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49
049
북부는 호락호락한 땅이 아니었다.
엿새 동안 진흙으로 범벅된 눈밭을 겨우 헤쳐 나온 뒤에야 일행은 자갈로 포장된 길과 마주할 수 있었다.
“으아! 드디어 길이구나! 이 동네에 길이 왜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제 좀 편히 걷겠네!”
쇠렌은 아예 바닥에 엎드려 입까지 맞출 기세였다. 컨셉만 아니었다면 토드 역시 그 바보짓에 동참했을지 모른다.
빈약한 사령술사의 육신이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지언정, 장화 속에 불어터진 물집이나 화끈거리는 발바닥까지 구제해주진 않았다.
다들 지친 와중에 쌩쌩하게 돌아다니는 건 이스라와 마드로뿐이었다.
이스라는 그렇다 치더라도 역시 79레벨의 위엄인가. 저런 살집으로도 태연히 눈밭을 거닐다니.
아마 자신은 저만한 경지에 도달하더라도 계속 빌빌대겠지. 괜히 마법사들이 기동력에 목숨 거는 이유가 있다.
어차피 천성적인 약점을 보완하느라 배의 수고를 들이느니, 차라리 강점에 더 주력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혹시 모르지. 나중에 지치지 않는 활력의 부적 같은 거라도 얻으면 모를까.’
목을 축인 토드가 마드로를 향해 물었다.
“여기 깔린 도로는 제국 사람들이 건설한 듯 보이는군요.”
“맞네. 모두 북방식민정책의 일환으로 거행된 일이지. 스칼바냐르에는 이만한 토목 공사를 행할 행정력도, 제도도 없지.”
도로를 훑어보는 마드로의 눈빛에 회한이 묻어났다.
요른카리로 주술사의 맥을 봉하러 간다는 것도 그렇고, 그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드로 씨는 스칼바냐르 태생 아니십니까?”
“글쎄.”
토드의 눈썹이 가늘어졌다.
물론 그는 껍데기만 북구인 일뿐, 안에 든 알맹이는 플레이어의 영혼이다.
그래도 스칼바냐르 태생은 자신의 출생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쇠렌처럼 불만을 가진 예외를 제외하면.
‘오드람을 플레이했을 때, 최대한 북부를 부흥시키고 제국을 때리는 식으로 가닥을 잡지 않았나?’
몰입을 위해 바이킹 드라마나 영화도 챙겨보고, 심지어 커뮤니티에 우스갯소리로 올라온 고전 스탑클락 지역감정 컨셉글까지 읽으면서 북부 뽕을 채운 뒤에 경건하게 플레이에 임했다.
나름 탄압받는 북부를 위해 들고 일어선 구세주, 모든 주술사들이 우러러보는 일인자, 제국을 함락할 이교도 대군세까지 일으키며 대장정을 마쳤었는데.
지금의 오드람, 혹은 마드로는 은연중에 스칼바냐르에 대한 경멸 어린 시선이 엿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네.’
걸터앉아 있던 쇠렌이 히죽 웃었다.
“사령술사 양반. 원래 스칼바냐르는 이런 동네요. 도로만 씹창난 게 아니지. 그냥 여긴 체계가 잡힌 게 없어. 온통 엉망이라니깐.”
“그래도 나름 정취는 운치 있지 않습니까?”
“운치는 니미럴. 저것도 맨날 보면 개똥보다 못하다고. 저 웅장한 산맥이 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잖소.”
애써 잡담으로 여정의 고단함을 환기하려던 차에,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마차 소리···?”
“잘됐군, 얻어 탑시다!”
과연 여기서도 히치하이킹이 통용될지 의문이었지만, 쇠렌은 태연히 도로 한복판으로 나아가 천 쪼가리를 흔들어댔다.
칠 테면 쳐보라는 배짱인가.
흥미롭게 지켜보는 가운데, 달려오던 마차에서도 이쪽을 인지했던지 말들이 멈춰선다.
곧바로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 질렀다.
“뒤지고 싶어 환장했냐, 이 미친놈아!”
얼큰한 욕설이 쏟아졌음에도 쇠렌은 히죽 웃으며 은화 한 닢을 던졌다.
“이보쇼, 마부 양반. 어디 가는 길이요?”
잽싸게 동전을 챙긴 마부가 미간을 좁힌다.
“에다리크로 가지.”
“아! 마침 거기로 가던 참인데! 뒤 칸에 자리 있소?”
“네가 누군지 알고 함부로 마차에 태워?”
한 닢 더 내밀자 말투가 공손해진다.
“그쪽만 타는 거요?”
“나만 타겠나, 이 사람아. 당연히 나머지 사람들도 다 타는 거지.”
마부가 수염을 씨근댔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길에서 만난 떠돌이 여섯을 태우라니···.”
그는 보란 듯이 손바닥 위로 은화를 굴렸다. 쇠렌이 열 닢을 내밀자, 마부가 헛기침했다.
“갈 길이 바쁘니 얼른 타시구려.”
돌아선 쇠렌이 황급히 짐을 집어 들었다.
“얼른 탑시다. 저 양반 마음 바뀌기 전에.”
“보통 북부에선 이렇게 마차를 얻어탑니까? 이러다 그냥 깔아뭉개고 지나가면요.”
“에이, 비록 여기 환경이 좆 같아도, 사람들 마음씨까지 각박한 동네는 아니오. 원래 이렇게 가다 얻어탈 수도 있지.”
그나저나 마부도 뭔 배짱이 있어 지나가는 길목에 사람을 태우나 봤더니, 마차 안에는 전통 문양을 한 야만 전사들이 넷이나 타고 있었다.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군.’
토드 일행이 들어섰음에도 전사들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색한 동행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스라는 유달리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싸우고 싶은 거겠지.
“안녕들하쇼.”
쇠렌의 인사에도 전사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석상처럼 꼿꼿한 자세로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토드가 제국 말로 속삭였다.
“왜들 저러는 겁니까?”
“전사랍시고 괜히 무게 잡는 거지, 뭘. 몸에 새겨진 낙서 보이시오? 출전 문양이오. 보아하니 어디 영주와 계약한 모양인가 보군. 그래서 최대한 언행을 삼가는 거고.”
면전에 대고 쑥덕거리고 있음에도, 전사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티르핑만큼 강한 전사들이다.’
저런 태도는 육신의 견고함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게다가 이들의 무장은 하나같이 양손도끼였다.
근본 충만한 복장, 장비, 마음가짐까지. 마음속으로 기립 박수를 쳤다.
그래, 바바리안들. 역시 너희는 도끼가 어울려.
///
마차는 이틀 만에 에다리크에 도달했다.
에다리크는 앞서 항만도시인 판가우보단 작아도, 스칼바냐르 고유의 목조 양식과 제국의 건물에서나 볼법한 회벽, 붉은 지붕 따위가 혼재되어 있었다.
‘원작에선 지역마다 문화권 특색이 분명했었는데.’
이렇게 문화가 뒤섞인 도시도 생길 줄이야.
차창을 걷은 마부가 외쳤다.
“자, 다들 내려서 검문부터 받고 가쇼!”
이것저것 내릴 것이 많은 토드 일행과 달리, 전사들은 도끼와 가죽 따위만 챙기곤 훌쩍 내렸다.
“여기도 북적이는군요.”
“그러게나 말이오. 내 기억에 여긴 경비가 이렇게까지 철저하진 않았는데.”
짐을 챙긴 마드로가 답해줬다.
“질서가 잡힌 것이지.”
토드는 가만히 성문 앞에서 벌어지는 실랑이를 관찰했다. 경비들은 제국 복색을 한 사람들은 쉽게 들여보내 주는 와중에, 북부 출신은 시시콜콜하게 붙잡고 늘어졌다.
토드 일행의 차례가 다가왔음에도 여전히 앞서 도착했던 북부인들은 옆줄로 물러서서 경비병들과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나 물건을 제시하시오.”
“켄젤슐리텐 변경백 각하의 직인이 찍힌 체포면책권입니다.”
경비대장은 서신을 들여다보더니,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토드를 응시했다.
“장의사, 토드 하워드?”
“그렇습니다.”
“뒤에 있는 자들도 일행이오?”
토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대장은 대강 일행을 훑어보곤, 어깨를 으쓱였다.
“뭐, 조만간 송장 치울 일이 많아질 듯 보이는데, 장의사 하나쯤 들어온다고 별일이 생기진 않겠지. 통과.”
토드가 손을 들어 대기하고 있던 북부인들의 행렬을 가리켰다.
“그나저나 통행하는 자들은 출신에 따라 달리 대우를 받는 겁니까?”
경비대장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럴 리가. 저들은 신분을 증명하지 못한 떠돌이들이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곳곳에서 봉기가 심해지는데, 불분명한 놈들을 함부로 들일 순 없지.”
토드는 코트를 눌러쓴 채 이쪽을 바라보는 북부인과 눈동자가 마주쳤다.
공허한 동공이 깜빡인다.
‘이 자식은 또 뭐야.’
뭐 저리 피의 업이 많이 쌓였지?
이제 보니 차별 대우가 아니라, 순 경비대장은 업무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여태껏 무수하게 마주친 경비병들의 인상 탓이라곤 해도, 토드는 자신의 편견을 반성했다.
“그랬군요. 실례했습니다.”
성문을 통과하는데, 경비대장은 마드로를 보곤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입을 다물곤 못 본 것처럼 시선을 피해버린다.
‘제국 쪽에 연줄이 닿아있는 건 분명해 보이는데.’
시내로 접어들었을 즈음, 마드로가 짐을 내려놓았다.
“여기서 만날 친우가 하나 있다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듯하네만, 오늘 저녁까지 다시 합류하겠네.”
“흠, 그렇습니까. 그럼 어디서 다시 만나실까요.”
“저쪽 길 위로 올라가다 보면 ‘마법사의 우물’이라는 여관이 있네. 내가 익히 아는 곳이니, 여독을 풀기엔 적당할걸세.”
“좋습니다. 그럼 저녁때 다시 뵙죠.”
마드로는 서슴없이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와중에, 쇠렌은 슬그머니 그가 내려놓은 짐가방을 들어보려다 기겁했다.
“이런, 저 양반. 이만한 걸 여기까지 짊어지고 왔다니.”
피에트가 중얼거렸다.
“우선 이걸 실어나를 노새나 말부터 사야겠네.”
근처에서 짐말 하나를 임시로 구한 뒤에, 일행은 마드로가 언급한 여관에 들어섰다.
‘새로 지은 곳이군.’
전반적으로 깔끔한 인상을 풍긴다. 바닥에 눌어붙은 때도 없고, 벽난로는 적당히 포근한 분위기였다. 딱히 흠잡을 만한 곳 없이 무난했다.
“허, 살다보니 스칼바냐르에도 이런 여관이 들어서는군.”
“보통 여관이 다 이렇지 않습니까?”
“스칼바냐르의 여관은 십중팔구 바닥에 건초가 깔려있소. 그 위에 벼룩과 개새끼가 같이 뒹굴고 있지. 천장에 짐승 대가리뼈 장식 두세 개 정도는 걸려있고, 벽에선 오줌 지린내가 나는 거지 같은 곳이오. 여긴 소위 문명화된 양식의 여관인게지.”
이른바 신식화된, 제국풍의 여관이라는 거다.
토드로선 조금 아쉬웠다.
다양한 것들을 체험해보고 싶은 토드로선 좀 더 로컬 분위기에 가까운 곳에서 묵어보고 싶었는데.
새삼 여관 내부를 돌아보니 여긴 한적한 편이었다.
“그나저나 사람이 많이 없군요.”
“그럴 수밖에. 스칼바냐르 사람이라면 여기 묵으려 들지 않을 거요. 나야 상관없다만.”
“아무래도 외지인이 장사하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아까 그 마드로 양반이 말했듯이, 예전부터 제국이 스칼바냐르에서 이것저것 일을 여럿 벌여놨소. 도로나, 이 도시도 계획 중 하나겠지만, 보아하니 그리 잘 되는 것 같진 않아 보이는군.”
여관에 묵고 있는 사람들의 낯에서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 느껴진다.
토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묘하게 도시가 차분한 느낌입니다.”
마치 폭풍 전의 고요처럼. 어깨를 으쓱인 쇠렌은 나직이 하품했다.
“별일이야 있겠소. 여긴 언제까지 머물 거요?”
“사흘 뒤쯤 떠납시다. 그쯤이면 여독을 풀기엔 충분하겠죠.”
히죽 웃은 쇠렌이 부리나케 자리를 박찼다.
“좋아! 그럼 간만에 좀 놀다 오겠소.”
그가 굳이 어디로 향하는진 알고 싶지 않았다.
피에트 역시 방에 짐을 풀고는 내려왔다.
“나도 여기서 들고 온 전리품들을 좀 처분하고 오겠네.”
“그러시지요.”
테이블에는 토드와 이스라, 산시아만이 있었다.
그가 감상을 물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죽음의 기사가 히죽 웃었다.
【이곳의 불온한 공기가 느껴지네. 아주 위태롭고, 팽팽하게 당겨져 있군. 분명 작지 않은 소동이 벌어질걸세.】
“도시 전체에 업이 뒤엉키고 있는 게, 좋은 의미는 아니겠죠. 스승님.”
“예. 조만간 다량의 살생이 발생할 거라는 징조입니다.”
“여기서 발생할만한 소요 사태라면, 아마 봉기일까요.”
뒤를 돌아본 이스라가 중얼거렸다.
【이곳 여관은 방어하기에 입지는 좋네. 대로변에서 떨어져 있고, 주변에 우물과 가옥, 골목이 감싸는 구조이니.】
턱을 쓰다듬은 토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음···. 우리도 나름 준비를 해둡시다. 우선 시장으로 갈까요.”
///
시장에서 지출한 내역은 이러했다.
토드가 걸칠 방한용 외투, 수술 도구를 소독할 독주와 솜, 아마포, 단검 한 자루, 작은 나무 방패 하나: 은화 65닢.
산시아에겐 활동성을 위해 사냥용 튜닉, 사슬 조끼, 셔츠, 부츠와 장검 한 자루: 금화 2닢, 은화 38닢.
그리고 이스라는···.
【흠흠, 여기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재출간본을 찾게 될 줄이야. 목판 삽화까지 실려있으니, 이건 동전이 아깝지 않네.】
낡은 기사도 문학 중고책. 동화 50닢.
토드가 이마를 짚었다.
“사야 될 게 더 많습니다.”
【본인은 이거면 충분하네만!】
어림도 없는 소리.
그녀 역시 갈아입을 의복과 장검, 기름까지 추가로 구매해줬다.
물론 옷은 남성복으로 챙겨줬다만, 이스라의 관심은 오로지 책에만 향해 있었다.
거기에 쇠뇌와 화살, 회복 물약과 마력 물약까지 사들이니 금화 3닢가량을 내야만 했다.
어쨌거나 준비는 마쳤다.
차츰 에다리크에 밤이 내려앉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