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4
014
사령술사라는 말에 가신들이 술렁였다.
다만 변경백이 아직 입을 열지 않았기에 먼저 치고 나오는 이는 없었다.
눈매를 좁힌 변경백은 토드를 탐색했다.
볼품없이 헝클어진 머리에 빼빼 마른 몸집.
밀랍처럼 창백한 얼굴과 세상 다 산 것 같은 눈빛.
천생 무인으로 살아온 슈테판에게 있어 이런 유약한 놈은 사내로서 일말의 재고할 가치도 없는 버러지였다.
그런데 놈의 입가에 걸려있는 미미한 미소가 유독 눈에 밟힌다.
“그래. 사령술사.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리 무시무시하지도 않고, 불길함이나 공포와도 거리가 멀어 보이는군. 네놈처럼 뼈다귀밖에 없는 몸으로는 남창 짓도 못 해 먹을 것 같은데. 그런 네가 내게 무슨 제안을 감히 건넬 수 있단 말이냐?”
신랄한 비아냥에 가신 중 대부분이 비웃음을 던졌다.
다만 크뤼거는 토드에게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낀 바 있었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럼에도 토드는 개의치 않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감히 아뢰건대, 저는 변경백 나리께서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자 심드렁한 표정의 변경백은 픽 웃더니, 술잔을 문지르며 되물었다.
“네놈이?”
토드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느새 술잔을 어루만지던 손가락이 검집에 놓여 있었다.
변경백은 충혈된 눈자위를 굴리며 이죽거렸다.
“그렇다면 고해봐라. 만약 그 제안이 내 성에 안 찬다면··· 나와 여기 있는 이들을 우롱한 대가를 치러야만 하겠지만.”
사령술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성큼성큼 넓은 판 위에 펼쳐진 지도로 향했다.
지도는 쾨흘링 일대의 지리가 묘사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병력의 포진을 나타낸 밀랍 모형들이 놓여 있었다.
토드가 손바닥을 빙글 돌리자, 먹다 남은 작은 닭 뼛조각 여러 개가 그의 손에 빨려 들어갔다.
주사위 놀이를 하듯 뼛조각들이 이리공 디트마흐의 군세 앞에 던져진다.
“장차 임박한 전투의 승리.”
토드가 손가락을 튕기자, 아무렇게나 뿌려져 있던 뼛조각들이 작은 병사의 모형으로 변모해 지도 위에 서 있었다.
“완전하고, 흠결 없는 승리를 약속드리겠습니다.”
해골들은 이리공의 병력 포진도를 사방에서 감싸듯 배치되어 있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
순식간에 가라앉은 집무실의 공기 속에서 토드와 변경백은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침묵을 깨트린 건 변경백이었다.
“푸화하하핫!”
그는 팔걸이를 주먹으로 두들기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까지 내며 낄낄대던 그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격한 반응에 비해 토드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크흐흐···! 네가?”
어깨를 들썩이던 변경백은 자신의 수염을 어루만지더니, 턱을 치켜들었다.
“나를 이깟 잔재주에 희희낙락하는 다른 멍청이들과 동일하게 생각하지 마라. 요술사. 나는 변경주에서 온갖 이방에서 들여온 진귀한 물품들과 다양한 재주꾼들을 봐왔고, 그중에 조금의 쓸모라도 있는 놈들은 거의 없었다.”
토드를 노려보던 변경백은 장검의 손잡이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하다못해 적색 학파의 마법사들은 화염을 부릴 수 있고, 창색 학파는 무더운 여름날에 적들의 머리 위로 우박을 떨구는 이적을 일으킬 수나 있지. 네깟 놈이 뭘 할 수 있다고 감히 이 싸움의 승리를 장담할 수 있냔 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변경백은 가신들을 빠르게 살폈다.
이미 대부분의 참모는 토드를 혓바닥이나 놀리는 사기꾼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제 저놈이 한 번만 더 경솔하게 굴면, 그때 목을 날리면 된다.
장검을 쥔 변경백의 두툼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려던 찰나, 토드가 입을 열었다.
“각하. 각하께선 사령술을 과소평가하고 계십니다. 강렬한 화염이나 날카로운 얼음송곳은 전투에서 일시적인 위협을 가할 수는 있습니다.”
그는 책상 앞에서 물러나 한 걸음, 변경백을 향해 나아갔다.
“물론 무지몽매한 이들이 보기에 화려한 주문이 적의 군세를 휩쓸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맹신하지요.”
토드의 움직임에 근위병들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크뤼거가 손을 들어 제지하자, 그들은 검집에 손을 올린 채로 대기했다.
토드는 다시금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내디뎠다.
“하지만 군권을 틀어쥔 각하라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투에서 이긴다고 전쟁까지 승리하는 건 아닙니다. 각하께선 그걸 알고 계시기에 비록 수세에 몰렸다고 하더라도, 이 성채에서 심기일전을 노리고 계신 것 아닙니까?”
비웃음을 띠고 있던 변경백의 얼굴이 싸늘해진다. 휘어진 그의 눈썹이 가늘게 떨린다.
변경백이 듣기에 눈앞의 요술사가 디트마흐보다 부족한 자신의 군사적 재량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변경백은 어느 때보다도 낮게 깔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흐, 처음부터 정신이 나간 놈이었나? 지금 네가 나를 우롱하려 드는 것이냐?”
토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각하. 지도를 유심히 보시지요. 이리공이 성채에 공세를 가하기에 최적의 위치는 강둑 옆의 초지입니다.”
그가 손을 휘젓자, 작은 해골 인형들이 움직이더니 한 곳에서 우르르 무너졌다.
토드는 뼛가루들이 지도 위에 작게 쌓인 곳을 가리켰다.
“사령술사의 역량은 시체로부터 기원합니다. 그 근간이 되는 시체가 향후 전장이 될 이 성채와 가까운 곳에 널려있지 않습니까?”
시체들이 쌓여있던 구릉지는 프론지 성채 앞의 평원에서 왼쪽에 있었다.
공성전이 발생한다면, 이리공의 좌익과 후방을 덮치기에 최적의 위치였다.
사령술사의 어두운 녹색 눈동자가 일렁인다. 그가 요사스러운 목소리로 나직이 속삭였다.
“변경백께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를 다시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수백의 주검들이 그곳에서 한데 엉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곳엔 비단 변경백 각하의 전사한 병사들뿐만 아니라, 적병들의 몸뚱어리들도 널려있었지요.”
슈테판은 검으로 요술사의 목을 칠 작정이었다. 그를 통해 어수선한 내부 분위기를 환기하고, 결전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가신들 앞에서 선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저자의 말을 도무지 끊기가 어려웠다. 어느 때보다도 궁지에 몰려 있었기에, 뱀의 속삭임을 거부할 수 없었다.
토드는 히죽 웃으며 한 걸음 나아갔다.
“상상해보십시오. 이미 쓰러진 충직한 병사들이 다시 일어나고, 죽은 적병들이 오히려 디트마흐의 전열로 달려드는 광경을요. 제 요청을 수락하신다면, 그들 모두가 각하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마술사들은 이해할 수 없는 힘을 부리고, 그 권위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서 존중받거나 두려움을 사곤 한다.
각종 구전이나 설화에서 그들은 때때로 명석한 조언자, 주군을 파멸로 이끄는 뱀의 혓바닥을 가진 사특한 자로 묘사되곤 했었다.
하물며 사령술사는, 그런 마술사들 중에 가장 불결한 족속.
분별력이 있는 자라면 애초에 알현 자체를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슈테판 변경백은 궁지에 몰려 있었고,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크뤼거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재 그들에게 주어진 여건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이었기에 그들은 은연중에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미약한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무의식에 사령술사의 기름 바른 혀가 파고든다.
“싸움에 있어 머릿수의 우위는 결정적입니다. 이게 제가 자신할 수 있는 여타 마법사들과 저의 차이입니다. 그들이 전투에서 이적을 일으킨다면, 저는 각하께 ‘병력’을 가져다드릴 수 있습니다. 각하께선 제가 보낸 망자들 덕에 전장에서 무사히 후퇴할 수 있지 않으셨습니까.”
변경백이 탄식했다.
“그걸, 전부 일으킨 게, 네놈이었다고. 쾨흘링 땅의 기운에 절로 일어섰던 게 아니라?”
당시에 도주하느라 토드가 직접 사자소생을 행하는 광경까진 미처 못 본 모양이다.
“하하. 자연 발생한 망자들이 어찌 그리 체계적으로 움직이겠습니까? 왜 죽은 자들이 각하의 병력은 보내주고, 이리공의 병사들만 공격했을까요.”
“으음······.”
내가 했다니깐? 워낙 오랫동안 네크로맨서를 본 적 없으니 끊임없이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듯 하다. 혹은 교섭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얄팍한 언사거나.
어느새 토드와 변경백의 거리는 다섯 발자국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근위병 중에 누구 하나 제지하려는 이가 없었고, 변경백조차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그 병사들은 지치지도 않고, 먹을 것도 필요 없으며, 달아나지도 않을 것이며, 오로지 각하의 뜻을 충실하게 이행할 것입니다.”
사령술사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비스듬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몸짓으로 허락을 요구했다.
“······”
변경백은 입을 벌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예의 요코프를 힐난했던 가신, 하인리히가 고개를 저으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각하! 사령술사들은 예로부터 기피되던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죽은 자를 되살려, 생전의 망자를 모욕하고, 신께서 이룩하신 자연스러운 섭리를 위반하는 불경한 자들입니다!”
그는 토드를 향해 삿대질하며 열변을 이어갔다.
“저런 삿된 자의 말은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장 끌어내는 게 마땅합니다!”
이에 다른 가신도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혹여 저자가 디트마흐 쪽에서 이쪽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보낸 첩자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혹여 그 비열한 놈이 간악한 요술사를 보내 각하의 이지를 흐리려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토드가 그들을 향해 헛웃음을 흘렸다.
“이리공이 첩자를 보낼 의향이 있었다면, 은밀히 침투시켰겠지요. 세상에 어떤 아둔한 이가 저처럼 대놓고 이목을 끄는 자를 간자로 들여보내겠습니까? 하물며 시체를 부린다고 자청하면서까지요.”
예상외로 가신 중에 반대만 하는 이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좀 전에 하인리히와 대립을 세우던 크리슈토프가 토드를 두둔하고 나섰다.
“저자의 말이 옳다. 더구나 죽은 자들이 적을 물리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로 후퇴하지도 못하고 전멸했겠지. 그가 이리공의 첩자라면 굳이 제 살을 깎아 먹으면서 우릴 도울 필요도 없다.”
“크리슈토프 경, 당신은 지금 불경한 흑마법사 족속들과 손을 잡자는 거요? 이는 주와 경전의 말씀을 거스르는 불명예스러운 일이오!”
하인리히의 말에 크리슈토프가 코웃음 쳤다.
“나는 이 싸움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야 기꺼이 악마의 손도 잡을 용의가 있소.”
“그건 신성모독이지 않은가!”
“멍청하기는. 아까부터 계속 신의 이름을 들먹이는데 작금의 상황을 봐라. 우리는 쾨흘링 땅에 들어선 이래로 변변찮은 승리는커녕, 패전만 거듭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 디트마흐 쪽에 신의 뜻이 함께하는 것 같다만.”
하인리히가 격앙된 어조로 소리쳤다.
“뭐라?! 그런 모독적인 망발을 지껄이다니! 이 악마의 사생아―”
싸늘하게 맞받아치는 크리슈토프.
“저쪽이 신이 내린 보살핌을 받고 있다면, 이쪽은 악마가 내민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인지상정인 게지. 멍청하게 손 놓고 저놈들이 이곳에 쳐들어오기만을 기다릴 건가? 우리는 어제의 패배로 아군의 삼분지 일을 잃었다. 그 뒤로 여기 틀어박혀 대책을 논의해봤지만, 그 과정에서 도출된 뾰족한 해결책이 여태껏 단 하나라도 있던가?”
그의 말대로 회의는 슈테판 변경백이 히스테리를 부리고, 그 밑의 가신들이 물어뜯고 남 탓을 하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조만간 디트마흐가 병력을 정비해서 공성에 돌입할 것이라는 건 자명했고, 곧 그 시기가 임박했다.
그럼에도 증원군이 올 기미는 없고 보급은 끊긴 절박한 상황.
앓는 소리를 미약하게 흘린 변경백은 토드를 향해 물었다.
“조건을 고해 보라.”
“각하!”
하인리히를 비롯한 일부 가신들이 반발했지만, 히죽 웃은 토드가 답했다.
“제가 바라는 건 각하의 이름으로 발행된 체포 면책권입니다. 그 외에 금전적인 공여는 일절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변경백의 직인이 찍힌 체포 면책권.
소유자에게 부여된 신변의 권리를 제후가 보장하고, 어떠한 범죄를 저질러도 형사 책임은 면책권을 발행한 자가 부담해야만 한다.
사회적 보증을 서달라는 소리다.
하물며 변경백 정도의 백이라면, 앞으로 두려울 게 없으니.
“사악한 마법사를 수하로 들이는 거로도 모자라, 신분을 보장해달라? 내가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큼 네놈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나?”
변경백의 딴지에 토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적어도 여타 마법사들이 부르는 값에 비하면 저렴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저는 이리공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각하를 섬길 테니,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에 지급해주셔도 상관없습니다.”
“귀하가 요구하는 조건은 그게 끝이오?”
크리슈토프의 물음에 토드는 입맛을 다셨다.
“거기에 이전에 사망한 전사자들과 향후 발생할 교전에서 전사자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을 제게 일임해주십시오. 아, 물론 저는 주검만 필요한 거지, 유품이나 전리품의 관리는 보급관을 맡고 계신 분에게 전적으로 맡기겠습니다. 더불어 귀족 나리들도 제외하고요.”
그 말에 가신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썩어들어갔다.
대부분의 시선이 호의적이진 않았지만, 대놓고 경멸감을 드러내는 이도 있었다. 노골적으로 시신에 대한 언급은 경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지도 위에서 해골을 부리는 술수를 보였을 때부터 썩 좋은 인상을 주진 못했으나, 암묵적으로 전사자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금기시되는 게 상식이었다.
당연히 사령술사들은 태생적으로 통념에 어긋나는 일들을 벌일 수밖에 없었기에, 여기서 변경백이 판을 갈아엎을 위험성이 있었다.
자, 이제 어떻게 나올 테냐.
정작 이 소동의 당사자인 토드는 흥미진진할 따름이었다.
여태껏 무덤만 도굴하며 전전긍긍하던 토드에게 있어, 이건 둘도 없을 절호의 기회였다.
언제까지고 묘지기한테 쫓기며 느릿느릿 사령술의 성취를 쌓는 건 사양이었다.
더 높은 곳을 노리기 위해선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었다.
반등과 추락의 사이, 그 어딘가에 놓인 외줄을 타는 것. 그런 기회조차 여태 주어지지 않았기에 내심 토드는 고조된 상태였다.
만약 협상이 최악의 방향으로 수틀린다면, 즉시 죽음의 기사가 이곳을 쓸어버리겠지만.
“······끙.”
고민에 잠긴 변경백은 나름 머릿속 주판을 굴리는 데 열중이었다.
문득 하인리히가 나섰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저 네놈이 입만 번지르르한 허풍쟁이에 불과할 수도 있는 건 아니냐!”
그에 대한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토드는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애초에 그럴 가능성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실패한다면 꼼짝없이 교수대로 끌려갈 테니까요.”
익살스럽게 말하고는 있지만, 지금 당장은 현실성이 꽤 높은 이야기긴 했다.
“과연 이리공 디트마흐가 적군에서 부역한 사령술사를 살려둘까요? 천만의 말씀. 처음부터 저는 여러분의 운명에 동행할 생각으로 이곳에 온 것입니다.”
물론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최악의 상황까지 치닫는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봐도 될 일.
지금만큼은 현란한 미사여구를 덧붙여준다.
결국 고심하던 변경백이 결단을 내렸다.
“네 요청을 허락하겠다.”
그 순간, 토드는 변경백 뒤편의 창틀에서부터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마치 하늘에서 빛줄기가 내리쬐면서, 비둘기 한 쌍이 날아드는 듯한···.
관짝 뒤적거리는 미친놈이라며 인근 교회에 고발당하질 않나, 오래된 무덤을 털다가 함정에 빠져 다음날 출근한 묘지기와 마주치질 않나···, 지난날의 고생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비로소 출세의 발판이 열렸다는 생각에 토드는 눈물을 한 방울 찔끔 흘릴 뻔했다.
“각하!”
반대쪽에서 격렬한 반발이 일었지만, 손을 든 변경백이 제지했다.
“대신, 내 병영에서 머무르는 동안 네놈의 거취는 크뤼거 대대장이 감시할 것이며, 일거수일투족을 여기 계신 마지스터 에스터리츠에게 보고해야 할 것이다. 불응할 시에 네놈은 즉시 처형될 거다. 여기 있는 모두가 이 약조의 증인이다. 동의하는가?”
입꼬리를 간신히 수습한 토드는 기꺼이 변경백의 반지에 입을 맞췄다.
“각하의 넓은 아량과 탁월한 안목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분을 보장받음과 동시에 막대한 양의 업을 쌓을 기회.
절대로 놓칠 생각도 없었지만, 실패할 자신은 더더욱 없다.
여긴 게임과 달리, 진행이 수틀렸다고 강제 종료 후 되돌릴 수도 없는 곳이니.
‘원래라면 여기서 퀘스트 창 같은 게 떴을 텐데.’
그런 편리한 UI 따위가 존재하진 않았다. 그래도 몰입을 위해 대충 내용을 구상해볼까.
목표: 슈테판 변경백을 도와 이리공과의 영지전을 승리로 이끌어라.
보상: [체포 면책권]-지역 교구에서 공개적으로 수배령을 내려도 철회를 요청할 수 있으며, 이단 심문관의 처분권 행사로부터 보호 받는다고.
실패 시: 아마 사로잡히면 일주일 고문 풀코스 이후에 가도행진을 하며 썩은 달걀, 짱돌, 똥 바가지 따위에 엊어맞으며 개같이 조리돌림 당한 뒤, 교수대에 내걸릴 지도?
체포 면책권의 의의는 대외적인 신분을 변경백 정도의 제후가 보장해준다는 것도 있지만, 토드의 경험상 교회에 속한 놈들 중 그런 세속의 법규 따위는 엿먹으라는 듯 막나가는 놈들이 더러 있었다.
가장 큰 메리트는 ‘처분권 행사’로부터의 보호다.
길 가다가 다짜고짜 심문관이 선빵을 때렸을 시, 반격을 가해 쓰러트리더라도 정당방위로 인정된다는 것.
‘언젠가 내 존재가 이목을 끄는 건 확정이야. 분명 매파 계열 교단 중에는 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단 심문관을 비밀리에 파견하는 놈들도 있겠지.’
그런 놈들이 덤벼들면, 망자로 만들어줄 생각이다.
체포 면책권이 있다면 정당방위가 입증되니, 토드가 심문관을 죽이더라도 교단이 그를 섣불리 공적으로 지정할 수 없다.
토드의 신변을 변경백이 보장해주니, 이를 저해하는 건 제후의 권리를 침해하는 꼴이므로.
이렇듯 교회의 운신에 제약을 채워두는 건 토드가 절실히 노리는 바였다.
“일어나라, 토드. 그대는 이제부터 종군 마법사로서 나를 섬기고, 그대가 가진 힘과 지혜로 하여금 내가 당면한 곤경을 결척토록 하라.”
토드는 묵례로 답했다.
워낙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절차가 약식으로 이뤄졌지만 확실한 건 하나.
이제 사령술사임을 숨길 필요 없이, 당당히 전장을 활보할 자격을 갖췄다.
오래도록 은거했던 흑색 학파의 마지막 계승자가,
비로소 긴 침묵을 깨고, 전란에 휩싸인 쾨흘링 땅에서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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