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569)
00569 나는 핵물리학자다 =========================================================================
“퍼플 결정체가 사라지면서 두 분의 신체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세종시 연구단지에는 유지웅 커플의 신체 변화만 전문적으로 측정하고 연구하는 전담팀이 있다. 연구 책임자는 윤성태 박사라는 인물로, 이 분야에서는 국내 권위자였다. 그는 일찍이 유지웅이 앱서버로 각성하던 시절, 처음으로 그 메커니즘을 규명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래저래 인연이 깊다.
“위험에 처하면 자동적으로 보호막이 발동되는 것도 그 중 일부인 것 같습니다.”
“그럼 효주는요? 효주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죠?”
“글쎄요. 아직 정확한 조건을 알 수가 없어서 저도 뭐라고 확답은 드리기가 어렵군요. 그렇다고 그 조건을 알아내려고 일부러 위험한 실험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작년 겨울, 지구 전체를 뒤덮은 프레온 괴수층을 박멸하기 위해 유지웅은 퍼플 결정체를 사용했다. 퍼플 결정체를 흡수해서 그 힘으로 전 지구적인 안전지대를 설치한 것이다.
그렇게 퍼플 결정체는 사라졌지만 한 가지 변화는 남았다. 바로 유지웅 커플의 결정도가 사라진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결정도는 남아 있지만 측정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최윤이 개발한 신형 측정 장비에도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윤성태 박사는 이 변화를 주의 깊게 연구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뾰족한 성과는 없었다. 단서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변화는 그뿐이 아니었다. 유지웅의 경우에는 위험에 처하면 자동적으로 보호막이 발동되는, 일종의 패시브 방어 능력을 얻게 되었다. 마치 반사신경처럼 보호막이 저절로 펼쳐지는 것이다.
정효주에게도 어떤 변화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그녀가 얻은 게 무엇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아마도 숙성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요.”
윤성태 박사의 연구팀에 자문격으로 간간이 참가하는 레지나가 그렇게 말했다. 유지웅이 반문했다.
“숙성이요?”
“숙성 반응, 숙성 현상이라고도 하죠. 결정도가 한계에 달한 결정체가 내부 에너지 구조를 변화시키는 현상을 말해요. 나미가 바로 그런 단계였어요.”
“그래서 나미 괴수, 아니 나미 연구원은 어떤 결정도 반응 검사에도 걸리지 않았지요. 레지나 연구원 말대로 아마 숙성 현상 때문일 겁니다.”
“할아버지가 말년에 연구하시던 테마가 바로 결정체의 숙성 반응이었어요. 이론상 결정체는 135,000에 달하면 더 이상 커지지 못하고, 성질에도 변화가 없죠. 하지만 에너지가 커지는 게 아니라, 그 밀도와 내부 구조에 변화가 일어난다면 결정체의 성질 및 색상이 변할 거라고 보셨어요. 그게 바로 숙성 반응이죠.”
“그럼 우리 몸에 나뉘어 있는 결정체가 숙성 과정에 접어들었다고 봐도 될까요?”
정효주가 묻자 레지나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자신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글쎄요. 현재로서는 그렇게 추정하지만…… 자세한 건 검사기기가 더 개량이 되어야 알 수 있을 듯해요. 어쨌거나 아직까지는 추정 단계에 불과하니까요.”
“가렌 박사님이 연구하시는 핵물리학의 다궤도 충돌 반응도 결정체의 숙성 반응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던 거 같아요. 하지만 아직 두 이론이 서로 융합되지 않은 이상, 섣불리 적용하는 것은 무리예요. 무엇보다 가렌 박사님도 아직 그 부분은 제대로 된 토양이 없어서 지금부터 다듬어나가야 한다고 하셨어요.”
이번에는 유지웅이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미국은 기초과학 하면 알아주는 나라 아닌가요? 핵물리학이 언제적 학문인데, 다궤도 뭐시기 그런 사소한 반응 이론 하나 정립이 되지 않았나요?”
“이런, 모르셨어요? 결정체가 등장하고나서부터 핵물리학은 찬밥신세가 됐어요. 그나마도 명맥이 끊어지지 않은 건 가렌 박사님이 자기 사비와 자기 노력을 털어서 핵물리학자 양성을 멈추지 않으셨기 때문이죠.”
“그, 그래요?”
“가렌 박사님이 결정체학 하나에만 올인하셨다면 최윤 소장이나 우리 할아버지 못지않은 업적을 남기셨을 거예요. 사실 그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세요.”
유일한 단점은 핵물리학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제1전공으로 남겨두었다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은 그 단점이 더 없이 귀중한 장점이 되었다. 만약 가렌이 없었다면, 얼마 전에 얻은 ‘숙성된 블루 결정체’의 입자 구조를 해석하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숙성 반응에 대한 단서도 그렇게 놓쳐 버렸을 테지.
“설마 그 퍼플 결정체, 사라지면서 우리 몸에 녹아든 것은 아니겠지?”
하얀 실험 가운을 입은 정효주가 자기 몸을 이리저리 만져보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유지웅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에이, 설마. 그 전에 나는 7만, 너는 6만 5천이었잖아. 이미 우리 둘이 합쳐서 한계에 달했는데 무슨 재주로?”
“혹시 모르잖아. 너와 나 이제 둘다 각각 13만 5천일지도?”
“아아,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언제까지나 너만 앞세우지 말고 폼나게 혼자서 팍팍 잡고 싶은데.”
“나랑 같이 싸우는 게 싫은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정효주가 서운한 척 목소리를 깔자 유지웅은 쩔쩔 매며 그녀를 달래려 애썼다. 그 몰래 정효주와 눈이 마주친 레지나는 그녀가 혀를 쏙 내밀며 웃는 모습에 그만 쿡 웃었다.
돈이 아주 많은 상관이기 이전에,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냥 부러운 생각이 든다. 이제 결혼 5년 됐다는데, 아직도 연애 시절인 마냥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는 모습이 부럽다.
“그러고 보니, 가렌 박사님과 최윤 박사님이 합작 연구를 진행한다면서요?”
“예. 그런데 가렌 박사님의 반대 때문에 아직 시원치는 않네요.”
“아니, 반대요? 왜요?”
유지웅은 의아했다. 가렌은 연구 달성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하물며 부서 이기주의, 파벌주의 같은 것은 지극히 혐오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왜 반대를?
“예산 줄어든다고요.”
“…….”
잊었다. 그 사람, 다른 건 몰라도 예산 이기주의만큼은 지독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어떡하지? 추가 예산을 배정해드리면 되나? 아, 하지만…….”
가렌의 경력을 철저히 오해하고 있는 유지웅은 예산을 퍼주면 가렌이 탱자탱자 놀면서 연구를 할까 봐 걱정이었다.
레지나가 염려 말라는 듯이 웃었다.
“걱정마세요. 최 박사님이 알아서 잘 해결하실 거예요.”
* * *
“왜 왔소, 최 박사?”
최윤이 들어서자마자 가렌은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 꼴이 마치, 알을 품고 있던 어미새가 침입자를 맞이하고 노려보는 듯한 자세였다.
“가렌 박사님. 공동 연구 때문에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그 이야기라면 이미 말하지 않았소? 우리 부서의 연구 결과는 당연히 연구소 내에 공개하겠소. 실시간으로 사내 서버에 올려둘 테니 최 박사도 언제든 볼 수 있을 거요.”
“하지만 그래서는 늦습니다. 저와 같이 공동 연구를 하시면 결정체의 숙성 현상에 관해서도 보다 빠르게 규명할 수 있어요.”
“그래서 내가 연구 결과는 실시간으로 공개한다지 않소?”
“가렌 박사님. 자꾸 그러시면 이야기는 원점이 됩니다.”
“결정체 숙성 현상 규명에 다궤도 충돌 현상 이론이 필요할지 모르나, 우리 핵물리학 연구에는 결정체 연구부서의 지원이 전혀 필요하지 않소. 연구 효율을 위해서는 그냥 우리끼리 하는 게 훨씬 낫소. 연구 결과 공유는 적극 협조할 테니, 우리끼리 연구를 하게 내버려두시오.”
부서 이기주의? 아니다. 파벌 이기주의? 더더욱 아니다. 그럴 사람이면 연구 결과를 바로바로 주겠다는 말 자체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빈말이 아니라, 가렌은 정말로 연구 결과는 연구소 내에서 100% 공유할 것이다.
아마, 가렌이 저리 경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
“설마 결정체 연구부서가 핵물리학 연구부서 예산을 뺏어 쓸까 봐 그러십니까?”
흠칫. 아무래도, 아니 역시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가렌 박사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 부서, 그렇게 예산에 쪼들리지 않습니다. 약속드리죠. 회장님께서 핵물리학 부서에 편성하신 예산은 단 1원도 손대지 않겠습니다.”
“정말…… 약속할 수 있소?”
“물론입니다. 아니, 저희 부서 예산을 오히려 지원해드리죠. 1년에 1조 원은 어떻습니까?”
가렌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랐다.
“아니, 예산을 그렇게 맘대로 운용해도 되는 거요? 아무리 우리가 같은 연구소 산하라 해도 그렇지, 결정체 연구하라고 준 예산을 핵물리학 부서에 멋대로 지원해도 되는 거요? 회장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실 텐데…….”
“그 정도 재량권은 있습니다.”
그 말을 하며 최윤은 지갑에서 하얗게 빛나는 카드 한 장을 꺼내 보였다. 보석 같은 광채를 발하는 금속재질의 카드는 한눈에 보기에도 뭔가 있어 보인다. 그 반짝이는 광택에서, 가렌은 불현듯 뭔가를 깨닫고는 가볍게 신음했다.
“설마, 그건…….”
“다이아몬드 카드입니다. 이 세상에 단 4장뿐인 카드죠.”
“드, 들은 적이 있어! 50조 원까지 긁을 수 있으며, 설령 잔액이 0원이라 해도 10조 원의 추가 신용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카드가 있다고! 역시 최 박사, 당신이 그 카드의 소지자였군!”
“제가 회장님께 따로 예산을 요구하지 않는 이유죠. 이 카드가 곧 예산입니다. 회장님의 경비 계좌와 직접 연동되어 있지요.”
“오오, 그럴 수가!”
가렌은 마치 예산의 신이라도 영접한 듯이 감격했다. 저런 카드가 정말로 존재하고 있었다니! 살아 있다는 게 오늘처럼 기뻤던 적이 없었다.
“공동 연구 기간 동안 이 카드를 가렌 박사님과 함께 공유하겠습니다.”
“정말이오?”
“물론입니다. 당연히 회장님께 추가 편성 받으시는 예산은 가렌 박사님 뜻대로 쓰시면 됩니다.”
가렌은 진중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공동연구, 하겠소!”
“탁월하신 결정이십니다.”
“이럴 게 아니라, 부서간 화합을 위해 파티를 벌이는 것은 어떻소? 안 그래도 내 제자들은 한국에 온지 며칠 안 되어 서먹한데, 술이 한 번 오가면 다들 친해질 것 같소만?”
“물론이지요.”
“당연히 회비는 그 카드로 긁는 것으로 하고…….”
“……염려 놓으십시오.”
예산에 쪼들린 경험이 별로 없던 최윤은 어떡하면 사람이 이렇게 될 수 있나 신기하기까지 했다. 100여 명의 제자들을 책임져야 하는 노교수란 다 저런 것일까? 그런 걸 보면 대학에 몸담지 않은 게 참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양 부서 간의 전격적인 공동 연구가 결정되고, 프로젝트 개시 전에 화합을 위한 파티가 열렸다.
“부어라! 마셔라!”
“으하하! 마셔, 마셔!”
“우리가 말이야, 얼마나 많은 천대를 받았는지 알아? 끄윽! 학교든 기업이든 정부든 다 결정체학 연구 부서에만 예산을 몰아주고, 우리는 박사 논문 심사도 제대로 안 이뤄져서 석사에만 몇 년씩 머무르고, 크윽!”
“그래도 포기 안 했어! 왜냐? 핵물리학이 너무 좋았거든! 재미있잖아!”
“결정체? 대단해! 인정한다고! 하지만 학문 자체는 핵물리학이 얼마나 오묘하고 재밌는데! 자네들도 그 맛을 한 번 알면 못 헤어 나올 걸!”
결정체학자들도 지지 않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나라가 연구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알아? 연구 실적을 올리면 뭐해? 윗대가리들이 죄다 처먹어버리는걸!”
“유지웅 회장님 덕분에 이만큼 풍토가 좋아진 거지! 그분 아니었으면 누가 이런 대형 연구단지 만들겠어?”
“우리도 할 말 많다 이거야!”
“끄윽! 알았어! 알았어! 우리도 힘들었고, 너희도 힘들었다! 그러니 이제 예산 걱정 없이, 실적 수당 떼먹힐 염려 없이 마음껏 연구해 보자고!”
“부어라! 마셔라!”
예산에 한 맺혔던 핵물리학자들과 수당에 한 맺혔던 결정체학자들은 그렇게 밤새 술잔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다음날 정신을 차린 최윤은 카드를 긁으려고 했으나, 이미 계산이 되었다는 말에 어리둥절했다.
“저 분이 이미 계산하셨습니다.”
그렇게 마셨으면서도 끄떡없어 보이는 가렌은 시선이 마주치자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기분이오. 이번 한 번은 우리 예산에서 내기로 했소. 얼마 나오지도 않았던데, 뭘.”
최윤은 가벼운 한기를 느꼈다. 저 노교수, 손톱 한 점을 주고 뼈다귀를 뜯어먹을 셈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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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을 지키는 법 : 손톱을 주고 뼈를 취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