, 혹은 소속 국가를 통해 간접적으로 CERC에 자본을 댔으며, 여러 방향에서 힘을 아끼지 않고 후원을 하고 있다. 세종시에 있는 제니스 연구단지도 CERC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미국 또한 간접적으로 CERC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나라다. CERC는 단순한 유럽의 자존심이 아니라, 서양 모든 국가의 자존심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곳을 사찰한다고? 그 반발을 과연 러시아가 감당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한국이 뒤에 있는 모양입니다.”
“한국이 관여했다면, 중동도 거기에 동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UAE의 안슐 왕자는 제니스 공격대장과 절친으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자칫 중동, 아시아 연합체와 유럽의 냉전으로까지 번질 수 있는 중대한 일입니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CERC는 결코 사찰에 응하지 않을 겁니다.”
순순히 사찰에 응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러시아도, 한국도 알고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성명 발표는 명분 쌓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을 위해 명분을 쌓고 있는 것일까?
비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국도 백신이 필요할 텐데? 이렇게 과격하게 나오는 것보다 뒤에서 조용히 압박하면 얼마든지 백신을 얻어낼 수 있지 않나? CERC도 한국을 상대로 크게 돈 장사를 할 만큼 생각 없는 곳은 아닌데.”
EIS 국장, 루딘이 말했다.
“제니스 공격대장은 감정적인 인물입니다. 자기가 싫은 행동은 결코 하지 않으려 합니다. 아마 밤 바이러스가 CERC의 자작극이라 생각하고 거기에 분노한 것 같습니다.”
“그럼 러시아는?”
“러시아는 비싼 돈 주고 백신을 수입하는 것보다 한국과 손을 잡고 압박하는 게 더 자국에 유리합니다. 이렇게 과격하게 나올 동기가 충분합니다.”
이 회의에서 밤 바이러스가 CERC의 자작극인지 아닌지는 주요 논점이 아니다. 설령 CERC의 자작극이라 해도, 백신 판매로 인한 이익은 결국 미국에도 환원된다. 백신 장사로 고통을 받는 것은 아프리카, 아시아 등 가난한 제3세계 국가들이지 미국이나 유럽은 아닌 것이다.
다양한 분석과 의견이 쏟아졌다. 회의가 길어질수록 비시의 이마에도 땀이 맺혔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 회의에서 미국의 주요 방침은 정해야 했다.
“그럼 우리 미합중국은 누구 손을 들어주면 되겠나?”
“한국은 주요 전략 우방국입니다. CIA의 테러로 인한 관계 실추가 이제 막 회복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여기서 또 다시 그릇된 판단을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한국과 틀어지지 않는다는 기본 방침을 세우고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국 한국에 양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아직 한국은 침묵하고 있으니 지켜보는 게 최선일 듯합니다. 한국, 아니 제니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지기를 기다리는 게 순서입니다.”
차분히 듣고 난 후 비시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제니스 공격대장이 원하는 게 무엇 같은가?”
“…….”
가장 어렵고, 답할 수 없는 논제였다. 유지웅은 쉬운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CERC를 사찰하고 드러나지 않은 진실을 끄집어낸다 해도, 결국 득을 보는 것은 밤 바이러스 때문에 고통 받는 약소국들뿐이다.
전혀 상관없는 타국을 위해 총대를 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대체 뭘까?
그때였다.
“각하. 급보입니다.”
“뭔가?”
“브라우니가 미국 땅을 떠났습니다. 한국으로 급히 되돌아갔다고 합니다.”
수확기까지 메뚜기형 괴수인 카직스 퇴치를 위해 잠시 미국에 머물렀던 브라우니는 신방을 차린 것 때문에 아직 한국에 돌아가지 않은 상태였다. 알이 부화하고 새끼들이 어느 정도 크면 돌아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시기에 브라우니가 돌아갔다? 이것이 의미하는 사실은 하나뿐이다. 참모진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셨다.
“설마…… 진심으로 해보자는 건가?”
* * *
―금장 나부랭이가 자부심은 엄청 쩌네.
―일단 다이아몬드나 찍고 자부심 부리던가 하지? 겁나게 못하는구만.
―금장도 대리 기사 맡겨서 찍은 거지?
또 졌다. 대학 후배인 장권재와 팀플레이를 하던 유지웅은 패배 화면을 바라보다가 손을 놓았다.
지는 것은 화가 안 난다. 자기 실력이 이것밖에 안 되니까. 하지만 욕을 먹는 것은 화가 난다.
“대리 기사 좋아하네. 이것들, 내 실력으로 금장 찍었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게요. 좀 실수할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거지, 애들은 무슨 게임에 목숨 걸었나 봐요.”
옆에서 장권재가 비위를 맞추려고 아부를 떨었다. 유지웅은 팔을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형, 근데 정말 대리 안 쓰시고 금장 찍으신 거예요?”
대리란 고수가 게임 계정을 대신 플레이해서 상위 계급으로 끌어올려주는 것을 말한다. 말 그대로 랭크 게임을 대리한다. 대리 기사 중에는 무명 프로게이머, 혹은 아쉽게 프로게이머가 되지 못한 고수들도 있다고 한다.
“대리 안 썼다니까? 너도 내 실력 못 믿어?”
“아니, 형 카톡에 ‘대리기사 구했다.’라고 돼있어서 혹시 계정 대리 맡기셨나 했죠.”
“아, 그거? 딴 이야기야. 롤 이야기 아니야.”
“그래요? 전 대리기사 구하실 거면 제가 해드리려고 했거든요. 이래봬도 제가 다이아몬드거든요.”
“어차피 네가 대리해줄 수 있는 게임도 아니야.”
“왜요? 저 요즘 인기 있는 웬만한 게임은 다 잘하는데요.”
장권재는 영리하다. 게임이 유지웅과 친해지기 쉬운 방법이라는 걸 일찌감치 깨닫고 그 길에 매진하는 중이다. 아, 그렇다고 학업을 소홀히 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 제일의 부자의 눈에 들기 위해 열심히 사교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랄까.
“그래? 네가 러시아보다 잘할 수 있어?”
“……러시아요?”
뜬금없이 러시아가 튀어나오자 장권재는 의아했다. CERC에 얽힌 국제 사정을 모르는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뭐, 그런 게 있어. 혹시 주변에 유럽에 주식 같은 거 투자한 사람들 있으면 다 빼라고 해.”
“알았어요. 고마워요, 형.”
자산 단위가 경을 넘었다고 추정되는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흘린 한 마디는 허투루 넘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장권재는 혹시라도 잊어먹을세라 ‘러시아, 대리기사, 유럽 투자 금지.’라고 급히 스마트폰에 기록했다.
============================ 작품 후기 ============================
러시아를 대리기사로 쓰는 클라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