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216)
그때.
커다란 덩치의 요리사가 우리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으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음, 대사님이 한 열 살만 어리셨어도 저와 같이 학교를 다니셨을 텐데요.」
그쪽을 돌아본 다비드 대사가 씩 웃었다.
「아, 이쪽은 에리크. 한국에서 알게 된 사이인데, 알고 보니 같은 동네 출신이지 뭡니까.」
「이런 걸 한국어로 ‘인연’이라고 하죠, 아마?」
요리사 에리크의 대꾸에 대사가 껄껄 웃는다.
척 봐도 꽤 편안한 사이인 듯한데.
「그러게요, 신기한 인연이네요.」
미소 띤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에리크가 내 쪽을 돌아보며 말을 받았다.
「처음엔 프랑스 대사님이 오신다고 해서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릅니다. 근데 이제는 얼굴을 자주 봬서 그런지, 제법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이가 됐지요.」
요리사가 호탕하게 말하자, 다비드 대사가 짐짓 너스레를 떤다.
「에리크, 요즘 자네 보면 나한테 너무 막 대하는 것 같은데.」
「어이쿠, 막 대하다뇨 무슨 그런 말씀을.」
그 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려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 그럼 수다는 이 정도로 해두고···.」
이제는 코르시카 전통의 맛을 볼 차례라며, 요리사는 우리가 올 시간에 맞춰 조리를 마친 요리를 하나둘씩 내오기 시작했다.
코르시카식 소시지라고 할 수 있는 피가텔루를 시작으로.
맑은 국물의 홍합탕, 비프 부르기뇽과 감자 그라탕이 메인 요리로 나왔고.
「어, 처음 보는 치즈인데요.」
내 말에 요리사 에리크가 반가워하며 설명했다.
「저희 코르시카섬의 전통 치즈입니다. 브로치우라고 하죠.」
염소 탈지유로 만들었다는 차게 식힌 치즈.
입 안에 넣으니 사르르 녹는 것이 꼭 거품을 먹는 느낌이다.
「와, 정말 맛있네요.」
새로운 요리가 나올 때마다 연신 탄성을 금치 못하자, 에리크와 다비드 대사 모두 몹시 흐뭇해하는 것이 보였다.
‘하긴, 우리도 외국인이 한식을 맛있게 먹으면 괜히 보람이 느껴지잖아?’
그렇게, 언젠가부터는 불편하다는 생각조차 완전히 사라진 채로 식사에 온전히 집중하고 나자.
마지막으로 카페오레와 달디단 미니 케이크가 디저트로 나왔다.
「그럼,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서빙을 마친 에리크가 어느새 자리를 피해주고 나자, 다비드 대사는 그제야 나를 초대한 진짜 저의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센터를 통해 잡오퍼 거절 소식을 전달받았다고 말이다.
‘쓰읍.’
뒤늦게 밀려드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킨 뒤, 나 또한 입을 열었다.
「그런 귀중한 제안을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하지만(mais), 이라고 다음 문장을 시작하려던 찰나.
다비드 대사가 조금 더 빠르게 말을 받았다.
「솔직히 말하면, 거절당할 걸 예상한 채로 오퍼를 넣은 거라 그리 놀랍지 않았습니다.」
「···네?」
거절당할 것을 예상했다라니.
의외의 말에 눈이 커져 있는데, 다비드 대사는 웃는 낯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일까, 막상 센터에서 거절 의사를 알려왔을 때는 좀 아쉽기는 했지만···.」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고, 생각보다 훨씬 쿨하게 말하는 대사.
그 모습에 나는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니.’
오히려 나는, 이 자리에 와서까지도 내가 대사관 잡오퍼를 거절한 것이 여전히 놀라웠다.
···아마 회귀 직전의 나였다면 묻고 따지지도 않고 받아들였을 테고 말이다.
다비드 대사는 딱히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조급했던 것도 있었고.」
「조급이요?」
그렇게 반문하자, 대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노레그라스의 향수 이미지 모델이 되었다는 소식에, 굉장히 깊은 인상을 받았거든요.」
「···음, 그건.」
물론 대단한 일이 분명하지만, 내 노력보다는 운이 더 크게 좌우한 결과가 아닐까.
그러한 의구심을 조심스럽게 입 밖으로 꺼내자, 대사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운도 실력이라고. ···어쩌면 진부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행운이라 불리는 것, 또 다른 말로는 ‘기회’라 불리는 것이 눈앞에 찾아온다는 것은-
「그 개인이 지금까지 쌓아온 수많은 인과의 결과물이 아닐까요?」
「···.」
「그런 의미에서, 나는 무슈 박이 오노레그라스의 조향사에게 영감을 준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여태껏 내가 해온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나의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다비드 대사.
「그러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사람은, 아주 그릇이 큰 인재라는 생각이.」
그래서 마음이 급해졌고, 자신이 지금 상황에서 쓸 수 있는 패를 다 써보았다- 라고 털어놓는 것이 아닌가.
‘참 신기한 일이긴 해.’
···한 나라의 대사가 이렇게 솔직하고도 소탈하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나야 자주 봐서 딱히 인식하지 못했지만, 사실 대사란 외국에서 자신의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
그런 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상당한 지위의 고관인데···.
「뭐랄까, 저는. 방금 대사님의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비드 대사의 눈이 내게 향한 가운데, 나는 스스럼없이 말을 이었다.
「대사님 같은 분이 한국에 계신 동안에는 한불관계가 좋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요.」
「···!」
잠시 눈을 크게 뜬 다비드 대사는 이내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데 꼭 진심처럼 들리는군요.」
어, 진심인데요···? 라고 미처 덧붙이기도 전.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 또한, 무슈 박의 재능인 동시에 개인적으로 참 탐나는 재능이겠지요.」
그렇게.
잡오퍼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 우리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친구들처럼 소탈한 대화를 즐겼다.
그리고 어느새 화제는 ‘일의 보람’으로 넘어갔는데.
다비드 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일의 보람, 아주 중요하죠.」
돈이나 명성, 권력 등은 어떠한 선을 넘어서면 사람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한 마디로 ‘정해진 이상의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지만.
「나도, 다른 걸 다 떠나서 이 대사라는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직업이라는 데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낍니다.」
나의 일이 타인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사실.
혹은, 누군가의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로 인해 느끼게 되는 보람처럼, 크나큰 원동력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일의 보람이라.’
다비드 대사가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담담히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어쩐지 나 자신을 조금이지만 반성하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도 이제부터는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고 다시금 자문하게 되는 것이었다.
*
다비드 발랑탱 대사와 제법 의미 깊은 대화를 나누며 헤어진 뒤.
그다음 주에 맞이한 12월의 첫날.
“촨용아, 게시판에 붙은 공고 봤냐?”
‘석사학위 종합청구시험’, 즉 졸업시험 공지가 발표되었다.
12월 중순, 한 주에 걸쳐 여섯 과목의 시험을 치르는 형태인데.
통역과라면 순차통역 AB와 BA, 동시통역 AB와 BA, 전문동시 AB와 BA를 보고.
번역과라면 종합번역 AB와 BA, 전문번역(분야 선택) AB와 BA, 순차통역 AB와 BA를 보는 식이다.
“아, 떴구나.”
어차피 학교 홈페이지에도 전부터 안내돼 있던 내용이라 나는 큰 감흥이 없었고.
그것은 ‘뭐, 예상했던 대로네’ 하고 중얼거리는 서이준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지만.
평온한 얼굴의 우리 둘을 가만히 지켜보던 수용이 형은 울상을 지으며 한마디했다.
“흑, 이 불공평한 세상···.”
옆에 있던 유정 누나는 그런 수용이 형을 위로해주듯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고 말이다.
“예상이야 다들 했지. 근데 또 시험이 눈앞으로 닥쳐오는 건 또 느낌이 다르잖아?”
“거럼 거럼.”
누나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송하늬.
···동공의 빛이 사라진 채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것이, 무슨 사망 선고라도 들은 사람 같다.
“루이 16세도 자신의 앞날을 예감했겠지만, 막상 단두대에 올라가선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겠지···.”
“···지금 여기에 단두대 얘기까지 나오는 거야?”
서이준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그래도 나는, 그런 송하늬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긴 했다.
‘안 그래도 12월은 지옥의 달로 악명이 높으니까.’
12월 중순에는 한 주를 통으로 잡아먹는 기나긴 일정과 어마무시한 난이도를 지닌 종합시험이 있을 뿐 아니라.
‘그다음 주가 바로 기말고사잖아?’
종합시험 봤다고 학기 끝이 아니라는 소리다.
여튼 그로부터 1주는 더 시험에 시달린 뒤에야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12월 말에 종합시험 결과가 나오지.’
그 말은 곧, 12월 내내 시험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한다는 의미.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권세미와 은새, 레아를 필두로 한 몇몇은 제법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여수 엑스포나 올림픽?”
“북핵 문제는 어때? 아니면 올해 미국 대선이라든가···.”
“그리스 유로존 탈퇴도 큰 이슈였잖아.”
“총기 난사 사건 같은 사회 문제도 충분히 가능성이···.”
종합시험의 주제를 미리 유추해본다며 열렬히 토론하는 그녀들의 모습에 추가 혀를 차던 그때.
“징하다, 징해.”
부우웅-
스마트폰의 진동과 함께 서지연 과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 저, 박 선생님 통화 괜찮으세요? 이번 건은 연락할지 어떨지 좀 고민했는데···.
평소와 서두가 조금 달랐지만, 요는 이것이었다.
“···장요한 선수요?”
나 같은 축구 문외한들은 물론, 다섯 살 난 어린애도 아는 스타 축구 선수.
유소년 축구팀 시절부터 ‘축구 신동’으로 불렸으며, 현재는 FC 서울에서 대활약하는 중이다.
‘회귀 후의 미래도 제법 기억이 나고 말이야.’
···그건 어디까지나 장요한 선수의 극성팬인 추 녀석에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 이번에 해외 프로 리그팀 몇 군데에서 영입 제안을 받았는데, 그중 한 팀이 프랑스팀이라서 교섭 과정을 통역해줄 프랑스어 통역사가 필요하다네요.
그렇게 설명한 서 과장은 얼른 덧붙였다.
– 제가 보기에 박 선생님이 할 만한 통역은 아니긴 한데, 이번 의뢰가 조금 독특한 통로로 들어온 터라···.
“독특한 통로라뇨?”
– 그게.
서지연 과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 유명한 장요한 선수가, 우연히 또찬영 영상을 너튜브에서 접하고 내 팬이 되었으며.
– 말도 안 되는 금액의 페이까지 제시하며 박 선생님에게 꼭 통역을 부탁드리고 싶다는데··· 제 선에서 거절하기 뭐해서 일단 말씀을 드렸어요.
분명 나는 예전에 서 과장에게 스포츠 관련 통역은 받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었다.
내가 자신이 없는 분야이기도 하거니와, 내 앞으로의 커리어를 생각하면 크게 도움될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종합시험 공고 소식에 기운이 빠져버린 추의 옆모습을 흘긋거렸다.
“제게 생각이 있는데, 일단 그 건은 거절하지 말고 잠시만 유보해주시죠.”
그렇게 통화를 마치는데, 언젠가 추 녀석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것이 기억났다.
‘스포츠는 즐겁지.’
‘축덕에겐 축구에 관련된 모든 것이 새롭고 즐거운 법 아니겠냐?’
회귀 전 추성원이 했던 말들도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야, 찬영아. 너 언제까지 이렇게 담 쌓고 지낼 거냐?’
집안 사정으로 통대를 그만두고 난 직후.
딱히 내 잘못도 아니고, 민망해할 일도 아닌데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 동기들과 교류를 칼같이 끊고 지내려 했다.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있는 것, 편하고 좋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사람은 같이 살아야 하는 거 아니겠냐.’
그때, 내가 세운 벽을 강제로 무너뜨리고 와준 게 다름 아닌 추성원이었다.
‘웬만하면 니 의견 존중하고 싶은데, 내가 타고난 진성 오지라퍼라서 도저히 안 되겠다.’
추 녀석은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는 건 물론, 불쑥 근처에 찾아와 알코올이 고프다며 술을 사주고 갔다.
그러한 녀석의 방식에 언젠가부터는 꽤 익숙해졌고.
추를 통해 은새와 호성이 형과도 연락하게 되고, 그 둘에게도 이런 저런 도움을 자주 받은 터.
···돌이켜보면, 그때의 그 오지랖이 내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뭐 대단한 은혜를 갚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저 지금의 내가 조금 여유로운 상태이고, 주변의 누군가에게 조금 더 마음 써줄 수 있는 여력이 있다면···..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게,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가 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마음을 정한 나는 추를 불렀다.
“추야.”
“오야.”
“장요한.”
“···?”
다짜고짜 장요한 선수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자, 추는 뭔 소리냐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지만.
“장요한 선수 보러갈래?”
“···!”
그렇게 한 마디를 덧붙이자.
추성원은 앉은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