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40
040
창고에 틀어박힌 토드는 즉시 시신들의 부검에 착수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증기, 살점이 담긴 유리관, 선반에 난자한 혈흔까지.
그동안 실험에 온전히 주력할 여유가 없었던걸 감안하면 귀중한 시간이었다.
샘플을 옮겨담은 토드는 이마를 찌푸렸다.
‘막상 일을 제대로 벌리고보니 손이 부족하네.’
늑대인간들의 사체는 변형이 지나치게 빨랐다.
최대한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온갖 약품을 쏟아부었음에도 벌써 날파리들이 꼬이고 있었다.
가뜩이나 토드의 근력으론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것도 벅찬데 날벌레까지 쫓느랴, 절차에 맞게 행하고 있는지 서책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시약을 달이고 경과를 지켜보는 것까지 눈뜰 새도 없이 바빴다.
그렇다고 힘쓰는 걸 이스라나 다른 하수인에게 맡기기도 곤란한 게, 망자들은 손길이 투박해서 쓸데없이 사체를 훼손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쩌면 제자를 들이라는 어머니의 혜안이 옳았던 걸지도.’
다만 그녀를 쓸만한 조수로 훈육할 때까지 또 얼마나 많은 노고가 필요할진 별개의 문제.
톱을 내려놓은 토드는 약병을 시체의 입에 들이부었다.
끓어오르는 육신을 향해 속삭인다.
“일어나라.”
꿈틀.
눈을 치켜뜬 망자는 날렵하게 몸을 일으켰다.
―크으으!
핏발선 눈동자는 동공이 확장되어 있었는데, 전신의 혈관이 불거져 꿈틀거렸다.
‘반응성은 우수하고.’
이리저리 망자를 둘러보던 토드는 기존에 있던 녀석을 지목했다.
―캬아악!
즉각 뛰쳐나간 망자는 대상을 우악스럽게 찢어발겼다. 기존에 느려터진 망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흉포하다.
행동을 마친 망자는 거칠게 헐떡였다.
‘항상 이스라가 먼저 나가서 고립되는 모습이 자주 보였는데, 이젠 어느 정도 발을 맞출 수 있겠어.’
더 이상 걸어 다니는 시체들이 아니다.
이젠 시체들도 달린다.
다만 늑대인간에게서 추출한 인자의 특성상, 활력을 급속도로 소모하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고기방패 역할만 떠맡던 망자들의 범용성을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만족스럽게 웃은 토드는 망자들을 시켜 정리를 명했다.
기재들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를 뒤로 하고, 토드의 의식이 침전했다.
이제 그가 선 층계는 31번째.
자신을 위해 마련된 대접들을 확인했다.
진청색. ‘재현’은 죽음을 거슬러 본연의 잔재를 되찾으려는 본능적 염원이라.
추후 소생하는 망자가 사망으로 인해 상실하는 여파를 최소화한다. 더 원활하게 기동하고, 섬세한 동작을 취할 수 있다. 소생 시 더 많은 마력과 낭송이 요구된다.
적색. ‘발현’, 잔해의 몸부림.
파손된 시신의 신체 부위를 조종할 수 있다. 단, 살점, 혈액, 뼈가 갖춰져 있어야 하며, 장기간 유지할 수 없다.
담갈색. ‘체액’은 신체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이다.
하급 망자들의 피와 살점이 점액질에 가까워진다. 살갗이 질겨지고, 둔기에 저항성을 가진다. 그러나 망자의 주요 장기가 약점으로 지정되고, 예기에 취약해진다.
우선 첫 번째 선택지인 ‘재현’은 망자의 기량을 저해하는 패널티를 최소화해주지만, 마력을 더 잡아먹는다는 점에서 기각이었다.
‘지금 당장은 이스라가 점유하는 마력만으로도 벅차.’
시체 특유의 위화감을 덜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망자를 생자로 위장하여 침투시키는 게 수월해지겠지만, 이런 전략적 이점은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이 제한적이었다.
이제 선택지는 2개로 좁혀졌다.
‘창이냐, 방패냐.’
각각 장단점이 명확한 선택지들이었다.
‘발현’을 고른다면 「업의 손아귀」처럼 즉발 스킬이 하나 더해지는 셈이다.
위급한 상황에서 적의 목을 조르거나, 육편을 끌어모아 저지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기본기에 주력하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엄연히 토드에게 여분의 목숨이 있다 하더라도, ‘영혼 목걸이’의 쿨타임은 길다.
게다가 영구적인 상해는 장기적으로 적잖은 부담이다. 여전히 새끼손가락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북부로 간다면, 분명 싸움에 능숙한 놈들과 맞닥뜨리겠지.’
급소가 무의미해지는 건 망자가 가진 이점 중 하나였다. 이번 분쟁에서도 적들이 심장이나 복부를 노리고 공격했다가 역습을 당하는 장면이 잦았다.
일단 전투에 능숙한 투사라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가와 별개로, 본능적으로 급소를 노려 타격할 확률이 높다.
체액을 분비하는 주요 장기들이 취약해진다면 도리어 도끼질에 망자들이 쓸려나갈 수 있었다.
‘이스라는 호위로 쓰기엔 너무 아까운 전력이야. 차라리 강한 적과 붙여놓는 게 낫고, 그 외에 돌발 변수로부터 내 몸을 지킬 수단은 필요해.’
플레이는 과감하게 하되, 스킬 빌드는 리스크를 회피하는 안정성을 추구한다.
대접을 받아든 토드는 여지없이 인상을 구겼다. 굳이 의식계에선 맛이나 질감을 구현할 필요가 없을텐데, 쓸데없을 정도로 감각이 생생하다. 모종의 악의마저 느껴진다.
‘거, 어머니, 이건 진짜 너무한 거 아닙니까. 다음엔 옆에 누룽지 사탕이라도···’
그는 가차없이 의식계에서 내쫓겼다.
섭섭함을 느낄 새도 없다. 아직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은 토드는 향로를 집어들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이스라.”
탐독에 열중하던 죽음의 기사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오오, 마침내! 그렇지 않아도 기사들이 이교도 대군세의 침공을 막아내는 대목을 읽고 있었네! 이자 역시 그 강맹한 전사들의 후예일테지!】
이스라의 안광이 반짝였다. 책에서 본 장면을 재현하려는 열망이 강하게 느껴진다.
야만전사의 시신 앞에 선 토드가 향로를 흔들었다.
“내가 그대를 부르노라. 거친 동토를 누비는 전사의 후예여.”
딸랑···.
손목에 매인 방울이 흔들린다.
“그대에겐 까마귀 신, 후단의 시선이 아직 머물러있는가? 그렇다면 다시 일어나 투쟁을 지속···”
토드가 낭송을 마치기도 전에, 돌연 야만전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사령술사가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주변을 돌아본 전사는 퉁명스럽게 외쳤다.
【술.】
그는 토드를 향해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술부터 내와라.】
“······.”
이 자식, 뭐하는 놈이지.
///
병나발을 분 전사가 투덜거렸다.
【젠장, 맹물만도 못하군.】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만 다섯 개였다.
어찌 연병장까지 데려오긴 했는데, 예속된 망자치고 그의 태도가 유별났다.
보다못한 이스라가 대검을 겨눴다.
【무기를 들어라, 전사!】
【내가? 왜.】
【그대는 나와 대련을 하기 위해 되살아난 것이다! 그대의 소임을 다하라!】
전사는 태연히 코를 후비적댔다.
【누가 그걸 정했나?】
【허! 사령술사의 소생에 응하지 않았나!】
발치에 놓인 도끼를 빤히 들여다보던 전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오랜만에 잘 자고 있었는데 자꾸 누가 불러대길래 귀찮아서 깬 거지. 누구 지시를 듣겠다고 한 적은 없다.】
이게 약관에 동의는 했는데, 그걸 잘 지키겠다는 약관에 동의는 하지 않았다는 말과 비슷한 건가.
이스라가 분통을 터뜨렸다.
【이 건방진 바르바로이 놈! 토드, 본인이 보기에 저놈도 햇살 찜질이 절실해보이네!】
전사가 코웃음쳤다.
【해보실테면 해보든가. 나는 스칼바냐르의 전사다. 비록 패배했을 지언정, 누군가를 따르고 말지는, 내가 정해.】
순 제멋대로인 놈일세.
예속된 망자라고 무작정 고분고분하진 않다. 여전히 자아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뜨내기는 아니라는 뜻.
물끄러미 전사를 바라보던 토드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눈물의 업이 있네?’
그 말인즉슨, 이스라와 마찬가지로 저 야만전사 역시 모종의 염원이 있다는 뜻이다.
이대로 피의 업을 사용하여 강제로 굴종시킬 수도 있지만, 타의로 끌려다니는 꼭두각시로 전락한다. 아마 이스라가 원하는 대련 상대로서 생동감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망자를 회유하여 눈물의 업을 얻어낸다면 자원을 소모하지 않고 협조적인 태도를 이끌어낼 여지가 있다.
선택은 토드의 몫이었다.
“전사여, 당신이 소생에 응했다는 건, 엄연히 당신이 생전에 이루지 못한 미련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전사가 고개를 삐딱하게 돌렸다.
“저는 사령술사로서 망자의 의지를 존중합니다. 당신이 품고 있는 한이 있다면, 응당 이룰 수 있도록 도울 의향이 있습니다.”
전사는 팔짱을 낀 채로 대꾸했다.
【전사는 외지인과 속내를 터놓고 얘기하지 않는다. 내가 그쪽과 할 말은 없다.】
이스라가 대검을 움켜쥔 채로 속삭였다.
【토드, 놈은 자기 처지를 모르는 듯 보이네. 팔다리 하나쯤 날려주면 제 위치를 인식하지 않겠나? 어차피 자네라면 문제없이 붙일 수 있지 않나.】
“귀가 솔깃한 제안입니다만, 저 전사에겐 유효하지 않을 겁니다.”
가슴팍을 두들긴 이스라가 포효했다.
【크아악! 비록 본인은 심장이 멈췄네만, 어째 죽은 피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군! 답답하다, 답답해!】
이스라는 전사를 향해 삿대질했다.
【본인이 즐겨보는 기사도 문학에선 저런 건방진 놈들은 즉각 정의의 철퇴를 내린단 말이네!】
길길이 날뛰는 죽음의 기사와 별개로, 히죽 웃은 야만전사는 마저 술병의 마개를 뜯었다.
【이봐, 차라리 독약을 내오는건 어때? 그 정도면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냐, 이놈! 본인이 네놈의 목을 칠테니, 그 주둥이로 네놈 몸뚱어리의 피를 받아먹거라!】
【그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색다른 경험이겠어.】
토드가 죽음의 기사를 만류했다.
“안됩니다. 이스라.”
【정의는 죽었는가!!】
【죽은 건 정의가 아니라, 그쪽이랑 나 아닌가? 피차 시체들끼리 뭘.】
만만치않은 놈이다.
【말리지 말게! 사령술사! 저런 놈을 살려두는 건 기사도 문학 애독자로서 용납할 수 없네!】
대체 저 골칫거리를 어떻게 해결해야하나 싶었는데, 돌파구는 의외의 구석에 있었다.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어여, 사령술사 양반. 오랜만이오!”
약삭빠른 쇠렌은 어디서 챙겼는지 손과 목에 목걸이, 반지 따위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흐흐! 얼굴이 폈군, 폈어! 안 그래도 당신이 전리품으로 금화를 한가득 받았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라고!”
반가운 얼굴이라 인사를 하려던 차에, 돌연 야만전사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쇠렌 스콜다르손-!!】
망자의 황색 안광이 세차게 이글거린다.
【골통분쇄자 스콜다의 아들이자, 명예로운 후스카를 지위를 내버리고, 남부로 내빼 흥청망청 살고 있다는, 내 친우 중 가장 비겁하고 부러운 놈 맞나?!】
“사, 사람 잘못 봤소!”
망자가 고개를 긁적였다.
【이상하다. 분명 대갈빡이나 머리숱으로 보아 우리네 사람인데?】
“내, 내가 방을 잘못 들어왔군.”
토드가 턱을 까딱이자 곧장 뒤에 서 있던 피에트가 쇠렌을 붙잡아놨다.
헐레벌떡 달려온 야만전사는 쇠렌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우악스럽게 얼굴을 확인한 야만전사가 환하게 웃었다.
【하하! 맞구만! 도나르께서 우리의 만남을 굽어살피는군! 이 먼 타지에서 동향 사람, 그것도 젖먹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놈을 마주칠 줄이야.】
그에 비해 쇠렌의 표정은 똥바가지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죽상이었다.
“이런, 씨부랄. 사령술사 양반. 나한테 왜 이러는 거요.”
토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야, 쇠렌! 너, 이 자랑 구면이었나?】
한숨을 흘린 쇠렌이 대꾸했다.
“후우, 티르핑 형님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어제오늘 본 사이는 아뇨.”
【그랬구만! 간만에 회포나 거나하게 풀어야겠어! 술이나 더 갖다 줘.】
“아니, 이 사람은 힘이 뭐 이리···!”
전사에게 붙들린 쇠렌이 울상을 지었다.
싱글벙글 미소를 흘린 토드는 망자들더러 술병을 더 가져오라 지시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듯 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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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이 후스카를 동기였군요.”
야만전사, 티르핑은 쇠렌의 어깨에 썩은 팔을 걸친 채로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결국엔 둘 다 중간에 도망쳤지만 말이야! 이놈이 나보다 5년 먼저 뛰쳐나갔지.】
“후스카를 정도면 전사라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위는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명예로운 자리지. 비록 일은 고되고, 박봉에, 야를들의 푸닥거리나 치우는 똥개 신세를 견딜 수만 있다면야.】
쇠렌은 한숨을 흘리며 대꾸했다.
“스칼바냐르에 희망은 없소. 낙후된 데다가, 전사들의 처우도 예전 같지 않지. 난 살 길을 도모하려고 제국으로 내려온 거요.”
고개를 끄덕인 티르핑이 술병을 들이켰다. 찢어진 상처에서 술이 줄줄 샜음에도, 전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앞으론 더 개판이 될걸. 10년 전부터 제국 놈들이 밀고 올라와 장사한답시고 교역소를 설치하더니, 군인들이 도로를 깔고, 건물을 짓고, 뒷산에 있던 괴물들까지 때려잡았다.】
“좋은 게 아닙니까?”
티르핑은 콧방귀를 뀌었다.
【전사들에게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그들이 할 일을 제국의 군대가 도맡아서 했으니, 전사들은 손가락만 빠는 신세가 됐지.】
가만히 듣고 있던 피에트가 되물었다.
“그렇다고 생계를 이을 수단이 없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낚시나 수렵이라던가.”
쇠렌이 인상을 구겼다.
“영감은 모르시나본데, 그 정도로 사고가 유연했다면 아직도 거기 있겠소? 그놈들은 평생 손에서 도끼를 놓지 않았다는 자부심만으로 살아가는 멍청이들이요. 대가리까지 꽉막힌 작자들이지.”
머리를 두들긴 티르핑이 폭소했다.
【나도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었지! 마침 평소에 알고 지내던 아치발트가 돈을 벌 수 있다고 꼬드기길래 내려온거고.】
토드가 눈을 번뜩였다.
“아치발트. 그자의 행적은 어땠습니까?”
어깨를 으쓱인 티르핑은 술병을 내던졌다.
【글쎄. 머릿속이 캄캄한데. 그러고 보면 최근 일들이나, 당장 어제 처먹은 저녁도 기억 안나. 벌써 치매가 도졌나. 빨리 관짝에나 들어가야지, 원.】
“그는 자신이 요른카리의 대전당에서 오래된 유물을 탈취했다고 하더군요. 그게 북부의 동향과 관련이 있습니까?”
야만전사가 어깨를 들썩였다.
【내게 어려운 내용은 기대하지 말라고. 요술사. 그놈은 내게 돈과 술을 줬고, 그걸 따랐을 뿐이야. 북부의 늙은이들은 내게 주지 못했던 것들이지.】
침묵을 지키던 이스라가 허리춤에 슬그머니 손을 올린다. 토드가 고개를 젓자, 안광이 침울해졌다.
가만히 쇠렌을 응시하던 티르핑은 손을 털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끙, 좋아! 나한테 저 깡통의 대련 상대를 해달라고 했었지.】
그는 바닥에 떨어진 도끼를 가리켰다.
【대신, 쇠렌 스쿨다르손. 네가 내 도끼와 유산을 고향에 가져다줘라. 너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지.】
쇠렌이 펄쩍 뛰어올랐다.
“나더러 거기 돌아가라고? 아니, 티르핑 형님이 직접 가져다주면 될 일 아니오!”
망자는 흥건한 바닥을 가리켰다. 틈새로 새어 나온 술이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날 봐라, 쇠렌. 이런 꼴로 고향에 돌아가봤자 좋을 게 없다. 기약 없이 기다리느니, 부고나 알려주면 그러려니 넘기겠지.】
그는 고개를 들어 토드를 응시했다.
【요술사, 그쪽한테 따로 후한은 없다. 아치발트가 그릇된 짓을 벌이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난 마땅히 고용된 전사로서 할 일을 다한 거고. 당신도 당신이 할 일을 한 셈이지 않나.】
“그렇습니다.”
팔짱을 낀 티르핑이 고했다.
【후단께서 날 부르고 계신다. 모든 스칼바냐르 전사들의 영혼은 그분께 묶여있지. 당신의 그 요술로도 날 오래 붙들지 못해.】
실로 그러했다. 토드 역시 그늘진 곳에 오롯이 서 있는 까마귀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비록 시간이 많진 않으나 내가 알고 있는 전투 기술들을 저 깡통에게 전수해주지. 내 강철에 걸고 약속하겠다.】
둘 사이에 낀 쇠렌은 안절부절 못했다.
턱을 쓰다듬은 토드가 나직이 물었다.
“도끼 외에 유산이 있다고요.”
【그래. 여기서 북쪽으로 2주 정도 가면 판가우라는 동네가 있지. 거기 은행에 내 전용 창고가 있다. 내 이름과 도끼를 대면 알아서 열어줄 거다. 거기까지만 내가 동행하지.】
판가우? 분명 아치발트는 하수구 연맹의 지부가 거기 있다고 했었는데.
“혹시 생전에 하수구 연맹이라는 놈들과 엮인 적이 있었습니까?”
티르핑은 딱 잘라 말했다.
【이봐. 내가 계약을 한꺼번에 두 개나 받을 정도로 똑똑한 놈으로 보이나?】
“아뇨.”
【연기 처먹고 눈 까뒤집는 또라이는 아치발트 그 자식만으로도 족해. 난 딴 놈이랑 일절 관계 없어.】
아무래도 주술사도 사령술사 못지 않게 인식이 나쁜 건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헛기침한 토드가 재차 물었다.
“실례지만 금액이 어느 정도 됩니까.”
【대충 은화만 따져도 애새끼 대갈통만한 자루가 3개는 필요할걸.】
“어마어마하군요. 그걸 다 나르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요.”
【원한다면 얼마든지 써도 좋아. 난 이미 뒈진 몸이니, 의미도 없지. 어차피 동전 한 닢이라도 전달하는 데 의의가 있는 거니.】
당장 수중의 주머니가 넉넉해졌지만, 금전은 많을수록 좋다.
더불어 현지의 지리를 잘 아는 길잡이를 고용할 여비로 충분했고.
토드가 슬쩍 쇠렌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럼, 유산을 전달한 분에게 수고비 명목으로 몇 푼 떼어드려도 상관없는 겁니까?”
【흐흐, 이 자식이라면 보나 마나 남창들한테 꽂아주겠지만, 내 알 바 아니지.】
“그렇다는군요. 쇠렌 씨.”
사내의 눈동자가 갈등에 잠겼다.
돈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수전노에게 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고 끝에 쇠렌이 한숨을 흘렸다.
“이 빌어먹을 팔자. 알았어, 간다고. 가!”
어느새 까마귀는 자취를 감췄다.
다시금 기구한 운명이 이들을 옭아매어, 하나의 행선지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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