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75
075
덧없이 살다 지는 필멸자와 유구한 삶을 영속하는 불멸자.
이를 구분 짓는 경계는 삶의 공간이다.
하여 하늘에 닿고자 하는 피조물들의 염원은 고래로 이어져 왔다.
벽돌을 쌓아 제단을 올리고, 담장으로 미천한 족속들의 접근을 불허하며, 자신들이 사는 거처를 드높여 권위를 내세운다.
그중 단연 정점에 있는 구조물은 마탑.
하늘에 닿은 탑은 장대한 규모로 뭇사람들을 압도한다.
마탑은 수백 년 동안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더욱이 여기 기거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세상의 신비와 불가해한 지식에 통달한 현인들.
필연적으로 그들은 오랫동안 지배 계층으로 군림해왔다.
그러나 지혜의 첨탑으로 불려왔던 탑은 장차 고고함을 잃고 지상으로 추락할 것이다.
이치를 꿰뚫어 보던 눈은 금화로 덮였으며,
깨달음을 전하던 입은 침묵하고,
세상의 이치를 안다며 으스대는 모리배들의 뒤틀린 자부심만이 남았다.
///
머리가 지끈거린다. 상황이 이렇게 꼬일 줄은.
“이건 부당해요. 전 스승님께서 내린 과업을 완수했잖아요.”
골칫거리가 살아서 돌아온 것도 달갑지 않지만, 꽁무니에 혹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오다니.
“제가 이런 대우를 받을 이유는 하등 없어요.”
늙은 마법사가 낮게 한숨을 흘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카리나.”
이를 악문 카리나가 항의했다.
“쾨흘링 분쟁은 변경백의 승리로 종결됐어요. 그라워볼프 공작은 낭광병 증세가 입증되면서 완벽히 몰락했고요!”
그녀의 적의 어린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저는 남들이 기피하던 일을 자처했어요. 그 대가로 스승님은 제게 마지스터의 지위를 약속하셨고요. 당초에 쾨흘링으로 저를 안내할 거라던 길잡이는 만나지도 못했고, 이동이 지연되면서 제가 합류한 시점에선 이미 전세가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었고요.”
카리나는 책상을 거칠게 두들기며 항의했다.
“몇 번이고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면서 돌아온 사람을, 얘기도 들어보지 않고 입구에서부터 다짜고짜 붙잡더니, 대뜸 끌고 오는 건···”
“흑색 학파.”
마법사의 언급에 카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사라진 줄만 알았던 사도가, 쾨흘링에서 이적을 행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눈매를 좁히고 카리나를 추궁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자가 변경백의 수하로 암약하면서 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들었는데.”
그녀도 충분히 우려하고 있던 일이다.
“···사령술사가 나타난 건 맞아요.”
마법사가 짧게 탄식했다.
“그럼, 그자와 더불어 움직인 것이냐?”
마법사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덩달아 주변의 시선들도 카리나에게 호의적으로 돌아가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입술을 곱씹은 카리나가 항변했다.
“불가피하게 그자와 협력을 한 건 부정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사령술사라는 자가 보인 행동은 제가 익히 알고 있던 모습과 사뭇 달랐어요.”
그녀는 품에서 여러 잡다한 양피지들과 표본들을 늘어놓았다. 카리나는 하나한 열거하며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라워볼프 공작은 스칼바냐르에서 온 주술사와 모의하여 계획적으로 영지민들을 살해하고, 대대적인 인신 공양까지 벌였어요. 그에 비하면 사령술사는 현장을 수습하고, 죽은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줬고요.”
마법사가 코웃음 쳤다.
“어처구니가 없구나. 카리나. 지금 네가 하는 짓을 이해하고 있느냐?”
“그자를 두둔하려는 게 아니에요. 저는 제가 거기서 목격한 걸 진술하고 있는 거고요. 그러려고 저를 잡아서 여기까지 끌고 오신 게 아니셨나요? 스승님.”
자신이 어쩌다가 그놈을 변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는진 모르겠다.
적어도 카리나는 마법사의 의무가 단순히 지식을 탐독하고, 경지를 수양하는 데만 그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우리가 마도에 입문할 때, 에메랄드 석판 앞에서 맹세하지 않았던가요.”
그녀는 기죽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깨우친 지혜는 핍박받는 자들을 돕기 위해 사용하고,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저지르는 위선자들로부터 인간을 구하기 위해 권능을 사용할 것이라고.”
마법사들의 강령은 학자, 철인과 더불어 세상을 계도하는 조언가로서의 책임을 강조한다.
“명백히 그라워볼프 공작은 선을 넘었어요. 집단 학살로도 모자라, 자신의 병사들까지 라이칸스로프로 만들었고. 심지어 자식에게까지 손을 댔고요!”
카리나가 작성한 일지에는 낭광병 환자들의 경과와 숫자, 출신지가 낱낱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토드 일행이 떠난 뒤에도 슈피어슐로트 성채에 남아, 꼼꼼하게 공작의 행적과 기록들을 관찰하고 수집했다.
“분명 사령술사의 권능은 규탄받을 만한 여지가 있어요. 적어도 그는 분쟁과 무관한 자들에게 힘을 남용하지 않고, 전쟁을 주모한 자들과 싸움을 지속하려는 자들에 한해서만 사령술을 행하는 모습을 보였고요.”
빠르게 말을 쏟아낸 카리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어쩌다 보니 변명이 길어졌네요. 이걸로 제가 할 말은 다 했어요. 모아둔 자료들은 더 있긴 한데···.”
마법사를 훑은 카리나가 한숨을 흘렸다.
“뻔히 안 보실 표정이니 굳이 꺼내진 않을게요.”
팔짱을 낀 카리나를 향해 마법사가 나직이 읊조렸다.
“홍염 마탑의 일원이, 사령술사를 거들고 나섰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너는 무지한 듯하구나. 아니면 놈이 구사한 저주에, 네 정신이 현혹되었거나.”
“제가 보기엔 그 녀석이 그리 대단한 실력을 가진 것 같진 않던데요. 여타 흑마법사들처럼 인간의 정신을 주무르거나, 내장을 다 벌려놓고 난리를 피운다거나.”
카리나는 눈매를 좁혔다.
“그런 건 오히려 공작 쪽에서 거리낌 없이 벌여댔고요.”
이상론에 찌든 철부지.
저 애송이는 혈기만 왕성할 뿐, 눈앞의 현상에만 몰두되어 더 큰 맥락을 읽지 못한다.
괜히 마탑 내에서 사사건건 갈등을 빚어온 골칫거리가 아니다.
“너는 지나치게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되어 있다. 카리나. 단순히 그라워볼프 공작을 악으로 규정짓고, 이를 근거로 사령술사와의 협업을 정당화하려는 네 태도가 옳다고 보느냐?”
“그래서 여기 증거들을 모아왔잖아요! 공작의 악행을 입증하는 자료들과 사령술사가 행한 권능을 상세하게 작성했다고요.”
마법사가 손을 치켜들었다.
대번에 마력으로 만들어진 사슬이 카리나의 양팔을 억죄었다.
“큭?!”
“그런 건, 하등 중요하지 않다. 마탑의 행보를 주시하는 협잡꾼들이, 그깟 수습생의 일지 따위에 관심을 기울일 거라고 생각하느냐?”
“적어도 세간의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는 자료가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마법사가 혀를 찼다.
어찌나 저리도 세상 물정에 무지한지.
“어리석긴. 그렇지 않아도 제국 내 실정이 극도로 예민한 시기인데, 위정자들이 그깟 보고를 신경 쓸 것 같더냐?”
호통을 친 마법사가 손을 휘두르자 양옆에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카리나를 끌어냈다.
“···어느 때보다도 신중을 기해야 하는 때이거늘. 경거망동하여 마탑의 위신에 해를 입혔으니, 근신 처분을 내리겠다. 사령술사와 협력한 건에 대해선 추후 조사가 있을 테니, 그때까지 대기하거라.”
“스승님!”
그는 거세게 발버둥 치는 카리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마에 팬 주름이 유난히 깊어진다.
‘차라리 거기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임무였다.
애초에 쾨흘링 분쟁에 관여한 선제후와 유력 제후들만 하더라도 쟁쟁한 배경이 있었다.
‘적당히 파견했다는 구색만 맞추고, 그 사이에서 균형만 유지했으면 됐을 것을.’
카리나 폰 에스터리츠.
모난 구석이 다분하다. 저런 성격으로는 마탑이나, 어디에서도 오래 살아남기 어렵다.
분명 재능은 충만하다만, 대응 능력도 떨어지고, 특유의 고집 때문에 사사건건 다른 마법사들이나 귀족 자제들과 문제를 일으키는 게 다반수.
실상 마탑의 유력 후원자들이 제후들임을 감안하면 지양해야 할 태도임에도, 카리나는 이따금 소개하는 자리에서 날 선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저런 골칫거리를 마탑에서 데리고 있는 건 순전히 그녀의 배경 때문.
에스터리츠 궁중백은 생전에 황제가 총애하던 가신이다. 추천서를 받았으니, 어쩔 수 없이 데리고는 있다지만···.
‘듣기로는 과거 에스터리츠 가에서 고아를 양녀로 들였다는 소문도 있던데.’
진위가 불분명한 소문이지만, 이렇게 문제가 불거진 이상, 내칠 명분을 파고들려면 어떻게든 후벼내야 하지 않겠는가.
문득 그는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 집무실에 홀로 있는데, 누군가가 쳐다보는 듯한 감각.
그리고 나직한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고민이 많아 보이네. 테오도러스.”
마법사의 몸이 굳었다.
문 뒤에서 걸어 나온 인영은 유유히 집무실을 거닐었다.
“제자에게 너무 가혹한 거 아냐? 어쨌거나 당신이 내린 일도 열심히 마치고 돌아왔는데. 칭찬은 못 해줄망정. 차가운 돌바닥에 가두다니.”
눈웃음을 친 여인은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테오도러스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겨우 침을 삼킨 마법사를 향해 여인이 히죽 웃었다.
“···당신이 올 줄은 몰랐다만.”
어깨를 으쓱인 여인은 손끝으로 단검을 빙글빙글 돌렸다.
“내 고용주께서 화가 잔뜩 나셨거든. 오죽하면 날 보냈겠어? 원래라면 지금쯤 나도 한창 드러누워 자고 있을 시간인데 말이야.”
사르륵.
녹아내린 단검이 책상 밑의 그림자에 스며든다.
“아주 귀찮아 죽겠다니까. 그래도 어쩌겠어? 금화를 잔뜩 쥐여주는데. 받은 만큼 일은 해야지.”
테오도러스의 어깨를 두들긴 그녀는 이빨을 드러냈다. 분명 커튼을 치지 않았음에도, 집무실이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어둡다.
돌연 그녀는 손뼉을 치며 실실 웃었다.
“아! 생각해보니 오히려 제자를 아끼는 거일 수도 있겠는데? 내 앞에 그년이 있었으면 면상을 찢어발겨 놨을 텐데 말이야. 응?”
테오도러스는 7서클 초입의 경지에 도달한 고위 마법사다.
그조차 이 여인의 무례한 언동 앞에서 한없이 무력했다.
“그 개새끼 키우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다고~ 고용주 놈이 아주 입에 거품을 물고 개지랄을 떨더라고.”
여인은 귀를 후비며 진저리를 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아가씨들이랑 질펀하게 노느라 피곤해 뒤지는 줄 알았는데, 내가 깨어날 때까지 들들 볶을 작정으로 떠들어대서 일어났거든.”
여인은 테오도러스의 볼을 찌르며 속삭였다.
“이제 대충 사태의 심각성을 아시겠어?”
“홍염 마탑은 가급적이면 세속 제후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마탑은 오래전 켄젤슐리텐 변경백 일가에 빚을 졌다. 우리는 그 보은을 갚으려 했을 뿐.”
혀로 입천장을 두들긴 여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얼씨구. 그래서 그 보은이라는 게. 이미 결정된 싸움까지 다 뒤엎은 걸로도 모자라서, 영지의 우두머리 모가지까지 따줄 정도로 깊으셨어?”
“당신도 이미 보았겠지만, 그 애송이는 그럴 만한 실력이 전적으로 부족한 녀석이다. 애당초 녀석은 구색만 맞추기 위해 파견했을 뿐. 일이 이렇게 흘러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콱.
책상에 단검이 박혔다.
어둠 속에서 자줏빛 눈동자가 번들거린다.
“혓바닥이 기네. 테오도러스. 그 잘난 머리통으로 그걸 예상 못 해?”
테오도러스는 꿋꿋하게 답했다.
“비록 그 녀석이 전장에 개입한 것은 사실이나, 실질적인 영향력은 극도로 미미했다. 분쟁의 결과와 공작의 사망은 전적으로 사령술사라는 작자에 의해 발생한 결과다.”
가만히 시선을 마주하던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책상에 널린 일지들에 시선을 던졌다가, 사령술의 권능을 묘사한 그림을 집어 들었다.
“흐, 제법 잘 그리네. 손가락을 분질러놔도 이렇게 잘 그리는지 궁금한데.”
여인이 허리춤의 주머니 끈을 풀자, 책상에 널려있던 자료들이 몽땅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몸을 빙글 돌린 그녀는 테오도러스의 앞에 앉았다.
“그래도 책임은 져야 할 거 아냐. 명색이 중립을 지키시겠다고 뻗대던 분이 일을 단단히 그르쳤으니까. 돈까지 받아 처먹어 놓곤.”
여인이 손가락을 비틀자 책상에 꽂혀 있던 단검이 유유히 공중에 떠올랐다.
달그락.
동시에 주사위 하나가 여인의 손끝에 맴돈다.
“고용주는 나더러 적당히 손만 봐주랬는데, 네가 말하는 싸가지를 듣자니 화가 뻗쳐서 말이야.”
그녀가 튕긴 주사위가 테오도러스의 앞에 굴러왔다.
“홀, 짝. 맞추면 살려는 드릴게. 간단하지?”
싱글벙글 웃는 여인을 향해 마법사는 겨우 입을 열었다.
“내게 응할 이유라도? 여긴 마탑 내부다. 아무리 당신이라 한들, 나를 겁박하고도 여길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나.”
여인은 작게 하품하며 손바닥을 내보였다.
“네가 응하지 않겠다면, 그냥 여기 있는 녀석들을 다 쳐 죽여버리지. 뭐. 그 정도면 다른 마법사들에게도 충분한 경고가 될 테고? 좀 귀찮겠지만?”
손가락 마디에 수시로 단검이 형상을 맺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난 라노야. 내가 여태껏 요술쟁이를 몇 명이나 죽여봤을 것 같애?”
낄낄거린 암살자가 손짓했다.
“난 딴 건 안 믿어도, 내 운빨은 믿어. 그러니까 주사위나 빨리 굴려. 네 운빨은 어디까지인지 보고 싶거든.”