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29
129
‘생기 흡수는 옵션만 놓고 보면 획기적이야. 나뿐만 아니라 하수인이 처치한 시체로부터 마력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게 커.’
사령술사에겐 물약을 마시는 것 외엔 별도의 마력 회복 수단이 없다. 생기 흡수를 선택한다면 마력이 불어나는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기존에 하수인이 점유하던 마력까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침을 삼킨 토드는 오른쪽에 놓인 잔을 응시했다. 마땅한 글귀도 적히지 않았고, 심상조차 떠오르지 않는 선택지.
‘어머니께선 공정하시다.’
요즘 부쩍 자신을 골탕 먹이는데 재미를 들리신 것 같긴 해도, 이런 상황에서 농간을 부리실 분은 아니었다.
분명 오른쪽에 놓인 잔도 「생기 흡수」의 이점에 상응하는 효과의 선택지임을 암시했다.
‘무슨 뜻으로 이걸 내려주신 걸까?’
무작위 은혜? 아니, 그런 건 암살자 쪽에 더 가까웠다.
여태껏 토드가 받았던 은혜들은 이점과 결점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차차 경지가 오를수록 각 스킬들을 유기적으로 연계하면서 상호 보완적으로 시너지가 발휘되는 식이었다.
‘하나를 얻으면, 다른 건 포기해야 하는 식이지.’
눈을 가늘게 뜬 토드는 다시금 생기 흡수의 내용을 헤아렸다.
업을 획득하는 대신 생명력과 마력을 회복한다···, 그렇다면 생기 흡수를 사용한 대상으로부터 업은 획득할 수 없다는 의미.
사령술사에겐 업의 수확도 중요한 문제다. 교전 중 파손된 하수인을 충원하려면 마력뿐만 아니라 업도 요구된다.
‘게다가 정신력까지 회복시켜주는 것도 아냐. 아예 업을 배제하고 생기 흡수를 남발하더라도, 내가 무한정 싸울 순 없어.’
게임이 현실이 되면서 극적으로 달라진 요소가 하나 있다면, 정신력이다.
아무리 마력이 넘치더라도 주문을 반복해서 써대면 급격히 피로해지고, 신체에 부하가 온다.
사령술사는 마력, 업, 정신력, 총 3가지 자원을 계산하며 싸워야만 한다.
‘보통 생각할 게 많은 클래스치고 좋은 경우는 드물지.’
골머리를 앓던 토드는 양쪽의 잔을 번갈아 보다가, 문득 일렁이는 잔의 물결을 응시했다.
생기 흡수가 담긴 잔과 달리, 공백으로 남은 잔의 표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이리저리 잔을 둘러보던 토드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머니가 하사해주시는 은혜는 신의 권능을 물질계의 사물로 구현한 것이다. 대접에 담긴 점액질이나, 잔을 채운 물이 그렇듯이.
밀도가 높아 보이는 왼쪽 잔에 비하면, 오른쪽 잔은 정순하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없는 건 아냐.’
찰랑.
보통 게임에서 공백으로 남은 곳은 구현되지 않은 더미 데이터나 버그다.
하지만 토드가 보기에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아니라면 유저가 임의로 채우도록 남겨둔 경우지.’
명백히 이 세상은 이전의 일부 규칙을 따르는 곳. 어쩌면 이 투명해 보이는 은혜의 나머지는, 자신이 채워보라는 뜻이 아닐까.
토드는 생기 흡수가 담긴 잔을 힐끗거리다가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생기 흡수가 없더라도 여태껏 마력 분배는 잘해왔어.’
생기 흡수는 보내주기에 매우 아쉬웠지만, 미지의 선택지를 향한 호기심이 더 강렬했다.
더욱이 50 레벨에서 주어진 선택지임을 감안하면 그 무게감이 적지 않다.
결심을 내린 토드는 오른쪽의 잔을 받아들었다.
숨을 몰아쉰 사령술사가 경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믿습니다, 어머니. 설마 가련한 하인을 내치실까요.”
잔에 담긴 액체는 의외로 아무런 맛이나 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불안감이 들었는데, 의혹은 잠시.
복잡하던 머릿속이 단숨에 개어진다.
필멸자는 신격의 권능을 빌어 편협한 의식의 너머를 잠시나마 들추어보았다.
어머니의 안배가 아니었다면 온몸의 말초신경이 타버렸을지도 모를, 장막 너머의 지식들.
고대의 선각자들이 세웠던 부활 신앙과 죽음을 관장하던 신관들, 막대한 권능을 부리던 초월자들조차 모래에 묻힌다. 끊임없이 융성했다가, 쇠퇴하기를 반복한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일련의 환상 속에서 토드는 자신의 모습 또한 발견했다.
환상은 토드가 부렸던 권능뿐 아니라, 과거 배제했던 은혜들을 골랐다면 벌어졌을 광경도 제시했다.
모든 인과와 결과는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끝은 오롯이 잔을 받아든 자신에 닿아 있었다.
오르카사의 하수인은 이제 그 뒤를 자신이 엮여야만 함을 깨달았다.
‘고유 주문.’
모든 짜임새를 자신이 맡아야만 한다.
주문의 종류나 요구되는 마력, 사용할 업, 발동할 매개, 낭송문의 길이나 사용할 글귀마저.
경우에 따라선 생기 흡수보다도 강력한 주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안배에 실패한다면 겉보기에만 그럴싸한 계륵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잔을 내려놓은 토드가 탄식했다.
“기껏 수수께끼를 풀었더니, 제게 더 어려운 과업을 내려주시는군요.”
대강 어머니의 저의는 짐작이 간다.
네크로폴리스의 기틀을 세우면서, 토드는 새로운 흑색 학파의 이념을 천명한 바 있었다.
무릇 사령술사들의 수장이라면, 그에 맞게끔 다른 사령술사들과 차별화되는 위엄이 있어야 하는 법.
오르카사는 토드더러 자신만의 주문을 직접 고안해보라는 과제를 내린 셈이다.
의식계가 허물어진다.
“그래도 해보겠습니다. 모쪼록 내려주신 기회,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해야지요.”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서 토드는 언뜻 손가락들이 까딱이는 걸 본 것만 같았다.
마치 잘해보라는 듯, 무심한 손짓.
사령술사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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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드의 머릿속에는 송장 박피기의 설계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제시된 도안대로 마력을 펼쳐 뼈를 옭아매고, 살점을 이어붙인다.
워낙 많은 마력을 투자한 탓에 토드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하나 만드는 것만으로도 벅차네. 그나마 영혼의 화로가 있어서 망정이지.’
건축물은 어지간한 망자들보다도 많은 마력과 정신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기껏 엉겨 붙은 살과 뼈가 무너져내릴 정도로 내구성이 취약했다.
네크로폴리스 외의 공간에서 설치하려면 적어도 3일 이상은 필요할 것으로 보였다.
비로소 마감을 마친 토드는 손을 떼어냈다.
─날름.
두툼한 혓바닥이 팔뚝을 쓸고 지나간다. 어지간히 비위를 단련한 토드조차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건축물이라기보단··· 살아있는 덩어리 같은데.’
완성된 송장 박피기는 쉼 없이 펄떡거리는 주둥이에 가까운 형상이었다. 연신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뾰족하게 치솟은 뼈대는 위협적이었다.
뿌리를 지면에 단단히 박고 있어 움직이진 못하지만,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운 기세를 풍겼다.
‘굳이 이걸 드워프들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겠지.’
괜히 기술자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기절했다간 네크로폴리스 공사만 지연될 뿐이다.
토드는 하수인들을 불러내어 송장 박피기 앞에 줄을 세웠다.
“자, 차례로 이 앞에 서라.”
멍한 눈빛으로 걸어온 망자가 신음을 흘리며 허덕였다.
【으··· 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송장 박피기는 코앞에 망자가 다가서자 몸을 들썩이더니, 살점으로 뭉친 가닥을 뻗어 망자를 덥석 낚아챘다.
─콰직, 꽈직! 와작, 와작! 갈, 갈, 갈···!
생살을 질겅이고, 씹고,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와 더불어 심지어는 뼈 갈리는 소리까지.
내부가 보이지 않는 점이 오히려 불길한 상상을 자극했다.
1분도 안 되어 송장 박피기의 입이 열렸다.
─구와아악!!
토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으음···.”
과정이 다소 흉악스럽긴 해도, 예상외로 결과물은 정교했다. 망자에게서 썩어가던 살점은 모조리 도려내고, 일체의 파손 없이 뼈대만 고스란히 남은 형태였다.
곧 해골의 눈자위에 연녹색 안광이 맺혔다.
눈을 뜬 망자는 턱뼈를 부딪치며 몸을 일으켰다.
【달그락.】
‘따로 마력을 들여 다시 일으킬 필요도 없이, 바로 승급되는 식인가.’
아무래도 「해골 병사」는 근육이나 신경을 모두 떼어낸 형태라 「걸어 다니는 시체」에 비하면 근력 자체는 약하다.
그러나 개체마다 이스라만큼의 방부 처리를 해주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는 만큼, 부패가 진행될수록 시체의 기능은 저하되기 마련.
토드는 뼈마디에 새겨진 마력을 헤아렸다.
‘내가 서약병을 구성할 때 사용한 구성과 동일한 방식이야. 내가 만든 피조물이니, 방식은 고스란히 답습한 건가?’
일일이 뼈마디를 마력으로 잇는 수고까지 덜어준다니. 제작자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편리함이다.
해골 병사의 내부 구조까지 관조하던 토드는 자연스럽게 하수인의 정보를 체득했다.
‘견진의 축가 때문인가. 조금 어지러운데.’
해골 병사, 최초로 백골만 남은 유해를 일으킨 건 나-샴디르의 신관 카문 아디프였으며···, 둔기 취약, 근력은 형편없는 수준이며, 소생 시 마력 소모 65, 상시 마력 점유량 28,···
다량의 정보가 정제되지 않은 채로 뇌에 고스란히 때려 박히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궁금하지도 않은 배경 설명까지 줄줄이 읊어대는 통에 어지러웠다.
‘이래선 안 돼.’
토드는 의식을 집중하고 복잡하게 뒤엉킨 텍스트 덩어리들을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개편했다.
핵심적인 정보 위주로, 간결하고, 눈에 확 들어오게.
「해골 병사: Lv.10」
─신체 능력 종합치: 9/20
─정신 감응 종합치: 3/10
─보유 특성: [망자], [하수인], [예기저항], [연약한 뼈마디], [▶추가할 수 있는 특성 20개···]
‘이제 좀 편안하네.’
홍수가 지나간 날의 길거리에 똥물이 흘러넘치는 건 참아도, 가독성 없는 활자 덩어리만큼은 참을 수 없다. 토드에게 있어선 후자가 더한 죄악이었다.
‘완력 2점, 기민 3점, 지구 4점을 더해 총 신체 특성 6점인가.’
슬쩍 송장 박피기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시체들을 살펴보니 완력은 4점인데 나머지는 전부 1점이었다. 힘이 반절 가까이 까였지만, 종합적인 수행 능력은 상승한 셈.
‘게다가 정신 감응 쪽에선 상시 마력 점유량을 깎아주고, 개조가 더 쉬워지는구나.’
전반적인 기초 능력치를 살펴보던 토드는 해골 병사가 보유한 특성을 살폈다. 크게 주목할 만한 것들은 아니라, 줄임표가 늘어진 부분에 의식을 집중했다.
촤라락-!!
[새 살이 솔솔]: 하수인에게 ‘열등한 재생력’ 부여. 기민 -1, 지구 +1.◆선행 조건: ‘트롤 인자’ 확보. (달성됨)
[부지런한 일벌]: 하수인의 자원 채집 속도가 25% 상승한다. 대신 교전 시, 모든 신체 능력치가 절반으로 경감된다.◆선행 조건: ‘재현’ 2회 습득. (달성됨)
‘이런 걸 붙여줄 수 있네.’
경지가 상승할 때 받는 은혜와 다른 점이라면, 개체마다 개별적인 특성을 붙여줄 수 있고, 얼마든지 마력을 회수하여 특성을 제거할 수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위쪽에 있는 특성들의 효과가 무난한 반면, 아래쪽으로 내려올수록 극단적인 것들이 많았다.
[불완전한 후예]: 하수인이 식인을 통해 수복 가능. 생자를 향해 무차별적 공격성을 띠게 됨. 주기적인 혈액 공급 미비 시, 파괴됨. 모든 능력 점수 +15, 신성 저항 -10.◆선행 조건: ‘흡혈귀 인자’ 연구. (달성됨)
◇요구 건물: ‘고풍스러운 저택’ (미달성)
[분열생식]: 하수인이 파괴되었을 경우, 파손된 부위를 수복하여 2개의 동일한 개체로 수복됨. 분열된 하수인은 이전의 절반에 해당하는 능력치 보유. 기민 -15, 지구 +20, 화염 저항 -50.◇선행 조건: ‘엑토플라즘 인자’ 연구. (미달성)
◇요구 건물: ‘3급 생리학 연구실’ (미달성)
‘재밌는 것들이 많은걸?’
토드의 표정은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했다. 단순히 수치상으론 와닿지 않는 것들은 실전에서 직접 검증을 해봐야 한다.
게다가 아직 연구가 미비하거나, 네크로폴리스에 갖춰지지 않은 시설로 인해 개방되지 않은 특성들도 무궁무진했다.
‘게다가 모든 녀석들한테 똑같은 특성을 부여할 필요는 없지. 벽돌을 다질 녀석, 끌로 석재를 쪼갤 녀석, 역할군에 따라 세분화할 수 있겠어.’
생각을 갈무리한 토드는 망자들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늘어선 망자들을 보곤 송장 박피기는 입술을 훑더니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겔, 겔.
여러모로 기분 나쁜 면모가 가득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너무 썩어 문드러져 애매해진 녀석들을 훌륭한 일꾼으로 탈바꿈시켜주는 기특한 녀석이다.
“모두 갈아라.”
송장 박피기가 신나게 망자들을 갈아 넣는 사이, 토드는 해골 병사들에게 일일이 특성을 부여했다.
주로 벌목이나 채광을 담당할 녀석들에겐 [부지런한 일꾼]을, 흉벽과 첨탑 건설을 맡길 녀석들에겐 완력과 건설 능률을 향상해주는 [과묵한 인부]를···
비록 여유 마력을 탕진해 기진맥진했지만, 절반이 넘는 해골 병사들에게 특성을 넣어줬다.
“너희는 다시 돌아가서, 노동에 전념해라.”
척!
일제히 발을 맞춘 해골 병사들은 저마다의 작업장으로 올라갔다.
잠시 계단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누군가 지하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사령술사!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박혀 있었군! 역시 음침한 곳을 좋아하는 게, 사특한 사령술사답네! 하, 하! 하.】
문득 이스라를 보고 있자니, 그녀의 정보가 궁금해졌다. 토드가 시선을 집중하자 이스라의 안광이 가늘어졌다.
【음? 왜 그러는가. 숲에서 돌아오는 길에 토끼나 멧돼지 따위를 잡아 왔는데, 갑옷에 피라도 묻었나?】
「파멸의 기사, 이스라: Lv.68」
─신체 능력 종합치: ?/?
─정신 감응 종합치: ?/?
─보유 특성: [자칭 기사], [?], [?], [?], ······
(이 자는 고유 서사를 마치지 못하였으므로, 그대가 확인할 수 없노라.)
여타 하수인들과는 제법 내용이 다르다.
게다가 레벨과 명칭 외에는 확인할 수도 없었다.
‘고유 서사라면··· 캐릭터의 기원이나 배경에 얽힌 퀘스트였지.’
망자는 생전의 기억을 일부 소실한다.
아무래도 이스라는 토드가 아직 사령술사로서 경지가 미천하던 시절 일으켰던 첫 번째 고위 망자. 소실의 정도가 더할 수는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녀는 살아있던 시절의 기억을 제외하면 기존에 탐독했던 기사도 전집이나 승마, 검술, 다양한 분야의 잡학에는 박식해 보였다.
‘일부만 잃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억 못 하고 있지.’
정말 소실된 걸까?
아니면 잊고 싶은 기억이기에, 지워낸 걸까.
토드는 이스라의 특성 중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였다.
[자칭 기사]: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세상이 미친 것인가? 직접 겨뤄보겠다!◆선행 조건: ? (미달성)
◆선행 조건: ? (미달성)
여러모로 아리송했다. 구체적인 효과나 페널티가 적힌 것이 아닌, 누군가의 독백을 적어놓은 듯한 내용.
‘지금은 알아낼 길이 없네.’
파멸의 기사가 흘리는 헛기침에 토드는 비로소 상념에서 깨어났다.
【흠흠, 사령술사. 이렇게 답답한 곳에 웅크리고 있으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게 아니겠는가. 좀 바깥에 나서서 신선한 공기도 맡고 하게!】
정작 이스라에게 저런 소리를 들으니 조금 억울했지만, 토드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아,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왜 저를 찾으신 겁니까? 무슨 용건이라도 있는지요.”
파멸의 기사는 팔짱을 낀 채로 대꾸했다.
【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본인은 한창 네크로폴리스의 관문을 지키는 사령관으로서 막중한 책무를 다하고 있었네.】
거창한 추임새를 넣은 이스라가 손을 까딱였다.
【헌데, 웬 여인네가 자신을 여기서 일하게 해달라며 간청하더군.】
토드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일을 하겠다고요?”
【그렇다네! 여길 돌아다니는 것들은 송장들밖에 없거늘, 어느 누가 이곳에서 일하겠다고 나서겠나?】
“그건 맞죠.”
【필히 정신 나간 여인이라 생각하여 정중하게 돌려보내려 했거늘, 자신이 그라워볼프 영애의 하녀였다면서 헛소리까지 지껄이더군! 끈질기게 초소를 두들겨대길래, 발치에 화살을 쏘았음에도 꼿꼿이 버티는 게 아닌가?! 들여보내 주지 않으면 송장이라도 되겠다더군. 아녀자치곤 보기 드문 기개였네.】
이스라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흠. 하녀라.’
그녀의 설명을 듣던 토드는 문득 슈피어슐로트 성채에 침입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산시아를 살피러 나갔던 시종이 있지 않았던가.’
피 웅덩이로 흥건한 난장판 속에서도 치맛자락을 꿋꿋이 헤치고 나아가던 모습이 워낙 인상 깊어서 기억난다.
‘이리공이 몰락한 이후로, 시종들은 전부 내쫓겼고, 그 뒤로 산시아를 따로 찾는 이들은 없었는데. 왜 이제 와서?’
···아니. 그러고 보면 산시아의 남동생은 황소대공의 보호 하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무릎을 턴 토드가 입을 열었다.
“한 번 만나볼 필요는 있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