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37
037
여인의 몸으로 기사를 자처하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룰 수 없는 공상에 사로잡힌 것이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 항상 함께하며.
닿을 수 없는 이상을 추종하다가.
현실에 질식해버리고 마는.
지독한 농담이다.
토드는 탄식을 삼켰다.
하물며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성별을 여성으로 고르더라도 취급이 좋지 않다.
이따금 편견 가득한 NPC들은 계집년이 왜 칼을 걸치고 설치냐며 비아냥대거나, 명성이 높아지기 전엔 모욕을 일삼는다.
현대의 세태와 별개로 게임의 배경은 엄연히 여권이 바닥을 치던 중세를 차용했다. 이런 상호작용이 몰입감에 도움이 된다며 반기는 괴짜 플레이어들도 더러 있었다.
그건 엄연히 객의 입장이기에 즐길 수 있는 요소에 불과하다.
눈앞의 기사에겐 이 세상이 숨을 쉬고 살아가는 공간.
다가오는 삶의 무게가 다르다.
본디 이상주의자와 미치광이는 그 차이조차 미미한 법.
그것이 어떤 의의를 품고 있을지.
여태껏 걸어온 인생의 여로가 어땠는지 마저.
그 속내를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사령술사는 덤덤하게 말했다.
“목 쪽에 상처가 있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프론지 성채에서 싸웠을때, 울리히라는 작자가 목을 꿰뚫었었네. 그자가 꺼낸 검기를 보고 깨달음을 얻었었지!】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본인은 직접 싸웠던 상대들을 모두 기억, 윽, 음.】
목덜미에 손길이 닿자 이스라가 움찔거렸다. 토드는 물에 적신 아마포로 핏자국을 닦아내고, 선명하게 파고든 검상을 면밀히 살폈다.
“목을 움직이는데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크게 문제되진 않았네.】
검날이 아슬아슬하게 근육을 빗겨나간 걸로 보였다. 이 정도면 동맥을 가르기에 충분했지만, 어차피 망자에게 출혈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나머지 부위들도 살펴봐야겠군요. 착용하신 갑주를 풀어주시겠습니까?”
이스라가 눈매를 오므렸다.
【다른 곳도 확인한단 말인가?】
“예. 아무리 죽음의 기사가 불멸의 존재라 하더라도, 그 토대를 이루는 기반은 육신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다른 곳에도 이상이 없는지 점검하고, 수복할 필요가 있지요.”
결국 이스라는 마지못해 폴드런 안쪽을 감싸는 버클을 풀고는, 갑주의 사슬과 흉판의 조임세를 해제했다. 그녀는 자신의 등을 가리켰다.
【뒤쪽에 있는 이음새를 풀어주겠나? 거기까진 손이 닿질 않네.】
얇지만 견고한 철판이 부위마다 촘촘하게 엮여 있었다. 단단하게 묶인 쇠줄을 푸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갑옷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쓰느라 토드의 몸이 들썩이는 데 반해, 이스라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스라가 핀잔을 줬다.
【거, 사내가 그렇게 힘을 못 써서야 쓰겠나.】
“노력, 중입니다···!”
괜히 기사들이 종자를 둘 이상 두는 게 아니었다. 매번 이런 갑주를 갈아입히고, 푸는 것도 적잖은 노하우가 필요했다.
그런데 쇠줄을 풀고 보니 그 안에 철판이 또 들어있다.
“이스라. 또 철판이 들어있는데, 이건 어떻게 풉니까?”
【아, 그건 양쪽에 리벳이 있을 걸세. 척추 쪽을 감싸는 선을 따라 풀면···】
등판의 결속을 겨우 풀자, 김이 일면서 흉갑의 뒤가 젖혀졌다. 이스라가 앞에서 흉판을 떼어내니 비로소 갑주의 몸통을 해제할 수 있었다.
겉에선 티가 잘 안 났지만, 자세히 보니 갑주의 곳곳에 균열이 나 있고, 일그러지거나 깨진 자국이 가득했다. 토드는 엉망진창이 된 갑주를 망자에게 건넸다. 망자는 멍청한 신음을 흘리며 구석의 받침대로 옮겼다.
이스라는 익숙하게 겨드랑이에 걸치고 있던 거셋을 떼어내 건넸다. 일반적인 의복에선 천으로 만들어 덧대는 식인데, 갑주 밑에 걸치는 것이라 미늘 형태였다.
덕분에 갑옷 안쪽을 상세히 살필 수 있었는데, 토드는 혀를 내둘렀다.
예상했던 것보다 내부 상태가 처참했다.
그녀는 갑주 안에 아밍 더블렛이라 불리는 자켓을 입고 있었는데, 천이 꽤 두꺼웠음에도 베이거나 찔린 자국, 새카맣게 그을린 흔적이 여실히 남아 걸레짝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가슴팍에는 사망 당시 총탄이 할퀴고 지나가 찢어진 상흔이 선명했다.
안에서 깨진 납탄 부스러기와 그을린 자국이 피와 섞여 새카맣게 문드러져 있었고, 더 안으로 파고든 탄흔이 보였다.
제아무리 우수한 갑주에 미늘이나 사슬을 꽁꽁 싸맸다고 해도 저지력에 한계가 있었다.
“······아무래도 내의를 갈아입으셔야겠군요. 이건 도저히 못 입을 지경입니다.”
【그렇군. 성내에 면갑이 비치되어 있던가?】
“글쎄요. 하인들을 닦달해보면 하나쯤은 나오지 않을까요.”
【약탈과 전리품은 마땅히 승자의 권리라지만, 그래도 지나친 수탈은 지양하게. 자비 또한 승자가 베풀 수 있는 덕목 아니겠는가.】
“잔소리할 시간에 버클이나 마저 푸세요.”
【크흠!】
허리에 덧댄 벨트를 풀고, 아밍 더블렛 밑을 받치는 사슬 스커트도 걷어낸다. 장비를 건네는 기사의 손이 차갑다.
이윽고 다리 보호대의 상부를 잇는 거들을 풀고, 차례대로 무릎가리개와 정강이받이, 사바톤까지 벗겨냈다.
이스라는 선반에 앉아있어도 눈높이가 꽤 위쪽에 있었다. 신장이 토드보다도 큰 편이라 평소에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렇게보니 다리가 꽤 긴편이다.
아무래도 이스라의 팔이 밑까지 구부려지지 않아 대신 토드가 발목을 부여잡았는데, 이스라가 움찔댔다.
【크흠, 흠. 흠.】
몸에 걸친 방어구를 해제하는 데만 족히 1시간 넘게 걸린 것 같다.
“자, 이제 내의도 탈의하셔야죠.”
이스라는 입술을 곱씹더니 토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소매만 걷어서 확인해도 충분하지 않나?】
자꾸 머뭇대는 이스라를 향해 토드가 일갈했다.
“이스라. 무인으로서 정신의 수양이나 무예의 단련 또한 중요하지만, 일신의 청결함을 유지하는 것도 권장되는 덕목 아닙니까?”
【그건······.】
“어찌 검과 갑옷만 정련한다 하여 평시의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육체 또한 갈고 닦아야지요!”
【어차피 마력으로 썩지않도록 보존 처리를 한다고 자네가 이르지 않았던가? 그러면 옷을 걸친 상태로도 문제가 없는게 아닌가?】
어쩔 수 없군.
이것만큼은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무엇보다 냄새가 심합니다. 이스라.”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핫.】
“죽음을 몰고다니는 투사가 피 비린내를 머금고 있는건 당연한 일이지요.”
토드는 약간의 경멸을 담아 이스라를 바라봤다.
“헌데 생각해보면 지금 사망한 이래로. 옷을 한 번도 갈아입지 않은 게 아닙니까.”
【······.】
망자의 안광이 세차게 흔들린다.
갑주의 무시무시한 외형 때문에 가려져 있는 것이지, 지금 그녀는 상당히 꼬질꼬질한 상태였다.
“죽음의 기사로서 평소에 품위를 유지하셔야지요. 전장이라면 모를까, 평상시에도 오물의 악취를 풍기고 다니는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두려움을 살까요. 비아냥을 살까요.”
입술을 잘근잘근 씹은 이스라는 건틀렛을 말아쥔 채로 파르르 떨다가 와락, 이를 악물었다.
【아, 알겠네! 알았어! 정말 사특한 사령술사다운 간교한 언변이로다! 정말이지, 치가 떨리는군!】
그렇게 당사자의 마지못한 협조를 구한 뒤에야 육체의 상태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정교하게 깎아낸 조각상 같은 육신이다.
언뜻 윤곽이 얄브스름한 듯 보이나 극도로 균형이 잡혀 있었다.
체격이나 신장으로 보아 생전에 영양 상태는 나쁘지 않았으리라 판단된다. 실루엣이 호리호리함에도 갈빗대가 드러나지 않았으니.
대강 갑옷의 가치만으로도 이 기사의 출생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신체를 확인해보니 확신이 선다.
‘확실히 종자나 여종같이 비루한 출신은 절대 아냐.’
그렇다고 노련한 투사라기엔, 애매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장의사 행세를 하면서 적지 않은 수의 싸움꾼, 병사, 용병들 따위의 칼 좀 잡아봤다 싶은 자들의 시신을 수습해왔다.
그들에 비추어봤을 때 분명 체계적인 단련의 흔적이 엿보이지만, 온실 속에서 규격 안의 훈련만 반복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적지 않은 노고가 있었을 테지.
혈액 순환이 멈춘 피부는 상앗빛에 가까웠다. 비록 부패는 마력으로 지연시키고 있으나, 온통 보랏빛으로 물든 피멍과 드문드문 희미한 시반이 피부색과 대비되어 두드러진다.
“별달리 이상이 느껴지는 곳은 없으신지요.”
【없네. 촉각 외에는 모든 감각이 무뎌진 느낌일세.】
왼팔을 들어 올려보니 어깨 쪽 연결부가 매끄럽지 않고 끊어지듯이 딸려온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건 전투 지속력에서 이점이 될 수 있지만, 부상을 자각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육신을 혹사하게 됩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선 기량이 저해되니 너무 갑주의 성능을 맹신해서는 안 됩니다.”
【흠! 그 또한 본인의 기백이 부족한 탓이로다. 더 정진해야겠지!】
상자에서 술병을 꺼낸 토드는 솜을 충분히 적시고, 피부에 묻은 혈흔과 기타 이물질을 정성스레 닦아냈다.
그러고 보면 맨 살갗을 만지고 있음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생기가 전혀 감돌지 않아서, 인형을 손질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온종일 죽은 자들을 마주하는 생애를 살아오면서, 덩달아 토드 자신의 인간성도 마모된 것인지는 모른다.
토드는 충동적으로 왼손에 쥐고 있던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단 한 모금, 들이켰을 뿐인데 목청이 타는 듯하다.
“쿨럭.”
하녀더러 독한 걸 가져다 달라고 하긴 했지만, 이건 숫제 독이 아닌가? 일그러진 토드의 표정을 바라보던 이스라가 키득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갈증이나 허기도 느껴지지 않는군. 그대의 모습을 보니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만.】
“맛이라도 보시죠.”
이스라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술병을 입에 머금었지만, 이내 실망한 표정으로 건넸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군.】
“망자의 육신은 대부분의 기능이 정지됩니다. 다만 당신의 사념과 제 마력이 깃들어있기에 일부 사지가 생전의 기억을 재현하지만, 예전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스스로 제 역할을 하던 부위들은 기능을 멈췄죠.”
【그럼 아까운 술이나 버린 게 아닌가?】
이스라가 투덜거리자, 토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핏물에 젖은 솜을 교체했다.
“적어도 당신의 내장이 썩지 않도록 임시 방부제 역할은 해주겠죠.”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로군.】
토드는 섬세하게 이스라의 얼룩진 육신을 구석구석 닦아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이 곧고 정결해서, 이스라는 입을 다물었다.
“장갑도 해제하시지요.”
달그락.
묵직한 건틀렛을 풀어헤치니 가지런한 손가락이 꼼지락댄다. 손바닥 안쪽에 굳은살이 가득했다.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왼손 엄지에 끼워진 반지.
“그건?”
그걸 빼낸 이스라가 안광을 좁혔다.
【줄곧 건틀렛을 끼고 있어 미처 몰랐군. 낯선 물건은 아닌듯하다만, 별달리 생각나는 건 없네.】
반지를 건네받은 토드가 반지를 면밀히 살폈다. 겉의 테두리로 보아 명백히 남성이 낄 법한 물건은 아니었다. 토드는 장신구나 보석에 그리 조예가 없었기에, 향로의 불빛에 대고 반지를 유심히 응시했다.
미세한 금이 가 있었지만, 광선에 비춘 보석의 내부는 기포 없이 깨끗하다.
‘에메랄드구나.’
흔히 생명의 힘을 품고 있다고 믿어지는 녹주석의 일종이었다. 죽음의 기사와는 조금 괴리감이 있지만, 차후 토드의 성취가 올라간다면 이스라가 활용 가능한 유물로 재가공할 여지가 있었다.
“일단 이건 차후에 수리해서 돌려드리겠습니다. 어쩌면 생전의 자취를 더듬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죠.”
그러자 이스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
【어차피 본인은 생전에 크게 미련이 없네. 정 안되면 나중에 그대가 비상금으로 사용해도 좋네.】
죽음의 기사는 흘려보내듯이 말했다.
생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이스라에겐 큰 의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쯧, 이 몸은 무위를 좇아 무인이 되기로 했거늘. 한심하게도 한 줌의 알량한 마음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에메랄드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토드는 말없이 품에 집어넣었다.
이걸로 세척 작업은 끝났고, 본격적으로 수복을 할 차례.
선반에 향로를 올려놓은 토드는 손바닥을 그었다.
핏방울을 그러쥔 채로 바닥에 놓인 소가죽 주머니들을 가리킨다.
“이를 취하라. 나의 살과 피로 하여금 그대가 영화롭게 되리니.”
마력에 이끌린 핏물과 살점이 주머니에서 빠져나온다.
실처럼 얇게 마력을 자아낸 토드는 일일이 구멍이 난 자리나 파인 곳, 사소한 잔상처까지 꼼꼼하게 메꿔나갔다. 이것도 소생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수고스럽고, 반복적인 작업의 연속이었다.
그 과정에 이스라도 감탄했다.
【허어, 자네. 이런 재주는 어디서 배운 건가?】
“한때 도시국가 쪽에서 외래 의사 행세를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심문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위장이었는데, 생각보다 벌이가 쏠쏠했었죠.”
【한때라는 건, 어느 시점에선 그만두었다는게 아닌가. 아무래도 사자의 피육을 사용하는 것 때문이었나?”
토드는 복부의 탄흔을 채우며 답했다.
“아뇨. 술법 자체는 문제될게 없었습니다. 매번 환자는 마취했었거든요. 다만 사고로 쇠그물에 얼굴이 찢어진 어부가 있었는데, 그를 치료해줬더니 하룻밤 사이에 너무 멀쩡해졌다고 흑마술 혐의로 고발당하더군요.”
【저런.】
“덩달아 저까지 교수대로 끌려갈 판국이었던지라, 불가피하게 장사를 접고 야반도주했습니다.”
【쯧, 원래 남부 것들이 그렇다네.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지.】
사령술에 융통성을 적용하기엔 조금 무리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지만, 토드 역시 맞장구쳤다.
“그렇다니까요. 비록 북부가 날씨는 궂지만, 민심이 훨씬 낫습니다.”
진녹색 향연이 하염없이 둘 곁에서 피어오른다.
이윽고 수복이 마무리되었다.
“끝났습니다.”
【수고 많았네.】
“아닙니다. 그간 불편을 감수한 이스라가 더 수고 많았죠. 제가 더 빨리 챙겨드렸어야 했는데, 미안합니다.”
【흐, 돌이켜보면 살아난 뒤로 정말 숨돌릴 틈도 없지 않았나. 자네나, 나나.】
그랬었지.
무덤가에 웅크리고, 하수도를 전전하며, 정처 없이 떠돌기를 반복하고, 그야말로 숨만 붙은 채로 연명하기 급급하던 시절을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금처럼 이렇게 격정적인 순간들의 연속이었나 싶었던 때가 있었던가.
토드는 쓴웃음을 흘렸다.
“잠시.”
창고를 나선 토드는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를 향해 말했다.
“남성이 갈아입을 의복이 필요합니다. 상·하의로 한 벌씩.”
토드를 위아래로 살핀 하녀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으, 마법사님이 입으실 건가요?”
“아닙니다. 저보단 키가 큰 체형으로 부탁합니다. 가급적이면 상의는 갑옷 밑에 받쳐입을 것으로, 하의는 기능성이 좋은 바지면 좋겠군요.”
제법 까다로운 요구에도 불구하고 시종들이 곧장 옷을 내왔다. 창고로 들어선 토드는 이스라 앞에 옷가지들을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갈아입으시지요.”
기함한 이스라는 쏜살같이 바지부터 집어들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상반신에 동여맸던 붕대는 다소 손때가 배어있었는데, 그사이에 갈아치운 모양이었다.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은 이스라는 곧장 몸의 상태를 점검했다.
어깨를 돌려보거나, 팔을 뻗어보고, 주먹을 내질러 보기도 하고.
“어깨와 목의 움직임은 괜찮습니까?”
이스라의 안광이 세차게 이글거렸다.
【오오, 아주 매끄러운 느낌이네! 전에는 관절부에 묘하게 뻐근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네만, 지금은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수월하군!】
“팔꿈치 쪽은요?”
【으음, 조금 맞물리지 않는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잠시 소매를 걷어보시지요.”
끊어진 신경은 다시 자라지 않는다. 주문으로 기워맞춰도 실사용자가 위화감을 느낄 여지는 있었다. 애초에 마법이 그렇게 만능이었다면 이 세상에 따로 병원이 필요하거나 돌팔이 의사들이 설치는 일은 없었으리라.
마력을 흘려보내 양팔의 균형을 맞춘다.
“고관절의 각도는요?”
【오른쪽이 조금 틀어진 듯 하네.】
“무릎과 발목은 어떠신지요.”
【무릎은 괜찮네! 발목은 뻑뻑한 느낌이···.】
그렇게 섬세한 조율을 마치고, 그 사이 구석에서 열심히 빗질을 끝마친 망자들이 광을 낸 갑주를 가져왔다.
다시 갑옷까지 착용한 죽음의 기사는 광소를 터뜨렸다.
【하, 하! 하. 본인은 이제 완전해졌다!】
허리춤에 양손을 얹은 이스라가 안광을 불태웠다.
【정말 최고로 끝내주는 기분이군! 몸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네! 오오, 본인을 상대할 호적수는 어디 있단 말인가! 본인과 검을 겨룰 상대는!】
“아마 당분간은 싸움이 없을 겁니다.”
기세등등하던 이스라의 안광이 대번에 식었다.
【이런···! 지금 본인의 상태는 최고조에 이르렀거늘! 통탄스러운 일이로다!】
“정말 무인다운 호승심입니다만, 지금은 정비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이곳 성채도 정리해야 하고, 분쟁의 전후 처리도 해야 하고, 저도 그동안 미뤄둔 사령술 연구도 해야 하고요.”
건틀렛을 말아쥔 이스라가 괴로운 듯 신음을 흘렸다.
【그으으! 전투가 없다니! 그럼 본인은 무슨 낙에 살아야 하는가!】
이스라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망자에겐 마땅히 즐거움을 느낄만한 요소가 전무하다. 더욱이 이스라의 원념은 무인으로서의 위명과 엮여있는 만큼, 전투 외에는 이렇다 할 자극으로 다가올 요소가 없는 것이다.
문득 토드는 지하실에 내버려 둔 시신에 생각이 미쳤다.
“생각해보니 대련 상대 정도는 구할 수 있겠군요.”
【대련 상대?】
귀가 솔깃했는지, 사그라들던 안광이 다시 점화된다. 토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그, 왜. 잘 안 죽는 녀석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주인에 그 하수인이라고, 이스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네. 후후, 이미 죽어버린 놈이니 팔다리 몇 번 잘려나간다고 나가떨어지진 않겠지?】
“물론입니다.”
사령술사와 그의 수족은 서로를 마주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죽지 않는 샌드백이라니.
투쟁을 갈구하는 하수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최고의 상이다.
겸사겸사 북부인들의 육신에 대해 데이터도 얻고.
백골까지 털어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