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36
036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어요.”
곤두섰던 머리카락들이 가라앉는다.
“대신, 아버지에게 완전한 안식을 약속해주세요. 다시 소생하는 일 없이, 사자의 명예가 모욕당하는 일은 없도록.”
“시신의 장례와 수습 절차에 대해선 제가 책임지고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변경백이 자신의 명분을 입증할 증거로 머리나 가죽같은 신체의 일부를 전리품으로 취할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별도로 중재할 일이다.
“···더불어 가문의 가솔들과 하인들의 생존도, 보장해주세요.”
“음, 아치발트와 직접적으로 결탁한 혐의가 있는게 아닌 이상, 그들의 목숨은 차후 변경백 각하와 협의해보겠습니다.”
미약하게 숨을 고른 여인은 고개를 떨궜다. 그녀를 향해 토드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더 바라시는 게 있으실까요.”
“······없어요.”
“좋습니다. 그럼 입회 절차는 차후에 정식으로 진행하고, 약조한 대로···.”
토드가 손짓하자 이스라가 대검을 틀어쥐었다. 자세가 조금 위태로워 보여서, 살며시 귓속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한 번에 깔끔하게 쳐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으음, 손목이 조금 뻐근하네만. 문제는 없을 걸세. 자네 마력은 충분한가?】
입가에 핏기가 감돈다. 이스라와 마찬가지로 토드 역시 몸에 누적된 부하가 심상치 않았다.
“예. 검기 한 번쯤은 뽑을 만합니다. 집행하세요.”
고개를 끄덕인 이스라가 라이칸스로프의 앞에 다가섰다. 야수는 핏물 섞인 침만 질질 흘릴 뿐, 멍하니 서 있었다.
이스라가 그를 향해 나직이 읊조렸다.
【이리공, 디트마흐.】
자신을 부르는 말에도 야수는 반응하지 않는다.
이스라는 어깨에 검날을 걸쳤다.
【이걸로 그대와 본인의 악연에 종지부를 찍겠네. 비록 그대의 말로는 명예롭지 못했으나, 분명 그대에게도 짐승의 형상으로 영락하는 걸 감수할 만한 사연이 있었을 테지.】
여인의 몸이 떨린다.
【허나 이 땅에 두 발 붙이고 거니는 자들 중에, 어찌 사연 없는 자가 있으리오! 이제 그대는 죽음의 여신이 건네는 입맞춤을 받으라.】
투구 너머 녹색 안광이 선명하게 타올랐다.
그의 곁에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4명의 서약병들이 서 있었다.
토드가 잘게 떨리는 여인의 어깨를 짚었다.
“부친께,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
뚝, 뚝.
고인 핏물이 상처와 눈, 코, 입에서 줄줄 흐른다. 벌써 용해가 진행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무리하게 힘을 계승한 탓에 부패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다.
그의 처참한 몰골을 차마 못 보겠다는 듯, 여인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빨리. 편하게 해주세요.”
바라시는 대로.
죽음의 기사가 손잡이를 틀어쥔 순간이었다.
돌연 야수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다.
그의 목청에서 희미한 울림이 새어나왔다.
【산, 샤.】
여인이 눈을 치켜떴다.
야수는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우물거렸다. 그러나 턱뼈는 으스러졌고, 안면을 지탱하는 근육이 허물어지고 있다. 미처 꺼내지 못한 낱말들이 목청 밑에서 아우성치다가 바스러진다.
그의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여아에게 마지막 한마디조차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우스운 건지, 비통한 건지, 아니면 분개하는 것인지.
디트마흐가 끊어오르는 목소리로 고했다.
【나는, 후회. 하지··· 않는다.】
묽게 물든 동공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담는다.
그의 몸이 휘청였다. 덜컥 고개가 꺾였다가, 비틀대며 머리를 들어올린 야수는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크, 그그르극···!】
야수는 곧장 여인을 향해 강렬한 적의를 드러낸다.
칼날에 검광이 맺혔다. 힘찬 궤적이 짐승의 머리를 쓸고 지나간다.
콰직.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검기의 고열에 문드러졌던 살갗이 하나둘씩 녹아내리고, 그대로 라이칸스로프의 육신이 앞으로 허물어졌다.
쿵.
지지대를 잃은 머리통이 바닥에 뒹군다. 예리하게 잘려나간 단면에선 끊임없이 핏물이 샘솟았다.
자신이 내버린 애병에 의한 최후다.
잘린 머리가 여인의 발치에 굴러갔다.
망연히 지켜보던 여인이 그걸 힘겹게 집어들었다.
하염없이 핏물만 떨어지던 머리에서 점차 짐승의 터럭 또한 덩달아 씻겨져 내려간다.
이윽고 털이 전부 걷히고, 급격히 쪼그라든 이리공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걸 보고 흐느끼던 여인은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이런.”
황급히 맥을 짚어본 토드가 숨을 몰아쉬었다.
죽진 않았다.
서약병들에게 부축을 지시한 토드는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분위기가 어째 저만 악당이 된 것 같습니다.”
【악당 아니었나? 죽은 아비더러 제 딸을 공격하게 시켜놓곤, 또 모가지까지 날려버렸는데. 이 얼마나 악랄한 처사가 아닌가! 하, 하! 하.】
“크흠. 너무 앞뒤 맥락이 생략된 내용 아닙니까.”
역시 사이좋게 부녀의 모가지를 날렸어야 깔끔했는데.
괜히 속이 텁텁해진 토드가 입맛을 다셨다.
늑대인간의 기질이 있는 사령술사라.
생각해본적 없는 기묘한 조합이었으나, 또 모르지.
적어도 어머니께서 자질이 있다 판단하셨다면, 신자로서 의심하지 말지어다.
토드는 이리공의 머리를 주워들었다.
“자, 다시 위로 갑시다. 이제 이곳의 소동을 정리해야겠지요.”
이리공의 목, 아치발트의 시체, 거기에 영애까지 챙긴 토드는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내성 곳곳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살아있는 시체들은 대부분 무력화되었고, 소수의 구울들이 날뛰고 있었다.
토드가 손을 까딱이자, 구울들이 일제히 멈춰섰다.
“병사들은 들어라! 그라워볼프 공작은 죽었다! 또한 그를 배후에서 간교한 혀로 조종한 이교도, 아치발트도 죽었노라!”
늑대인간의 사체를 들처매고 있던 서약병들은 보란듯이 안뜰의 정원을 향해 몸뚱이를 내던졌다.
“목숨이 아까운 자는 투항하라! 저항하지 않는다면 자비를 베풀도록 하겠다!”
즉각 가신 기사가 반발했다.
“저놈의 말을 듣지 마라! 어찌 그라워볼프 가문의 하인으로서 흑마법사에게 굴복할쏘냐!”
“흠. 그대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코웃음 친 기사가 장검을 겨눴다.
“네놈이 간교한 요령으로 어떻게든 성에 침입했을지 몰라도, 네놈의 하수인은 전부 정리됐다. 우리가 수적으로 우위에 있는데, 왜 네놈에게 투항하나!”
사령술사가 미소지었다.
“정말 그럴까요?”
딸랑.
토드가 방울을 흔드는 즉시, 놈들이 쇠뇌를 쏘고, 허겁지겁 장총을 겨눴다.
그러나 서약병들은 철통같이 토드를 감쌌다. 알량한 화살은 방패에 막혔고, 납탄은 거리가 멀어 닿지도 못하고 바닥에 굴러다녔다.
“내가 부르노라. 죽은 자들은 일어서라.”
낭송이 완료되었다. 성 곳곳에 널려있던 시신들이 기립한다.
사령술사는 싸늘한 표정으로 저들의 종막을 고했다.
“두 번은 없다.”
죽음의 기사가 그들에게로 당도했다. 몸이 성치않아 삐걱댔음에도, 대검이 번뜩일때마다 대여섯명의 육신이 찢겨나갔다.
그럼 그중에 쓸만한 놈이 셋 정도 일어나고.
사령술사의 명에 따라 제 전우들을 공격한다.
이스라와 구울들을 앞세운 토드는 빠르게 내성을 소탕했다.
이리공이 일전의 전투에 대부분의 주력병을 끌고나간 탓에 성에 있는 수비 병력들은 상대적으로 질이 형편없었다.
하물며 정예병들도 전장에서 살아있는 시체들을 마주치면 몸서리치는데, 기껏해야 예비대로 남아 갬비슨에 창칼 좀 걸쳤다고 거들먹거리는 놈들이 싸워봤자다.
복도를 정리한 망자들은 거리낄것 없이 성 내부를 누볐다.
쾅!!
“히익!”
문을 걷어차고 들어간 이스라가 안광을 좁혔다.
【토드, 이들은 전투원이 아닌 것 같네만.】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 토드는 방안을 확인했다. 안에는 서른명 가량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공포에 질린 얼굴들에 따로 무장도 없었다. 그나마 발악이라도 해볼 심상인지 부지깽이를 쥐고 있는 중년 사내가 있었다. 그는 이스라와 눈을 마주치더니 손을 벌벌 떨며 그만 부지깽이를 놓치고 말았다.
“당신들이 이곳의 시종들입니까?”
“······.”
밖의 소동 때문에 겁에 질렸는지, 눈만 멀뚱멀뚱 깜빡이고,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이리들 나오시지요. 해치지 않을 테니.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쪽은 시체 부리는 흑마법사인데, 왜 우리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가요?”
제법 드세 보이는 하녀가 당차게 대꾸했다. 토드는 바닥을 가리켰다.
“지하실에 영애가 기절해있습니다. 아무래도 돌바닥이 서늘해서 대충 천에 눕혀두긴 했습니다만.”
그가 빙긋 웃었다.
“가뜩이나 상태가 좋아보이진 않던데, 이대로 더 방치했다간 죽어버리겠죠.”
그 말에 하녀가 기겁했다.
“산시아 아가씨···! 살아계신건 맞나요?!”
“예.”
그녀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토드를 흘겨봤다.
“정말 우리 살려주는 건 맞고요.”
“당신네 아가씨께서 하인들의 안위를 직접 요청하셨습니다. 그나저나 기절한지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
입술을 곱씹은 하녀가 앞으로 당당히 나섰다.
“몸도 안좋으신 분을 그런 곳에 방치해두다니. 길이나 얼른 열어줘요.”
“좋으실대로.”
기세좋게 나섰지만, 곧장 복도와 벽에 흥건한 핏자국을 마주하자 하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게다가 다소 살벌한 인상의 망자까지 마주치자 그녀는 비명을 삼켰다.
“히익···!”
그래도 꿋꿋하게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피웅덩이를 나아가는 기개가 대단하다. 사내놈들도 지레 겁먹고 도망치는 와중에.
【차라리 일단 죽여놓고, 망자로 살려내서 부리는게 더 편하지 않겠나?】
“아무래도 망자들은 움직임이 투박해서, 손길이 섬세하진 않거든요. 제가 일일이 지시를 내려줘야 움직이는데, 적어도 여길 전부 정리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것도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이스라는 벽에 등을 걸치려다, 그만 주르륵 미끄러졌다.
모양새 빠지는 행동에 당황한 이스라가 곧장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몸이 휘청인다.
“괜찮으십니까?”
토드가 그를 급히 받쳐들었지만, 부족한 근력 탓에 덩달아 깔릴 뻔했다.
이스라가 힘겹게 답했다.
【제길, 몸이 영 말을 듣질 않네.】
몸에 누적된 부하가 한계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버텨준게 용할 지경이었다.
서약병들이 나선 뒤에야 겨우 이스라를 일으켜 세웠다.
토드가 몸을 웅크리고 있는 하인들을 향해 일갈했다.
“아마포, 붕대, 신선한 물, 기름, 밀랍.”
사령술사의 눈이 사이하게 이글거린다.
“10분 내로 내오는 게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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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인들의 협조하에 적당히 한적한 창고방을 찾아냈다.
비틀댄 이스라는 겨우 선반에 걸터앉았다.
【몸이 무겁군.】
“수복이 필요한 것이겠죠. 아무리 죽음의 기사라 하더라도, 토대를 이루는 육신에 끊임없이 피해가 누적되면 반작용이 오기 마련입니다.”
【본인은 무적인 줄 알았거늘.】
선반에 수술 도구들을 내려놓은 토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필멸자들보단 훨씬 튼튼하긴 합니다. 게다가 지금 당신이 머물러 있는 육신은 생체 기능이 정지되었으니, 살은 부패해서 문드러지고, 끊어진 근육과 장기들이 점차 녹아내릴테죠.”
그러자 이스라의 안광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 그럼··· 나중에 썩은 살점들이 다 떨어지면, 본인은 백골만 남는 건가? 그것도 나쁘진 않다만!】
여러모로 종잡을 수 없는 발상이다.
긍정적인 건지, 아니면 어디 나사가 하나 빠진 것인지. 이스라의 이글거리는 안광으로 보아 위풍당당한 해골 기사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보통 그런 백골의 형상을 한 망자는 유골을 매개로 한 영체입니다. 그런 망자들의 힘은 사역한 사령술사의 수준에 비례하기 때문에, 대부분 생전의 기량에 크게 못미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그는 수레에 담긴 살점과 피 주머니들을 가리켰다.
“제가 직접 당신의 육신을 보수할 생각입니다. 소실된 부위는 죽은 자들의 것으로 메꾸고, 육신이 썩지 않도록 보존 처리를 해야겠지요.”
【앞으로도 매번 이 짓을 해야 하나?】
“주기적으로 보수 작업을 거쳐야겠죠. 검이 꾸준히 기름을 먹여주지 않으면 망가지는 것처럼 망자의 육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끙, 성가시구만.】
토드가 집게로 선반을 두드렸다.
“자. 일단 투구부터 벗어주시겠습니까? 머리부터 발끝 순서대로 살펴봅시다.”
그러자 이스라의 안광이 휘둥그레졌다.
【투, 투구를?】
“예. 아무래도 머리 쪽에도 외상이 없는지 확인해야죠.”
죽음의 기사는 목이 잘려도 문제없이 움직이겠지만, 그래도 기능이 상당히 저하된다.
그런데 이스라는 자꾸만 머뭇거리더니, 건틀렛을 꼼지락거리기만 했다.
“이스라?”
【파, 팔이 잘 올라가지 않는 것 같네.】
“아, 그랬군요. 투구끈이 이 뒤에 있는 겁니까?”
대수롭지 않게 여긴 토드가 이스라의 뒤로 다가섰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더니, 안광이 꺼졌다.
“이거. 생각보다 단단히 묶여있군요. 뒤쪽에 나사도 감겨있는 겁니까?”
【······왼쪽으로 돌리면 풀 수 있네.】
이놈의 빌어먹을 투구끈은 마치 퍼즐을 푸는 것만 같았다. 서툰 손길로 한참 동안이나 애를 먹던 토드는 겨우 투구를 풀어해칠 수 있었다.
달그락.
“후우, 이거야 원. 이렇게까지 투구끈을 조여놓으면 좀 답답하지 않습니까? 이랬다간 급박한 상황에 투구를 원활하게 탈모하지도 못···”
그 시끄럽던 이스라가 왜 느닷없이 조용한가 싶었다.
손에 투구가 들린 토드 역시 말문이 막힌 건 마찬가지였다.
‘허.’
은연중 위화감을 느꼈던 게 언제부터였더라.
돌이켜보면 처음 투구 너머의 얼굴 윤곽을 어렴풋이 봤을 때부터였을 거다. 유난히 속눈썹이 길다 싶었다. 그땐 단순히 얼굴이 곱상한, 젊은 기사인 줄 알았는데.
짧게 자른 머리칼은 윤기를 잃긴 했지만, 여전히 밝은 금색이었고, 볼은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밀랍빛이었다. 얇은 입술은 혈색이 없어 어두운 색이 감돌고 있었으나, 콧대가 부드럽지만 분명히 서 있어 이목구비가 단정했다.
무엇보다도 화룡점정은 눈이었다. 짙은 눈꺼풀 아래에 깊은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비록 사망의 충격으로 인해 여타 망자들처럼 동공이 흐릿했지만, 대신 죽은 눈동자에는 죽음의 기사 특유의 진녹색 안광이 선명하게 감돌고 있었다. 눈매마저 우아하게 뻗어 있어 고고한 인상을 풍긴다.
이스라, 그는, 아니.
그녀는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멋쩍게 입술을 곱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