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61
061
망토 자락을 추슬러도 서늘한 바람이 옷자락을 들춘다. 살갗에 파고드는 한기가 예리하게 벼린 단검의 날처럼 느껴졌다.
부싯돌을 긁어도 불씨가 잘 붙지 않으니 쇠렌이 투덜댔다.
“젠장, 이럴 때만큼은 마법사 아가씨가 그립구만.”
그래도 미약한 불꽃으로부터 필멸자들은 위안을 느낀다. 나뭇가지를 던져넣은 오드람이 중얼거렸다.
“이곳은 진기로 가득하군. 시험해보기에 적당한 장소인듯싶네.”
“따로 준비해야 할 게 있습니까?”
“이들을 불러내는데 따로 제물이 필요한 건 아니네. 그들이 원한다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걸세.”
손을 비비던 쇠렌이 움찔거렸다.
“무얼 불러낸다는 거요?”
“정령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걱정하지 말게. 내가 있는 한 자네들을 해치려 들진 못할 테니.”
품에서 솔방울을 꺼내든 오드람은 불씨를 옮겨 붙였다. 그는 손바닥을 모아 몇 차례 숨을 불어넣었는데, 안쪽에서 향로처럼 연기가 피어올랐다.
주술사는 솔방울을 들어 올린 채로 느릿하게 콧소리를 흘렸다.
특정한 가사 없이 소리만 흘리는 식이었는데 오드람은 주변의 바람에 맞춰 점차 음을 조율해나갔다.
그의 울림이 퍼져나가던 중, 점점 바람 소리에 희미한 속삭임이 스며들었다.
토드는 숨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돌연 장작이 들썩이더니, 모닥불이 세차게 피어올랐다. 오드람의 콧소리는 멈췄지만, 속삭임은 어느새 활발한 가락으로 바뀌어 노래했다.
다만 쇠렌과 피에트는 겁에 질린 눈치였다.
저들이 보기엔 느닷없이 불씨가 기름이라도 부은 것처럼 거세게 타오르고,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가 숲에서 들려오니 유령이라도 나온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오드람이 물었다.
“토드. 저들이 보이나?”
“···소리는 잘 들리지만, 형체가 뚜렷하진 않군요.”
분명 주변에 몰려든 존재들은 많았다. 하지만 토드가 느끼기에 밀도가 높은 연기처럼 느껴졌다.
“정령들은 원초적 기운이 결집된 형상들일세. 자네는 여태껏 죽은 자들을 여러 차례 전송해주지 않았나. 그들과 소통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네.”
토드가 난색을 표했다.
“영가들은 결핍된 존재들이라 태생적으로 확고한 동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대체 무슨 뜻으로 여기 맴도는 거죠?”
명확히 소통할 수 있는 영가들과 달리, 정령들은 불가해한 존재처럼 보였다.
그저 불가를 맴돌거나 이따금 쇠렌의 머리를 쓸어내리는 등의 몹쓸 장난을 쳤다.
쇠렌이 기겁할 때마다 연기가 배배 꼬이거나, 잽싸게 바닥을 쓸고 지나갔다.
“정령들은 충만한 존재들일세. 그들은 무언가를 딱히 필요로 하지 않네.”
토드가 보기에도 저들의 동기는 보다 원초적이었다. 유독 반응이 큰 쇠렌을 건드리는 것만 봐도 그렇고, 마치 일행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 하는 것처럼.
“아이들 같은 느낌이군요.”
오드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수한 영혼들이지.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을 해보게. 나 자신의 대역폭을 저들에게 맞춘다는 느낌으로.”
“그런 조율은 어떻게 합니까?”
오드람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나는 자네의 스승이 아닌 데다가, 자네는 주술사도 아니니 거기까진 가르쳐줄 수 없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저들을 자네 앞에 불러낸 것까지일 뿐.”
분명 토드는 주술사가 불러온 존재들로부터 알 수 없는 호의를 느꼈다.
아직 연기로만 아른거리는 것들은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자신에게 답답함마저 느끼는 것 같았다.
“자네는 분명 영적인 존재들과 친숙하네. 이미 길은 닦여있는 셈이니 그걸 열기만 하면 되네.”
고민하던 토드는 향로를 집어 들었다. 오드람이 한 것처럼 향을 피울까 싶다가, 대신 방울을 집어 들었다.
저들을 향해 흔든다.
딸랑.
연기가 흔들린다.
하지만 형체가 또렷해진 건 아니었다.
마치 이쪽을 재촉이라도 하듯 부추기는 느낌이 전해진다.
‘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허공에서 눈싸움이라도 하듯 빤히 바라보다가, 토드는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처음엔 영가들을 부르듯 낮고 길게 불러봤음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영가와 정령은 영적인 존재들이지만, 둘의 본질은 사뭇 다르네. 토드. 저들에게 맞는 방식으로 부르게.”
토드는 오드람의 조언을 헤아려보다가, 방식을 바꿨다. 자신이 어렸을 적에 죽었던 개는 자신이 휘파람을 부르면 밥을 주는 줄 알고 달려와 꼬리를 흔들었었다.
그때처럼 토드는 높은음으로 뾰족하게 휘파람을 여러 차례 불렀다.
소법은 영(靈)을 부르는 근간.
마력이 새어나가는 감각이 느껴진다.
희미하던 연기의 윤곽에 점점 상이 맺힌다. 토드의 동공이 확장되고, 웅얼거리던 노랫가락이 명백히 재잘거리는 말소리들로 가득했다.
비로소 사령술사의 눈에도 정령들의 모습이 보였다.
토드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아.”
가만 보니 작은 불똥들이 손을 맞잡고 모닥불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다.
나비를 닮은 작은 꼬마 요정들은 연신 쇠렌을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어디선가 찾아온 순록은 유유히 일행의 주변을 맴돌았는데, 눈을 깜빡일 때마다 머리가 곰, 여우, 매로 형상이 바뀌었다.
토드가 그들을 명확히 인식한 순간부터 정령들은 곧바로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쇠렌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던 요정들은 토드의 어깨에 앉아 노닥대고, 순록은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까지 접근했다.
토드가 그의 머리를 훑어내리자, 정령은 그의 몸을 휘감고는 불가를 스쳐 지나갔다.
“자네는 저들의 총애를 받고 있네.”
토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왜들 이러는 걸까요?”
“···여러 뜻으로 해석해볼 수 있겠지.”
“단순히 죽음에 친숙한 것 외에는 딱히 구심점을 생각하기 어려워 보이는데요.”
오드람은 어깨를 으쓱일 뿐, 별달리 대꾸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던 토드는 그제야 이스라의 뿔 투구에 겉돌고 있는 담비를 발견했다.
놈은 뚱한 표정으로 일행에게 몰려든 정령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확실히 여기 몰려든 개체들에 비하면 투구에 속박된 정령은 거무튀튀하고, 날이 서 있는 느낌이 강했다.
녀석은 이스라에게 해를 미칠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어째서인지 쇠렌을 이따금 노려봤다.
“자네는 명확히 영안을 열었다고 볼 수 있네. 이젠 비단 죽은 자뿐만 아니라, 그를 더 아우르는 영체들을 명확히 인지할 수 있겠지.”
오드람은 손에 쥐고 있던 솔방울을 모닥불 너머로 던졌다. 세차게 타오르던 불꽃이 점점 사그라지며 정령들도 떠나갔다.
길지 않은 조우였지만, 시간이 한참 동안 흐른 것 같았다. 여전히 벅찬 감정의 잔여가 토드에게 남아있었다.
이 세상은 정말로 경험하지 못한 신비와 경이로 가득하다.
그건 어쩌면 이곳뿐만 아니라, 이전에 자신이 머물렀던 세상 역시 마찬가지였을 지도 모른다.
거기선 자신에게 있던 제약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다면, 여기선 어디든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었다.
토드는 환상으로 가득한 이 세상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오드람. 저도 정령들을 불러낼 수 있을까요.”
그의 물음에 오드람은 수염을 매만졌다.
“으음, 가능은 할걸세. 다만 내가 불러낸 녀석들과는 사뭇 다른 놈들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높네.”
오드람은 이스라의 투구를 가리켰다.
“아마 저놈과 비슷한 부류에 속하는 것들이겠지.”
돌연 지목을 당하니 뿔 투구의 담비 정령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대강 어떤 느낌인진 알겠네요.”
“조심하게. 아직 자네의 성취가 높지 않아서 그리 강한 영체들이 부름에 응하진 않겠지만, 이따금 변덕이 심한 존재들은 때때로 강림하니.”
불길은 여전히 희미하게 아른거린다.
문득 토드는 어디선가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찰나였지만, 숲의 그늘이 드리워진 어둠 너머에서 무언가가 토드를 바라보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오드람이 낮게 속삭였다.
“범도 제 말을 한다면 온다더니, 정말 근처에 와 있었군.”
망자들을 다루면서 어지간한 걸 봐도 소름이 끼친 적은 없었다. 그런 토드조차 입안이 바싹 마를 정도.
“저건 뭡니까?”
주술사는 미간을 좁혔다.
“···명계에서나 기거할 놈이 지상을 활보하다니.”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명계의 존재가 모습을 보였다는 건 근방에서 틈새가 열렸다는 뜻이기 때문.
“쫓아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으로선 우리가 저놈을 쫓아갈 방법이 없네. 어차피 놈도 내가 있는 걸 인지하고 있으니, 섣불리 접근하진 않을 걸세.”
자꾸만 무언가가 있다는 얘기에 쇠렌은 고개를 내밀고 숲을 살폈다.
한숨을 흘린 오드람은 불가에 주저앉았다.
“곧 요른카리가 머지않았네. 거길 들어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테니, 이만 눈들 붙이세. 내가 근방에 경계를 세워두겠네.”
그가 손을 뻗자 지면에서 토템들이 솟아올랐다. 덕분에 다른 일행들은 안심하고 마차로 자러 들어갔지만, 토드와 오드람은 여전히 불가에 남아있었다.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 표정이군.”
“당신께 묻고 싶은 것들이 한두 가지는 아니죠.”
오드람은 픽 웃고는 배낭에서 술병을 꺼내 들었다.
“그래. 뭐가 그리도 궁금하신가.”
“제가 당신이었다면 이유 없이 제게 영안에 대해 가르칠 것 같진 않습니다.”
“자네도 알다시피, 스칼바냐르의 주술사들은 흑마법사 집단과 깊게 결탁해있네. 듣기론 그들은 스스로를 ‘메아리의 추종자’라 칭한다고 하더군.”
메아리의 추종자.
과거 아치발트가 증언했던 세 집단 중 하나다.
사령술사 행세를 하며, 분란을 일으키던 놈들.
토드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예의주시하던 무리 중 하나입니다. 놈들은 저희 학파의 유물인 「넋의 거울」을 소지하고 있죠.”
“···놈들은 주술사들로 하여금 인신 제사를 부추기네. 희생자들의 육신은 제물로 바치고, 영혼은 뽑아내 권속으로 삼지.”
한 명에게서 두 개의 자원을 사용하다니. 너무나도 무시무시하고, 효율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군요. 토드는 애써 근질거리는 입을 다물었다.
“놈들을 상대하려면 영체에 대응할 만한 지식은 갖춰놔야 하지 않겠나.”
“그렇군요.”
“내가 언제까지고 자네들 옆에서 지켜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네. 만일의 사태는 언제나 대비해둬야겠지.”
모닥불이 희미해진다.
“···가만 생각해보니 주술사의 맥을 봉하는 건, 곧 당신이 섬기는 신의 교단을 약화시키는 꼴이 아닙니까. 그걸 까마귀 신께서 순순히 두고 보는 것도 이상한데요.”
기침을 흘린 오드람이 답했다.
“이미 주술사들 사이엔 걷잡을 수 없이 타락이 만연하네. 그들은 신을 저버리고 무저갱의 존재들과 손을 잡았지.”
그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뜩였다.
“썩은 뿌리는 걷어낼 필요가 있네. 설령 주술의 명맥이 끊긴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용인하신 거군요.”
“굳이 초월적인 존재들의 뜻에 끌려다닐 필요는 없네. 내가 살아보니 그들은 전능하나, 전지하진 않아.”
토드가 쓴웃음을 흘렸다.
“거기에 대해선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어째 속에서 무언가가 두드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무시했다.
“다만 주술의 맥을 봉하는 것 자체에 대해선 용서받기 어렵겠지.”
“자칫 신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당신이 보호하는 도시들이 위험에 처하는 게 아닙니까?”
오드람은 술병을 들이켰다.
“···그래서 난 신이 가장 바라는 걸 바치기 위해 요른카리로 향하는 길이라네.”
주술은 언제나 행하는 술법에 걸맞는 제물을 요구한다.
오드람은 다른 제물을 희생시키는 대신, 자신의 레벨을 바쳐왔다.
후단은 오드람의 육신을 원한다.
오드람은 요른카리에서 대제례의 제물로 자기자신을 바칠 작정이었다.
“···아쉽군요. 개인적으로 저는 당신이 더 오래 살았으면 했습니다만.”
오드람이 피식 웃었다.
“더는 주술사들의 타락을 방조하기 어렵네. 내 과오를 책임지고, 모든 걸 되돌려야지.”
불꽃이 꺼져간다.
토드가 그를 향해 물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오드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